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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
Sansa, monastères bouddhistes de montagne en Corée
·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
· 경상북도 안동시: 봉정사
· 충청북도 보은군: 법주사
· 충청남도 공주시: 마곡사
· 전라남도 순천시: 선암사
·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
한국의 산사(山寺), 즉 전국 각지 외곽의 산자락에 입지하는 절과 그 특유의 문화가 잘 보존된 지역 중 일곱 곳을 묶어서 지정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은 특유의 선종 문화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신도들이 생활하는 도시와 거리가 먼 전국 명산자락 각지에 산사가 발달하였고, 오랜 세월 동안 일반 신자들을 위한 신앙처로서의 기능과 승가공동체의 수행공간으로서 다른 나라의 불교사원과 차별화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위 영어, 프랑스어 등재명을 보면 알겠지만 'Sansa'라고 한국어 독음을 앞에 표기해서, 산사가 다른 불교 문화권 국가의 사찰과 구분되는 독창적인 한국 고유의 문화임을 강조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2018년 6월 30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 42차 회의에서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의 산사 7곳이 등재되었는데,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이다. 등재 심사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통도사·부석사·법주사·대흥사의 등재 가능성이 높았고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나머지 3곳을 제외할 것을 처음에 권고하기도 했지만 문화재청의 설득과 외교적 노력으로 처음 안대로 모두 같이 등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유네스코는 이 산사를 등재하면서 몇 가지 권고 사항을 제시했는데, 사찰 내 방문객들로 인해 공간이 침해받지 않을 것, 지나친 개발 신축 행위를 삼갈 것, 신규 건설 사업은 유네스코와 상의할 것 등이다.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山寺, 韓國의 山地 僧院·僧園)은 대한민국의 산사 7곳을 묶어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대한민국의 13번째 세계유산으로, 2018년 6월 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가 결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영축총림 통도사(通度寺)
■통도사(通度寺)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하북면 지산리 583/지번)
전화 : 055-382-7182
■ 통도사(通度寺)
시대 : 고대/삼국
문화재 지정 : 양산시 기념물 제289호
건립시기 : 646년(선덕여왕 15)
성격 : 사찰
유형 : 유적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로 108,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분야 : 종교·철학/불교
요약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영축산(靈鷲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佛寶·法寶·僧寶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2018년 1월에 양산시 기념물 제289호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의 형세가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탑(奉鉢塔),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靈山殿)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舍利孔)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 가람배치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上爐殿)과 중로전(中爐殿)·하로전(下爐殿)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九龍神池)의 자그마한 상징적 못이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을 대웅전이라고 하지만 남쪽 정면의 금강계단이 그 정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건물의 바로 뒤쪽에는 통도사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 불사리탑(佛舍利塔)이 있다. 이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바로 불사리 계단이다. 통도사의 특징은 이 불사리 계단에 있으며 또 이로 인하여 불보사찰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부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봉안하였으므로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이 조각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의미는 계단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금강계단 목조건물의 천장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꽃의 문양 또는 불단에 새겨진 조각은 주목되는 작품이다.
(1) 상로전
상로전의 법당은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應眞殿)·명부전(冥府殿)·삼성각(三聖閣)·산신각·일로향각(一爐香閣)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서 창건한 시기는 1677년(숙종 3)이며, 내부에는 석가삼존과 그 주위에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후벽의 탱화를 위시하여 내외 벽화는 주목되는 불화들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된 명부전은 1369년(공민왕 18)에 창건되었고, 1760년(영조 36) 춘파(春波)가 고쳐 지은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十王像)·탱화를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고려 말의 삼화상(三和尙)인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서, 1870년(고종 7) 영인(靈印)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현존 건물은 1935년 경봉(鏡峰)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의 내부 측면에는 산신탱(山神幀)·칠성탱(七星幀)을 봉안하고 있으며, 산신각은 1761년에 초창된 이래 철종대에 중수를 거친 사방 1칸의 건물이다.
(2) 중로전
중로전의 건물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세존비각(世尊碑閣), 장경각(藏經閣), 해장보각(海藏寶閣), 황화각(皇華閣), 감로당(甘露堂), 원통방(圓通房), 화엄전(華嚴殿), 전향각(篆香閣) 등을 들 수 있다.
관음전의 창건은 1725년 용암(龍岩)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내부에는 독존상으로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용화전은 1369년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주는 미상이며, 1725년 청성(淸性)이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역시 약 2m에 달하는 미륵좌상을 봉안하였다. 대광명전(大光明殿)은 중로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보물 제1827호로 지정되었다.
세존비각은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부도비의 비각으로서 불사리 계단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중국에서 자장율사가 가져온 불사리·가사 등에 관한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사리 수호에 따르는 수난의 사실들을 기재하였다. 비신의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 1m이다.
장경각에 있는 목조 경판은 『능엄경(楞嚴經)』·『기신론(起信論)』·『금강경』·『법수(法數)』·『사집(四集)』·『부모은중경』 등 15종이 있다.
개산조당(開山祖堂) 바로 뒤에 있는 해장보각은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주위에는 고려대장경 완질이 봉안되어 있다. 요사(寮舍)의 중심이 되는 감로당은 창건이 1340년(충혜왕 복위 1)이나 현존 건물은 1887년(고종 24) 덕명(德溟)이 중건한 것이다. 口자형 건물로서 약 86칸의 대소 방사로 이루어져 있다.
감로당과 가까운 원통방은 1341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존 건물은 감로당과 함께 탄해(坦亥)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화엄전은 창건이 1368년이며, 1762년에 중건하였고, 1882년 불타서 없어진 것을 1887년 구련(九蓮)이 중건하였고, 1970년 재건하였다.
(3) 하로전
하로전의 중요 건물들은 영산전·극락전·약사전(藥師殿)·만세루(萬歲樓)·영각(影閣)·범종각 등이 있다. 이들 건물배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배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북쪽의 중심 건물과 그 좌우, 그리고 남쪽 전면에 누각을 두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하로전 일대의 건물군이 가장 짜임새 있게 배치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곳 일대의 법당들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 중심 건물은 영산전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외 벽의 벽화가 주목되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팔상탱화(八相幀畵)를 봉안하였다. 팔상탱화는 1775년에 그린 것이며, 본존 후불탱은 1734년의 작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양식이나 구조로 볼 때 대웅전 건물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1369년 성곡(星谷)이 창건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추녀의 네 귀는 활주로 받치고 있는 아담한 법당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약사전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동시에 창건한 아담한 맞배건물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만세루는 창건이 미상이나 1644년 영숙(靈淑)이 중건하였다.
역대 조사(祖師) 및 통도사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은 1705년 처학(處學)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범종각은 2층 누각 건물로서 정면 상하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의 상하에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대종(大鐘) 등 사물(四物)을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석 예불시에 사용하는 의식용구이다. 그리고 1757년에 건립한 응향각(凝香閣), 도서실인 명월료(明月寮)와 금당(金堂)을 위시하여 종무소 건물들이 즐비하다.
또, 절의 세 문 가운데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현판은 대원군의 필적이며, 기둥 좌우의 ‘불지종가 국지대찰(佛之宗家 國之大刹)’은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된 통도사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이다. 사찰수호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목조 사천왕이 각기 특징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된 통도사 불이문은 1305년에 창건되었으며, 편액 ‘불이문(不二門)’은 송나라 미불(米芾)의 필적이다. 건물은 매우 단조로우며,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무게를 유지하는 건물이다.
사찰 경내의 현존하는 석조물로는 역시 금강계단이 가장 중요하며, 대웅전과 함께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통도사 창건의 이유가 바로 이 계단에 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불사리 계단이 축조된 이래 특히 고려시대에 와서는 이 계단에 얽힌 수많은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 보려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35년(고종 22)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郎) 유석(庾碩)에 의하여 계단의 석종이 들려졌다.
“큰 일에 상장군 김공 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 왕이 하사한 旗)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승이 그 전의 일을 들면서 어렵다고 하였다. 김이생과 유석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수정함(水晶函)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三國遺事 卷3 前後所將舍利條).”
이와 같은 기록이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다가 1379년(우왕 5) 고려 말에 국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빈번히 왜구들이 침입하여 이 계단은 일대 수난을 겪는다. 즉, 이색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 따르면, 통도사의 주지 월송(月松)이 왜구들의 침입을 피하여 1379년 8월 24일 석가여래의 사리·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의 평리(評理) 이득분(李得分)을 만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유정(惟政)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休靜)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계(戒)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안치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1652년(효종 3) 정인(淨人)이, 1705년에는 성능(性能)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에도 영조·순조·헌종·고종 대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중수와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단의 크기는 초층 너비 약 990㎝, 총높이 약 300㎝이며, 형태는 2중의 넓은 방단(方壇) 위에 석종(石鐘)의 부도를 안치한 지극히 간단한 구조이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면 돌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의 작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유연한 수법이 하층보다는 월등하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2. 석조물
대체로 통도사의 석조물은 고려 선종대를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 조형으로는 극락전 앞의 배례석·삼층석탑, 그리고 사지경계(四至境界)인 국장생석표 등이다.
(1) 배례석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다. 길이 175㎝, 너비 87㎝의 판석으로 3절되었으며, 상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었다. 현재의 명문은 ‘太康王一年乙丑二月日造’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太康十一年乙丑二月日造’의 위각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 너비 87㎝)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
(2) 삼층석탑
배례석 바로 옆에 있는 보물 제1471호 삼층석탑 역시 신라 말기의 양식이나 이 시대 선종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석탑으로서 전체 수법은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기단에 나타난 안상(眼象) 등 장식된 수법은 고려의 석탑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3) 국장생석표
통도사에서 약 2㎞ 거리의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의 보물 제74호로 지정된 국장생석표 역시 고려 선종대의 사찰 경계로 알려져 있다. 이와 동일한 명문을 지닌 장생석표가 울산광역시 울주구 삼남면 상천리에서 근래 발견되었으나 상부가 단절되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의하면, 이와 같은 표지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12장생을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형태는 목방(木榜)·석비(石碑)·석적장생(石磧長生) 등으로 분류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석비장생뿐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이두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금석문이다.
3. 기타 중요 유물
그 밖에 이 절에 현존하는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34호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471호인 양산 통도사 봉발탑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통도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6호인 자장율사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7호인 통도사 삼화상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8호인 통도사 팔금강도, 보물 제1041호인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보물 제1353호 통도사 영산회상탱, 보물 제1042호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 보물 제1350호 통도사석가여래괘불탱, 보물 제1351호 통도사괘불탱, 보물 제1352호 통도사화엄탱, 보물 제1354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1471호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보물 제1472호 통도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보물 제1711호 양산 통도사 영산전 벽화, 보물 제1735호 양산 통도사 청동은입사향완, 보물 제1747호 양산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보물 제1826호 양산 통도사 영산전, 보물 제1827호 양산 통도사 대광명전 등이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인 대광명전 신중탱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1호인 오계수호 신장도, 보물 제757호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46, 보물 제738호인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 보물 제1194호와 보물 제1196호인 『묘법연화경』권2, 보물 제1195호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9~10,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인 청동은입사향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청동은입사정병(靑銅銀入絲淨甁)이 있다.
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인 청동여래좌상·청동사리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인 인적(印籍) 및 동인(銅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인 청동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9호인 양산 통도사 동종 및 종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인 청동시루(철부포함), 보물 제1373호 양산 통도사 금동천문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금니법화경(金泥法華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인 『금니금강경』 등이 있다.
그 밖에 전석가여래가사(傳釋迦如來袈裟)·전자장율사가사(傳慈藏律師袈裟)·고려은입사동제향로(高麗銀入絲銅製香爐)·청개와(靑蓋瓦)·감로병(甘露甁)·육환철장(六環鐵杖)·동자상(童子像)·동탑(銅塔)·화엄만다라(華嚴曼陀羅)·육각요령(六角搖鈴)·금자병풍(金字屛風)·구룡병풍(九龍屛風)·삼장서행노정기(三藏西行路程記) 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극락암·비로암·자장암·백운암·축서암·취운암·수도암·사명암·옥련암·보타암·백련암·안양암·서운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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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통도사지(通度寺誌)』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한국의 사찰』4 통도사(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4)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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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人生(인생)
人生事(인생사) 先後(선후) 緩急(완급) 輕重(경중)이 있습니다.
우리네 人生(인생)은 아무도 대신 살아 주거나 누구도 대신 아파 주거나 죽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을 때 가지 않으면 가고 싶을 때 갈 수가 없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하고 싶을 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奇跡(기적)은 아무에게나 어디서나 함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꿈과 희망을 먹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면 計劃(계획)과 實踐(실천) 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잘 생각하고 判斷(판단)해서 몸 가는 대로 行動(행동) 하고 實踐(실천)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될 것입니다.
다만, 嚴重(엄중)한 現實(현실)앞에 우선순위를 어디에 어떻게 둘 것인가에 愼重(신중)을 기해서 責任(책임)과 義務(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人生事(인생사) 刹那(찰나)와 彈指(탄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最善(최선)입니까?
인생의 眞理(진리)는 오직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로지 건강하세요.
가족의 健康(건강)과 가정의 幸福(행복)을 축원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19991212(陰1105) SUN
Mundy Sung
■ 양산 영축산 통도사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한 사찰 건물을 말한다. 적멸은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를 말하고,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에는 다섯 곳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에는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했기 때문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 양산 영축산 통도사 금강계단
국보 제290호 대웅전과 금강 계단은 현재 통도사에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영역이다.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자장 율사에 의하여 지어졌으며 현존하는 금강 계단은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고 대웅전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 된 것을 인조 23년(1645년) 우운 대사가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았는데 이는 대웅전 뒤에 있는 금강 계단에 석가 여래의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 生活사진
생활寫眞은 일상의 사소한 발견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사진의 훌륭한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 전화기나 손 안에 쏙 들어가는 똑따기 사진기만으로도 누구나 크게 공감하고 많이 동감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더 없는 사랑과 꾸밈없는 정성으로 인시공(人時空)을 담아내어 소중한 추억으로 오래토록 간직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자 역사의 기록이다’
생활寫眞에 대하여 이렇게 거창한 말까지 앞세울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진실과 진심으로 있는 대로 보고 진정과 최선을 다하여 보이는 대로 담아내면 그것이 곧 예술이자 역사가 될 것입니다.
보다 많은 사진 인구의 저변 확대를 기대합니다.
가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祝願(축원)합니다.
오로지 건강하세요.
늘 고맙습니다.
20121212(陰1029) WED
Mundy Sung
■ CAMERA : SONY DSC-HX80(똑따기 사진기) & SAMSUNG SM-A102N(휴대용 전화기)
■ 양산 영축산 세계문화유산 영축총림 통도사(靈鷲叢林 通度寺)
■ 국제 불교기(Flag of Buddhism-국제佛敎旗)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파랑, 노랑, 빨강, 흰색, 주황색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오른쪽 열에는 5개색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줄무늬로 되어 있다. 색은 각각 의미가 담겨있다.
부처님 상호와 가르침 상징 흰 바탕에 태극을 두고 건(乾) 곤(坤) 감(坎) 이(離) 네 괘를 네 귀에 검은 색으로 표현한 것이 태극기다. 우리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國旗)다. 국기는 국가를 상징하며, 그 모양은 그 국가의 역사와 전통, 사상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불교도 불교를 상징하는 불교기(佛敎旗)가 있다. 모양은 청색, 황색, 적색, 백색, 주황색 등 5색을 가로와 세로로 배치했다. 가로 세로 비율은 3:2다. 의미는 부처님의 상호(相好)인 모발과 몸, 피, 치아, 가사의 색과 그 가르침을 상징한다. 청색은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불법을 구하는 정근을 상징한다. 부처님의 모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황색은 찬란한 부처님의 몸빛과 같이 변하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나타낸다. 건장한 몸매에 확고부동한 부처님의 태도가 금강에 비유되는 이치와 같다. 적색은 더운 피의 색깔로서 항상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정진에 힘쓸 것을 표현한 것이다. 백색은 깨끗한 마음으로 온갖 번뇌를 맑게 하는 청정을 뜻한다. 부처님 치아의 색을 상징한다. 주황색은 부처님의 성체를 두른 가사색으로 온갖 유혹과 굴욕 그리고 수치스러움을 참고 견디며 성내지 않는 인내를 상징한다. 가로로 그은 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며, 세로로 그은 선은 그 가르침이 영원히 변함없는 것을 뜻한다. 1950년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불교도우의회에서 회기(會期)로 제정됐으며, 이후 세계 각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66년 8월 11일 개최된 제13회 조계종 임시중앙종회에서 논의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후 8월 12일부터 ‘조계종기’로 공식 게양됐으며, 이후에는 각종 불교행사에서 종파를 초월해 게양하고 있으며, 불상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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