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부잣집 / 임정자
아팠다. 밤새 끙끙 앓으면서 엄마를 불렀다.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노란 쓴 물이 나올 때까지. 다음 날 아침 운전을 해서 병원에 갔다. 입원했다. 정신없어 아무 준비물도 없이 오게 되었다. 퇴근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남편이 검정 가방을 들고 왔다.
외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남자아이를 원하셨다. 일명 아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중요한 일이었으니. 그런데 여자아이만, 딸 여섯이 되었다. 동네에서는 딸 부잣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들 둘이면 되었지, 엄마는 욕심을 냈다. 내 밑으로 8년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다. 그래서 2남 6녀, 8남매 중 나는 일곱째다. 언니 오빠들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객지로 나갔다. 아, 큰아들은 국민학교 때부터 목포 외가에서 학교에 다녔다. 딸 넷 낳고 얻은 귀한 아들이었으니. 은보다 금이 더 귀했다.
딸들 교육 문제로 아버지와 엄마는 자주 다텄다. 엄마는 여자도 배워서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사회생활 하면서 당당히 살아야 한다고 했다. 반면 아버지는 계집아이가 시집만 가면 됐지, 공부해서 어디에 써먹을 거라고, 언성을 높여 엄마에게 따지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황소 같은 엄마 고집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우리집 딸들은 고등교육을 마쳤으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국민학교 2학년 이후로 학교를 가지 못했단다. 외가도 외삼촌을 가르쳐야 한다고 계집애는 학교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거다.
그 당시 농사꾼이 쌀 만 석가량을 거두어들이는 논밭을 가졌더라도 여러 자식을 객지로 학교 보낸다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국가에서 교육비를 지원해 학교를 다니지만, 그때는 육성회비(교육비)를 내야 했다. 그 용지를 아버지에게 전달하면 바로 주지 않았다. 서무실(행정실)에 몇 번을 불려 가야 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학교에 갔다 왔으니 그리 알라고 하셨다. 이뿐만 아니다. 참고서나 연필을 산다 해도 사나흘 지나야 했다. 오빠들은 그렇지 않았다.
객지에서 자취한 언니들의 불만은 가난한 주머니 속이었단다. 넉넉하지 못한 용돈으로 한 달 살기가 서러운 일이라 했다. 둘째 언니는 아버지 몰래 쌀을 내다 팔아 부족한 용돈을 채우기도 했단다. 나는 낡은 검정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창피했다. 검은색 직사각형 모양에 사각형 버튼, 손잡이가 달린 가죽으로 된 가방이었다. 넷째 언니가 가지고 다녔던, 이도 둘째 언니에게 대물림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교복도 마찬가지다. 나는 새것을 가질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전,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책가방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손잡이가 너덜너덜 뜯어진 것, 여러 번 덧대고 미싱으로 박은 게 떨어진 것이다. 친구들 앞이라 내 얼굴은 붉어졌고 창피했다. 얼른 품에 안았다. 집에 와 새것으로 사달라고 떼쓰면서 울었다. 아버지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수선했다. 며칠이 지났다. 엄마는 검정 가방을 내게 주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새것은 아니었다. 낡아 보이는 걸로 봐서 누군가 썼던 것 같았다. 방학하고 한 학기만 다니면 고등학교 갈 거니까 눈 딱 감고 들고 다니라는 말까지 덧붙인듯하다.
남편이 병원으로 가지고 온 검정 가방은 크고 둥글다. 15년 전, 독일 출장 가서 사 온 지(G)사 명품 가방이다. 병원에서 사용할 슬리퍼와 치약, 칫솔, 드라이, 속옷 등 잡다한 것들을 담아왔다.
첫댓글 우리 나이 또래가 다 그렇게 살았어요. 나도 고등학교 교복은 언니 것 물려 입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