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잉글랜드와 터키의 일전이 끝났다. 표면상으로는 유로2004 본선 직행으로 인해 들떠 있지만,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영국 안팎의 축구에 대한 관심은 사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 말많던 사건들을 단순하게 나열만이라도 해보자.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이 개입된 10대 소녀 집단 성폭행 사건, 리즈 유나이티드
선수가 개입된 20세 여성 성추행 사건, 프리미어리그 선수 벨라미(뉴캐슬/웨일즈)의 술집 난동 추태, 디비젼1 선수 케빈 카일(선더랜드)의 레스토랑 싸움, '신동'이라 불리는 웨인 루니의 저급한 심판 모독, 첼시 감독 내정설에 대한 에릭손 대표팀 감독의
침묵,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서 아스날이 보여준 수준 이하의
경기 매너, 프리미어리그 포츠머스의 래드냅 감독이 선보인 심판
권위에 대한 도전, 잉글랜드의 유일한 희망이라 여겨지던 마이클
오웬의 다리 부상, 그리고 리오 페르디난드의 도핑 테스트 불참으로 벌어진 일련의 파장들, 특히 대표팀의 터키전 보이콧 위협
사태까지...
1년이 걸려도 보기 힘들만한 사건들이 지난 열흘간 이 좁은 섬나라 영국 땅에서 쉴새없이 이어졌다. 개별 사건들로만 놓고 본다면 '그럴 수도 있지' 싶은 일들이 몇몇 보이긴 하지만 이들이 한데 뭉쳐 연쇄 폭발하면서 잉글랜드 축구계는 그야말로 초토화 직전의 상태다. 당장
눈앞에 닥친 터키전 결과에 대한 우려 뿐만 아니라 지나친 상업화가
선수들의 도덕적 역할과 축구의 신성함을 극도로 저열하게 몰아가고
있다는 자괴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탓이다.
먼저 터키전을 놓고 보자. 이미 지난번 터키와의 홈경기에서 홈팬들의 수준 낮은 행동으로 여러가지 불이익을 받은 잉글랜드는 - UEFA는 잉글랜드 팬들이 터키 원정에서 난동을 부릴 경우 잉글랜드의 유로2004 출전권을 자동 박탈하겠다고 협박했고, 이에 FA는 각종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영국팬들의 터키 입국 자체를 차단하고 있다 - 오웬의 부상과 페르디난드의 이탈 등으로 총체적인 전력난에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전력을 갖춰도 터키 원정경기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것이 현 잉글랜드 대표팀의 전력인 바, 무승부 이상의 결과를 거둬야만 직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는 잉글랜드로서는
그야말로 벼랑끝에 놓인 셈이었다. (개인적으로 현 잉글랜드의 전력은 세계 8강에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특히 공격진의 경우, 오웬을 제외하면 세계 수준에 근접한 선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잉글랜드 이상의 공격력을 가진 국가는 쎄고 쎘으니.)
무엇보다 공격진의 공백은 심각하다. 한창 나이에 후배들을 이끌어줘야할 알란 시어러가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이후 잉글랜드의 총대를
홀로 짊어졌던 오웬이 부상으로 결장하는 것은 치명타다. - 참고로,
에릭손 체제 하에서 잉글랜드는 오웬 없이 치른 경기에서 승리한 일이 단 한 차례도 없다. 갓 18세에 불과한 웨인 루니가 그간 A매치에서
보여준 선전에 힘입어 공격의 핵으로 나설 기세지만 루니가 공격의
축으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게다가 그의
곁에 설 파트너로 남은 선수라는게 비티, 헤스키, 바셀 정도라 공격진의 완성도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수비진 역시 별반 다를
바 없다. 그간 약팀과의 경기에서 호평을 받은 테리가 페르디난드의
공백을 메울 예정이지만 터키의 터프하고 빠른 공격에 대한 대처가
적절할 지 여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잉글랜드 내의 사정으로 보아 이 경기에서 패할 경우 그 후유증은 심각할 수 밖에 없었고(에릭손 감독에게는 대표팀을 떠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장기적인 슬럼프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최근의 전력 불균형은 심각한 고민거리였지만, 잉글랜드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앞으로 잉글랜드의 관건은 역시 미드필드다. 포인트는 스콜스와 캠벨이다. 베컴이 종종 그랬듯 중요한 경기에서 기적같은 한방을 터뜨려주길 기대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상의 리더 역할을 해야하는 것은 이
둘이기 때문이다. 올시즌 리그에서 제2의 전성기라 할만한 대활약을
펼치는 스콜스가 미진한 공격진을 어떻게 잘 보좌할 것이냐가 첫번째
포인트가 될 것이며, 불미스러운 커뮤니티 실드의 기억을 떨쳐내고
아스날의 선두 질주를 사실상 견인하고 있는 솔 캠벨의 역량을 재시험하는 것은 두번째 포인트다.
앞의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잉글랜드 축구팬들의 두번째 우려는 축구계의 도덕적 붕괴가 결과적으로 축구판을 엎어버릴 것이라는 걱정에서 나온 것이다. 가장 많이 지적받는 것은 역시 천정부지로 치솟은 이적료 및 연봉이다. 최근 거품 장세의 약화로 많이 주저않기는 했지만
여전히 선수들의 수입은 거대하다. 특히 20대 초반의 선수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이번주중에 나이트 클럽에서 만취해 옷 다 벗고 난동부리고 기물 파손한 크레이그 벨라미의 경우 주급이 5만파운드다. 그러니까 1주일에 1억원을 받는다는 얘기다.) 이같은 고수입은 선수들이 퇴폐적인 향락 문화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페르디난드의 도핑 테스트 불참이 곱지 않은 눈총을 받는 것도 그가 어린 시절 이후 보여준 가끔씩의 일탈과 주변 친구들의
'물'이 그의 약물 사용 가능성을 예측하게 하는 탓이 크다. (그는 집 이사 때문에 깜빡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고분고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특히 다이어를 필두로 한 일부 젊은 스타선수들의 경우 시즌 중에도 나이트 클럽과 호텔을 들락거리며 그룹 섹스를 즐길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밤문화를 즐기고 있는 것으로 확인 돼 축구팬들은 꽤나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어찌됐건, 일련의 사태로 잉글랜드 축구의 위상이 급전직하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최근 몇일동안 한국의 조,중,동과 다름없는 일간지들이 연일 축구 관련 기사를 1면에 내세우는 것은 이를 잘 방증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하나같이 터키전 승리를 통해 이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길 기대하지만... 글쎄, 정의가 존재한다면 이때쯤 저 거만한
축구 종주국에 심판을 내릴때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드....은다. 조심스럽게.
과연, 그 결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