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 / 이훈(2003)
뛰어난 영화 살인의 추억을 감독한 봉준호의, '반말의 날'을 만들자는 그럴듯한 제안이 마음에 들어 옮긴다. 예술 창작에서 자유는 필수적인 요구 사항이다. 이 자유는 상식이나 관습을 거부하는 태도도 마땅히 포함해야 한다. 형식적인 존대는 싫다는 감독의 말을 듣고 좋은 영화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렸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반가움도 컸다는 점도 적어 두어야겠다.
형식적인 존대는 싫어요 / 봉준호
나의 두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이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에 초청돼 스페인에 와 있다. 경쟁부문으로 초청된 영화제에선 늘 기자회견 같은 것을 하게 마련이다. 파란 눈의 서양기자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영화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과 그 당시 한국 사회의 맥락 같은 것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사실 해외에서의 인터뷰나 기자회견은 국내에서보다 두 배의 시간이 소모된다. 질문이건 대답이건 통역자에 의해 한번씩 더 반복되는 셈이니 당연한 일이다.
다소 지루한 회견이 계속되던 중, 문득 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어차피 여기엔 전부 스페인과 유럽 기자들뿐이고,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통역자 외엔 아무도 없다는 것. 나는 슬그머니 … 반말을 쓰기 시작한다. "그게 말야, 그 당시 한국 상황이 실제로 그랬거든" "라스트 신은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느낌이 중요했어…." 공식석상에서 반말을 사용하니 묘한 스릴과 짜릿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반말 중에도 나의 억양이나 얼굴 표정은 진지하기 때문에 외국기자들은 변함없이 심각한 눈빛으로 내 말에 집중한다. 오로지 통역을 해주시는 한국분만 슬며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쓸 뿐.
그런데 묘하게도, 반말을 함으로써 내가 그 외국인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묘한 친근감, 나 자신이 솔직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말의 내용에 있어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자세하고 진지하게 설명하려 애쓰고 있는데, 반말이면 어떻고 존댓말이면 어떤가. 게다가 저들은 어차피 우리처럼 세밀하고 강고한 존댓말 구조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나 또한 이렇게 반말을 쓰는 것이 서로 공평(?)한 것이 아닌가도 싶고.
사실 우리의 경우 술자리 같은 곳에서 보면 (특히 남자들은)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는 몇인지, 학번은 어떤지 등등을 꼬치꼬치 따져보며 서로 말을 놓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때때로 그런 쪽에 집요한 사람들이 "학교에 일찍 가서 학번은 하나 위지만, 생일은 두 달밖에 차이가 안나니까 서로 말을 놓죠"라는 둥, "양력이 아니라 음력 생일로 치면 사실은 내가 한 살 윈데" 라는 둥…. 구차한 수준까지 파고들며 술자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렇듯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서로의 수직적 관계부터 정확히 규정하려 애쓴다. 우리말의 정교하고 강력한 존댓말 시스템이 더더욱 이를 부추긴다. 그런 숨막히는 시스템에 대한 반대급부로 '야자타임' '거꾸로 타임' 같은 다소 유치한 놀이를 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속좁고 성질 더러운 고참의 심기를 건드려 어이없는 구타와 단체기합으로 상황이 종결되기도 한다.
누구나 느끼지만, 사람이 쓰는 말은 사람의 행동과 사고를 규정한다. 우리는 우리말의 특성에 힘입어 사람관계를 어떻게든 상하관계. 수직관계로 몰고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공식석상의 언어가 사적 세계의 언어와 너무나 달라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우리말 특유의 섬세한 존댓말 표현들은 언어 그 자체로 무척이나 흥미롭고 아름다운 표현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한편 반말의 시원함과 솔직한 뉘앙스 또한 똑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딱딱한 공식석상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연설자의 반말이 유독 장쾌하고 시원하게 느껴진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만우절 하루에는 온갖 거짓말도 애교로 용인되듯이, '반말의 날' 같은 것이 일년에 하루라도 있어서 그날만큼은 공식석상이건 방송에서건 누구나 반말을 써도 된다면 매우 즐겁겠다는 공상을 해본다. "안녕. 아홉시 뉴스 엄기영이야. 오늘 임시국회 소식부터 말해줄게…." 상상만 해도 신선하지 않은가?
중앙일보, 2003. 09. 24.
나도 평소에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 반말(우리말 경어법 체계에서의 '반말'이 아니라 높이고 낮춤이 없는 말이란 뜻으로 쓴다. 아래 덧붙인 글 읽어 보세요.)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농담 비슷하게 경어법을 없애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받아들여질 만하다고 판단하면 실행해 보기도 한다. 사실, 사람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나이만을 기준으로 하여 말을 높이고 낮추는 것은 좀 우스운 데가 없지 않다. 그런데도 시비 끝에 그 주제가 완전히 바뀌어 나이를 따지는 희극이 벌어지는 일을 흔히 본다.
중학교 3학년인 딸은 부모에게 반말을 한다(참고로, 2019년 현재는 결혼해서 따로 사는데 말버릇은 여전하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으니 우리는 존댓말을 거의 들어 보지 못한 셈이다. 처음에는 고치려고, 반말하면 못 듣는 척도 하고 설득도 해 봤지만 꾸준히 행하지도 못하거니와 부부 사이에도 그렇게 쓰기도 하니 성공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아이가 좀 커서는, 말을 높이면 부모가 아닌 것 같아서 어색하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넘어갈 수밖에. 그래도 욕할 일이 있으면 어린것이 어른에게 반말한다고 해 보지만 감정을 앞세워서 윽박지르는 일일 뿐이어서 스스로도 민망해지고 만다. 딸에게는 아버지가 한심하고 웃기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요컨대, 나이가 어리다는 것 때문에 괜히 기죽지 말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랐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 부모에게 하는 반말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크게 화를 내더라도 딸아이가 끝까지 반말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된다. 물론 나도 잘 참아야 할 것이다. 감정을 추스를 수 없게 되면 자식과 부모 사이라는 점을 환기시켜 아이를 내리누르려는 못된 버릇이 나도 모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면 스스로가 위태위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딸의 반말은 내 민주적인 삶의 태도를 시험하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셈이기도 한 것이다. 나도 뭘 배우는 것이다.
부디, 딸의 반말이 나와 딸을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펴고 힘이 더 센 것들에게 의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제발 그럼으로써 어설픈 내 반말론(?)이 자식 잘못 키운 것을 합리화하는 핑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임)
내가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경어법 체계를 없앴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영어처럼 해 보자는 말이다. 높임말이 없으면 낮춤말도 그 대립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차원의 반말이 일상화된다면 사람들의 관계가 훨씬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게 될 것이다. 나는 합리적인 개인 주체의 형성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경어법 체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서 반말은 그 환경에 따라서 정겹거나 상대방을 무시하게 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일부러 반말을 하기도 하는데 아마 기분이 나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봉준호 감독의 제안처럼 날을 정해 반말하는 것을 연습 삼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