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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장 8-13절. ‘자유 유보의 문제’. 요약설교
8절.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이 구절은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식을 엄격히 명령하지 않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금식했다고 하나님이 더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금식을 안 했다고 하나님이 덜 알아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식이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금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가 적게 먹는다는 것 때문에 더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지 금식이란 우리가 좀 더 순수해지고 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 된다면, (금식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중세시대 사람들은 사순절 기간 동안에 고기를 먹으면 죽을죄를 짓는 것이라는 미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구절이 그런 미신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율법적인 두려움에서가 아니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경건함을 위해서 고기 먹는 것을 절제하고, 금식하는 것은 신앙 경건 생활에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여기서 ‘약한 자’는 우상 신이 실제로 있는 줄 알고, 또 우상의 제물도 우상 신에 의해서 더럽혀진 줄 아는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상 신은 없고,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도 그 자체는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다만, 우상 숭배와 제물 드리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죄악입니다.
4. 이처럼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문제가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들입니다.
(1) 우리가 음식 문제에 있어서 쉽게 부딪히는 술 먹는 문제나, 담배 피우는 문제, 또 무슨 보신탕이나 선지국이나 집에 선물로 가져온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등은 다 ‘양심의 자유’ 문제입니다.
예컨대, 담배를 먹지 말라는 것은 죄라기보다는 건강에 손상이 가고, 그리스도인로서 건덕상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금하는 것입니다.
(2) 또, 의복에 관해서도 소매 없는 옷을 입고, 배꼽티를 입고, 핫팬티를 입는 문제 등도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더운 계절에 건강과 미적 감각과 유행에 따라서, 젊은 아가씨들이 짧은 옷을 입는 것을 굳이 죄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예식 석상에서 건덕상 예복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3) 또, 술 회식 자리에 참여하는 문제나( 사이다를 마시지만), 직장에서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나이트클럽에 가는 문제나( 술도 안 마시고 춤도 안 출지라도), 성인이 기분 전환을 위해서 컴퓨터의 음란 싸이트에 들어가는 문제 등도, 다 ‘양심의 자유’ 문제입니다.
(4) 또, 주일날 예배드린 후에, 부모님 찾아뵙는 일이나, 친척이나 친구 만나는 일이나, 의약품 같은 생필품을 사는 문제나, 손님 접대하는 문제나, 가까운 친족 결혼식에 참여하는 문제나, 가족들끼리 가까운 곳에 나들이 가는 것 등도 ‘양심의 자유’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심지어 교회에서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 춤을 추는 문제, 결혼식이나 장례 예식을 하는 문제, 영화를 상영하는 문제,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문제, 갑작스러운 재해를 당해서 교회를 임시 구호소로 사용하는 문제, 주일날 교회의 전기가 다 나가서 촛불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초를 사는 문제 등 모두가 다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소위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이런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는, 도덕적인 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지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과거에는 교회당에서 악기도 사용 않고, 결혼식도 안 했고, 예배당 안에 이런 스크린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다 합니다.
6. 이런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점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과 사람에게 덕이 되는 것의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할례 문제나 우상의 제물 문제나, 유대인 사회 전도와 이방인 사회 전도에 관해서 말씀해주고 있듯이, 이것들은 모두 어떤 딱 잘라서 잣대처럼 기준을 정해줄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7. 우리는 성경에서 이처럼 중요한 사랑의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들의 분쟁 문제는 교리 문제가 아니라, 이런 양심의 자유 문제로 서로 사랑의 원리로 행치 않고, 교권으로 누르려고 하고, 또 다수 세력으로써 실력행사를 하는 데서 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율법과 정의를 앞세워 싸우지 마시고, 사랑의 원리에 따라서, 서로를 세워주고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십시오!
죄가 되지 않는 이상,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따라서 어떤 교인들을 서운하게 하지 말고, 예수님과 바울처럼 사랑의 법을 따라서 교회 일에 동참할 기회들을 주시기 바랍니다!
9절.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즉, 우상 제물을 용감하게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도 아니고, 못 먹는다고 해서 멸시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강한 신앙인의 우상 제물에 대한 자유 때문에, 약한 신앙인의 양심이 고민에 빠지게 되고 손상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2. 여기서 ‘약한 자’란 우상신이 실재한 줄 알고 우상의 제물도 우상신에 의해서 더럽혀진 줄 아는 신앙인을 가리킵니다(박윤선, 118-119쪽, NIV-SB).
3.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소위 ‘양심의 자유’의 문제입니다.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라고 합니다.
이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란 헬라어로 ‘무관심한 것’이란 뜻인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딱 법규로 하지 말라거나 하라고 명령된 것이 아닌 문제를 가리킵니다.
(1) 이웃집에서 선한 마음으로 제사 음식을 가져왔는데, 이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이 거리껴서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은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나 이웃에서 주는 음식은 먹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단지 대접하는 사람이 이것이 제사 음식이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귀신 숭배와 관련해서 말하면 신앙 수호를 위해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2) 아디아포라(adiaphora)란 용어는 헬라어 '아디아포론'의 복수형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 비본질적인 것들>이란 뜻입니다.
즉 성경에 옳다고 하지도 않고 금하지도 않아서 도덕적으로 중립에 해당하고 개인적 신앙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들을 가리킵니다.
이 문제는 종교개혁 당시에 루터가 중세교회가 교회 강단 색깔을 어떤 색깔로 꾸밀 것인지를 가지고 싸우는 문제를 ‘아디아포라’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말에 미국 장로교회가 분열되면서, 성경에서 완전한 금주를 명령했는가를 논할 때, ‘아디아포라’가 주장되었습니다.
과거 1960년대에 한국교회에서는 주일날 텔레비전 보는 것, 버스 타는 것, 음식을 사 먹는 것, 국가시험을 보는 것 등이 아디아포라의 문제로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허용적입니다.
그리고 개고기를 먹는 문제나 피 음식을 먹는 문제 등도 ‘아디아포라’ 문제로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개고기를 건강상의 이유로 먹는 것은 허용적이고(2024년에 개 식용 금지법이 제정되어서 2027년부터는 처벌됨), 피 음식은 개나 닭 등 짐승들도 안 먹는 것으로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안 먹는 것을 장려했습니다.
(3) 성경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아디아포라’의 문제는 ①로마서 14-15장에 나타난 음식 먹는 것과 절기 지키는 문제, 그리고 ②고린도전서 8-10장에 나오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입니다.
로마서 14-15장의 음식 문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롬 15:1).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롬 14:3).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는,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고전 10:25)
그러나 누가 이것은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하거든, 그 사람의 신앙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전 10:28)
(4)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 제사 드리는 문제에 대해서 ‘아디아포라’의 문제로 처신했습니다. (사도행전 21:15-26).
즉 자신은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것으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여겼으나, 예루살렘교회 유대주의 지도자들인 야고보 등이 권하므로 결례 제사를 시행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할례 문제도 원칙적으로 소용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디모데에게는 선교 여행의 편의상 할례를 시행해서, 할례 문제도 아디아포라 문제로 다루었습니다. (사도행전 16:3)
(5) 그러므로 ‘아디아포라’의 정신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강하고 자유한 성도가 약한 성도를 섬기고, 약한 성도는 강한 성도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돈을 가졌다고 가난한 이웃에게 상처가 되도록 사치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기쁘다고 슬픈 사람에게 상처가 되도록 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적으로도 지식을 가지고 자유 했다고 믿음이 약한 성도에게 상처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10절.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 고대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여신 신전에는 제사 지낸 사람들이 친지들과 함께 제물을 나누어 먹는 방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NIV-SB. p.1744)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유식한 신자들은 이교도의 초청을 받아 이러한 우상 신전에서 음식을 같이 먹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식한 신자들은 우상 신은 헛것이고, 제물 자체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청결한 음식이기 때문에 우상 신전에서라도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지식이 부족한 신자들은 그 제물이 우상 신에게 바쳐진 더러운 음식으로 알면서도 마음에 담력을 얻어서 그 제물을 먹으므로 그 신앙 양심이 더러워지고, 죄를 지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따라서 믿음이 장성한 사람이 믿음 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5장에는,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 중직자들은 바울의 모범을 본받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23.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5.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분이었지만, 약한 사람들에게 야단치면서 자기처럼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약한 사람처럼 되고, 약한 사람들과 같이 되어서, 믿음 약한 성도들이 자신에게 감동 감화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낮은 데로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높이 있어서, 낮은 사람들을 자꾸 무시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바울의 정신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정죄하면서 사회에서 제거하려고 했고, 병자들을 부정하다고 격리시키려고만 했고, 먹고 살길이 없는 세리들에게는 그 자식들조차도 상대를 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면서도, 죄인들을 가까이하시고 친구가 되어주셨으며, 병자들을 더럽다고 저리 가라고 쫓아버리신 것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시며 가까이 가셔서 만져주시고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과 저주받았다고 여겼던 이방인조차도 너그러운 사랑으로 친절을 베푸시고 크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섬김과 사랑의 정신입니다.
교회의 중직자가 될수록 이런 ‘그리스도의 정신’이 충만해야 합니다.
6. 우리 교단 헌법에 보면, 주일이라도 사세 부득이한 일은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하나님이 낫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또, 갑자기 식중독이 발생했으면, 주일이라도 얼른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어야 합니다.
주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바란다거나, 그런 자세가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릇된 신앙입니다.
특히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신앙이 좋으신 분들이 신앙 약한 분들을 위해서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양심에 꺼려서 우상의 제물을 안 먹는 성도가 있는데, 신앙이 좋다고 함부로 먹으면, 형제의 신앙 양심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특히 우상의 문제는 계명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의 신앙 양심에 손상을 가져다주므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죄가 됩니다.
11절.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였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 여기서 <약하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소자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소자 하나를 넘어지게 하는 모든 자들에게 무서운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6)
그러므로 지식이 있고 담대한 양심을 가진 성도는 양심이 여린 성도를 배려하고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 유식한 신자의 자유로운 행동이 고의는 아니나 결과적으로 무식한 신자의 신앙적 파멸을 초래했다면, 이러한 행동은 그 연약한 신자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께 대한 범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가르쳐주는 좋은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31 이하에서, 주님은 마지막 심판 때에, 이웃에게 선악을 행한 것이 곧 주님께 선악을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3절.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1. 만일 유식한 바울이 우상 제물을 먹음으로써 약한 신자의 신앙 양심이 손상을 당한다면, 바울은 차라리 우상 제물을 영원히 먹지 않음으로써 (즉, 자유를 유보함으로써), 약한 신자의 신앙 양심이 손상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참된 지식으로 말미암은 믿음과 자유를 가진 표본적인 사도였으나, ‘십자가의 정신’에 따라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을 더욱 이상적인 신앙인의 자세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고, 바울 사도의 정신을 본받아서, 믿음이 굳건한 중직자들께서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용납하고, 양보하고, 존중해주는 아름다운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