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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자 맞는 위치를 갖는다(各其の所 take one's proper station)'를 알아야 한다
일본의 신념인 질서와 계층은 미국의 자유와 평화과 매우 다르다 일본은 신분제를 통해 천민-평민(상인 공인 농민)-사무라이-다이묘-쇼군-덴노(てんのう天皇)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통해 일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와(和)'를 실현하였다
일본의 '자리(各其の所)'는 서양의 봉건제나 중국의 관료제와는 다르다 국가 종교 경제 개인 등 모든 것에 적용된다 심지어 국제관계에도 이런 관점을 가진다 다른 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도 이런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진주만 공격 당일 미국 정부에 보낸 문서에 '...모든 국가가 세계 속에서 각기 알맞은 자기 위치를 갖게 하는 일본 정부의 정책은 불변이다...' 라고 적혀있다 미국이 주장하는 각 나라의 주권과 영토의 불가침 내정 불간섭 국가간의 협력과 신뢰 평등이라는 원칙과 매우 다르다
일본인들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인 당신~ 먹는다~ 앉는다~ 등도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이는 다른 아시아 민족들도 비슷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머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는 자세까지 달라진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서 허리를 굽히는 각도도 다르고 절하는 자세도 다르다 이런 관습에서 어긋나면 매우 불경하거나 아니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단순한 계급의 차이라면 어느정도 이해되지만 계급만의 차이가 아니고 성별 연령 가족관계 친근함의 정도 등 많은 사항들을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같은 위치에 있다가 위치가 바뀌면 즉시 그것에 맞는 새로운 존경의 표시를 해야 한다
미국에도 예의를 갖춘 존경의 표시가 있지만 가족끼리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가족간에도 엄격하게 한다 자식은 아버지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동생은 형에게 여자형제는 남자형제에게 깍듯한 존경의 표시를 한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는 뜻이고 반대로 존경을 받는 사람은 모든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중국은 씨족 공동체인 마을의 공동 조상에 대한 효도 개념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19세기 중반까지 귀족과 사무라이 이외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직계 조상이나 씨족 개념이 없다 대신 봉건 영주 다이묘가 존재하고 어느 다이묘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하다
조상에 대한 효도는 마을 신사에 모여서 막연하게 단체로 예를 갖추거나 또는 집에 모신 불단에서 기억을 하는 가까운 조상을 모신다 즉 일본에서의 호(孝こう)는 직접 만날 정도로 가까운 제한된 가족끼리의 예의이다
아무리 장성한 아들이 있어도 늙은 부모가 모든 일의 우선이다 - 식사도 먼저 목욕도 먼저 - 이다 일본 속담이 있다 '아버지에게 의견을 내고 싶은 자식은 머리를 기르고 싶은 중과 같다' 왜냐? 둘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말하는 맞는 위치는 연령의 차이에도 있다 장남은 능력이 부족해도 모든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일본 육군성의 대변인은 이렇게 말한다 '... 일본은 형이고 그들은 일본의 동생이다 그들에게 처절하게 가르쳐줘라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면 거꾸로 이용하려고 하고 결국 해악이 된다... ' 즉 형이 모든 결정을 하고 동생에게 너무 배려하지 마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다 일본인들은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상태를 난형난제(難兄難弟) 라고 표현한다 미국의 Neither fish nor fowl과 비슷하다
나이에 관계없이 남녀에도 적용된다 부인은 남편 뒤에서 걸어야 한다 사회적 지위도 낮아야 한다 남자형제에게 먼저 교육 양육 등 기회를 준다 여성 교육은 예의범절이 대부분이었다 지식습득의 기회가 적었다 어느 교장이 상류층 여자에게 외국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외로 들릴 수 있으나 사실 그 이유는 외국어를 알아야 남편의 책장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성의 권한은 중국이나 인도보다 앞서있다 가정살림의 책임을 가지고 집안 하인을 부리고 자녀 혼인에 관여하고 며느리를 얻으면 매우 단호해진다 즉 권리와 책임이 많아진다
가족의 명예와 관련되는 사항; 결혼이나 중요한 결정 곤란한 결정 등에는 전 가족 친지들의 의견을 골고루 듣고 결정한다 일단 결정되면 혹시 부당하더라도 공동의 충성으로 모두 따른다 실제 권력을 가진 아랫사람 즉 부인이나 동생이라도 겉으로는 따른다는 예의를 다하여야 한다
7세기 경에 중국에서 문자를 빌려오고 도시 건설을 배운다 관직과 행정 체계도 가져온다 4만여의 토속신을 모시는 신토(神道)에 호국종교인 불교를 도입한다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의 체계적인 문명도입이다
그러나 귀족 가문이 관직을 세습하는 일본은 중국의 관리 선발제도는 가져오지 않는다 세속적인 권력을 가지는 중국 황제의 개념도 가져 오지 않는다 중국 황제는 무한한 권한을 가지는 대신 수시로 가문이 바뀐다 일본 천왕은 쇼군을 인정하는 형식적인 권한만 가지면서 가문이 유지된다 정치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며 재산도 조금만 가지고 그냥 맞는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일본의 천왕 개념이 수백년에 걸쳐 사무라이(武士)를 거느린 다이묘들끼리 패권다툼을 하게 만든 배경이 된다
16세기 수십년간의 내란 끝에 이에야스(家康)가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초대 쇼군이 된다 이에야스는 적군 편이었던 다이묘를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라 하여 임무를 갖지 않는 지방영주로 지내게 하고 자기편 다이묘는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라 하여 중요한 지위를 맡겨 다이묘들을 분리시켰다 각 지방을 다이묘에게 맡기는 대신 쇼군은 다이묘를 엄하게 관리하였다 대표적으로 일년중 반을 에도(江戶)에 살게 하고 처자식을 인질로 두게 하였다
각 계층을 복잡하게 나누고 심지어 의복 음식 집의 종류까지 신분과 계급 즉 일본의 카스트에 따라 강제하였다
특수한 직업을 가진 천민이 있고 그 위에 상인을 두었다 이에야쓰는 봉건제도를 보호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상인계급을 억압하였다
농민이 가진 무기를 압수하여 무장해제시킨다 농민은 법률상 큰 보호는 받지 못하였지만 대신 농지의 소유권을 가진다 그만큼 소작료가 엄청 높았다
농민과 사무라이를 계급적으로 분리하였다 농민은 생산자이고 사무라이는 소속된 다이묘에게서 봉록을 받아 소비만 하도록 하였다 대신 평민에게 칼을 휘두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후 200여년의 태평시대에서 사무라이의 기능은 전통적인 칼잡이에서 점차 재산관리인이나 예능인으로 변화한다
인도의 카스트는 계층간 이동이 불가능하지만 일본은 그러지 않다 결혼을 통하여 또는 데릴사위(婿養子)를 이용하여 사무라이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특히 부유한 상인과 가난한 사무라이 사이에서 많이 일어 났으며 두 계급의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서양에서는 대체로 계급간의 알력이 심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 상인과 돈을 가진 전주(銭主) 그리고 하급 사무라이들의 동맹이 바쿠후를 전복시켰다
일본에 아직 귀족 가문들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부유한 상인계급들이 수월하게 진입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세세하게 묘사된 생활지침을 좋아한다 상호의무사항이며 그대로 따라하면 보장을 받을 수 있고 잘못될 경우 이를 근거하여 항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쿠후가 폐지될 때 이것도 같이 없애자는 의견은 전혀 없었다 프랑스혁명과 다른 점이다
미국의 페리제독이 들어와 통상조약을 강요할 즈음 일본의 모든 다이묘들은 전주(錢主)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연쇄적으로 과중한 세금과 소작료에 허덕이던 평민들은 과거로 돌아 가자는 잇신(一新)을 따른다 혁명이나 진보와는 다른 왕정복고(尊王)와 오랑캐 추방(攘夷)을 내세우며 쇄국의 황금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이었다
결국 서양의 모범을 따르기로 하고 문을 연다 불과 50년 후 서양의 여러나라와 경쟁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일본 고유한 장점을 활용하고 낮은 계급 높은 계급 모두 각자 목표를 이루어 내었다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계층제도에 묶여있던 일본인들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새로운 길로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발췌요약 : <국화와 칼>
다음은 제 4장: 메이지유신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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