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쇼장을 돌다 보면 모든 데스크가 다 화려하지만 왠지 모르게 한 번 더 눈길이 가는 데스크가 있습니다. 물건이 특이해서일 수도 있고, 분위기가 달라서일 수도 있는데, 타이거릴리님 데스크는 두 가지 다였습니다. 데스크 주인이 외국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앞에 빈티지 만년필들이 그득히 놓여있는 데스크.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서 말을 걸었습니다.
타이거릴리는 강아지 이름이에요
데스크 주인은 김진숙 선생님과 짐(Jim Fiorella / 짐 휘오렐라)씨 두 분이셨습니다.
짐씨가 미국인이시라 선생님이 통역을 해주시면서 인터뷰가 진행됐어요.
닉네임이 어떻게 타이거릴리가 됐냐고 여쭤봤더니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희 첫 번째 강아지가 말티즈였는데, 걔 별명이 타이거릴리예요. 저희가 개를 너무나 좋아했거든요. 걔가 죽은 다음에 너무 힘들어해서 그때 생각이 나서." 릴리는 엄청 사랑받은 강아지였겠다.
변호사를 때려치운 남자
짐씨의 이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원래는 변호사였다고 해요. 근데 변호사를 제일 싫어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고, 영국에서 공부할 때부터 모아온 수집품들을 보면서 '이걸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대요.
뉴욕 첼시 플리마켓을 알게 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전 세계 유명 배우들도 오고, 진짜 고수 컬렉터들도 오는 그 시장에 몇 번 나가보더니 너무 좋더래요. 그래서 변호사를 완전히 때려치우고 2년간 세계 일주를 하셨다고합니다. 일본에서 1년을 살기도 하셨고요. 그렇게 빈티지 세계에 뛰어드신 지 벌써 40년이 됐다고 합니다. 저도 첼시 플리마켓은 몇 번 들어서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뭐랄까. 베를린 사는 독일인이 동묘 구제시장을 누비던 40년 고수를 만난 느낌이라고 하면 비슷하려나
만년필, 연필, 시계, 지포 라이터, 라이카 카메라, 인디언 주얼리, 플라이 피싱 용품, 카우보이 관련 물건들. 수집하셨던 분야가 많았습니다.
"뉴욕 경찰에서도 이 분한테 자문을 구할 정도예요."
선생님이 옆에서 살짝 덧붙이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에 만년필이 나오면, 간혹 전사한 군인의 유해에서 만년필이 나오면 파카51님께 자문을 구하는 것처럼 뉴욕에서는 오래된 것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때는 짐씨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 같아요.
강화도에서 빈티지 샵(?)을 열고 계신 것 같았어요. 방문은 언제든 환영하는데, 다만 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주셔야 한다고 합니다.
벽 속에 숨겨진 컬렉션
짐씨에게는 잊지 못할 단골 손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집가들 중에도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 한 분으로 DR. Zedek 이란 분으로 노벨 의학상 후보에도 오를 정도로 대단한 분이시고 이 분과의 일화를 소개해주셨어요. 닥터 제덱은 짐으로부터만 수집한 게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이런 분과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만나서 닥터 제덱 사무실에서 서로 만년필과 시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인이 수집을 너무 싫어하셔서 물건을 몰래 사서 사무실 벽 뒤에 숨겨놓으셨대요. (새삼 아내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뉴욕에서 30년을 사시다가 나이가 좀 들고 플로리다에서 은퇴를 하고 지내는 어느 날 닥터 제덱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해요. 닥터 제덱 부인이 전화를 할리가 없는데 전화가 와서 이상하다고 하니 돌아가셨다고ㅠ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유언장에 이렇게 남기셨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저 벽을 허물어라. 안에 수집품이 있다. 다른 사람 누구한테도 연락하지 말고, 짐에게만 연락해서 짐하고만 거래해라."
30년 넘게 쌓아온 신뢰가 그 유언 한 줄에 담겨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전해주시는데 저도 모르게 멍하니 듣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은 다 속일 거라고, 이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 이 사람하고만 딜을 하라는 얘기. 원래 대단한 수집가가 평생 모은 수집품이면 처음 살 때와 달리 상당한 가격일텐데, 본인이 세상에 없을 때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니 대단한 신뢰라는 생각이 듭니다.
롤렉스가 부탁했는데 거절했어요
짐씨는 빈티지 시계도 깊이 아시는 분이라, 롤렉스 본사에서 자사 시계 역사에 대한 책을 써달라고 요청이 왔었다고 합니다. 근데 거절하셨대요.
왜요? 하고 여쭤봤더니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전해주셨어요.
"자기들 좋으라고 다 하는 건데 자기는 얼마나 시간을 뺏겨야 되냐고. 이 사람은 시간이 돈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인생이라는 거예요."
책을 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드는데, 결국 출판사 좋은 일만 시키는 거라고 하시네요. 본인한테는 그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멋있다. 롤렉스 제안 보다 내 시간을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럼에도 짐씨가 이미 책을 한 권 내셨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 병사들이 지포 라이터에 새긴 문구들만 모아서 직접 글 쓰고 편집하고 출판하신 책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들,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는 말들. 돈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이 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셔서 만드셨겠구나 싶었어요.
한국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두 분이 한국에 정착하신 데는 선생님의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암 투병을 오래 했어요. 끝나고 나니까 한국 음식만 먹고 싶고, 아들들도 보고 싶고. 이 사람이 외국 사람이니까 혹시나 해서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봤어요. 한국에 좀 가고 싶은데…"
짐씨가 바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무슨 걱정이야. 나 아프리카에서도 살았고 일본에서도 살았는데."
그렇게 강화도에 자리를 잡으셨다고 합니다. 저는 짐씨를 "로맨틱 가이"라고 엄지척을 보내드렸습니다., 암 투병 내내 뒤에서 열심히 도왔다고 하셨어요. 듣는 저도 괜히 뭉클해졌습니다.
김진숙 선생님도 예사 분이 아니십니다
인터뷰 도중에 선생님이 슬쩍 꺼내신 게 있었어요. 자신이 1980년대부터 20년간 활동한 페미니즘 아티스트였다고요. 이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한국 화단과 멀어지셨는데, 얼마 전 후배 연구자가 찾아와 7시간 인터뷰를 하고 갔고, 최근 《전시로 보는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책에 선생님의 이야기가 담겼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일보에 기사까지 났다고요.
'26.4.10. 사라진 이름, 지워진 실천… 전시로 다시 쓴 '페미니즘 미술사'-문화ㅣ한국일보
이번 달 10일에 난 기사에도 소개되신 분이셨네요!! 사진 속의 가운데가 김진숙 선생님이셨어요. 미리 알았으면 책도 읽어보고 사인도 받을 걸 그랬습니다. 어쩐지 뭔가 보통 분들이 아니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늘 가장 추천하고 싶은 건요? 이벤트 발생!!!
혹시 오늘 데스크에서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게 있냐고 여쭤봤을 때, 마침 인터뷰 중에 작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 방문객이 젊었을 때 쓰던 만년필이 너무 생각난다고 한참을 아련히 보고 가셨다고 해요. 그 분이 돌아보다가 다시 돌아오셨을때 짐씨가 그 자리에서 그 펜을 선물로 드렸어요. 방문하신 분이 정말 오랫동안 소중하게 쓰던 펜인데 잃어버리셨다고, 그것과 꼭 같은 만년필을 보고 그리워하시던 눈빛을 보고 선물로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오랜 수집을 하시는 동안 애착하던 물건에 대한 그 향수 어린 그리움을 알아보고 공감하실 줄 알게 되신 것 같았습니다.
짐씨에게 만년필은 파는 물건이기 이전에, 각자의 기억과 이야기가 담긴 것들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순간 혹시 좋은 만년필을 싸게 구할 수 없을까 두리번거렸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솔직히 누구나 조금은 그렇지 않나요ㅠㅠ)
마치며
펜쇼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자꾸 두 분 생각이 났습니다. 변호사를 그만두고 40년을 빈티지와 함께 산 사람, 그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다가 암을 이겨내시고 사랑하는 사람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 만년필 데스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펜쇼에 오시면 꼭 한 번 찾아가 보세요. 물건보다 이야기가 더 많은 데스크입니다.
P.S.
이번 펜쇼 취재데스크를 제 아이들이 인터뷰를 따라다니며 도와줬습니다. 아이들에게 선물이라며 만년필 두 자루를 선물로 주셨어요.
"Can you repair these vintage fountain pen?" 이라고 하신 듯,
"Yes, I think I can. I'm studying vintage pen and repairing it" 이라고 대답한 듯.
그러자 짐은 아이들에게 선물이라며 셰퍼, 콘클린 빈티지 펜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웠습니다. 잘 수리해서, 아이들에게도 잘 사용하도록 가르쳐주고 다음 펜쇼에는 아이들 허락을 받아 시필로 보여드릴까 생각중이에요~ 행복한 펜쇼였습니다~~~
첫댓글 스텝으로 참여한 저도 물건 위주로 펜쇼를 들여다보곤 했는데 안알록님 취재 덕분에 좋은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얘기에 빠져들어서 듣다보니 시간이 부족하더라고요. 궁금한 분들이 더 많았는데ㅠ 이게 뭐하는 짓일까 수줍었는데 츠바이님이 응원해주시니 안심이 됩니다ㅎㅎㅎ
잘 봤습니다. 두분 오래도록 평안한 날들 되셨으면 좋겠네요.
안알록님 펜쇼장에서 처음 뵈었죠. 우연일지는 몰라도 우리 옆동네 주민이시기도 하고 반가웠습니다.
자세한 취재후기 잘봤습니다.
제 부스 바로 앞 부스였는데 이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화장실 다녀오면서 슬쩍 보는데 멋진 빈티지 펜이 많아 놀랐어요. 제 부스 챙기느라 가보지를 못해 너무 아쉬웠는데 다음 펜쇼에도 참가하시면 꼭 구경하고 싶네요.
와, 이런 부스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저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어서 읽었습니다 :)
두 분의 멋진 이야기를 공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 펜쇼에도 오시면 그때는 꼭 방문해봐야겠어요!
와~~안알록님의 펜쇼 인터뷰!!엄청납니다.
여러 사연과 풍성한 후기 이야기 덕분에 잘 읽어보고 다음 펜쇼에서 더 잘 돌아 볼게요~~
멋진 취재후기 감사합니다^^
소개글을 쓰고있는 지금까지도 쑥스럽지만 흥미있어 해주시니 뿌듯합니다^^
저희집 아들이 타이거릴리 님 부스를 좋아해서 저도 펜쇼 갈 때마다 자주 뵜는데요. 이런 로맨티시스트+빈티지에 전문가신 줄은 몰랐네요. 다음 펜쇼에서 뵈면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스텝 분들에 대한 내적 친밀감을 높여주는 취재 감사합니다, 안알록님. 비하인드 스토리 넘 좋아요~🙂
안알록님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응원합니다 !!
이런 글도 올라오다니... 이번 펜쇼에 못 갔지만 덕분에 펜쇼를 직접 참가했을 때보다 더 깊이 있게 겪은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한 글입니다 두분도 너무 멋지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