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착각
〈원문〉
부루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만약에 이 미묘한 깨달음의 본래 묘하고 밝음이 여래의 마음과 똑같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데 까닭 없이, 홀연히 산하대지의 모든 유위(有爲)의 모습이 생겼다면 여래는 지금 미묘하고 공한 밝은 깨달음(妙空明覺)을 얻었사오니 산하대지 유위의 습루(習漏)가 언제 다시 생기게 됩니까?”
부처님이 부루나에게 말했다.
“어떤 마을에 사는 사람이 방향을 착각하여 남쪽을 북쪽이라 한다면 이 착각이 착각을 인하여 있는 것인가. 착각하지 않음을 인하여 있는 것인가?”
부루나가 말했다.
“이 착각한 사람은 착각을 원인으로 한 것도 아니고 착각하지 않음을 원인으로 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착각은 근원이 없습니다. 어떻게 착각을 원인으로 했다 하며, 착각하지 않으면 착각이 생기지 않거늘 어떻게 착각하지 않음을 원인으로 했다 하겠습니까?”
부처님은 다시 부루나에게 착각은 근본이 없다고 말씀해 주셨다.
〈강해〉
깨달음(悟)과 미혹(迷)의 관계를 두고 말할 때 중생이 본래 부처였다면 왜 중생으로 전락되었느냐는 문제와 부처도 그러면 중생이 될 때가 오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청정본연(淸淨本然)한 데서 산하대지 유위상(有爲相)이 생기게 되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부루나가 생각해 보니 깨달음의 세계가 미혹의 세계로 바꿔진 것이 산하대지 유위상이다. 그렇다면 부처님도 다시 유루습기(有漏習氣)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 물었다. 깨달은 부처님이 다시 미혹한 중생이 되는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원각경〉 ‘금강장보살장’에도 비슷한 질문이 나온다. 여기에 대한 답을 비유로 설명해 주고 있다. 어떤 마을에 사는 사람이 동서남북의 방향을 착각하여 남쪽을 북쪽인 줄 알았다. 이것이 미혹(迷惑)이다. 길 잃은 아이를 미아(迷兒)라고 하듯이 원래 미(迷)란 길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중생이 생사의 윤회를 거듭하는 것도 고향을 잃고 헤매는 미아의 신세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동네에 살던 사람이 어째서 남쪽을 북쪽이라 여겼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느닷없는 착각일 뿐이다. 미(迷)의 원인이 없다는 것을 말해 놓고 있다. 물론 정방(正方)이 있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지만 착각 그 자체는 홀연히 잘못 생각한 착각일 뿐 착각할 원인이 본래 있어 이것을 인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착각하지 않은 상태가 착각의 원인을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착각의 근본이 없다는 것이다. 본래 미(迷)한 것은 없는 것인데 미혹하지 않았던 사람이 홀연히 미혹해졌을 뿐이다. 여기서 방향을 바로 아는 것은 오(悟)고 방향을 착각한 것은 미(迷)인데 미(迷)가 미(迷)에서 생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오(悟)에서 생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이 대목의 결론이다. 또 착각하여 남쪽을 북쪽이라 생각했을 때 그렇다고 남쪽이 북쪽이 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비록 착각했지만 착각(迷) 자체가 공(空)한 것이다. 착각(迷)하고 있다가 누군가 정방(正方)을 바로 일러주어 착각을 벗어나면 이미 미(迷)가 아닌 오(悟)인 것이다.
정각을 이룬 부처님이 더 이상 미혹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몇 가지 비유를 들어 설한 대목이 있다. 그 하나는 나무가 타서 숯이나 재가 되면 그 숯이나 재가 다시 타지 않은 나무로 돌아갈 수가 없고 또 광석에서 추출된 순금이 순금이 된 후에는 광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였다. 경문에서는 또 “미(迷)을 깨달아 미(迷) 없어지면 각(覺)에서는 미(迷)가 생기지 않는다(覺迷迷滅 覺不生迷)”고 하였다. 비록 중생의 번뇌가 미혹이기는 하지만 중생 자체는 번뇌가 있건 없건 각(覺)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다. 다만 수행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수행의 지위가 구분되어 지위점차(地位漸次)가 있는 것이지만 보리 그 자체에서는 지위점차도 없는 것이다. 본래의 깨달음은 본각(本覺)이고 수행을 통해 얻는 깨달음의 접근성을 구분하여 시각(始覺)이라 하며 이 시각에 범부각(凡夫覺)이 있고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구경각(究竟覺)이 있다고 구분해 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