* 청춘에 酒 色 錢 순서인데 늙어서는 주색은 빠지고 ,돈이 있어야 요양원 양로원 안가고 자식들 한테도 신세 덜진다 고령화인구절벽시대에 우리까지는 자식이 있지만 다음 세대들은 어떻게 마무릴 지을런지 그게 걱정이다 인조인간 로봇이라도 많이 만들어선 후사 없는 자들 잘 모시게 할른지... ,그 시대에도 돈과 재물은 필요할거다 효도관광가서 좋은 인연만나게 해준다 하는 연리지 있는데를 가라하니 이미 만난것만해도 좋다 하는데야 , 나쁜넘 만나는 것 보다 혼자 사는 것 좋다는데야 해볼도리 있는가 후주後主 이욱李煜의 황후 대주후大周后와 소주후小周后 중국 문화 산책 ・ 2023. 7. 19. 14:01 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주아황周娥皇은 남당南唐의 세가世家(여러 대에 걸쳐 국가의 요직에 있거나 특권을 누리는 집안) 출신으로, 그녀의 부친 주종周宗은 일찍이 이욱李煜의 부친 이경李璟을 따라 사방에 정벌전쟁을 나가서, 원훈공신元勳功臣이라고 불릴만했다.
그래서 가세家世의 지위가 높고 귀한 집에 태어난 주아황은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고귀하고 전아典雅한 기질을 배양하여, 남들에 비해 뛰어나게 청아하고 수려했다. 그녀는 비파琵琶에 조예가 깊어, 그녀의 비파 소리를 들은 이경은 연신 칭찬하며 자기가 아끼는 소조燒槽 비파를 그녀에게 선물했다.
954년에 18 살이 된 주아황은 그녀보다 1 살 아래인 황자皇子 이욱李煜에게 시집을 갔다. 두 사람은 취미가 서로 맞아서 더욱 행복해 하며, 서로 의지하며 날마다 함께 즐겼다.
주아황이 이욱을 위해 『요취무파邀醉舞破』 곡曲을 창작했는데, 이욱도 주아황을 위해 감동적인 시사詩詞를 많이 썼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작곡하고, 또 한 사람은 사詞를 써넣으며, 언제나 온화한 정취를 누리며 생활했다.
이 당시에 후주後周 왕조는 시영柴榮의 치국 아래 날로 강대해져서, 부단하게 군대를 동원해서 남당南唐을 공격했는데, 바로 주아황과 이욱이 함께 향락을 누리던 그때였고, 남당은 연속적으로 영토를 뺏겼다. 눈앞에 위기가 다가오자, 이경은 황급히 이욱을 태자로 책립한 뒤에 남창南昌으로 달아나 피난했다.
961년에 이경이 붕어하여 남당후주南唐後主로 즉위한 이욱은 주아황을 황후로 책립했다. 그러나 즉위한 이경은 군대를 인솔하여 나라를 지키지 않고, 후주後周에 칭신稱臣하고, 북송北宋에는 공물을 바쳤다.
주아황은 그 중간에서 이욱에게 권고도 하지 않고, 도리어 오로지 시를 짓고 사詞를 써넣어 가무를 즐기는 생활에 깊이 빠져 지냈다. 그녀는 현명한 황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정무에도 공적을 세운 적이 없이, 오히려 극도로 사치하게 생활했는데, 이욱은 주아황을 총애했기 때문에, 언제나 온갖 방법으로 그녀가 애호하는 것을 만족시키려고 했다.
964년의 걸교절乞巧節, 즉 칠석날 밤에 주아황과 이욱은 함께 칠석을 경축하며 흉금을 털어놓고 마음껏 마시다가 날이 밝을 때에야 주연을 파했다. 축하연에서 과음하고,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곧 감기에 걸려 병이 나고 말았다.
주아황에 대한 총애가 대단한 이욱이 곧 주후周后의 가족에게 입궁하라는 영을 내리자, 주후의 부친이 여동생 소주小周씨 여영女英을 데리고 병문안을 왔는데, 소주씨 여영에게 궁중에 남아 언니 시중을 들게 했다.
그때, 14 살 난 소주씨는 이미 유연하고 아름다운 자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용모가 젊었을 때의 언니 아황과 아주 닮았는데, 다만 언니보다 14 살이나 어리고 성격도 활달했다. 이러한 모습에 눈앞이 환해진 이욱은 즉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후에 몰래 소주씨의 거처로 간 이욱은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보고, 얼이 빠진 것처럼 계속 보고 있었다. 잠에서 깬 소주씨는 언니의 남편이 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얼른 일어나 예를 차렸지만, 멋쩍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이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욱은 순舜임금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자매를 아내로 삼아 행복한 생활을 한 전고典故로 화제를 이끌어서, 계면쩍어하면서도 자기가 부러워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소주씨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히 총명해서, 이욱의 말속에 다른 뜻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일순간 놀랍고도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
자신이 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한 이욱은 자기 거처로 돌아와 소주씨에게 사詞 한 수를 써서 마음을 완곡하게 표현하여 보내고, 나중에 또 소주씨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야밤에 따로 만나자고 했다. 소주씨는 흥분되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지만 여러 가지를 가늠하여 생각해본 다음에, 밤중에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밤에 두 사람은 작은 정자에서 밀회하며 잊지 못할 밤을 보냈다. 남당후주 이욱의 황후 대주후와소주후 소주씨를 얻은 뒤로 이욱이 다른 비빈들을 냉대하게 되자, 비빈들의 마음에는 원한이 생겼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대주후大周后의 처소로 병문안을 갔을 때, 이욱과 소주씨가 사통한 사정을 대주후에게 알려주고, 이욱이 소주씨에게 쓴 연애시까지 증거로 내보였다.
대주후는 자기 몸에 중병이 있어 이욱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자기가 가장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할 때, 오히려 이욱은 자기 친여동생과 분별없이 지내고 있는 것에 상심이 되어 몸의 통증이 더욱 가중되었다.
주아황은 일생동안 이욱에게 아들 둘을 낳아주었는데, 즉 이중우李仲寓와 이중선李仲宣이다. 어느 날, 겨우 4 살 난 이중선이 불상 앞에서 놀고 있을 때, 커다란 고양이가 갑자기 뛰어오르다가 유리등을 넘어뜨렸는데, 그때 너무나 놀란 나머지 중선은 얼마 뒤에 병으로 죽었다.
원래 병이 위중했던 주아황은 또 사랑하는 아들이 돌연 죽은 데 타격을 받아, 병이 더욱 악화되어, 얼마 뒤에 죽었다. 아황이 죽은 뒤, 이욱은 대단히 고통스러워하며, 예전에 사랑하고 아낀 세월을 떠올리며 상심해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바람에 소주씨는 자연히 궁중에 남게 되었고, 언제나 이욱 옆을 지켰다. 대주후가 죽은 이듬해에 이욱의 생모 종鐘씨도 세상을 떠났다.
아황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째인 968년에 이욱은 소주씨와 정식으로 혼례를 거행했다. 혼인을 치른 뒤로 이욱은 정사를 더욱 돌보지 않고, 거의 모든 시간을 소주후小周后와 향락하는 생활에 소비했다. 용모가 점점 더 예뻐진 소주후는 음률에도 뛰어나고, 향료를 만드는데 흥취가 넘쳐흘러서, 이욱은 그녀와 동석하여 하루 종일 향료와 화초를 연구했다.
이때의 남당은 바로 내우외환의 정치적 형세에 처해 있어서, 응대하기 어려운 국사國事에 시달린 이욱은 곧 하루 종일 부드럽고 살뜰한 마음씨를 지닌 소주후에게 탐닉하며, 지나치게 사치를 향락했는데, 이것은 남당의 멸망을 상당히 가속화시켰다.
969년에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거듭거듭 사람을 파견해 이욱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몇 번을 물러났다가 사람을 보내 화친和親을 요구했다. 이욱은 화친이 두 나라 국교에 미칠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소주후를 너무 아낀 나머지 그녀가 당할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조광윤의 화친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975년에 북송北宋의 대군이 남당을 공격하자, 남당은 대적하지 못하고, 이욱은 송군宋軍의 포로가 되어 망국노亡國奴가 되었다. 조광윤은 이욱의 재기才氣를 칭찬하며, 그를 위명후違命侯, 소주후는 정국부인鄭國夫人에 봉하고, 그들에게 저택을 주어 거주하게 하고, 생활도 예전대로 누리도록 우대했다. 그러나 그 해에 조광윤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조광의趙光義는 이욱을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강등시켰다.
978년의 원소절原宵節에 조광의는 정국부인에게 입궁하여 경축하라는 영을 내렸다. 조광의는 입궁한 소주후의 뛰어난 용모와 풍격에 한눈에 반하여, 절차切磋(학문 따위를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다)하는 여공女工이라는 명분을 주어 그녀를 황후의 거처에 남아 있게 했다. 소주후는 궁중에 며칠 동안 얽매여서 조광의에게 모욕을 당하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
연유를 알게 난 이욱은 상심해마지 않았다. 궁중에서 능욕을 당한 소주후가 이욱이 치국治國을 돌보지 않고 오직 향락만 추구하여 지금의 이런 국면을 초래했다고 질책하는데도, 이욱은 그저 자책하며 말 한마디도 못했다.
조광의가 이욱을 우대한 것은 전부 소주후에 대한 그의 야심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기념일이나 경축일에 소주후를 만날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식에 벗어난 요구를 궁정화가에게 했는데, 자신이 소주후를 총애하는 장면을 그리게 하고, 자기가 보고 싶을 때면 그런 그림을 감상했다. 평소 소주후는 이욱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조광의에게 굴복했으나, 그녀는 돌연 여러 명의 화가가 옆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나마 누르고 있던 자존감이 순간적으로 폭발하고 말았는데, 그리하여 구석에 숨어서 조광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조광의가 다시금 소주후에게 강제로 능욕을 했을 때, 화가들은 그 옆에서 그 전 과정을 그렸는데, 바로 이것이 『조릉행소주후도照陵幸小周后圖』이다.
이욱은 분노와 원한에 사무쳤지만, 그저 사詞 한 수를 쓰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뿐이었다. 그의 이러한 거동은 조광의에게 살기殺氣를 일으키게 했다. 이욱은 42 살의 생일축하연에서 심경이 더욱더 처량해져 절필사絶筆詞 『우미인虞美人』을 지었다. 이를 알고 난 조광의는 벌컥 화를 내며, 독이 든 술을 이욱에게 보냈다. 살피지도 않고 술을 마신 이욱은 얼마 뒤에 경련을 일으키며 사지를 떨다가, 마지막에 소주후의 품에 안겨 죽었다.
이욱을 안장한 소주후가 전례대로 궁에 들어가 감사 인사를 올리자, 조광의는 또 궁중에 며칠 동안 억류시켰다가 풀어주었다. 소주후는 비명에 죽은 이욱을 그리워하며 매일같이 이욱 영전에 멍하니 앉아 지냈다. 조광의가 여러 번 불러도 거절했는데, 아무리 협박하고 이익을 내세워 회유해도, 그녀는 여전히 단호하게 거절했다. 소주후는 이욱의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 끝난 그 해에 자살하여 생을 끝냈다. [출처] 후주後主 이욱李煜의 황후 대주후大周后와 소주후小周后|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