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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고전 읽기 자료입니다.
F. 엥겔스: 「1847년의 운동들」, 최인호 역
확실히 1847년은 우리가 오래간만에 맞이한 가장 운동적인 해였다. 프로이센에서는 헌법과 연합 지방의회, 이탈리아에서는 정치적 생활의 예상 밖의 급속한 성장과 오스트리아에 대항한 전반적 무장, 스위스에서는 내전, 영국에서는 단호한 급진적 색채를 띤 새로운 의회, 프랑스에서는 추문들과 개혁 연회들, 아메리카에서는 합중국의 멕시코 정복−이러한 것들이 근래 몇 년 동안 그 어느 해에도 볼 수 없었던 일련의 변화들이고 운동들이다.(선집1,434)
1830년은 역사의 최후의 전환점이었다. 프랑스에서의 7월 혁명, 영국에서의 개혁 법안은 부르주아지의 종국적 승리를 보장하였으며, 게다가 영국에서의 개혁 법안은 산업 부르주아지, 즉 공장주들의 비산업 부르주아지, 즉 금리 생활자들에 대한 승리를 확실하게 보장하였다. 벨기에와 부분적으로는 스위스가 이를 따랐다. 이곳들에서도 부르주아지가 승리를 거두었다. 폴란드는 봉기를 일으켰고, 이탈리아는 메테르니히의 멍에 밑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으며, 독일은 완전히 들끓는 상태에 있었다. 모든 나라들이 강력한 투쟁을 각오하고 있었다.(선집1,434)
그러나 1830년 이래 모든 것이 후퇴하고 말았다. 폴란드는 몰락하였고, 반란을 일으킨 루마니아 인들은 분쇄되었으며, 독일에서의 운동은 억압되었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자국의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하였으며, 자신들이 봉기를 일으키도록 자극했던 타국의 자유주의자들을 배신하였다. 영국의 자유주의적 내각은 아무것도 관철시킬 수 없었다. 결국 1840년에는 반동이 완전히 만개하게 되었다.(선집1,435)
그리고 또한 1830년이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의 정점이었듯이, 1840년은 반동의 정점이었다. 1840년부터 현존 상태에 맞서는 운동들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그 운동들은 종종 패퇴하기도 하면서 장기간 차츰차츰 전진해 나갔다. 영국에서는 차티스트들이 재조직되고 이전보다 더 강력해진 반면에, 필은 몇 번이고 자신의 당을 배반하였고, 곡물법의 폐지로 자신의 당에 치명상을 입혔으며 그리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퇴장시켰다. 스위스에서는 급진파가 진출하였으며, 독일, 그리고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거세어졌다. 벨기에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이 1847년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오직 프랑스에서만 1846년의 선거에서 반동적 장관들이 미증유의 다수표를 획득하였다. 이탈리아만이 피우스 9세가 즉위하여 1846년 말에 매우 미심쩍은 개혁 시도를 하기 전까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선집1,435)
1847년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도처에서 당파들을 서로 날카롭고 확실하게 대치시켰다. 1847년은 어떤 문제도 최종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모든 문제들이 오늘날 해결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선집1,436)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결국 어쩔 수 없이 헌법 제정을 인정하게 되었다. 상수시 궁전의 이 불임의 돈키호테는 오랜 투쟁과 비명 끝에 헌법 하나를 낳았지만, 이 헌법은 봉건적 가부장적 절대주의적 관료적 성직자적 반동의 승리를 영구히 보장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산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이미 그러한 헌법 안에서도 그[프리드리히 대왕]와 사회의 반동적 계급들 전체를 겨냥하는 무기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프로이센에서도 부르주아지는 왕에게 돈을 내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왕은 절망에 빠졌다. 돈을 내는 것이 거부되는 최초의 날부터 프로이센에는 왕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이센은 그것을 모르는 채 완전한 혁명 속에 있었다.(선집1,436)
그때 천만다행으로 러시아의 1,500만 루블이 당도하였다. 그리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다시 왕이 되었고, 지방 의회의 부르주아들은 모두 허리가 부러져 버릴 정도로 놀라 버렸으며, 혁명적 뇌운은 사라져 버렸다. 프로이센의 부르주아지는 지금 당장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며, 토론 광장을 장악하였고, 왕에게 그들의 힘을 보여주었으며, 전국을 들끓도록 만들었다. 프로이센에서 누가 지배해야 하는가, 왕을 선두로 한 귀족, 관료들, 성직자들 사이의 동맹인가 아니면 부르주아지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이쪽을 위해서든 아니면 저쪽을 위해서든 결정지어져야만 하는 문제로서 제기되었다.(선집1,436)
그러므로 1847년은 일시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사업을 위해서는 근사한 한 해였다. 독일의 그 밖의 국가들의 부르주아들과 소부르주아들 또한 이것을 알아채고서 프로이센의 부르주아들에게 강한 호의를 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프로이센 부르주아들의 승리가 그들 자신의 승리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선집1,437)
그런데 이러한 개혁들은 어떤 성질의 것들인가? 이 개혁들은 누구에게 유리한 것인가?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에게 유리하다. 출판은 장려되고, 관료 제도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되며 (사르디니아의 개혁들, 로마의 자본 의회, 내각 제도의 재조직을 참조하라), 부르주아들은 지방 행정에 대한 더 큰 영향력을 확보하고, 귀족과 관료의 폭정은 제한되며, 부르주아지는 시민군으로서 무장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개혁들은 전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으며, 또 그를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로이센의 개혁을 이것과 비교해 보라. 둘 다 정확히 똑같은데, 다만 전자가 여러 가지 점에서 좀 더 나아간 것이었다. 행정은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종속되었고, 귀족과 관료의 전횡은 타파되었으며, 시 조례와 예비군 제도가 바뀌어졌으며 부역의 상각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 프로이센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이탈리아에서도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증대한 부에 힘입어 그리고 특히 전체 인민의 생존에서 공업과 상업의 중요성이 증대함에 힘입어, 외국의 지배로부터의 이 나라의 해방이 주로 의존하는 계급이 되었다.(선집1,438)
그러나 이 모든 계급들은 오스트리아의 멍에가 일단 벗겨지자마자 매우 실망하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들이 외국의 적들을 끝장내게 되는 때, 그들은 자기 집 안에서 양들 사이에서 염소를 가려내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후들과 귀족들은 오스트리아에 다시 도움을 요청하게 되겠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밀라노, 플로렌스, 나폴리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이 비로소 진짜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선집1,438)
농민들에 관해 말하자면, 이들은 소부르주아들에게 오랫동안 행사한 것과 동일한 역할을 부르주아들에 대해서도 당분간 행사할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부르주아들에게 이용되는 팔로 남을 것인바, 부르주아들을 위해서 전투를 할 것이요, 부르주아의 면포와 띠를 짤 것이며 부르주아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를 보충해 줄 것이다.(선지1,440)
그 밖에 그들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그들은 부르주아들과 마찬가지로 소유자들인 까닭에 당분간은 그 모든 이해가 부르주아들과 거의 똑같다. 그들이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는 모든 정치적 방책들은 부르주아들에게도 이롭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더욱 더 이롭다. 그렇지만 그들은 부르주아들에 대항해서는 허약한데, 왜냐하면 그들보다 부르주아들이 더 부유하며, 우리 세기의 모든 정치권력의 지렛대인 공업이 부르주아들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부르주아와 함께라면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지만 부르주아에 대항해서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선집1,440)
하지만, 농민들 중에서 고혈을 빨릴 대로 빨려서 빈곤화된 부분이 그때까지 계속해서 발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연합하여 부르주아지에 맞선 전쟁을 선포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선집1,440)
이처럼 1847년의 세 개의 가장 두드러진 운동들은 그것들 모두가 무엇보다도 그리고 주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진보적 당은 어디에서나 부르주아들의 당이었다.(선집1,440)
영국에서는 1688년 이래 부르주아지의 개별 분파들이 지배권을 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권의 장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기대고 있는 그들의 채무자인 귀족들에게 명목상의 지배권을 맡겼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투쟁은 실제로 부르주아지 자신의 개별 분파들 사이의 투쟁, 즉 금리 생활자들과 공장주들 사이의 투쟁인 데 반해, 공장주들은 그 투쟁을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라고, 또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귀족과 인민 사이의 투쟁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선집1,441)
공장주들에게는 귀족의 지배라는 외관을 유지하는 것이 하등의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데, 왜냐하면 경, 준 남작, 스콰이어(시골 귀족)는 그들에게 단 1헬러도 빚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외관을 엎어버리는 것은 그들에게 큰 이익이 되는데, 왜냐하면 이 외관이 엎어지는 것과 함께 금리 생활자들의 최후의 닻이 유실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부르주아 의회 내지 공장주 의회는 이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의회는 봉건적인 외관을 띤 과거의 영국을 많든 적든 현재적인, 부르주아적으로 조직된 나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선집1,441)
아메리카에서 우리는 멕시코의 정복을 지켜보았고 그것을 반겼었다. 지금까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일에 몰두했던 나라, 끝없는 내전에 의해 분열되어 어떠한 발전이든 방해받던 나라, 기껏해야 영국의 산업적 가신 상태에 놓인 채 우리 앞에 마주 서 있던 나라−그러한 나라가 힘 있게 역사적 운동에 끌려 들어오는 것 또한 하나의 진보이다. 이 나라가 장래에 합중국이라는 후견 아래에 있게 되는 것은 이 나라 자신의 발전에 이익이 된다. 합중국이 캘리포니아의 점령에 의해서 태평양의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은 아메리카 전체의 발전에 이익이 된다.(선집1,442)
그 전쟁은 우선 누구에게 이로운 것인가? 오직 부르주아지에게 이로울 뿐이다. 북아메리카 인들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에 새로운 지역을 획득하는 것은 그곳에 새로운 자본을 낳기 위함인바, 즉 새로운 부르주아들을 탄생시키고 이미 존재하는^ 부르주아들을 부유하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오늘 태어난 모든 자본은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추구되고 있는 테완테백 지협의 개착(開鑿)은 아메리카의 선주들 외에 누구를 이롭게 하겠는가? 태평양의 지배, 이것 역시도 바로 그 아메리카의 선주들 이외에 누구를 이롭게 하겠는가? 정복된 나라들에서 형성되는, 공업 생산물들의 새로운 고객들에게 제품을 공급하는 일을 아메리카의 공장주들 말고 누가 하겠는가?(선집1,442-443)
완전히 미개한 나라들에서조차 부르주아지는 진보를 이룩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공업은 힘찬 발걸음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보야르들로부터도 부르주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농노제는 제한되고 있으며, 이로써 부르주아들에게 이롭게도 귀족이 약해지고 있으며, 어디에서든지 부르주아지가 필요로 하는 자유로운 농민 계급이 출현하고 있다.(선집1,443)
어디를 봐도 부르주아들은 힘찬 진보를 이룩하고 있다. 그들은 머리를^ 곧추세우고 그들의 적들에게 대담하게 싸움을 건다. 그들은 결정적 승리를 예기하고 있으며, 그들의 그 희망은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전세계를 그들의 척도에 맞추려 하고 있으며, 이는 지구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공을 거둘 것이다.(선집1,443-444)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친구들이 아니다. 이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는 그들의 승리를 빌어 준다. 우리는, 특히 독일에서 일견 하찮게 보이는 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작은 무리를 내려다보는 그들의 거만한 시선을 태연하게 웃어넘길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도처에서 그들의 의도들을 관철시키고 있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선집1,444)
부르주아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얼마나 가공할 만한 진지함을 갖고서, 얼마나 비장한 열광을 갖고서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볼 적에 우리는 비웃지 않을 수 없다. 그 신사분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와 함께 세계가 그 최종적 모습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믿을 만큼 편협하다. 그러나 실은 그들은 단지 우리를, 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위해서 도처에서 길을 닦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들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불안정한 향유, 이후에 즉각 다시 전복되고 말 향유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것만큼 자명한 것도 없다. 어디서건 그들의 등 뒤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서 있는바, 여기에서는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처럼 부르주아들의 계획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들의 환상을 공유하면서, 저기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에서처럼 과묵하면서도 신중하게 그러나 암암리에 부르주아지의 전복을 준비하면서 서 있으며, 마지막으로 저기 영국과 아메리카에서는 지배하는 부르주아지에 맞선 공공연한 폭동 속에 서 있다.(선집1,444)
우리는 부르주아들에게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카드를 다 보여 주고 카드놀이를 할 수 있다. 자신들이 단지 우리들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들이 예지해도 좋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절대 군주제, 귀족, 성징자들에 대한 그들의 투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들은 승리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오늘날 벌써 몰락해야만 한다.(선집1,444)
우리는 당분간 당신들을 필요로 하오. 우리는 심지어 종종 당신들의 지배까지도 필요로 하오,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중세의 잔존물들과 절대 군주제를 쓸어내 버려야만 하오, 당신들은 가부장제를 절멸시켜야만 하오. 중앙 집권화해야 하오. 많든 적든 무산계급 전부를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로, 우리를 위한 신병들로 바꾸어 놓아야 하오. 당신들의 공장과 통상 관계들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해방을 위해 필요로 하는 물질적 수단의 기초를 우리에게 제공해야만 하오. 그 보수로서 당신들은 잠깐 동안 지배하게 될 것이오, 법률을 명령하는 것도 좋소. 당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존엄의 빛으로 일광욕을 하는 것도 좋소. 왕궁의 광장에서 연회를 베풀고 아름다운 왕녀에게 구혼해도 좋소. 그러나 이것을 잊지 마시오−“사형 집행인이 문 앞에 서 있다.”
1848년 1월 23일자 브뤼셀 독일어 신문 제7호
K. 맑스/ F. 엥겔스:「독일에서의 공산주의당의 요구들」,
1. 독일 전체는 단일한 불가분의 공화국으로 선언된다.
2. 21살이 된 모든 독일인은 선거권자이며 피선거권을 가진다. 단, 형벌에 처해진 경우가 없었다는 전제하에.
3. 노동자들도 독일 인민의 의회에 의석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인민의 대표자는 급료를 받는다.
4. 전국민의 무장. 미래에는 군대가 동시에 노동자 군대이다. 그래서 군대가 단지 이전처럼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지비에 달하는 것 이상으로 생산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노동의 조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5. 소송은 무료로 한다.
6. 이제까지 농민을 억누르던 모든 봉건적 부담들, 즉 모든 공납, 부역, 십일조 등등은 어떤 배상도 없이 폐지된다.
7. 군주의 영지 그리고 여타의 봉건적 영지, 모든 광산, 탄갱 등등은 국가 소유로 전환된다. 이들 영지들에서 농업은 대규모로, 그리고 과학의 가장 현대적인 보조수단들을 가지고서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경영된다.
8. 농민 소유자에 대한 저당권은 국가 소유로 선언된다. 이 저당권에 대한 이자는 농민에 의해 국가에 납부된다.
9. 소작세가 발전된 지역에서 지대 혹은 소작료는 조세로서 국가에 납부된다.^
6, 7, 8, 9에서 제시한 모든 방책들은 농민과 소 임차인의 공적인 부담 및 여타의 부담을, 국가 비용의 충당에 필요한 수단을 삭감하지도 않고 생산 자체를 해치지도 않고서 경감시키기 위하여 작성된 것들이다. 농민도 임차인도 아닌 고유한 의미의 토지 소유자는 생산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토지 소유자의 소비는 단순한 낭비일 뿐이다.
10. 그 지폐가 법률적 통용력을 가지는 하나의 국립 은행이 모든 개인은행을 대신한다. 이 방책은 신용제도를 전체 인민의 이익을 위해 규제하는 것을 가능케 하며, 이로써 대은행가의 지배권을 파탄시킨다. 이 방책은 점차 금과 은을 지폐로 대체함으로써 부르주아적 교류의 필수 불가결한 도구, 즉 일반적 교환수단을 값싸게 하고 금과 은을 대외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다. 끝으로 이 방책은 보수적 부르주아들의 이해를 혁명에 결부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11. 모든 운동수단: 철도, 운하, 증기선, 도로, 우편 등등은 국가가 장악한다. 이것들은 국가 소유로 전환되고, 무산계급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한다.
12. 전체 국가 공무원들의 급료 지불에 대해서는, 가족이 있는, 따라서 남들보다 더 많은 필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남들보다 더 높은 급료를 받는 것 이외에 어떠한 구별도 없다.
13. 국가로부터의 교회의 완전한 분리. 모든 교파의 성직자들은 다만 자신의 자발적 교구민들로부터 급료를 받는다.
14. 상속권의 제한.
15. 소비세의 폐지와 강력한 누진세의 시행.
16. 국립 작업장들의 건립. 국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생존을 보장하고 노동능력 상실자를 부양한다.
16. 무상 보통 국민 교육.
상술한 방책들을 관철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은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 소부르주아 신분, 농민 신분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직 이러한 방책들의 실현을 통해서만, 이제까지 독일에서 소수에 의해 착취당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억압 속에 있게 될지도 모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으며, 모든 부의 생산자로서 그들에게 응당 귀속되어야 할 권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원회: K. 맑스 K. 샤퍼 H. 바우어 F. 엥겔스 J. 몰 W. 볼프
1848 3월 21일과 29일 사이에 씌어짐.
F. 엥겔스: 「프랑크푸르트 의회」, 최인호 역
2주 전부터 독일에는 전 독일 인민의 선거에 의해서 생긴 제헌 국민의회가 있다. 독일 인민은 나라의 크고 작은 도시들의 거리에서, 그리고 특히 빈과 베를린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자신들의 주권을 쟁취하였다. 그들은 이 주권을 국민의회의 선거에서 행사하였다.(선집1,453)
국민의회의 첫 번째 행동은 독일 인민의 이 주권을 공공연하게 소리 높여 선포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 두 번째 행동은, 인민 주권의 기초 위에서 독일 헌법을 완성하고 독일의 실제의 현존 상태에서 국민 주권의 원리에 저촉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어야 했다. 국민의회는 자신의 전 회기에 걸쳐, 모든 반혁명적 기도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고 국민의회가 서 있는 혁명적 기반을 고수하고 혁명의 획득물인 인민 주권을 모든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방책들을 취해야 했다.(선집1,453)
그런데 벌써 12차에 걸쳐 독일 국민 의회가 열렸지만 이 모든 것들 중에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대신 독일 국민의회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사업들을 통해서 독일의 행복을 보장하였다. 국민의회는 회의 규칙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는바, 이는 두세 명의 독일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회의 규칙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걸상 다리들이 결딴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을 국민의회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선생께서 이러한 경우를 미리 예견하시고 이 고귀한 의회를 위한 특별한 회의 규칙을 제안하였다. 학교의 연습 작문 같은 이 제안을 임시로 채택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주저 없이 그것을 채택하였다.(선집1,453)
새로운 수정안들, 새로운 지엽적 토론들이 비 오듯 쏟아졌고, 기나긴 연설과 여러 번의 혼란이 거듭된 후, 이미 의사일정에 올라 있는 문제들은 분과 위원회에 되돌려 보내자고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간은 마침내 다 흘러가서, 의원 선생들은 식사를 하러 갔다.(선집1,454)
5월 23일에 회의록에 관해서 처음으로 옥신각신하게 되었다. 뒤이어 다시 무수한 제안들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으로 다시 의사일정으로, 즉 애호해 마지않는 회의 규칙으로 넘어가려는데, 마인츠에서 온 지츠 씨가 프로이센 군대의 잔학한 행위들과 마인츠 주재 프로이센 사령관의 전제적 찬탈 행위에 대해 보고하였다. 여기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성공적인 반동적 기도가 문제가 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의회의 권한에 전적으로 특별히 속하는 사안이었다. 이는 거의 국민 의회의 눈앞에 있는 마인츠를 포격하겠노라고 감^히 위협한 오만방자한 군인에게 시말서를 쓰게 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들의 집에서 무장 해제당한 마인츠 시민들을, 그들을 위협하고 있고 그들을 위협하도록 부추김을 받은 병졸들의 폭행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덴의 물장수인 바써만 씨는, 이 모든 것을 하찮은 일이라고 언명하였다. 마인츠는 제 운명에 맡겨 두어야 하며, 전체가 우선하는바, 여기는 국민 의회 토의장이고 독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회의 규칙을 토의하고 있다는 것이다.(선집1,455)
5월 24일에 마침내 우리는 회의의 가닥을 놓쳐 버렸다. 회의 규칙은 완비된 듯 보이기도 하고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선집1,455)
25일에 사상이 가득한 대의원들의 머리는 소나기를 맞은 무르익은 곡식 이삭처럼, 무더기로 쏟아지는 제안들을 맞으며 수그러졌다. 2명의 대의원들이 또다시 추방 건에 대해서 발언을 시도하였지만 그들 또한 발언을 거부당했고, 안건의 긴급성에 대한 발언마저 거부당했다.(선집1,456)
26일에 다시금 무수한 제안들이 올려졌다. 그리고 뒤이어 마인츠 위원회는 최후의 그리고 매우 우유부단한 보고를 제출하였다.(선집1,456)
5월 27일에 회의록 때문에 생긴 장시간의 예비 토론이 있은 후, 마침내 라보의 제안이 토론에 부쳐졌다. 2시 반까지 오락가락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를 하러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야간 회의까지 열리고 안건은 마침내 결말지어졌다.(선집1,456)
1848년 6월 1일자. 신 라인 신문 제1호
K. 맑스/ F. 엥겔스: 「프랑크푸르트 급진 민주주의당의 강령과 좌파의 강령」, 최인호 역
급진파의 선언은 ‘재산에 의한 자격 제한 없이 그리고 직접선거에 의해’, 그리고 좌파의 선언은 만인의 자유선거에 의해 구성되는 국민의회를 요구하고 있다. 만인의 자유선거는 재산에 의한 자격 제한은 배제하고 있지만 간접적 방법은 배제하지 않는다.(선집1,458)
좌파는 ‘국민의회에 의해 임기가 한정되어 선발되는, 국민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중앙 집행 권력’을 요구한다. 이 중앙 권력이 국민의회의 내부로부터 만들어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 급진파의 선언은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해 좌파는 결론 내리지 않고서 그냥 놓아두고 있다.(선집1,458)
마지막으로 좌파의 선언은 개별 정부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침해들에 맞서서 독일 인민의 기본권들을 즉각적으로 확정하고, 공포하고, 보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급진파의 선언은 그러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급진파의 선언은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국민의회는 지금도 전체 국가의 모든 국가 권력들을 자신 안에 통합해야 하고, 자신이 결정할 소명을 안고 있는 각종의 권력들과 정치적 생활 형태들을 또한 즉각적으로 작동시켜야 하며, 전체 국가의 대내외 정책을 취급하여야 한다.”(선집1,458-459)
두 선언들은, ‘독일 헌법의 제정을 오로지 국민의회에’ 맡기려고 하며, 정부들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두 개의 선언들은 ‘국민의회에 의해 포고될 인민의 권리들이 침해받지 않는다면’, 입헌 군주제이건 공화제이건 헌법 선택의 재량권을 개별 국가들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선언들은 독일을 연방 국가 혹은 동맹 국가로 바꾸기를 희망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선집1,459)
급진파의 선언은 적어도 국민의회의 혁명적 성격을 표명하고 있다. 이 선언은 적절한 혁명적 활동을 요청하고 있다. 제헌 국민의회만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은 더 이상 헌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어떠한 헌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국민의회 자신이 통치해야 한다. 국민의회의 최초의 생명의 징후는 다음 여섯 단어들의 포고이어야만 했다. “연방 의회는 영원히 해산된다.”(선집1,459)
제헌 국민의회는 무엇보다도 행동적인, 혁명적 행동적인 의회이어야 한다.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의회 정치의 연습을 하고 있고, 행동은 정부들이 취하도록 하고 있다. 설령 이 박학한 공회의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심사숙고 끝에 최선의 의사일정과 최선의 헌법을 고안해 냈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정부들이 의사일정에 총검을 들이댄다면, 최선의 의사일정과 최선의 헌법은 어디다 쓸 것인가?(선집1,459)
독일 국민의회는, 그것이 간접선거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게르만 특유의 병에 시달리고 있다. 국민의회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주재하고 있고,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은 단지 관념적인 중심지, 즉 지금까지의 관념적인, 요컨대 공상 속에 있는 독일의 통일에 상응했던 관념적^ 중심지일 뿐이다.(선집1,459-460)
또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은, 국민의회의 뒤에 서서 때로는 국민의회를 지켜주고 때로는 앞으로 추동하는 거대한 혁명적 주민을 갖고 있는 대도시가 아니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한 위대한 국민의 제헌의회가 소도시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독일의 발전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와 영국의 국민의회들이 불을 내뿜는 지반−파리와 런던− 위에 서 있었던 반면에, 독일 국민의회는 중립적 지반, 국민의회가 아주 안락하고 조용한 기분으로 최선의 헌법과 최선의 의사일정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중립적 지반에 서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선집1,460)
그러나 독일의 당면 상태는 국민의회에게 그 불행한 물질적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국민의회는 노후한 정부들의 반혁명적 책동들에 대해서 독재자로 맞서기만 하면 되었다. 그랬으면 국민의회는 모든 총검과 곤봉을 분쇄하는 힘을 인민의 여론 속에서 거머쥐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대신에 국민의회는 자신의 눈앞에서 마인츠를 폭병들의 자의에, 독일의 외국인들을 프랑크푸르트의 성외 시민들의 술책에 내맡겨 두었다. 국민의회는 독일 인민을 열중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열중하거나 하는 대신에 그들을 지루하게 만들고 있다. 국민의회는 공중, 즉 이따금씩 인자한 미소를 띠며, 다시 깨어난 신성 로만 독일 제국의회의 망령의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을 바라보는 공중은 존재할지 모르나, 인민, 즉 국민의회의 생명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재발견할 인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의회는 혁명 운동의 중앙기관이기는커녕,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혁명운동의 메아리인 적도 없었다.(선집1,460)
우리는 하나의 단일하고 불가분한 독일 공화국을 선포하라는 식의 공상적 요구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소위 급진 민주주의당에 대해서는 투쟁과 혁명적 운동의 출발점을 그 종착점과 혼동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독일 통일도 독일 헌법도 어떤 운동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바, 이 운동 속에서는 국내의 갈등들과 마찬가지로 동구와의 전쟁이 결판으로 몰아갈 것이다. 종국적인 헌법 제정은 포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국적 헌법 제정은 우리가 거쳐 가야 할 운동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견해나 이러저러한 정치적 이념의 실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발전의 과정에 대한 통찰이 중요하다. 국민의회는 단지 우선적으로 실행 가능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한다.(선집1,461)
미합중국이 모두 동일한 통치 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미합중국은 문명의 유럽만큼이나 드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미합중국이 그 유사물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유럽 연방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이 다른 나라들과 연방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일은 하나의 나라이어야 한다. 독일에서 집권화와 연방제 사이의 투쟁은 현대 문화와 봉건주의 사이의 투쟁이다. 독일은 서구에 대군주정이 형성되는 바로 그 순간 부르주아화된 봉건제로 전락했다. 그러나 독일은 세계시장이 서유럽에 문을 열었던 바로 그 순간 또한 세계시장으로부터 배제되었다. 독일은 서유럽이 부유해지고 있는 동안 가난해졌다. 독일은 서유럽이 대도시화되는 동안에 농업국으로 되어 버렸다. 러시아가 독일의 현관문을 두드리지 않았을지라도, 국민 경제적 상태가 독일로 하여금 가장 엄격한 중앙집권화로 나아가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심지어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독일의 완전한 통일은 독일을 지금까지의 가난으로부터 구출하고 국부를 창출하기 위한 제1조건이다. 그런데 하물며, 39개의 소국들로 찢겨져 있는 땅에서 현대의 사회적 과제들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선집1,462)
1848년 6월 7일자 신 라인 신문 제7호.
K. 맑스: 「6월 혁명」, 최인호 역
파리 노동자들은 우세한 힘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힘에 굴복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격파되고 말았지만, 그들의 적들은 패배하였다. 야만적 폭력의 순간적인 승리는 2월 혁명의 모든 기만들과 공상들이 파괴된 대가로, 낡은 공화주의적 당파 전체가 해체된 대가로, 프랑스 국민이 소유자 국민과 노동자 국민이라는 두 개의 국민들로 나누어진 대가로 획득된 것이다. 삼색 공화국은 이제 하나의 색깔, 패배자들의 색깔, 피의 색깔만을 띨 뿐이다. 삼색 공화국은 붉은 공화국으로 되었다.(선집1,463)
폭동 그 자체 이외에는 어떠한 지도자, 어떠한 수단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은, 온갖 군사 기구를 지니고 있는 저 프랑스 왕조가 인민과 연합한 부르주아지 분파에 저항한 것보다 더 오랫동안 부르주아지 연합 세력과 폭병에 저항하였다. 또한 인민의 마지막 환상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과거와 완전히 절연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폭동의 친숙한 시적 장식품인 열광적인 부르주아 청년들, 이공과 대학 학생들, 삼각모자들도 억압자들의 편에 서야 했다. 의학부 학생들은 부상당한 평민들에게 과학의 도움을 주기를 거절하였다. 과학은, 루이-필립이나 마라스트 씨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대신에 딱 한 번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이러한 이루 말할 수 없고 형언키 어려운 죄를 범한 평민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선집1,463)
우애, 한편이 다른 편을 착취하는 대립적 계급들의 우애, 이 우애는 2월에 선포되어 파리의 건물 전면에, 모든 감옥에, 모든 병영에 커다란 활자로 아로새겨졌다−이 우애의 진정한, 꾸밈없는, 산문적 표현, 그것은−내전, 가장 끔찍한 형상의 내전, 노동과 자본의 전쟁이다. 부르주아지의 파리가 불꽃으로 하늘을 장식하고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파리가 불길에 타고, 피를 흘리고, 신음하던 6월 25일 저녁에 이 우애는 파리의 모든 창문들 앞에서 불타 버렸다.(선집1,464)
우애는 부르주아지의 이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가 융화되고 있는 한에서만 지속되었다. 1793년의 낡은 혁명적 전설에 매달리는 소인배들, 부르주아지의 곁에 붙어 인민을 위해 구걸하며, 부르주아지에게 허락을 받아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사자를 잠들게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긴 설교를 늘어놓으며, 그만큼 길게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사회주의적 공론가들, 다만 왕관을 쓴 우두머리가 없는 일체의 낡은 부르주아적 질서를 요구하고 있는 공화주의자들, 불의의 사건 때문에 내각의 교체 대신에 왕조의 전복을 맞이하게 된 왕조적 반대파, 하인의 제복을 벗어 던지지 않고 그 옷의 제단 모양을 바꾸고자 한 정통 왕조파, 이들이 2월을 함께 만들어낸 인민의 동맹자들이었다. 루이-필립을 증오함으로써 인민들이 본능적으로 증오한 것은 루이-필립이 아니라, 왕관을 쓴 한 계급의 지배, 왕권을 거머쥔 자본이었다. 그러나 인민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관대하게도, 자신들의 적의 적, 공동의 적을 전복한 후에 자신의 적을 섬멸했다고 착각하였다.(선집1,464)
2월 혁명은 아름다운 혁명, 일반적 공감을 얻는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그 혁명 속에서 왕권을 반대하여 현저하게 나타난 대립들이 발전되지 못한 채 나란히 의좋게 졸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그 대립들의 배경을 이룬 사회적 투쟁은 단지 허공에 뜬 존재였고, 문구의 존재, 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6월 혁명은 추한 혁명, 혐오스러운 혁명이다. 왜냐하면 사실이 문구를 대신해서 나타났으며, 공화국이 괴물의 머리에서 그것을 덮어 주고 가려 주던 왕관을 벗김으로써 괴물의 머리 자체를 드러내 놓았기 때문이다.(선집1,464)
질서! 이것은 기조의 전투 구호였다! 질서! 바르샤바가 러시아 령이 되었을 때, 기조 파의 세바스티아니는 이렇게 외쳤다. 질서! 프랑스 국민의회와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잔인한 메아리인 카베냑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질서! 그의 산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으며 이렇게 울렸다.(선집1,465)
1789년 이래의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무수한 혁명들 중에서 어떤 혁명도 질서의 암살 기도였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혁명들은 계급지배도 노동자들의 노예상태도 그대로 존속시켜, 비록 이 지배와 이 노예 상태의 정치적 형태가 그렇게 많이 변했음에도, 부르주아적 질서를 존속시켰기 때문이다. 6월 혁명은 이 질서를 침범하였다. 6월에 불행이 있으라!(선집1,465)
임시정부 하에서는, 수천의 공식 전단들에 인쇄되어 있듯이, ‘빈곤의 3개월을 공화국을 위해 바친’ 자애로운 노동자들에게, 2월 혁명은 노동자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수행되었고, 2월 혁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이익이라고 노동자들을 타이르는 것이 예의였으며, 나아가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정책이었고 동시에 몽상이었다. 국민의회의 개회 이후에−사람들은 산문적으로 되었다. 장관 트렐라가 말한 것처럼 노동을 과거의 조건들로 되돌리는 것−이제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었다. 이처럼 노동자들은 산업 공황 속에 던져지기 위하여 2월에 치고받고 싸운 것이다.(선집1,465)
국민의회의 용무는 적어도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는 2월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드는 데에, 그들을 과거의 관계들 속으로 도로 집어 던지는 데에 그 요체가 있다. 그러나 또 그렇게 되지도 않았는데, 왜냐하면 전반적 성격을 띤 산업 공황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는 것은 국민의회의 힘으로도 왕의 힘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 그러나 2월 이후의 감상적인 수사학도 5월 15일 이후의 잔인한 입법도 불충분하였다. 실제적, 실천적으로 결판을 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너희 천민들은 2월 혁명을 너희들을 위해서 일으켰느냐 아니면 우리를 위해서 일으켰느냐? 부르주아지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고 그리하여 천민들은 6월에 대답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산탄과 바리케이드로.(선집1,466)
부르주아 사회의 조건들 자체로부터 생겨 나온 갈등들은 투쟁에 의해서 제거되어야 하며, 환상으로는 제거될 수 없다. 사회적 대립들이 모호해지지 않고, 폭력적으로 구속되지 않는, 따라서 인위적으로만, 따라서 외견상으로만 구속되는 국가 형태가 최선의 국가 형태이다. 사회적 대립들이 자유로운 투쟁에 이르게 되며 그리하여 해결에 이르게 되는 국가 형태가 최선의 국가 형태이다.(선집1,466-467)
1848년 6월 29일자 신 라인 신문 제29호
F. 엥겔스: 「독일의 대외정책」, 최인호 역
민족들을 이간질하는 것, 어떤 민족을 억압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을 이용하는 것, 그리하여 절대적 지배권의 유지를 도모하는 것−이것이 지금까지의 권력자들과 그들의 외교관들의 기술이고 작업이었다. 독일은 이 점에서 특히 두드러졌다.(선집1,468)
원조에 의해 다른 나라들에서 자행된 추악한 행동들의 책임은 정부들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이 독일 인민 자신에게도 부과된다. 독일 인민이 현혹되지 않았더라면, 노예근성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용병으로서 또한 ‘신의 은총을 입은’ 군주의 ‘순종적인’ 형리와 도구로서 민첩함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독일인이라는 이름이 외국에서 그처럼 증오스럽고 저주스럽고 경멸적인 이름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독일의 억압을 받고 있는 민족들은 오래 전에 자유로운 발전의 정상적인 상태에 도달했을 것이다.(선집1,469)
독일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씌워져 있는 멍에를 벗어던지고 있는 지금, 외국에 대한 그들의 정책 또한 변화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을 속박하는 데 섰던 그 굴레에 우리 자신의 약관(弱冠)의, 이제 겨우 예감될 뿐인 자유를 묶어 두게 되는 것이다. 독일은 이웃 민족들을 자유롭게 하는 그만큼 그 자신 자유로워진다.(선집1,469)
낡은 정부 기관들이 폴란드와 이탈리아에 반대하여 그토록 열심히 유포시킨 거짓말과 왜곡들, 인위적인 증오를 조장하려던 시도들, 독일의 명예가 중요하고 독일의 위세가 중요하다는 식의 과장된 미사여구들−이러한 주문들의 효력은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화려한 애국적 언사 뒤에 물질적 이해가 숨어 있는 곳에서만, 이러한 공식적 애국주의를 가지고서 영업을 하고 있는 일부 대부르주아^지에게 있어서만 공식적 애국주의는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이를 반동적 당파는 알고 있으며 이용하고 있다.(선집1,469-470)
그러나 독일의 중간 신분 및 노동자 계급의 거대한 대중은 인근 민족들의 자유 속에서 자신의 자유가 담보된다는 것을 이해하거나 혹은 감지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독립을 반대하는 오스트리아의 전쟁, 폴란드의 부흥을 반대하는 프로이센의 전쟁−이런 것들이 인기가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애국적인’ 십자군 원정에 대한 마지막 환상이 소멸하고 있지 않은가?(선집1,470)
독일의 피와 돈이 더 이상 독일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는 데 낭비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진정한 인민 정부를 쟁취해야만 하며, 낡은 건물은 그 주춧돌까지 뽑아 버려져야 한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낡은 체제, 다시 새로워진 체제의 피 어린 비열한 정책은 민주주의의 국제적 정책에 그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국내에서는 묶여 있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외국에 대해서 민주주의적 행동을 취하려 하는가? 그런 속에서도, 알프스의 이쪽저쪽에서 민주주의적 제도를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 예비하기 위한 모든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선집1,470)
1848년 7월 3일자 신 라인 신문 제33호
K. 맑스: 「봉건적 부담들의 폐지에 관한 법률 초안」, 최인호 역
기르케 씨는 봉건적 부담들 전체가 오직 배상에 반해서만 폐지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억압적이고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주요한 부담들은 존속하게 되고 혹은 그러한 부담들이 실제로 농민들에 의해 이미 제거되었을 경우에는 부활된다는 것이다.(선집1,474)
농촌에서의 혁명의 본질은 모든 봉건적 부담들을 실제로 제거하는 데 있었다. 이 혁명을 승인했던 행동 내각은 그것을 은밀히 파괴하는 것을 통해 농촌에서의 혁명을 승인했다. 완전한 옛날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농민들은 곧바로 자신의 봉건 영주들을 살해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기르케 씨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저곳에 산재하고 있는 하찮은 봉건적 부담들의 겉치례용 목록들이 폐지된 것이고, 부역이라는 한마디 말로 포괄되는 주요한 봉건적 부담들은 부활된 것이다.(선집1,474-475)
폐지될 권리 모두로써 귀족은 연간 5만 탈러가 안 되는 액수를 희생하고, 이를 통해 수백만 탈러를 구하게 된다. 희망한 대로 그 장관은 이를 통해 농민들을 무마시키게 되고, 게다가 장래에는 의회 선거에서 농민들의 표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기르케 씨가 오산하지만 않았다면 실제로 이 일은 괜찮은 장사이리라!(선집1,475)
이제 농민들은 구정부 아래에서 체결된 모든 상각 계약들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농민들의 이러한 요구는 완전히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기르케 씨는 결코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그것을 허락하는 것은 ‘형식적인 법과 법률에 반한다’고 하여. [그런데] 일반적으로 개개의 모든 진보에 대립하는 것은 그러한 형식적인 법과 법률인바, 왜냐하면 모든 새로운 법률은 과거의 형식적인 법과 법률을 폐지하기 때문이다.(선집1,477)
물론 기르케 씨는 소유를 침해하고 있다−이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적, 부르주아적 소유가 아니라 봉건적 소유를 침해하고 있다. 봉건적 소유를 이렇게 파괴함으로써 기르케 씨는 봉건적 소유의 폐허 위에서 자라나온 부르주아적 소유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상각 계약들을 개정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이 계약들을 통해서 봉건적 소유 관계들이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들로 변화되었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동시에 부르주아적 소유에 형식적으로 손상을 입히지 않고서는 그 계약 관계들을 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선집1,478)
바스티유 습격이 있은 지 3주 후인 1789년 8월 4일, 프랑스 인민은 단^ 하루 만에 봉건적 부담들을 끝장내게 되었다. 3월의 바리케이든 전이 있은 지 네 달 후인 1848년 7월 11일에 봉건적 부담들은 독일 인민들을 끝장내게 된다.(선집1,478-479)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동맹자들인 농민들을 한시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농촌에서 봉건주의를 파괴하는 것, 토지를 소유하는 자유로운 농민계급을 창출하는 것이 그들의 지배의 기초임을 알고 있었다. 1848년 독일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농민들, 즉 그들과 혈연관계를 지닌 그들의 가장 자연적인 동맹자이며 또한 그들 없이는 귀족에 대항하여 스스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농민들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배반한다.(선집1,479)
1848년 7월 30일자 신 라인 신문 제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