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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는 소련군 환영민중대회가 열렸다. 조선해방을 기념하고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환영하는 집회였다. 7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김일성~ 그가 평양 군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제가 역사저널 그날을 7년째 진행을 하고 있는데요. 그 어느 때 보다도 긴장이 되는 주제예요.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 김일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김일성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분명한 건 한반도 동족상잔 비극의 책임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오늘 조심스럽게 얘기를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상영/작가: 아무래도 우리가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게 화제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도 국가 보안법에 위배된다 북한을 미화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고 해요. 사실 역사 프로그램에서 이런 얘기를 다루는 게 작가인 저로서는 몹시 떨리는 일입니다.
이시원/배우: 긴장하신 거 같애요, 떨려요?
최원정: 이 풍채로 봐서는 그런 거에~
박상영: 저 속으로는 계속 울고 있어요. 방송인생 5주만에 이렇게~
최원정: 혹시 잡혀 가는 거 아냐? 우리 이 배우님도 긴장이 좀 되세요?
이시원: 아무래도 긴장이 돼죠. 그리구 어떻게 보면 이 이름 자체가 한국에서는 터부시 돼잖아요 그리고 또 제가 영화를 찍으면서 직접 탈북민들을 만났어요. 저는 계속 교류를 하고 있고 말도 배우지만 북한 사정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 이름만 들어도 저는 살짝 피가 끌어요. 감정조절을 잘해야 될텐데~
최원정: 탈북민을 통해서 얘기를 들었으면 북한의 인권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다 공감하는 부분이고~이시원 배우께서 북한 사투리를 탈북민 한테 직접 배우셨잖아요 한번 보여 주세요~
이시원: (북한 말투로) 아유 부끄럽게시리~제가 어떻게 말을 해야될 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최원정: 평양 말씨를 저렇게 예쁘게 쓸까~
박상영: 우리는 (북한 방송에서) 앵커님께서 선언하시는~
----------(북한 조선중앙TV) 이춘희 아나운서-------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정부 성~명~
박상영: 그 얘기만 듣고 자라서 그렇지 실질적으로 평양 말은 들어본 적이 거의 없잖아요.
이시원: 처음 접한 평양말은 생각보다 부드러워요.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독일어도 마찬가지에요. 사람들이 히틀러 연설만 봐서 소리 지르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독일어는 굉장히 부드러운 언어예요.
최원정: 다니엘씨도 북한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시잖아요?
다니엘: 저는 이제 분단 국가 중심이다 보니까 사실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고 저는 옛날부터 대학원에서 라든지 학부에서 북한 관련 수업을 들었으니까 사실 학문적으로 되게 많이 접했어요. 그런데 이제 관심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바로 너 빨갱이다 그러면 나 빨갱이 아니야 독일인인데~일단 그런 식으로 하니까 확실히 한국에서 그래도 감정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최원정: 그러면 객관적으로 사실에 입각해서 북한, 특별히 김일성을 다루어 볼까 하는데 오늘 주제에서 만큼은 빠질 수 없는 분입니다. 국내에서 북한 전문가로 단연 톱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기광서 교수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기광서/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안녕하세요? 김일성 얘기로 지상파 KBS에 나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사실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김일성 하면 우리 사회에서 굉장한 거부반응이 있고 부정적인 인식들이 존재해 왔는데 이것을 지상파에서 얘기한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럽고 오늘 이걸 잘 해서 나름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시원: 그런데 궁금한게요. 북한에 대해서 옛날에 공부할 자료를 찾기가 힘들었고 공부할 것도 마땅치 않았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셨는지?
최원정: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기광서: 네, 네, 91년도에 소련이 막 해체되었을 시기입니다. 양국의 이런 분단상황과 통일문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온전한 민주화라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고민들을 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북한을 좀 더 이해하고 남북관계가 잘 되어야 한다는 바램 속에서 북한을 연구하기로 결심했고 러시아로 갔습니다.
최원정: 오늘 귀한 분 모셨으니까 여러분들 막 물어보세요.
이시원: 교수님! 첫번째 질문입니다. (소련군 환영민중대회에) 저 당시는 아직 북한이 수립되기도 전인데 왜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약7만명).
박상영: 그거보다 더 궁금한게 거기 김일성 사진을 보면 분명 목이나 얼굴이 매끈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어딘가에서 소문으로 듣기로는 김일성이 미사일을 맞아서 목 쪽에~ 주먹만한 혹이 튀어나왔다고 들었는데~?
기광서: 김일성의 목뒤 혹은 1960년대 이후부터 자라기 시작해서 말년 되면은 굉장히 커집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혹이 암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구요. 지방종이란 설이 있습니다.
이시원: 지방종 정도면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는 수술로 알고 있는데~ 왜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은 그걸 놔뒀나요?
기광서: 그거는 추측컨데 최고 지도자가 중병이나 생사를 다투는 병이 아닌 한은 최고 지도자의 몸에 칼을 대는 것은 굉장히 위험스럽죠.
박상영: 조선 시대의 임금이네요~용안은 건드릴 수 없다.
최원정: 그런데 아무튼 평양 군중 앞에 섰을 때 (1945.10.14)는 혹이 자라기 전이니까 목이 말끔한 모습으로 나왔어요. 저 자리가 어떤 자리였어요? 저게 대회인가요?
기광서: (1945년) 10월 14일날 열린 공식명칭은 소련군 환영민중대회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소련군이 북한의 각 지역에서, 큰 도시에서는 소련군 환영민중대회를 열면서 해방을 자축한 겁니다. 이건 어떤 역사적 궤도를 봐야 하는데 소련의 입장에서는 유일하게 8.15 해방 당시에 일본군과 싸웠던 군대는 소련군이다 라는 그런 자부심이 있고, 지금의 러시아의 역사교과서에도 현재조차도 그걸 강조는 합니다. 그래서 어떤 소련군 환영대회 라는 명칭, 그 속에서 김일성이 등장을 했던 것이죠. 문제는 소련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련이 한반도를 해방시켰느냐 라고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관점은 미국의 역활은~
이시원: 일본이 미국에 패전해서 우리는 독립이 되었다고 알고 있잖아요?
기광서: 그렇죠.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일본이 항복했다 라는 것은 맞습니다. 또 하나는 소련군이 8월 9일에 참전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일본이 항복을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소련이 한반도를 해방했다 라고 판단을 하는 것이고~
박상영: 소련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기광서: 절반의 진실이라고 얘기를 할 수 있죠.
유동훈/하나고등학교 교사: 실제로 45년 8월 9일에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내려오면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주로 함경도 나진, 웅기, 청진에서 싸웠는데~ 그런 모습을 북한 주민들이 실제로 보았데요. 그러면서 승승장구하는 소련군을 보고 이번에 정말 우리가 해방이 되겠구나 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실제로 소련군이 들어온 다음에는 일본 식민통치자들을 다 쫓아냈고 우리가 원래 자치적으로 세웠던 38이북지방의 건국준비위원회 세력들에게 통치권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소련군을 어떻게 보면 해방군으로 인식을 했다고 합니다.
다니엘: 역시 동독하고 분위기는 많이 다른 것 같애요. 소련군이 동베를린을 점령했을 때는 주독일 소련군정청을 설치했었거든요.
기광서: 독일 같은 경우는 군정이 실시됐죠. 독일은 전쟁에서 패전국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의 2차 대전 영웅인 주코프 원수에 의해서 주동독 소련군정청이 만들어지고 (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에서 소련을 승리로 이끈 영웅), 직접적으로 소련군이들어가서 군정을 실시하게 되는 거고, 조선은 이 지역 패전국이 누굽니까. 일본이 패전국이고 조선은 식민지 해방국입니다. 식민지 해방국은 기본적으로 점령해서 군정이 아니라 독립해서 자발적으로 자주적인 독립국가로 나아가는 소련에 우호적인 관념 속에서 정책을 추진했다 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유동훈: 그래서 처음에 소련군이 내려왔을 때 1945.8.24. 평양에 들어가는데 소련군 장군이 조만식을 만나요. 조만식 선생을 보러옵니다. 당신들 소련군은 점령군으로 온 것이냐 아니면 해방군으로 온 것이냐 라고 불어봐요. 그때 소련군이 우리는 당신들을 해방시켜주러 왔다. 사실 그 당시에는 평양 지역에 고당 조만식의 파워가 꽤 쎈 시기였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 이후는 평양에 있는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가릴 것 없이 일단 소련군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됐고 소련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니까 상당히 통치하는데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이시원: 그런데 해방군으로 왔어요 점령군으로 왔어요 라고 물어보면 실제 본심이 어떻든 당연히 해방군으로 왔다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유동훈: 거기서 포인트가 하나 있는데 만약에 점령군으로 왔다면 직접 우리 자치위원회나 인민위원회나 다 해체 시키고 본인들이 통치를 했을 것인데 실제로 소련은 군정을 실시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모습에서 보면 단순한 립서비스는 아니었습니다.
최원정: 미군정과 다른 성격이군요. 이런 민중대회도 우리는 해방군이다 라는 이미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개최를 했겠어요.
기광서: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조선 민족을 해방시키려 왔다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이시원: 거기 그러면 사람이 아주 많이 몰렸을 텐데 어느 정도나 모였나요?
기광서: 당시로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힘들겠지만 대체로 한 7만명 정도에서~10만명까지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상영: 책이 그렇게 팔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김일성 그 사람을 보려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몰렸나요?
다니엘: 알고 있었나요?
기광서: 당시는 신문들이 폐간 되었던 시기거든요. 39년대 까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발행이 되었는데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비롯해서 항일전투의 양상이 많이 보도가 되었고 김일성의 이름 존재 자체는 많이 드러났다 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박상영: 저는 태어나서 지금 처음으로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니엘: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인가요?
이시원: 저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워낙 과장이 심해서 측지법을 쓰고 분신술 쓰고 둔갑술 쓰고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쓰고 워낙 과장이 심해서 솔직히 어디까지 믿어야 되나 싶고요 이게 과장되고 부풀려진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거든요.
최원정: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의 이런 항일투쟁이 날조 되었다고 믿고 있거든요.
다니엘: 저희도 학교에서 배웠을 때는 일단 김일성 이라는 이름 부터가 원래 자체가 자기 이름이 아니고 항일 투쟁하면서 전투이름으로 개명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박상영: 전투 이름이 따로 있어요?
기광서: 질문이 이상합니다.
최원정: 김일성 이름 가짜설 까지 있다고 교육을 받아서~
기광서: 김일성의 이름은 당연히 가명이죠. 본명은 김성주입니다. 김성주지 김일성이 아니다라고 우리 사회에서 많이 전파가 되었는데~ 그건 북한에서도 교과서에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라고 알고 있습니다. 김성주 소학교도 있다고 밝혀졌습니다. 당시 독립운동을 했거나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명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본명을 쓰고 일제와 싸울 수는 없었습니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이런 신화적인 얘기에 대해서는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건 거짓말이라고 완전히 매도될 일인데 그만큼 30년대 중반 엄혹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김일성의 활동이 빛처럼 나타나서 이것이 민간에게 소문으로 전파가 됐던 것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그러면 교수님, 정말 역사적 사실과 기록에 근거해서, 김일성의 성장기부터 한번 가볼까요?
기광서: 저는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기록에 근거한 말씀만 하겠습니다. 1919년에 8살에 아버지를 따라서 만주로 가서 한 2년간 살다가, 다시 평양에 (1923~1925년)으로 돌아와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다시 만주 (1925년)로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1927년 만주 길림 육문중학교 편입).
유동훈: 중학교를 중퇴한 걸로 되어있는데~
기광서: 네, 중학교를 중퇴합니다.
최원정: 만주에서 중학교를 다녔지만 중국어로 수업을 받은거예요?
기광서: 그렇죠, 중국어로 수업을 들었죠.
최원정: 중국어를 잘 했겠네요?
유동훈: 그렇죠.
기광서: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죠. 그 과정에서 독립이념과 공산주의를 학습하게 되고 그 당시 만주 괴뢰국이 수립되었을 때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상황에서 조중 빨치산이라는 유격대 부대가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무장투쟁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때 빨치산란 이름으로 등장을 합니다.
최원정: (박상영을 향하여) 빨치산을 아세요?
박상영: 제가 아직 빨치산에 대해서 어렴풋이 아는게 혹시 (최원정 아나를 향해)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읽어 보셨어요? (태백산맥 (조정래作) 전10권-광복후 부터 6.25 전쟁까지의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대하 역사소설).
최원정: 솔직히 완독하지는 못했어요.
박상영: 맞아요. 사실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이름은 들어봤지만 다 읽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지요~ 왜냐하면 10권이나 되는 긴 대하소설이기 때문이죠~
최원정: (유동훈을 향해) 선생님도 못읽어보셨어요?
유동훈: 저는 3권까지만 읽었습니다~
박상영: 그 소설을 제가 알기로는 빨치산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실 그 용어만 알고 있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최원정: 많은 분들이 빨치산 하면 빨갱이들의 어떤~?
박상영: 그렇죠, 어감도~
기광서: 빨갱이란 말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러시아의 파르티잔 이란 단어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이게 유격대원이란 뜻입니다. 게릴라, 유격대원, 빨치산 다양하게 명칭이 불립니다.
최원정: 그러니까 영어로 Partisan이죠?
기광서: Partisan 파티잔이라고 그러죠. 정규군처럼 맞서 싸우는게 아니라 정규군의 배후를 기습하거나 통신이나 교통을 끝는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 비정규군의 역할이었고 그것이 빨치산 유격대로 불리게 된 것이죠. 김일성이 항일투쟁했다는 이름이 어떻게 알려졌느냐 하면 바로 1937년 보천보 전투를 통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최원정: 보천보 전투가 김일성이 유명해 지는 계기가 됐다는 얘기신데, 보천보 전투가 어떤 건지 반가운 분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금수 박사님!
박금수: (일제시대 독립군 복장을 하고) 네, 안녕하세요. 박금수 입니다. 제가 역사 저널에 출연한지도 벌써 6년째 되는데요.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김일성 편에 제가 나올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동북 항일연군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리 (現양강도 보천군 보천읍) 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본 경찰과 벌였던 전투를 말합니다. 여기 보시면, 보천군은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압록강과 불과 20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일제의 감시가 삼엄했던 곳입니다. 이렇게 경비태세가 삼엄할 때는 아주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게릴라 전술이 전투에서 효과적이죠. 또한 게릴라 전술의 특징은 적이 방심한 틈을 타서 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진 시간도 감시가 소홀한 밤 10시였던 것입니다. 당시 보천보 내에 일본경찰들이 어디 모여서 술을 한 잔 한다는 첩보가 입수됐습니다. 어디서 모였나? 바로 산림보호구(오늘날 산림청에 해당)에 다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바로 습격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항일군의 승리였습니다. 어떻게 승리했는지 그 비결 몇가지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이 바지 제가 오늘 입고 나온 이 바지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승마바지입니다. 승마바지를 잘 보시면 위는 펑퍼짐하죠. 펑퍼짐해서 활동하기에 편리해요. 그런데 다리쪽 밑에는 좁습니다. 좁기 때문에 이동하기에 편합니다.
최원정: (바지 편한게) 비결까지 되나? 그렇게 생각하면 어르신들이 입는 고쟁이 같은 옷은~
박금수: 만주에서 보천보까지 올려면 거리도 멀고 압록강을 건너야 됩니다 (만주~보천보-강과 산을 넘어야 하는 험준한 코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건너야 됩니다. 더욱이 보천보는 산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이동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활동이 편하도록 승마바지를 입었던 거죠. 이 승마 바지를 입으면 허벅지 언덩이가 큰 남자들도 편하게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다리도 올라가고 발차기도 쉽고~ 그런데 이 바지 이름이 조드퍼즈 바지 라는 건데요. (조드퍼즈(Jodhpurs)바지-인도 조드퍼 지방의 예복, 추리다르(Churidr)에서 유래). 원래 이게 인도 조드퍼 지역에서 유래하는 건데 영국군이 이 옷을 기병용 군복으로 입으면서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군대에 갔으면 이 정도는 입어주어야 폼이 난다고 볼 수가 있겠죠. 다니엘씨가 합기도를 한다고 제가 들었는데요~지금도 수련하고 계신거죠?
다니엘: (합기도4단) 하는둥 마는둥 하고 있어요.
박금수: 그리고 이제 밤이 됩니다. 보천보 마을에 침투하는 거죠. 압록강을 건너오는데 항일연군이 무기가 변변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은 바로 남의 무기를 빼앗아서 내가 이용하는 것이죠. 그 무기가 있었던 곳이 바로 경찰주재소(오늘날 파출소)입니다. 먼저 주재소를 공격을 해서 무기고에 있던 기관총, 장총을 탈취합니다.
다니엘: 그러면 주변에서 지원이 오지는 않았나요?
박금수: 연락체계가 있기 때문에 습격을 받았을 때는 당연히 연락을 하겠죠. 그럴 때 대비해서 쓰는 게 바로 이 칼입니다. 게릴라 전투에서는 이 칼이 중요하고 지금도 특수부대는 칼이 있죠. 당시에 이 칼이 했던 역할은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바로 이런 전선을 끊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통신선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재소가 습격을 받게 되면 전시이동전화로 연락을 하게 되는데 선이 끊어져 있으니까 통신연락이 안되는 거죠. 그러면 전투지역에 적을 고립시키게 됩니다. 이후에는 경찰주재소를 공격하고 무기가 있으니까 편을 나누어서 산림보호구 습격을 했죠. 모여있었던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나머지 기반시설들, 우편국 , 면사무소, 농사시험장을 다 공격을 하고요. 마지막으로 소방회관도 공격을 합니다. 불을 못끄게 하려고, 이렇게 항일연군이 일본경찰을 습격하고 다시 퇴각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시간 이었다고 합니다.
일동: 우아! 세상에~
다니엘: 1시간만에 진짜 빠른데요.
박금수: 당시 동아일보는 바로 이 호외를 뿌리면서 이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호외요!~~
박상영: (호외를 보면서) 눈에 보이는 글자 있지요. 김일성 이라는 글자가~가장 먼저 들어오는데요~
최원정: 김일성 할 때 한일자(一)가 아니고 날일자(日)인데~
기광서: 겸용을 했습니다. 원래는 날일자 金日成 이라고 써야 정상인데 정보부족 언론사에서 한일자 金一成으로 쓰는 데가 있습니다.
박상영: (동아일보 호외신문을 보고) 제가 기가 막히게 한번 해석을 해볼게요. 지난 4일, 김일성 일파 등 300여명이 보천보에 나타나 보통학교, 우편소, 면사무소, 소방서 등을 습격하고 방화를 하였고, 그들은 한 명을 사살시키고 도주하였다. 그렇죠, 한 명?
다니엘: 기가 막히네~
박상영: 피해 규모가 작기는 한데~ 호외에 나올 정도면 큰일 이었죠.
박금수: 제 개인적으로는 전투라기 보다는 습격 사건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역사는 KBS 간첩신고는 111, 또는 113 잊지 마세요. 전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꾸벅인사).
최원정: 1998년도로 기억하는데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갔던 그때였어요. 북한과 평화무드가 조성되었을 때 언론사들도 초청을 받아갔는데 그때 아마 동아일보 故김병관 회장과 취재진이 가서 보천보 전투 호외원판을 순금으로 떠서 김정일이한테 주었던 기억이 있어요.
기광서: 제가 북한에 방문했을 때 묘향산에 가면은 국제친선 전람관에 선물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남쪽에서 온 여러 선물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그 안에 순금으로 된 호외동판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최원정: 북한 쪽에서는 굉장히 귀한 선물을 받다 들였을 것 같애요.
다니엘: 궁금해서 찾아 봤는데 독일 위키피디아에도 보천보 전투가 보도되어 있더라구요. 그리고 음모론이나 이런게 없고 그냥 팩트 처럼 보도된 거였어요.
Kim Il-sung feuerte einen Schuss in den Himmel, und der Kampf began, Wahrend die Schlacht, die von Japan besetzten Polizeistation, ein postamt, Forstern Buro, locale Grundschule, Feuerwehr Halle wurde vonder Nord Koreanischen Armee zerstort 김일성이 하늘로 총을 쏘아 올리며 싸움이 시작됐다. 일본의 경찰서, 우체국, 지방초등학교, 소방서가 전투 도중 북한군에 의해 파괴됐다.
이시원: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까 어떻게 보면 약한 게릴라 전투였고 워낙 과장이 심한 북한 사회다 보니까 이게 진짜 참여를 했었는지 이런 것두 저는 솔직히 많이 의심이 되거든요.
박상영: 진짜 참여하기는 했나요?
기광서: 김일성이가 이끈 부대가 했다는 팩트는 정확합니다. 맞구요. 저를 믿어 주세요.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한 당시 언론들의 보도가 일회성이 아니라 그 뒤로 연속적으로 김일성 부대의 동향에 대해서 단신이지만 적극적인 보도를 합니다. 조선일보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보도를 하고 그리고 해외에서도 이 사건이 꽤 반향이 있었어요. 일본이나 중국언론에도 나왔고 심지어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프라우다에도 2회 연속 이 관련기사가 보도가 됩니다. 왜냐면 당시는 항일운동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던 시기였고 침묵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사건이 굉장히 파급력을 갖게 되는 거죠.
박상영: 규모가 커서 유명하다기 보다는 약간 조용하게 있던 시절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자체로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볼 수가 있겠네요.
유동훈: 보천보 전투의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37년이면 일본이 만주를 완전 장악했어요. 만주국을 세웠고 만주에 있었던 우리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본토 관내로 들어가는 상황이었고요. 그 다음에 양세봉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암살됐고 이재우도 이때 검거가 됐을 때입니다. 거의 완전 암흑기죠. 희망도 없고 비젼도 없는 시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 보천보가 터지니까 아~~ 조선독립운동 살아있네~ 이런 의미로~ 누가 김일성이래 이렇게 된 거죠.
기광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밤새 술을 마셨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다니엘: 우리와 다를 바 없네요? KBS 전투가 끝나고~,
최원정: 아무튼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일종의 전국구 스타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일제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텐데~
유동훈: 그렇죠. 굉장히 화가 난 거죠. 김일성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현상금을 걸고 검거를 하기 위해서 많은 부대들을 만주로 보냅니다. 결국은 김일성의 부대들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서 소련 땅으로 넘어갑니다. 소련의 88여단에 소속되어서 거기서 계속 항일무장투쟁을 합니다.
박상영: 소련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하네요.
이시원: 김일성은 그 당시에 소련하고 처음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게되었네요.
기광서: 그렇죠. 해방이 되고 나서 김일성 부대의 대원들은 일부 소련군의 대일전에 정찰대원으로 참전하고 본진은 나중에 귀국을 하게 됩니다. 1945.9.19에 귀국을 하게 되는데 소련 배를 타고 오게 되고 김일성 부대 부대원들의 역할은 북한 각 지역에 투입이 돼서 해당 각 지역에 결성된 소련군 경무사령부에 조선인 대원으로 고문 역활을 맡게 되죠. 김일성 같은 경우는 평양시 경무사령부 부사령관(고문)의 직책을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지 소련군과의 밀접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바로 소련군 환영대회에도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최원정: 그 환영대회에서는 거의 보천보 전투의 영웅, 김일성으로 소개가 되었을 것 같애요. 그랬으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였지요.
다니엘: 지금 따지면 정말 아이돌 스타 같기도 하였네요.
이시원: 무슨 아이돌 스타예요? 저는 상당히 불편해요. 솔직히 말해서 항일운동했고 보천보 전투참여 했고 그런데 이 사람들이 김일성 이후의 일을 알았으면 이렇게 환영을 했을까요?
박상영: 모르니까
이시원: 그때부터 김일성의 팬클럽정치가 시작된 게 아닐까?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을까요?
기광서: 초기에는 그렇게 아이돌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거는 아는 사람은 알고 왜냐면 일제의 언론이라는 것이 굉장히 막혀있었고 소문이라는 것은 민간 내에서 돌았기 때문에 물론 김일성의 이름은 광범위 하게 당시에 확산되었다 라고 얘기하지만 어느날 같이 팬덤을 형성하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구요. 해방된지 얼마 안되는 이런 싯점에서 굉장히 축제분위기 였고 그런 속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나온다고 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거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민간에 당연히 있었죠. 김일성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어떤 정보라는 것이 없었어요. 이름만 있었다는 라는 것이죠. 사진도 없었죠. 나이가 몇인지 기본정보가 부재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김일성을 보자하고 달려간 거죠.
이시원: 신비주의 같은 거 그런 거~
박상영: 약간 신비주의 스타 얼굴이라도 확인하자 하고 나간 것 같애요. 군중이 약7만명 내지 10만명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네요.
유동훈: 이름만 알고 있는 상황인 거죠. 해방 직후에 <선구> 라는 잡지가 한국을 이끌어가는 양심적인 정치인은 누구인가 하고 서울시민 2천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데요.
최원정: 그때 한번 이광용 아나운서가 소개했던 설문조사
유동훈: 1위가 당연히 여운형 (33%), 2위 이승만 (21%), 3위 김구 (18%), 4위 박헌영 (16%)까지 나왔는데, 그리고 5위 이관술 (12%), 6위 김일성 (9%), 선구 잡지는 약간 우파성향의 잡지이거든요. 그만큼 당시 민중들이 김일성의 이름은 알고 있었고 어떤 일을 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나 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그러면 그런 사람이 연단에 섰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기광서: 사람들이 굉장히 놀랬다고 합니다. 왜냐면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를 보면은 장군이라고 그러면 굉장히 연로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의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김일성 나이가 너무 어린 거예요. 김일성의 나이가 당시 34세였죠.
이시원: 그러면 그 당시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서 너무 어리거든요. 김구 선생은 70이었고 이승만 박사는 71, 여운형 선생은 60이었잖아요.
기광서: 1917년 러시아 혁명했던 사람들 마흔이 안넘었어요. 레닌을 빼고는~ 20대 지도자들 많습니다.
유동훈: 실제로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을 만든 때가 22살입니다. 청산리 전투 리더였던 철기 이범석도 스무살에 리더를 했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훨씬 어렸습니다.
기광서: 귀국했던 우리의 지도자들이 지나치게 老지도자들이 와서 그런 이미지가 있는 거예요. 당시 극작가였던 월남한 오영진씨가 이런 묘사를 합니다. 중국인 웨이터 같은 머리 모양에 오리 같은 목소리 라고 표현을 합니다. 30대 젊은이가 서서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자고 외쳤으니까 진짜 김일성 맞나? 라는 의구심들이 든 거죠.
다니엘: 그럼 지금까지 가짜 김일성 장군 이야기가 나온 거네요.
최원정: 여기서 비롯된 거예요. 어떻게 저렇게 새파란 사람이 김일성이래~?
유동훈: 당시에 소련군이 김일성이 가짜래 라는 반응들을 보고 김일성 환영대회 후 그날 김일성을 만경대 생가로 데려갑니다. 그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있었거든요. 인사시키고 이 사람이 진짜 김일성이 맞다 라는 대대적인 언론보도를 해요. 그 이후로 평양에서는 김일성 가짜라는 소문이 약간 자자들었다고 하더라구요.
박상영: 어떻게 보면 신원조회를 한번 한 거네요.
유동훈: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는게 쉽지 않은게 여기는 겨울철에 영하 30도로 내려가는 굉장히 추운 지역 이구요. 그리고 산도 많고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면 하루에 백리 이상을 뛰어야 해요. 그럴러면 2, 30대 젊은이들이 아니면 쉽지가 않죠.
박상영: 체력이 상당히 좋았어야겠네요.
유동훈: 특수한 상황이 있습니다.
기광서: 가짜 소동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집회 분위기는 뜨거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반응을 보고 소련군 지도부도 김일성 위상을 재평가 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구요. 그렇지만은 그 당시 김일성 위상이라는 것은 다양한 많은 후보자 가운데서 한 명이었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최원정: 그러니까 소련의 지지를 받는 유력한 후보는 아니었다는 얘기네요.
기광서: 유력한 후보의 하나일 수 있지만은 유일한 후보는 아니었다.
최원정: 그러면 도대체 어떤 지도자 후보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볼까요?
----------------KBS 그날 지도자 제전-----이광용 아나운서와 기광서 교수 등장------------
이광용: 지금부터 해방 직후 북한 지도자 제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한 상황판단과 도움 말씀을 위해 기광서 해설위원, 최고의 북한 전문가, 기광서 위원을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광서: 안녕하십니까?
이광용: 북한을 그렇게 잘 아신다고?
기광서: 잘 알지는 못합니다.
이광용: 아까 말씀하시는 것 보니까 잘 아시던데~ 김일성 이랑 친하십니까? 알겠습니다~ 해방 후의 일단 지도자를 뽑는 다는 것 자체가 아~ 이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 그런데 말씀드리는 순간, 첫번째 후보가 등장했습니다. 조만식 후보 63살, 조선의 간디로도 불리는 인물이죠.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소련과도 가장 먼저 접촉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거의 뭐 다 조만식 후보한테 왔다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어! 갑자기 빨간 글씨로 반탁! 반탁이 떴어요. 반탁! 반탁을 주장했다, 교수님! 이게 사실 반탁 주장이라는 게 심상치 않은 일 아닙니까?
기광서: 반탁이라는 것은 미국과 소련이 1945년 12월에 합의했던 조선 임시정부수립과 5년 이내의 신탁통치 실시가 중요한 결정인데 이것에 대해서 반대했다 라는 거죠. 소련의 입장을 거역을 한 겁니다. 소련이 긴밀하게 협력하고자 했던 이 인물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광용: 이 엄중한 시기에 탄성을 한껏 올려서 중계를 하고 있는데 너무 침착한 것 아닙니까, 교수님? 자, 그럼 다음 인물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두번째 후보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박헌영 후보입니다. 올해 나이 46세, 박헌영 후보가 만만치 않습니다. 남북 전체 공산당을 대표하는 조선공산당 1인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위에 있다고 말씀 드립니다.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김일성 보다 두수 정도 위가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갑자기 38선 지도가 뜨고, 박헌영 후보에게도 뭔가 약점이 있군요. 지리적인 문제 이건 무슨 문제인가요?
기광서: 박헌영은 조선 공산당 영수죠. 미소가 38선으로 분리돼서 진주하다 보니까 행정적인 구분선이 생기고 공산당도 독자적으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만들어지고요. 이게 나중에는 북조선 공산당으로 변하게 되죠. 그러니까 한반도 내에 두 개의 공산당이 만들어졌던 것이고 북한의 혁명은 김일성이 책임지고, 남쪽의 혁명은 박헌영이 책임진다 라는 역할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박헌영이 남한의 수많은 조직들을 버리고 북한에 가서 북한의 지도자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광용: 아, 우리 해설위원님의 말을 들으니까 박헌영 후보의 지리적인 약점이 상당히 치명적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북한 지도자제전의 승리는 결국은 아, 김일성 후보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겠는데요~
최원정: 연륜이나 덕망으로 봤을 때는 조만식이나 박헌영이 훨씬 지도자감에 가까웠는데 이걸 다 제치고 김일성이 지도자가 된 거예요.
다니엘: 조만식 선생 같은 경우는 반탁 이유만으로 아예 탈락이 된 건가요?
기광서: 조만식이 누굽니까 조선의 김구, 안창호 선생과 더불어서 3대 민족주의 지도자입니다. 조만식이 소련군과 대화하면서 소련군을 우호적으로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조만식은 반일주의자 이긴 하지만 미국과는 가까웠고 소련은 싫어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소련군들이 북한에서 약탈, 강간 등 범죄행위를 했다 라는 것에 대해서 함경도 사투리로 마오제 라는 말을~, 이게 막 굴러먹은 놈이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잘 알겁니다. 소련군이 독일을 점령하면서 동독에서 상당한 재산들을 약탈했고 또 여성들에게 대해서 그런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군 생각은 재산을 가지고 오는 것은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건 전리품이다. 독일이 우리한테 그만큼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한 기준을 똑같이 조선에서도 초기에는~, 그런 비난을 소련군이 받았고 당시에 조만식도 소련군의 횡포에 대해서 항의를 했습니다.
이시원: 조만식이 소련의 약탈에 대해서 당연한 항의를 했고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면 소련은 말 잘 듣는 자기한테 복종하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거네요.
기광서: 이게 껄끄러운 관계가 되지만은 구체적으로 이것 때문에 조만식을 밀어냈다는 것은 아니구요. 결정적인 이유는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서 찬성을 해주지 않았다 라는 이유 때문에 사실은 정치 무대에서 축출된 거죠.
박상영: 이런 이유 때문에 결국 김일성이 소련의 선택을 받았네요.
유동훈: 그렇죠, 당시에 김일성은 소련군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도 정치적 입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고 실제로 1945년 11월에 신의주에서 학생사건이 일어나요. 신의주에서 많은 학생들이 반소-반공 시위를 했는데 그때 김일성이 직접 가서 사태수습을 직접합니다.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라고 해야 되나~
박상영: 대외적인 퍼포먼스는 탁월하였네요.
기광서: 박헌영 하고 비교를 하면, 박헌영은 이론적인 사람입니다. 해박하고 다만 대중성이 좀 떨어지죠. 능력이야 맑스 레닌 주의를 꿰뚫고 있고 언어도 5개 국어를 다 잘 합니다. 중국어, 일본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사람이죠. 김일성은 논리적이고 이념적이기 보다는 대중성이 있다. 대중 친화력이나 스킨쉽 면에서~
------------------1946년 2월, 김일성을 북한 최고지도자로 추대한 북조선 임시인민회의가 창설됐다. 그리고 한달 뒤 북한 농민들은 뜻밖의 희소식을 접한다. 지주 땅을 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겠다는 것, 토지개혁, 권력을 잡은 김일성의 첫 행보였다-----------------------
박상영: 땅을 공짜로 준다는데~
이시원: 세상엔 공짜는 없죠.
최원정: 굉장히 획기적인 제도일 것 같은데요, 교수님!
기광서: 맞습니다. 토지개혁은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추진한 최초의 북한사회를 변화시킨 대규모 개혁입니다. 당시 한반도 전체에서 북한만을 보더라도 인구의 75%가 농민이었고, 75% 가운데 40%가 토지가 없는 소작농 이거나 아니면 소농들이었죠. 이렇게 구분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인구의 대다수가 해방 이후에 조선의 목표로 첫번째가 건국(建國), 그런데 건국 못지않게 다수의 농민들은 자기 땅이 필요했던 것이죠. 자기 땅에서 경작하는 열망을 가진게 농민인데 그런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토지를 주어야 하는 과제가 가장 컸다라는 것인데 문제는 토지개혁을 국가 수립 후에 해야 했는데 급진적으로 먼저 시행을 하게 됩니다.
유동훈: 당시 북한의 농민들은 토지개혁후 가구당 보통 4천평 정도의 토지를 가졌다고 해요.
박상영: 그런데 제가 지금 13년째 원룸에 셋방 살이 하고 있는데 사실 이게~
최원정: 대상을 받아도~
박상영: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진짜로 셋방살이의 고통이라는게 만만치 않은데 소작농 같은 경우는 4천명 땅을 준다면 얼마나 뿌듯했겠어요. 그때 이런 정책이 그때 당시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호소력이 있었겠다 라는 생각이 들고 감격했을 것 같애요~
다니엘: 흥미로운 건 동독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소련이 동독을 점령했을 때 45년에 똑같이 토지개혁 실시하거든요. 소련군이 들어갔던 동유럽 국가에서는 다 토지개혁을 했습니다.
기광서: 그렇죠, 그런데 독특하게 북한에 대해서만 무상몰수, 무상분배 했어요 (기광서 교수의 팩트 체크-무상몰수, 무상분배는 북한에서만 실시). (폴란드, 동독, 헝가리 등 소련의 위성국가는 유상매수, 유무상 분배가 원칙). 그러니까 돈을 주고 사서 다시 돈을 주고 팔거나 무상으로 분배하는 정책을 썼죠. 그러니까, 북한은 굉장히 급진적인 정책을 쓴 거예요. 소련 외무성에서는 오히려 동유럽의 모델을 권고 했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거죠. 그리고 더 급진적이었던 건, 처음에는 아예 국유화를 하자 라는 주장이 현지 김일성 지도부에서 나왔었거든요. 그걸 소련이 또 막았어요. 국유화가 아니라 개인 소유로 가야 한다.
다니엘: 근데 반발도 있었던 거 같애요. 내 땅을 뺏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잖아요.
기광서: 당연히 반발이 있었죠. 처음 3월 1일에 3.1절 행사에 김일성 한테 폭탄을 던진 사건도 있었어요. 이게 어떻게 보면 물리적으로도 저항을 했고 이게 힘에 부쳐서 어렵다 싶으면 상당수가 남한으로 내려가거나 지하로 숨거나 그렇게 된 거죠. 당시 땅을 가진 많은 분들이 내려와서 사실은 남한에서 반공의 토대가 되는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주도하는 개혁정책이 계속됩니다. 토지개혁이 끝나고 바로 몇 달 후에 남녀평등권 법령이라든가 노동법령이 발효가 되어 기본적으로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게 되고 여성들에게 산전 산후 휴가를 보장하는 근대적인 노동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만들어집니다. (김일성이 시행한 급진개혁-① 남녀평등권법령, ②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 ③ 8시간 근무원칙, ④ 여성의 산전산후휴가보장). 이런 변화에 대한 지지의 근거는 공산당, 다음에 노동당(북조선 노동당)으로 변하지만, 북한에 공산당 당원수가 1945년 12월 달에 한 4500명 밖에 안되요. 그런데 46년 8월에 가면은 36만명이 되어 거의 7,80배가 됩니다.
최원정: 정말 정책만으로만 보면, 토지개혁과 사회복지정책으로 보면, 사실 높게 평가할만한 부분인 거 같애요. 제 느낌으로는 그런데 이시원 배우가 자꾸 아~아쉬워~ 그러는데~
이시원: 못마땅합니다. 저는 굉장히 못마땅합니다. 저는 진짜로 만약에 정말 국민들을 위해서 토지개혁을 했다면 그걸 하고 물러났어야지 결국에는 그게 권력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되지 않았나~
기광서: 그 현상이라는 것을 같이 봐야 하겠죠. 정치적 목적이 없는 행위는 없다라는 것이죠. 그러나 다만 그 당시에 과제가 뭐냐 라고 했을 때 토지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 조선 민중의 염원이었고 당연히 실현되어 되어야 할 과제였기 때문에 그런 요구들을 밑으로부터 받아서 해야 되는데 문제는 독립국가가 형성된 다음에 이것을 시행을 했어야 되는데 그것을 형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개혁을 먼저 시행했다 라는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동훈: 사실 이게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토지개혁을 해버리면 사실 이걸 한반도 전체로 생각을 했을 때는 남과 북에 각각 미국과 소련이 들어온 상황에서 하나의 나라를 만들려면 같은 방식의 토지개혁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먼저 북조선에 정부도 수립되기도 전에 임시인민위원회 시절에 이 토지개혁을 먼저 해버린 거예요.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해버리니까 그러면 이제 남쪽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분단으로 갈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북한 김일성이 너무 성급했습니다. 토지개혁의 방식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남쪽과 조율해서 했으면 좋았을텐데 이게 결국은 남북분단으로 가는 하나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최원정: 아무튼 당시 그런 항일투쟁이라든지 개혁의 급진적인 이미지가 지금 우리에게 김일성 하면 그렇게 친근하게 다가오지를 않아요.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 김일성 장군이 아닌데).
유동훈: 1970년대 만화영화 중에 똘이 장군이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어요. 똘이 장군이 태권도를 써서 악의 무리를 소탕한다는 얘기인데 그 악의 무리의 대표적인 주인공이 돼지인데 돼지가 김일성이고 (김일성=돼지), 늑대의 역할로 나왔던 북한군이 늑대였거든요 (북한군=늑대).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정말 김일성이 돼지고 인민군이 늑대인 줄 알았습니다. 최원정 아나운서도 그 만화 기억하시죠?
최원정: (정색을 하면서) 저는 그 세계 아네요. 그런데 똘이 장군 못봤지만 많은 반공서적을 읽으면서 독후감을 썼던 세대거든요. 진짜 김일성은 악당이고, 우리는 거기에 조국을 사수해야 되고 이런 교육을 받았던 세대이긴 하죠~
기광서: 저희 세대 때는 김일성 북한군은 머리에 뿔난 사람들이라고 그런 그림들을 많이 그렸고~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김일성을 악마로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북한 연구를 하면서 굉장히 아쉬웠던 점은 해방 후에는 통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 결정에 있어서 좌우세력들이 하나의 입장으로 나아갔더라면 분단되지 않고 통일될 가능성들이 있었는데 결국은 미소의 입장을 따라서 우리의 좌우세력들이 통일을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단국가로 남게 되는 비극이다. 분단국가가 된 이후에도 통일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평화적인 교류를 노력했다면 지금과 같은 적대적인 관계는 형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시작하면서 김일성이 이야기 한다고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는데 오늘 우리 얘기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수령 모독죄로 걸리는 건 아니죠? 허~허~
박상영: 핸드폰 번호 안바꾸어도 되죠? 하~하~
기광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했지 않습니까. 대체로 북한을 의도적으로 찬양하거나 이롭게 하지 않는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안될 거구요.
다니엘: 저 개인적 생각으로 한반도의 제일 큰 비극은 한국전쟁이에요. 만약에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한반도도 분단상태이지만 독일 처럼 통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김일성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유동훈: 제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중에 탈북 교사하고 같이 공부하게 되었는데 제가 물어봤어요. 우리가 배우고 있는 근현대의 독립운동사를 많이 알고 있느냐 대답은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만 배웠데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광복군, 조선의용대, 한국독립군 이런 건 하나도 배우지 않았어요. 역사가 상당히 중요한데 김일성의 무장투쟁은 독립운동사 중에서 작은 한 부분인데 북한에서는 이게 everything이 되어 버렸고요. 남쪽에서는 이게 nothing이 되어 버린거예요. 그래서 남북한 역사학자들이 만나서 객관적으로 역사를 상호 조율하여 어느 정도 균형있는 역사를 가르쳐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시원: 물론 항일투쟁을 한건 팩트니까 인정을 해야되지만 그 이후에 김일성에 대해서 더 집중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그 항일투쟁을 자기의 집권을 위해서 이용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한 책임을 져야되고 우상숭배와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분명한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우리가 해방에서 분단으로 넘어가는 한 싯점에 김일성은 꼭 다루어야 하는 주제잖아요. 오늘 사명감을 갖고 함께 해 주셨는데 괜찮았나요?
기광서: 우리 사회에 가장 커다란 문제가 남남갈등 아닙니까. 어떻게 북한을 보느냐에 지금의 한국사회의 이념적 분화가 있는 것인데 이 원인은 사실 장기간의 분단을 통해서 서로를 오랫동안 적대시 해왔고 결국은 이것이 상대에 대한 무지로 전환됐던 측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남북관계가 개선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류하고 서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러면서 하나 하나씩 문제를 고쳐나가는 이런 과정들이 존재해야만 남남갈등의 존재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이 들고요.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변하고 북한도 당연히 변해야겠죠. 북한의 유일체제 라는 것이 인류보편적인 구조라고 보기에는 힘드니까 거기도 북한도 당연히 변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원정: 오늘 해방 공간에서의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사실 한국전쟁에서 책임을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되지 않겠습니까. 한국전쟁과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는 6.25 전쟁편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57회 우리가 아는 김일성에서 정리).
① 일본육사(기병장교) 출신에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김경천은 독립군을 교육했고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백마를 타고 독립운동을 했다(조선의 나폴레옹), 김경천 장군을 김일성 장군이라 호칭한다. 그의 후배로는 이응준,홍사익,김석원이 있다. 그런데, 연해주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일성 장군이 어느날 전설처럼 사라졌다. 해방이 되고, 10.14. 김일성 장군이 평양집회에서 연설한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은 60이 넘은 김경천 老장군을 예상했었다.
② 한국의 해방은 미국이 45.8.8. 일본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니까 급속히 이루어졌다. 참전을 미루던 소련군은 늦게 8월 9일 만주와 북한으로 밀고 내려왔다. 며칠후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하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소련이 한반도를 해방시켰다고 가르친다. 미국은 3년간 태평양에서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북한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절반의 진실도 아니다. 김일성은 권력을 잡기 위해 스탈린을 추켜세웠고 북한주민을 계속 속였다.
③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는 1937. 6. 4,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동북 항일연군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리 (現양강도 보천군 보천읍) 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본 경찰과 벌였던 전투다. 보천군은 압록강과 불과 20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일제의 감시가 삼엄했다. 전투가 벌어진 시간은 감시가 소홀한 밤 10시, 당시 보천보 내에 일본경찰들이 산림보호구에 모여서 술을 한 잔 한다는 첩보를 입수, 바로 습격했다. 1937.6.5. 동아일보 호외에, 지난 4일, 김일성 일파 300여명이 보천보에 나타나 보통학교, 우편소, 면사무소, 소방서 등을 습격, 방화하였고, 그들은 한 명을 사살시키고 도주하였다. 피해 규모가 작기는 한데, 전투라기 보다는 습격 사건이었다.
④ 보천보 전투는 타이밍이 중요, 1937년이면 일본이 만주를 완전 장악, 만주국을 세웠고 만주에 있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상황, 그 다음에 양세봉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암살됐고 이재우도 이때 검거. 독립운동 완전 암흑기, 희망도 없고 비젼도 없는 시대, 이때 보천보가 터졌다. 조선독립운동 살아있네~ 이런 의미로~누가 김일성이래~규모가 커서 유명하기 보다는 조용하던 시절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⑤ 해방 직후 선구 잡지가 한국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정치인은 누구인가 서울시민 2천명에 설문조사결과, 1위가 여운형 (33%), 2위 이승만 (21%), 3위 김구 (18%), 4위 박헌영 (16%)까지 나왔는데, 5위 이관술 (12%), 그리고 6위 김일성 (9%), 선구 잡지는 약간 우파성향의 잡지, 당시 민중들이 김일성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고 추정(1937.동아일보 호외보도), 소련군 북한에 진주할 때 북한 지도자로 접촉한 사람 63세 조만식, 46세 박헌영, 그리고 34세 김일성(본명 김성주), 조만식은 반탁을 주장했고(소련정책에 반대), 박헌영은 5개 국어를 잘하고 공산주의 이론에 해박하나 남한출신 지리적 한계, 결국 소련군 장교 출신 34세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소련에 의해 발탁.
⑥ 1946년 2월, 김일성 북한 임시인민위원회에서 최고지도자로 추대,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지주 땅을 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분배, 토지개혁 전격 실시, 당시 한반도 전체에서 북한만을 보더라도 인구의 75%가 농민, 75% 가운데 40%가 토지 없는 소작농 이거나 소농들, 그런데, 인구의 대다수는 해방 이후 조선의 첫번째 목표 건국(建國), 건국 못지않게 다수의 농민들은 자기 땅이 필요, 자기 땅에서 경작하는 열망을 가진게 농민, 그런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토지분배 과제가 가장 컸다. 문제는 토지개혁을 국가 수립 후에 해야 했는데 김일성은 급진적으로 먼저 시행, 당시 북한의 농민들은 토지개혁후 가구당 보통 4천평 정도의 토지소유.
⑦ 토지개혁은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토지개혁을 해버리면 한반도 전체를 생각했을 때, 남과 북에 미국과 소련이 주둔한 상황에서 하나의 나라를 만들려면 같은 방식의 토지개혁 필수, 그런데 북조선 김일성이 정부도 수립되기 전에 임시인민위원회 시절에 이 토지개혁을 해버렸다.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해버리니까 이제 남쪽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건 분단으로 갈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원인, 북한 김일성이 너무 성급했다. 토지개혁의 방식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남쪽과 조율없이 한게, 결국 남북분단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⑧ 현재까지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만 가르쳐왔지, 한국의 근현대 독립운동사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광복군, 조선의용대, 한국독립군 이런 걸 김일성은 북한 청년들에게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다. 김일성의 무장투쟁은 독립운동사 중에서 극히 작은 한 부분인데, 해방후 70년 동안 북한에서는 이게 everything이 되어 버렸고, 남한에서는 이게 nothing이 되어 버렸다. 남북한 역사학자들은 만나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상호 조율하여 균형있는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북한 김정은이 이런 걸 좋아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