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복하시네요?
아시다시피 나는 애가 넷이다. 초등학교 5 학년인 장남으로부터 오늘로 꼭 6 개월 된 막내딸까지...... 그 중간에 2 학년인 둘째 아들과 유치원에 다니는 큰딸이 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보면 아들, 아들, 딸, 딸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 가족이 다 함께 밖에 나갔을 때 자주 듣는 인사가 “참, 다복하시네요”라는 말이다. 다복(多福)의 ‘복’자가 자녀 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말이 맞다. 적어도 요즘의 상황에서는 우리 집의 아이 수는 다른 집의 4 배, 적어도 2 배 정도는 되니까. 그러나 혹시 그 말이 ‘복도 많으시네요’라는 뜻이라면, 안타깝게도 꼭 동의할 수만은 없다.
어제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요즘 내가 몸이 좀 안 좋아 오전 강의만 마치고 1시쯤 귀가하였다. 그랬더니 방학을 맞은 큰놈, 작은 놈까지 좁은 집에서 바글대고 있는데 ‘괜히 집에 왔다’ 싶은 생각이 바로 들었다. 아들놈들은 컴퓨터를 하면서 떠들어대고 있고, 선형이는 또 오빠들에게 맞았는지 거실 구석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으며, 막내는 자다가 막 깼는지 방에서 ‘응애 응애’ 울어 제끼고 있다. 휴식은커녕 오히려 병이 도질 지경이다.
큰놈은 현관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당장,
“와, 아빠 일찍 오셨다. 농구공 사주시기로 하셨죠? 얼른 롯데마트에 가요. 얼른요. 가요. 얼른요. 가요. 얼른요.......” 하며 쉴 새 없이 졸라댔다.
언제 그런 약속을 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너무 피곤해서 바로 나갈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은 또 미루고 보자는 생각으로,
“지금 아빠가 너무 피곤하다. 좀 쉬고 생각해보자.” 했다. 그랬더니,
“얼마나 쉬실 건데요? 그럼 20분만 쉬세요. 그리고 저랑 같이 롯데마트에 가요. 그럼 빨리 쉬세요.” 하고 재촉을 한다.
빨리 쉬어라? 어떻게 쉬는 것이 빨리 쉬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마음만 공연히 급해져서 긴장만 더 된다. 그런 중에 또 아내는,
“빨리 오셨네. 마침 잘 됐네요. 마트 갈 일이 있는데 아이들 때문에 못 가고 있었는데.... 다녀올 동안 선린이 좀 보고 계세요.” 하면서 막내를 안긴다. 허리가 아파 쩔쩔 매는 사람에게 아기를 맡기다니...... 그러나, 그것도 혼자 생각일 뿐 결국은 아기를 받아서 “깍꿍, 깍꿍” 어르다가, 아기 표정이 안 좋아지면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구리구리 가위바위보” 하며 혼자 갖은 쇼를 다 한다.
한참 후에 아내가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는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자면서도 주기적으로 아이들의 싸우는 소리, 번갈아 가며 울어대는 소리, 아내의 고함소리를 고스란히 듣는다. 그러다가 5 시쯤 깼다. 그래도 조금 쉬고 나니 농구공을 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 내의 운동구점이 좀 쌀 것 같아 그곳에 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학교 들어간 김에 밀린 일도 조금 처리하려고 생각했다.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바로 선우가 달려와,
“아빠, 이제 일어나셨어요? 왜 이렇게 오래 주무셨어요? 얼른 농구공 사러가요. 롯데마트로 가요. 얼른 옷 입으세요. 얼른 가요. 얼른 옷 입으세요. 얼른 가요....” 하고 또 재촉한다.
“아빠가 농구공을 사주긴 하는데 롯데마트가 아니라 아빠 학교에 가서 사 올거야. 거기는 대학생들이 쓰는 공이기 때문에 더 좋아. 아빠가 혼자 얼른 학교 가서 사올게.”
“아니에요. 저도 같이 가요. 내가 봐둔 공이 있단 말이에요. 같이 가요. 저도 가요. 같이 가요. 저도 가요.....”
그래서 결국은 큰아들을 데리고 가게 되었다. 학교 간 김에 처리하려던 일은 또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큰아들이 간다고 하니 작은 아들도 따라가겠다고 한다. 오빠들이 다 간다고 하니 큰딸도 벌써 옷을 챙겨 입고 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아내까지도,
“여보, 학교 가신다고요? 학교에 현금인출기 있지요? 마침 잘 됐네. 돈을 좀 찾아야하는데 같이 갑시다.”
결국 농구공 하나 사는데 온가족이 총 출동하였다. 차를 타고 가는데도 “내가 앞에 탈거야.”, “어, 너 뒤로 안 가.”, “아냐, 내가 먼저 앉았잖아.”, “에이씨, 너 정말 두고 봐.”, “아빠, 오빠가 때렸어. 엉엉.”, “너희들, 정말 또 싸울 거야. 여보. 여기 차 세워요. 애들 다 내리라고 해” ....... 늘 그렇듯이 차 속은 완전히 아수라장 판이다. 나는 단련이 돼서 그 정도로는 운전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한 손으로 운전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뒤돌아보며 아이들 꿀밤을 한 대씩 먹일 수 있는 수준이다.
학교 운동구점에 가니 주인 아주머니가 웃으시면서 “와, 모두 교수님 자제분이세요? 정말 다복하시네.” 한다. 웃으며 인사말을 하는 사람에게 ‘혹시 다복의 '복'자가 아이 수를 의미한다면 동의하지만, 만약 복이 많다는 뜻이라면 동의할 수만은 없다’며 길게 따지고 들 수는 없어서 그냥 “네” 하고 웃고 만다. 그리고 “농구공 하나 주세요” 하니, 옆에서 큰놈이 “검은 색으로 주세요.” 하고 덧붙이고, 작은 놈은 “아니, 빨간 색으로 주세요.” 하며 또 다른 소리를 한다. 그러더니 둘이 한참을 ‘검은 공!’, ‘빨간 공!’, ‘검은 공!’, ‘빨간 공!’ 하며 싸워대고 주인 아줌마는 누구 말을 들어야할지 몰라 엉거주춤 기다리고 있다. 결국 내가 “저번에 축구공은 선빈이 말대로 했으니까, 이번 농구공은 형 말대로 해라. 아주머니 검은 공으로 주세요” 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선빈이는 쉽게 수용하지 않고 “검은 공은 밤에 안 보이는데...... 이름도 쓸 수 없는데.....” 하며 계속 구시렁대고 있다. 어쨌거나 검은 공을 샀다.
공을 사자마자 큰놈은 실내고 실외고 구분 없이 바로 공을 튀겨댄다. 작은 놈은 “형, 나도 한번만 해보자. 아빠, 형이 혼자 해요. 형, 한번만 하자. 아빠, 혼내주세요. 형, 나도 한번 하자. 아빠, 형, 아빠, 형, 아빠.....” 하며 징징댄다. 잠시 후에는 또 큰딸이 “아빠, 오빠들이 나는 못 하게 해요. 나도 공 사 주세요. 아빠, 나도 사 주세요. 엉엉, 아빠, 아빠. 사 주세요. 엉엉...” 결국 선형이는 훌라후프를 사주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아내는 또 “너희들 조용히 안 해? 시끄러워서 못 살겠네. 여보, 아기 좀 안으세요. 힘들어 죽겠네. 현금인출기 어디 있어요? 내가 얼른 가서 돈 찾아올게요.”
아이고, 괴로워라. 그 날 잠들기 전까지 아이들이 몇 번 더 싸우고, 몇 번 더 울고, 아내와 내가 막내를 서로 몇 번씩 떠 넘겼는지는 셀 수가 없다. 잠시도 귀가 편했던 순간은 없었으며, 내 느낌으로는 내가 줄곧 아기를 안고 있었다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제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일상사일 뿐이다.
애가 많아서 다복하겠다고? 그래, 하루 몇 번은 아이들의 웃기는 짓들과 막내의 활짝 핀 미소 때문에 나도 웃긴 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쉴 새 없이 졸라대는 소리와 싸우고 울어대는 소리까지 감미롭게 들리는 것은 전혀 아니며, 아기를 안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서 팔 아픈 줄도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다복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그저 오늘 하루 가족 모두 별 탈 없이 넘긴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 여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2002. 7.24.)
(경남대 김원중)
첫댓글 아직도 그렇습니당~
하하하 귀여운 막내따님~~~~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