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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네 영을 부어주리니 / 행 2:14-21
캐나다 토론토에 찰스 밀러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일생을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마땅히 재산을 물려줄 상속자가 없었다. 1926년 그가 죽었을 때, 캐나다 사람들을 재미있고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유서를 남겼다. 그의 유서에는 그의 돈과 부동산들을 전혀 엉뚱한 사람들에게 납겨주도록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Ontario Jockey Club의 배당 몫은 경마장에서 늘 반대편에 내기를 걸었던 두명의 저명한 사람에게 남겼고, O'keefe Brewery Company(캐톨릭 맥주회사)의 배당 몫은 토론토에 사는 모든 개신교회의 목사들에게 남겼다. 더 재미잇는 것은 대부분의 유산 상속은 토론토에 사는 젊은 여자들에게 주어졌다. 앞으로 십년 내에 가장 많은 아이를 낳은 여인에게 거액의 유산을 주도록 하였다. 이 유서의 마지막 조항은 캐나다에 사는 여인들의 가슴을 들드게 했고, 특히 젊은 여인들을 흥분시켰다. 신문기자들은 아이를 낳는 경쟁자들을 찾기에 열을 올렸다. 결혼을 한 여자들마다 경쟁적으로 아기를 낳기 시작했다. 그때의 경쟁을 ‘The Great Stork Derby’(대출산경마대회)라고 불었다. 10년 뒤 1936년 드디어 우승하여 유산을 상속박을 여자가 가려졌다. 10년 동안 9명의 자녀를 출산한 여인이 유산을 받게 되었는데 4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각각 $125,000을 받게 되었으니 그때의 화폐가치로 보면 엄청난 액수였다. 아마 몇 십억은 충분히 더 되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밀러는 그의 유산상속이 사회에 해악을 끼쳤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인구증가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여기서 유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사렛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실 때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유산을 남겨 주셨다. 그분이 남긴 유산이 곧 성령이다. 성령님은 유리에게 위로와 인도, 능력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말씀을 들어보자. 요 14:16, 18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오늘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선포한 말씀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행 2:1절 이하에 기록된대로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이적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나라 말로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여든 사람들의 반응이다. 열심히 나와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바라본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눠진 반응을 보였다. 한편에서는 깜짝 놀라 이상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래 무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유창한 외국어로 설교를 하고 있으니 놀랬다. 그런데 또 한편의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였다. 여러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이 제자들을 가리켜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그들이 단순히 복음을 전하고 다른 나라의 방언으로 설교를 했기 때문인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술에 취했다고 다른 나라 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가리켜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쁨과 행복감 대문이었다. 그들 속에서 넘쳐나는 삶의 비전과 용기 때문이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아랍사람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한번은 악한 마귀가 어떤 아랍사람에게 와서 ‘당신에게 앞으로 큰 화가 미칠 게 됩니다. 그 액을 피하려면 내가 말하는 세가지 가운데 한가지를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세가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마귀가 대답한다. ‘하나는 당신의 종 가운데 하나를 죽이든지, 또 하나는 당신의 아내를 때리든지, 나머지 하나는 큰 술병을 가지고 와서 한병 다 마시든지 해야 한다.’ 이 사람이 생각해 보니 죄 없는 종을 죽일 수도 없고, 살림 잘하는 부인을 때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술이나 먹겟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술병을 받아 잔뜩 먹고 취하자 공연히 트집을 잡아가지고 살림 잘하는 아내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종이 보다 못해 기가 막혀서 ‘죄 없는 부인을 왜 때립니까?’ 하며 나서다가 그가 ‘네 놈이 뭐기에 나에게 대들어?’ 하며 때리니까 매를 맞고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니 술 한병 받아 먹고서는 아내도 때리고 종까지 죽인 셈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술의 영향이 어떻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술은 일만 죄의 뿌리’가 된다고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잠 23:29-30절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술에 취한 사람들의 특성이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술이 한잔 들어가면 기분이 좋다’고 한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잊어버린다. 그리고 어디서 생기는지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횡단보도가 아닌데도 막 건어간다. 화장실이 아닌 길가에서도 실례를 한다. 두려움과 체면이 없어진다. 그래서 파출소에 끌려가서는 경찰을 때리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술에 취한 사람들의 특성이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에 속지 마라. 그것은 일시적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성령충만한 사도들이 가진 기쁨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자 기쁨이 생겼다.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나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사람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제자들을 잡아들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만사를 잊어버리고 마냥 좋은 것처럼, 제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 없는 기쁨이 넘쳤다. 몰론 그것은 술에 취한 사람들과 같이 일시적인 망각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도들을 바라본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 대낮부터 술에 취한 것이 아니냐고 조롱했다. 맨 정신으로는 저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명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다. 베드로가 하는 얘기는 간단하다. ‘여러분이 우리를 보고 술에 취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몇시입니까? 겨우 3시(오전 9시) 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술에 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갰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가졌던 그 기쁨과 행복감,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폭발적인 힘과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원리를 우리의 삶에, 우리의 가정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곧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우리의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된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1. 성령의 능력에서 변화된 근원적인 힘이 온다.(16-17상)
사도 베드로는 자신들의 엄청난 변화에 대하여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여러분, 저희가 취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같이 저희에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달라졌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삶의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물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물질로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면 부자는 다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교육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열심히 가르치면 어느 정도 이성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으로 사람의 근본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많이 배워서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대학을 졸업한 사람보다는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 더 행복해야 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또한 많이 배워서 사람이 사람다워질 수 있다면 유학을 다녀오고 석박사가 된 사람들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보면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범죄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오늘날 지식교육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몇 년 전에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미국 교육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너내준 사건이었다. 미국의 교육은 1920년대에 ‘존 듀이’가 내세운 실용주의적 진보주의 교육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결과 1950년대부터는 실용과 합리라는 이름 아래 교과과정에서 성서를 제외시켰다. 학교에서 창조론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없는 교육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믿음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의 교육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총을 난사한 그 아이들은 모두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었다. 한 아이는 전직 공군 조종사의 아들이었고, 또 한 아이는 대학교수의 아들이었다. 합리주의와 실용주우적 이론에 바탕을 둔 교육도, 중산층의 풍요로운 물질로도 그들의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학교교육의 위기는 이제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각 중고등학교마다 ‘일진회’라는 서클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직에 속한 부천의 어느 여자 중학생들이 다른 아이가 조직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폭행을 했다. 할 수 없이 서울로 전학을 왔는데 그 학교에 있는 일진회에 연락을 해서 또 다시 폭행을 했다는 보도였다. 아이들의 심성이 점점 강퍅해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사는 존재일 뿐 아니라, 성령에 의해 삶의 능력을 공급받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인간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임하시기 때문에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2. 성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말씀하고 있다.(17)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의 역사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늙은이들(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연약한 육체에 성령이 임하실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가 임하게 된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살펴볼 때 가족 구성원들을 몇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성서에서 말씀하고 있는데로 어린 아이들과 청년들과 장년들이다. 이러한 구분은 또한 교회와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임하시면 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능력 때문에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인가?
첫째, 우리의 자녀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예언을 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예언’이라고 하면 앞일을 점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 같이 ‘어디에 가서 무얼 하면 성공을 하겠다느니, 주식 값이 얼마나 뛰고 내린다느니, 이사는 며칟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한다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의 자녀들이 에언을 한다는 말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바르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자가 됨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할 때가 있다.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집사님의 가정에서 교회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병이 들고, 아버지는 하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모두가 낙심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댔어요. 하나님은 모든 병을 다 고치실 수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말을 통해 역사하셨다. 그 집사님은 아이의 말을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힘을 얻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음을 얻었다. 그리고 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성령께서 그 아이를 통하여 그 가정에 역사하셨다. 그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어린아이가 한 말,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병도 고쳐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잖아요.’ 이것이 바로 예언이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이런ㅁ 화가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녀들의 말이 변한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언어가 병든 시대이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하는 말을 한번 귀담이 들어보라. 아이들이 놀면서, 그리고 저희들끼리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라. 무슨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사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주로 하는 얘기가 연예인 애기, 스포츠 얘기, 돈 얘기, 쇼핑 얘기, 쾌락 얘기라면 문제가 있다. 그 많은 말 중에 하나님 얘기, 신앙에 관한 얘기는 몇마디나 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의 인생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 잠언 6:2절은 말하기를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잠 18:21절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약 3장은 ‘혀는 배의 키와 같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말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 임하실 때 그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가정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자녀들의 말이 바뀌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둘째,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환상’이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비전(vision)이라고 한다. 헬라어로는 ‘오라시스’라는 말인데,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계시를 의미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비전‘이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상력과 직감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 가실 일을, 인생의 스케줄을 보는 것이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과 위치를 바로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비전이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비전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알기 때문에 바른 걸을 걷게 된다. 정도를 걸어가게 된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볼 때 함부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또한 자신들을 향한 부모의 기대를 알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 볼 때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반면에 비전이 없는 사람은 제멋대로 살 수밖에 없다. 비전이 없으므로 자기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청년기는 정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지배하지 않으면 타락과 폭력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안에 임재하심으로 비전을 본 사람은 결코 타락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젊은 세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대학가의 문화를 보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대학 주변에서 가장 번창하는 사업이 술집이다. 그리고 노래방, PC방, 비디오방, DVD방, 전화방 등 향락산업이 번창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옷가게, 미용실, 성형외과 등이 성행을 하고 있다. 학교 앞에 서점을 열면 굶어죽기 알맞다는 말은 어제 오늘 나온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보여주는 것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지식은 쌓여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비전은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잠언 29:18절에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비전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위치를 지키며,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첫 번째 제목은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셋째, 성령이 임하시면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꿈과 환상은 다르다. 꿈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뉴프니온’이라는 말인데 ‘앞을 본다’는 뜻이다. 그러면 연세가 많은 노인들이 앞을 본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영원한 미래의 세계, 자신의 영원한 정착지인 천국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노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 때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됨을 말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사람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노인들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꿈을 꾸는 노인들은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증명된 말이다. 낮잠 많이 자고 꾸는 꿈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가운데 믿음으로 꾸는 꿈의 사람들은 치매에 걸릴 염려가 없다고 한다. 반면 연세드신 분들 중 ‘혹시 내가 치매에 걸려 자식들 고생시키면 어쩌나?’ 이런 걱정 많이 하면 할수록 치매에 걸릴 확률은 높아진다. 연구에 의하면 치매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이 있는데, 우선 충격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치매가 올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한이 많은 사람들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다음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왜냐하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일수록 죽음이 가까워지면 불안해진다고 한다. 특히 구원의 확신이 없고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안 된 사람일수록 그 불안은 더 심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자꾸 과거로 되돌리고 싶어하게 된다. 결국 옛날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 마음 때문에 치매가 온다고 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그 원인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는 기쁨이 없다. 감사가 없다. 그저 원망과 불평만 남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국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그렇지 않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영생에 대한 확신이 더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죽음의 문을 넘어 천국 영생의 삶을 살게 된다. 믿는 사람과 믿디 않는 사람의 차이는 죽을 때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생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다가 이빨이 다 빠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한 사람. 성령충만한 사람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천국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 어르신들이 되기를 바란다.
3. 성서는 언젠가는 끝이 있다고 말한다.(19-20)
19-20절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하나님은 마지막 때 피와 불과 연기로 심판하신다. 앞으로 이 세상에는 이런 변화와 역사가 많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도 세계는 지진, 화산폭발 등 기상이변과 전쟁, 테러 등 크고 작은 일들이 쉴 사이없이 일어난다. 불안한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들이 성령충만할 때 가능하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의 말씀을 통한여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셔서 자녀들, 젊은이들, 노인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된다. 지금 여기 있는 자녀들, 젊음이들, 노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았다. 곧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온다. 마지막 심판 때이다.
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의 주님,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고 불러야 한다. 누구든지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부르지 않는다.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없이도 오늘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21세기 과학과 기술과 물질의 사회 속에서 세상은 산악과이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히다. 세상 것을 다 갖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한다. 세상의 것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죽은 뒤에 갖게 된다는 영원한 세계, 신령한 세계, 영생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다. 육에 속하여 육의 것을 위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의 것은 잠간이다. 이 세상은 속히 지나간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잠간 잠을 자는 것과 같고, 화살처럼 날아가고, 나그네와 같고, 안개와 같다. 눈을 들어 영원한 시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신령한 것을 바라보면서 신령한 것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종말의 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준비해야 한다. 결혼식을 앞두고 신부가 곱게 몸단장을 하는 것처럼,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처럼, 도둑이 들기 전에 문단속을 잘하여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믿음으로 준비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 종말적 시간을 살고 있음을 알기를 바란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곧 주님 앞에 서게 된다. 주님 앞에 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사용되는 거룩한 환상을 보고,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영광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말씀 위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말씀 위에 우리 가정을 세우고, 말씀 위에 우리 교회를 세우면서 오늘 본문에서 요엘 선지자가 말하고 베드로가 말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 심령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10 성령강림주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