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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포교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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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스크랩 분황사 우물(호국삼룡변어정)이 갖는 의미
法藏 (카페지기) 추천 0 조회 61 13.11.04 11: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분황사 우물(호국룡삼변어정護國三龍變漁井)이 갖는 의미

 

 

 

분황사 우물과 모전삼층석탑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자장대사는 643년에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여 분황사에 머물면서 수행 정진을 하였으며 원효대사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

분황사 창건 당시의 가람배치는 탑을 앞에 두고 법당이 '품(品)'자 모양으로 지어졌는데 신라시대의 1탑 3금당 양식은 이 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경덕왕 14년(755), 3개의 금당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본피부(本彼部)에 사는 강고내말(强古乃末)이  무게 30만 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으나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이 약사여래불은 없어지고 현재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약사여래불상은 1609년에 구리 5,360근으로 조성되었다.

 

신라 최초로 만들어진 분황사 모전석탑은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만들어 쌓았는데 원래 9층이었지만 지금은 3층만이 남아 있고 이 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분황사에는 신라시대의 우물 중 가장 아름다운 8각형의 석정(돌로 만든 우물)이 있다

'호국삼룡변어정(護國三龍變漁井)'으로도 불리는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오는데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황제의 비밀 지령을 받은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들어와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킨 후대나무통에 숨겨 잡아가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들이 용을 잡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북천의 물이 불어나 왕이 되지 못했던 김주원 후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나라 사신들이 용을 잡아 떠난 그날 밤, 원성왕의 꿈에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우리는 청지와 동지에 사는 용의 부인인데 당나라 사신들이 우리 남편을 잡아가고 있으니 다시 데려다 주소서"라고 아뢰었다

이에 원성왕은 군사를 풀어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을 붙잡아 용을 데려오고 이들을 도와준 김주원의 후손 일당을 처형하였다.  다시 우물에 돌아 온 용은 신라를 지키는 호국용으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물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된다. 고대인들에게 우물은 식수를 공급하는 인공적인 시설임과 동시에 신성한 성지(聖池)로서도 인식되었다. 물이 가진 정화의 능력은 세속의 더러움을 씻어내 재앙이나 잡귀를 물리치고 세속의 공간을 신성한 공간으로 바꾼다는 믿음의 장소인 것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신화에 등장하는 나정(蘿井)이나, 오릉에 있는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부인의 탄생지인 알영정(閼英井)은 탄생을 상징하는 신성한 장소들이다.

 

 

경주에는 분황사 우물을 비롯하여 김유신장군의 생가에 있는 재매정, 남간사지 내 우물 등, 아직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우물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분황사 석정(삼룡번어정)은 돌우물로서 분황사모전석탑과 보광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땅 위에는 평면 팔각형의 우물틀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평면 원형의 석축 우물이 남아있다. 1개의 큰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우물틀은 매우 독특한 형식이다.

 

 

분황사 우물

 

 

 

 

분황사 우물의 크기

 

 

분황사 석정은 옆에서 보면 가구식 기단의 형식과 비슷하게 지대석, 면석, 갑석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면석이나 갑석에는 치장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갑석 형태의 윗면 북쪽 일부에 거친 정으로 따 낸 후 다듬은 흔적이 보이는데 왜 깎아내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땅 속의 우물 석축은 약 20cm정도의 냇돌을 사용하여 허튼층쌓기방식으로 쌓아올렸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올린 방식이다

 

그런데 분황사 우물이 보여주는 특이한 점은 우물의 바깥면은 팔각형, 안쪽면은 원형으로 만들어졌으며, 우물 안쪽에는 긴 장대석으로 사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미적 요소를 위해 구성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기본사상을 바탕에 두고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우물 안 내부에 있는 사각형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체(四聖締)를 말한다

사성제는 '네가지의 높은 깨우침'이라는 뜻으로,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성체'자를 붙여서 고성체, 집성체, 멸성체, 도성체라고 하기도 한다

 

석가모니가 깨달아 가르친 네가지의 진리, 사성체(四聖締)

1.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과 (고-苦)

2. 그 괴로움의 원인과 (집-集)

3.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과 (멸-滅)

4. 열반에 이르는 길 (도-道)이다.

사성제를(四聖締)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도 하는데 고집멸(苦集滅)이 과정을 말한 것이라면 도(道)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육바라밀과 팔정을 언급한다

육마라밀은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반야(般若)로서

                베풀고, 참고, 지키고, 노력하고, 일관성을 가지고,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우물 바깥면의 팔각형은 팔정(八正)를 의미한다. 팔정은 바르게 해야할 8가지로서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③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⑥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즉  올바르게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유지하고, 노력하고, 기억하고, 안정함으로서 인간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물 안쪽면의 원은 '원융(圓融)의 진리(眞理)'를  뜻한다

마음도, 만물도, 우주도 모두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원이 되는 우주의 진리가 부처님이 깨친 진리인 것이다.

즉  '나'라고 하는 것이 따로 우뚝한 것이 아니고 모든 '나' 속에 저 모든 '나'가 깊이 관계하고 있는 상즉상립(相卽相立)의 원융화엄(圓融華嚴)의 세계라는 것이다.

 

분황사 우물의 구조 원리

 

따라서 이 분황사 우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고통의 근원인 세상적 욕망의 끈을 끊어야 하며 그 길은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의 훈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불교의 중심 사상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우물의 내부

안전을 위하여 철망을 쳐 놓았고 철망 아래로 장대석으로 만든 사각형의 모양이 보인다

 

현재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하여 우물 내부에 철망을 설치하여 놓았지만 고인 물은 아직까지 식수로 가능하다고 한다
 

 

분황사 우물에서 발견된 목 없는 불상 14점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뒷편에 전시되어 있는 분황사 우물속의 불상들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뒷편에는 목이 잘려나간 여러 기의 불상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1967년 분황사 우물 속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를 두고 위에 소개한 변룡삼어정 우물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글들이 많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불상이 발견된 우물은 이 우물이 아니고 현재 분황사의 북쪽 담장 너머에 있는 또다른 우물이다.

 

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가 분황사 주변을 발굴조사 결과, 당시의 분황사는 현재의 사역보다 몇 배나 더 큰 규모였으며  20여기에  가까운 크고 작은 우물들이 발견되었다.

 

 

 

불상이 출토된 우물(추정)-분황사 북쪽 담장 뒤

 

 

현재 분황사 북쪽 담장 뒤쪽 밭에도 큰 건물지가 있음이 조사되었고 건물지와 3 m의 거리를 두고 지표면 약 50cm아래에서 대형 석축우물이 노출되었다. 이 우물이 1967년 목잘린 석불 14기를 수습한 바로 그 우물로 추정된다고 문화재연구소가 밝힌 바 있다.

발견 당시 우물 안에서는 목잘린 불상 13구, 보살입상 1구, 불두 5구, 광배 1점이 출토되었다.

이 우물은 할석과 냇돌을 혼용하여 쌓아올렸는데 우물의 직경은 약 1,9m 크기이다

 

 

색깔이 연하게 칠해진 부분이 창건 당시 분황사의 사역이다

 

 

누가 왜 불상들의 목을 잘라 우물 속에 빠뜨렸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숭유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유생들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과  몽고인이나 왜인(옛날의 일본인)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이 있기도 하나 명확하게 알수 없으며 이에 대한 의혹에 대해 문화재청에서는 아래와 같이 답변하고 있다

 

우리나라 불상 중 불두가 없는 경우는
    1) 자연적인 재해로 목 부분이 약한 부분이어서 대부분 불두가 없어진 경우이다. 
    2) 인위적인 재해로 사찰이 폐사된 경우로 땅에 묻어 버린 경우인데, 예를 들면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 중 분황사에서 출토된 불두 없는 불상입니다. 분황사 정비 중 우물 속에서 나온 목없는

        불상들은 몽고나 왜인 침입 등의 의해서 우물 속에 넣고 매몰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에서 발견된 신라 우물

 

박물관 부지에서 발견된 신라 우물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을 신축하기 위하여 사전 발굴조사 중 2개의 신라 우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줄 한곳의 우물 안에서는 수백 여점의 토기와 기와, 목제류 등과 함께 어린아이의 뼈 한 구가 발굴된 일이 있었다. 그 아이가 실수로 우물에 빠진 것인지, 제사를 위한 제물로 바쳐진 것인지 그 누구도 그때의 정황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다만 우물, 그 소소한 역사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천 년 전 그들과의 따뜻한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자료 : 우물에 빠진 신라 동물들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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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의 생가터에 있는 재매정

 

 

나정 옆 남간사지에 있는 신라 우물

(뚜껑은 근간에 복원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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