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감상의 시간, 존재향유의 시간
‘단풍’의 ‘단’(丹)은 ‘붉을 단’이지만, ‘단풍’의 ‘풍’(楓)은 ‘단풍 풍’이다. 이에 따르면, 붉게 변한 잎도 단풍이지만, 그 외에 단풍이라고 불리는 잎들은 모두 단풍이다.
사전에선 단풍을 “늦가을에 식물의 잎이 적색, 황색,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영어로는 ‘틴티드 오텀널 리이브즈’(tinted autumnal leaves)라고 하는데, ‘물든 가을의 잎들’이라는 뜻이다. 어떤 색으로 물이 드는가에 따라 붉은 단풍, 노란 단풍, 갈색 단풍이 된다.
‘단풍’의 ‘풍’(楓)이 ‘단풍 풍’이라는 것은 결국 ‘단풍의 뜻은 단풍이다’라는 말이 되니, 왠지 어색하다. 이유나 근거를 찾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저런 말은 답답한 말이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유나 근거 없이 성립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일에 이유가 있는가? 내가 늙어가는 일에 이유가 있는가? 내가 죽는 일에 이유가 있는가? 과학이 알려주는 이러저러한 이유들은 모두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립된 것들로 ‘나의 존재에 대해 의미 있는 이유들’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더러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대한 과학적 물음 없이 단지 존재를 향유하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다. 그러한 존재의 향유를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라는 시인은 장미에게서 보고 있다.
“장미는 왜[라는 물음]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weil) 피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람이 자신을 보는지의 여부도 묻지 않는다.”(안겔루스 질레지우스)(마틴 하이데거, <근거율>, 네스케 출판사, 1971, 77쪽)
“Die Rose ist ohn warum; sie blühet, weil sie blühet,
Sie acht nicht ihrer selbst, fragt nicht, ob man sie sieht.”(Angelus Silesius)
(M. Heidegger, , Neske, 1971, S. 77.)
‘장미는 피기 때문에(weil) 핀다’고 했으므로, 장미에게 “때문”이라는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미는 그것을 묻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도 묻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잘나고 못난 점을 찾아 그것을 번민의 이유로 삼지도 않는다. 장미는 단지 자신의 존재를 향유할 뿐이다.
그런데 ‘장미는 피기 때문에(weil) 핀다’는 말은 ‘장미는 피는 동안에(weil) 핀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봐일(weil)이라는 단어는 “때문에”만이 아니라 “동안에”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미는 피는 동안에 핀다’는 말로 다시금 ‘장미는 필 때가 되면 핀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동안”은 “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이리 보면 ‘필 때 피고, 질 때 지고, 지는 것을 준비할 때 지는 것을 준비한다’는 것이 장미가 존재를 향유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사람은 장미가 아니라서, 항상 왜라는 물음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왜라는 물음이 없다면 사람은 더이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도 한동안 왜라는 물음 없이 머물 때가 있는데, 그런 때를 감상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동양철학에서는 이를 ‘물아일치’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단풍을 감상하는 시간도 그런 시간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사람이기를 중지하고, 자연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공원에 들려 단풍들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직찍(=직접 찍은) 사진들은 감상할만한 것이 못되어, 남의 사진들도 빌려와 함께 올렸다. 어떤 사진이 빌려온 사진인지, 맞추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사진이 옆으로 눕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는데, 누운 사진은 마음의 눈으로 보셔야 할 것 같다.)
1. 느티나무 단풍
2. 대왕참나무 단풍
3. 라일락 단풍
4. 메테세콰이어 단풍
5. 산딸나무 단풍
6. 산수유 단풍
7. 영산홍 단풍
8. 왕벚나무 단풍
9. 흰말채나무 단풍
10. 공작 단풍
11. 화살나무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