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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크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r d’Avignon)](1907년, 뉴욕 현대 미술관)을 처음 보았을 때 매우 당황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 작품에 대한 당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마치 당신이 우리에게 삼 부스러기를 먹이거나 휘발유를 들여마시게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두 화가는 곧 가까워졌으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서로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아 마침내 입체파가 출현하였다. 그들은 입체파을 창시하고 이를 발전시켰으며, 뒷날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두 사람 중 누가 이 혁신적인 새 양식의 주요한 창안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 하면 그들은 한창 공동 작업을 할 때 거의 매일 생각을 나누었으며 실제로 구별하기 힘들 만큼 비슷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
이 시기에 젊은 화상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가 브라크의 작품을 모아 전시했다. 칸바일러는 브라크에게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소개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브라크와 피카소는 늘 함께 작업했고 의견을 나누면서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2차원의 평면 위에서 3차원의 오브제를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구도를 파기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들이 이 시기에 제작한 입체파 작품들은 미술사의 전체 지형도를 바꿔놓았고, 오늘날까지 미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1908년부터 1911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 동안 브라크는 초창기의 생생한 색채를 포기하고 형태와 입체감, 선에 대한 엄정한 연구에 집중했다. 이 시기의 브라크와 피카소의 공동 작업은 너무도 긴밀해서 각자의 작품 구별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뒤이은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불리는 1912년부터 1914년 동안에 브라크는 신문 조각이나 모래, 톱밥 등 일반적으로 회화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재료를 도입하여 콜라주 기법으로 캔버스에 부착하여 제작한 아상블라주와 종이를 이용한 콜라주인 파피에 콜레, 눈속임기법인 트롱프뢰유, 두껍게 칠하기와 같은 새로운 기법을 선보임으로써 한결 탁월한 독창성을 발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브라크는 전쟁터로 나갔다. 1915년 부상으로 전역한 브라크는 전쟁 중에 입은 머리 부상으로 1년 동안 요양을 한 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파리에 남아 있었던 피카소는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이제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브라크는 정물화라는 주제에 매달리며 꾸준히 입체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보다 세련된 경지로 입체주의를 밀고 나갔다. 특히 만년에 이를수록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이성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중시하는 프랑스적인 전통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브라크는 1920년대 들면서 신고전주의적이고 기념비적인 여인의 형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르게이 디아킬레프(Sergey Pavlovich Diaghilev)의 ‘발레 뤼스’의 무대장치를 디자인하기도 했고, 조각이나 스테인드글라스, 보석공예,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활동을 지속했다. 후기에는 ‘작업실’ 연작, ‘당구대’ 연작, 그리고 ‘새’의 이미지를 도입한 캔버스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1948년 제24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1등상을 수상했다. 1961년에는 살아 있는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브라크는 1963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주요 작품으로 《에스타크 풍경 Paysage de l'Estaque》(1906), 《에스타크의 집 Houses at L'Estaque》(1908), 《거대한 나부 Grand Nu》(1908), 《포르투갈인 Le Portugais》(1911), 《과일 접시와 유리잔 Fruit Dish and Glass》(1912), 《바이올린과 파이프 Violin and Pipe》(1913~1914), 《카네포르(제물 바구니를 머리에 인 처녀) Canéphore》(1922), 《만돌린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a Mandolin》(1935), 《거실 Le salon》(1944), 《작업실 V Atelier V》(1950) 등이 있다.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의 브라크의 작품은 피카소의 당시 그림과 거의 구별이 안되는 유사 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브라크의 예술적 독자성을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둘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같은 아틀리에를 쓰며 공동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그림에서 영향받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 12년경에는 P.클레와 그림물감에 모래를 섞는 등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되어 부상하였으나, 소집이 해제된 17년부터 다시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피카소가 카멜레온처럼 자주 변모하는 데 비해 그는 자신의 본래 개성에 따라 차분히 큐비즘의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세잔의 이론을 가장 충실하게 전개시켜 나갔으며, 프랑스 특유의 정서가 깃든 작품을 그렸 다. 피카소와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여 입체파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초기에는 풍경을 주로 그렸고,중기 이후는 정물·실내·인물 등을 주제로삼았는데, 그 구성 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성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최대로 중시하는프랑스적인 전통이 풍긴 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우아한 세련미를 더하였다. 주요작품에 《앙베르 항구》 《레스타크의 짐들》 《기타를 든 남자》 등이 있다.
후에 브라크의 표현 양식을 본 딴 그림들 및 화가들의 경향을 큐비즘이라 부르게 되었다.
브라크는 레스타크 지방의 풍경화를 그리면서 대상을 입체적 공간으로 나누어 여러가지 원색을 칠하여 자연을 재구성 하였다. 이와 같은 실험적인 공간 구성과 대상의 표현 양식에서 출발하여 브라크는 점차 눈에 두드러진 입체적인 형태, 원통형, 입방형, 원추형 따위를 종래의 선이나 면을 대신한 표현 수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브라크가 추구한 입체적 표현 양식은 자연 대상을 순수한 그림 대상으로 완전히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야수파의 전시회인 ‘살롱 도톤느’전에 참여하였으나 그는 야수파 그림을 좋지 않게 보았다.
1907년에 피카소를 만난 후로는 입체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살롱 도톤느 전에 출품한 그림을 두고 기이한 정육면체를 그려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 평에서 입체주의라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하였다.
1911-12년에 피카소와 같이 작업하면서 꼴라쥬를 시도하였다. 파피에 꼴레는 브라크가 제일 먼저 시도한 기법이라고 하였다.
1915년에 심한 머리 부상을 하여 제대를 한 후에 1917년에야 다시 붓을 잡았다. 그후로 많은 작품을 그렸다.
1948-55년 사이에 그린 8점의 연작 ‘아틀리에’를 그의 가장 뻬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1948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고상을 수상ㅇ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