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JAMVY7XDQV4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에스라의 나무 강단이 제공하는 성경의 어휘 연구, 오늘 다시 계속합니다.
성경의 어휘를 연구하는 목적과 그 기대하는 바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성경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통하여 올바른 신학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109번째로, '에세네(Essenes)'라고 하는 사람들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이 에세네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 무리에 속했던 사람 가운데 아주 중요한 인사가 성경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부류에 속했는지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당당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에세네인은 누구일까요? 이 에세네인이 비록 성경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헬라어로는 복수형으로 '에세노이(Essenoi)'라 하고 단수형으로는 '에세노스(Essenios)'라고 합니다. 항상 '-오이'로 끝나면 복수이고, '-오스'로 끝나면 단수입니다. 문헌에 따라서는 이들을 '에사 이오이(Essaioi)'라고도 부르며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본래 히브리어였으나 헬라어로 음역 되면서 모음이 많이 바뀌었고, 고대에는 음역 방식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기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히브리어 어원으로는 '이심(Isim)'인데, 이 단어의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학계의 통일된 정설이 없으며 다소 불명확한 단어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를 히브리식 의미로 자세히 풀어 설명할 때는 '오세 하토라(Osei ha-Torah)'라고 부르는데, 이는 '토라(율법)를 행하는 사람들' 혹은 '토라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앞서 공부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앞으로 다룰 셀롯인(열심당)과 더불어 신약 당시 유대 사회의 3대 혹은 4대 사상파 중 하나였습니다. 이 사상파들은 모두 BC 2세기부터 AD 1세기까지 유대 땅에 존재했던 사람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종파는 바리새인이며, 두 번째는 사두개인, 세 번째는 셀롯인이며, 언급 빈도와 상관없이 그 역사적 중요성 면에서는 에세네인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렇다면 에세네인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 근원에 대해 학자들은 이들이 본래 사독 가문의 제사장 무리에서 탈퇴한 자들이라고 추정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두개인을 공부하며 '사독'이라는 이름에 대해 배웠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독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직후에 활동했던 대제사장 사독이 있고, BC 3세기에서 2세기경에 활동했던 제사장 사독이 있습니다. 사두개인이 이 사독 가문의 후예를 자처한 반면, 에세네인은 "사두개인들의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 우리는 더욱 독자적이고 정결하게 살아가겠다"라며 그 제사장 무리로부터 탈퇴하여 광야로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참된 언약을 지키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남은 자'라고 자처했습니다. 세속화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을 비판하며, 자신들이 더 정당한 신앙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들은 토라의 해석을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는데, 그 지도자를 가리켜 '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라고 불렀습니다. 의의 교사는 에세네파의 우두머리이자 최고 지도자를 부르는 명칭이었습니다. 에세네인들은 이 의의 교사가 해석해 주는 대로 율법을 철저히 따랐으며, 그를 합법적인 대제사장으로 받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두개인 제사장들은 모두 엉터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소 독선적으로 보일 만큼 고결한 율법 수호자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이들이 바로 에세네인입니다. 이들은 예식의 정결함을 지독하게 강조했고, 영과 육, 현세와 내세, 빛과 어둠을 엄격히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와 철학자 필론의 기록에 의하면, 신약 당시 에세네인의 수는 약 4,000명 정도였습니다. 바리새인이 약 6,000명이었다는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였습니다. 이들은 유대 여러 지역에 흩어져 공동체를 이루며 거주했습니다. 반면 로마의 저술가인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AD 23년~79년)의 기록에 따르면, 에세네인들의 핵심 공동체는 사해 서쪽에 위치한 엔게디 위쪽 광야 지대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며, 세상 욕심을 버리고 명상과 기도에 깊이 몰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이들 공동체의 지도층과 핵심 단원들은 금욕 생활의 일환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1세기의 위대한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술인 '유대 전쟁사', '유대 고대사', 그리고 자서전인 '요세푸스의 생애' 등에서 에세네인들의 생활 방식과 신조를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경건한 금욕 생활을 영위했으며, 독신주의를 장려하여 핵심 지도층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사유 재산과 돈의 소유를 철저히 금지하고 모든 물건을 함께 공유하는 공동 재산·공동 생활제를 채택했습니다. 안식일을 그 어떤 종파보다 엄격하게 준수했으며, 매일 아침 회개 기도를 드린 뒤 몸을 정결한 물에 완전히 잠그는 결례(침례)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 결례를 행하던 물 저장소를 '미크베(Mikveh)'라고 부릅니다. 또한 정결 기도회를 마친 뒤에는 다 함께 모여 공동 식사(애찬)를 했습니다.
그들은 자선과 구호 활동을 매우 성실히 수행했고, 분노를 겉으로 표출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여 늘 평온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공동체 내부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도서들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했으며, 단체 내부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하고 함부로 맹세하지 말 것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맹세를 어길 수 있으므로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는 취지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서적에 등장하는 수많은 천사들의 이름을 암기하고 기억하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미가엘과 가브리엘 정도만 등장하지만, 에세네인들의 문헌에는 수십 명의 천사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이들은 가축을 함부로 도살하거나 피 흘려 제물로 바치는 성전 제사를 멀리했고, 부도덕한 범죄를 멀리하며 공동체의 엄격한 규칙들을 성실히 다음 세대에 물려주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육체적인 쾌락을 철저히 금하는 강력한 금욕주의(Ascetism)적 삶의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에세네인들이 현대에 들어와 전 세계적인 주목과 관심을 받게 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1947년 봄, 사해 연안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 중 하나인 '사해 두루마리(사해 사본, Dead Sea Scrolls)'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 쿰란(Qumran)의 한 동굴에서 고대 두루마리들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에세네인들의 명성과 실체가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이 동굴들은 본래 에세네인들이 사용하던 문서 보관소이자 도서관이었습니다. 쿰란은 사해 북서쪽 광야에 위치한 고대 에세네 공동체의 정착지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문서들 속에는 구약 성경 사본을 비롯하여 각종 외경,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 규칙을 적어 놓은 '공동체 규칙서(Community Rule)', '다메섹 문서', '전쟁 두루마리' 등 대단히 귀중한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문서들은 에세네인들이 직접 필사하고 공부하며 보존해 온 것들로, 이들의 실제 생활상과 신앙적 정체성을 완벽하게 증명해 주는 고고학적 유산입니다.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에 따르면, AD 66년에 발발한 유대-로마 전쟁 당시 로마군이 사해 인근의 쿰란 기지를 습격하여 파괴하면서 이들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들은 로마군의 공격을 피해 소중한 성경 두루마리들을 항아리에 담아 인근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는데, 그것이 1,900여 년이 지난 1947년에 비로소 발견된 것입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은 에세네인들이 그 후에도 AD 2~3세기까지 아주 미미한 형태로 존속하며 초기 기독교 형성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공동체로서의 활동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습니다.
오늘날 쿰란 유적지에 가 보면 사해 서북단 언덕에 에세네인들이 정착해 살았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던 공동 방, 곡식 저장소, 정결 의식을 행하던 물 저장소(미크베), 그리고 두루마리를 필사하던 방의 흔적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지 바로 맞은편 절벽 언덕에 사해 사본이 발견된 유명한 쿰란 동굴들이 있습니다. 특히 제4동굴 등에서 수많은 두루마리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두루마리들은 1947년 한 아랍 베두인 목동 소년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 일대는 풀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양과 염소들을 방목해 두고 몇 시간씩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해가 질 무렵 잃어버린 염소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절벽 아래를 뒤지던 소년이, 혹시 염소가 동굴 안에 들어갔나 싶어 안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동굴 안에서 무언가 쨍그랑하고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상히 여겨 동굴 안으로 기어 올라가 보니, 그곳에 수많은 흙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과 문서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에세네파 내부에는 크게 두 개의 하부 정파가 존재했습니다.
첫째는 '나사라파'입니다. 이 명칭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는 전혀 상관없는 독자적인 명칭입니다. 이들은 본래 유대인들이었으나 요단강 동편 북부 지대인 길르앗과 바산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세를 존경하고 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은 믿었으나, 오늘날 성경에 기록된 율법과는 다른 별도의 율법을 전수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가축을 도살하여 먹거나 제물로 바치는 제사 의식을 철저히 금지하는 독특한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도살과 육식이 자신들의 고결한 영적 명상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둘째는 '오사파'입니다. 이들은 나사라파 이후에 등장한 정파로, 역시 유대인들이었으나 사해 남쪽 나바테아 지대 및 모압, 암몬 등 요단 동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이들입니다. 이들 역시 모세의 권위는 인정했으나 전해 내려오는 모세의 율법 책들을 거부하는 독특한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하부 종파 역시 세월의 흐름과 함께 로마 전쟁을 거치며 역사의 무대 뒤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에세네인들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사용하던 '달력'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전통적인 유대 달력(태음력)과 전혀 다른 달력을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창조절에 근거하여 봄철의 충분과 가을철의 추분을 기점으로 새롭게 달력을 계산하는 일종의 '태양력 안식일 계산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봄철 유월절이 들어 있는 첫째 달(아비월 혹은 니산월) 초하루(월삭)로부터 3일이 지난 '제4일'을 첫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요일 기준으로 제7일을 안식일로 지켰으나, 이들은 니산월 4일을 안식일로 삼은 뒤 그로부터 일주일씩 더하여 '11일', '18일', '25일'을 차례로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둘째 달의 안식일은 니산월 25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산법은 가을철인 일곱째 달(디스리월)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가을 추분이 지나고 티스리월 초하루로부터 3일이 지난 '제4일'을 안식일로 삼고 이어 '11일', '18일', '25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이처럼 에세네인들은 춘분과 추분을 기점으로 안식일을 완전히 새롭게 다시 계산하는 특이한 태양력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계산한 신학적 이유는 창조의 기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기사에 따르면 하나님은 넷째 날(수요일)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달이 만들어진 창조 넷째 날이 실질적인 음력 1일(초하루)이 되는 것이며,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일곱째 날(토요일)에 첫 안식일이 도래했기 때문에, 언제나 초하루로부터 사흘 뒤인 제4일을 기준으로 안식일을 계산하는 것이 천체 창조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비록 기발하고 정교한 역학적 계산이었으나,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절기 계산법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 속에 에세네인의 흔적이 존재할까요? 아쉽게도 신약 성경 본문에는 '에세네'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성서학자들은 광야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회개를 선포했던 '침례 요한(세례 요한)'이 에세네인이었거나, 최소한 쿰란 공동체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은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광야에서 살았던 점,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며 메뚜기와 석청(야생 꿀)으로 단순한 식생활을 유지했던 점은 에세네인들의 극단적인 금욕주의 및 식생활 지침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또한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풀던 '회개의 침례' 의식은 에세네인들이 매일 미크베 물 저장소에서 행하던 정결 결례 의식과 사상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닿아 있습니다.
나아가 에세네인들의 사상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 사이에는 매우 놀랍고 깊은 공통점들이 발견됩니다.
첫째, 사해 두루마리 문서 속에는 장차 도래할 메시아가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거룩한 식사 예식을 제정할 것이라는 예언적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의 모형과 매우 흡사합니다.
둘째, 에세네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모두 임박한 세상의 종말과 심판, 그리고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는 강력한 '종말론적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셋째, 사해 사본의 기록들 중에는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와 문맥 및 표현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메시아 예언 문서들이 존재합니다.
넷째, 두 공동체 모두 선과 악의 대립을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묘사하는 영적 이원론적 표현들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다섯째, 물로 씻는 결례(침례) 의식을 중시했고, 독신 생활을 장려하며 이혼을 철저히 금지하고, 사유 재산을 부정하며 모든 소유를 통용하는 공동 생활과 공동 식사(애찬)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초기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의 유무상통하던 유무상통 공동체 생활과 매우 유사합니다.
여섯째, 쿰란 문서 속에는 구약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개념과 유사하게, 장차 도래할 메시아가 '찔려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메시아의 고난과 대속적 죽음에 대한 사상이 이미 싹트고 있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 에세네인은 본래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와 타락에 환멸을 느끼고 탈퇴한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로부터 시작된 종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언약을 수호하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남은 자'로 여겼으며, 광야로 나아가 '의의 교사'의 지도 아래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예식의 정결을 강조하며 경건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고, 소박한 식생활과 철저한 무소유, 안식일 엄수를 생활화했습니다. 쿰란 기지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를 통해 이들의 경건한 신앙적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났으며, 신약의 침례 요한 역시 이 에세네파의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음이 유력합니다. 초대 교회의 여러 예식과 사상적 표현들 역시 이들의 유산과 상당 부분 영적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에세네인들이 어떤 존재였으며 무엇을 믿었고, 이들의 경건주의 운동이 예수님 당시와 초기 기독교 형성에 어떤 영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109번째 에세네인 강의를 여기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는 유대 사회의 또 다른 극단적 정파였던 '셀롯인(열심당)'에 대해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 핵심 요약정리
본 강연은 신약 시대 유대 사회의 신비주의적 금욕 공동체였던 에세네인(Essenes)의 역사적 기원, 쿰란 공동체와 사해 사본, 그리고 초기 기독교 및 침례 요한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다룹니다.
1. 에세네인의 기원과 명칭
2. 에세네파의 생활 방식과 신학적 신조
3. 사해 두루마리(사해 사본)의 발견
4. 신약 성경 및 초대 기독교와의 연관성
5. 결론 및 신앙적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