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14일 월요일
워크숍(workshop)을 떠났다. 평일 점심부터 시작하기로 했으니 대단한 사건이다. 그건 순전히 사진을 찍고 '내려온 돈'을 쓰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오전에 메신저로 전송된 '일정표'를 보고 참 의아했다. 실제 내용이 있는 건지, 어디까지가 실행될 것인지. 주무 부장은 '어디까지나 계획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래도 계획이지만 해지고 나서 하는 산행은 무리가 아닐까요? 금방 시간을 조정한다. 어차피 '계획일 뿐'이니까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1교시를 8시 30분으로 당겨서 하니 5교시도 12시 40분에 마친다. 아이들을 보내고 직원들은 오후 1시에 버스에 올랐다. 내연산 보경사까지 달리기에는 30분이 모자란다. 차에서 내리니 산바람이 차다.
진주식당에 들어선다. 참 오랜만이다. 아마 10년도 더 된 듯하다.
형식적인 의례와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는다. '도구 막걸리'라 부르는 '동해명주 생 동동주'에 묵과 파전이 안주로 나온다. 지난 주에 도구 막걸리 예찬을 하던 김 선생이 무척 좋아한다. 동해 동동주 원료는 100% 쌀로 빚었지만, 수입 쌀이라 아쉽다. 더욱 아쉬운 건 보경사가 위치한 곳은 행정 구역으로 포항시 북구 송라면이다. 송라면에도 보경 양조장이 있는데, 멀리 남구 동해면 도구 2리에서 만들어진 도구 술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보경사에 오면 보경 동동주를, 청하에서는 청하 막걸리를, 도구에서는 도구 막걸리가 제맛이 아닐까?
내가 사는 흥해에서도 흥해 막걸리보다는 연일 막걸리나 도구 막걸리를 파는 곳이 더 많다. 며칠 전 청송이 고향인 친구와 청송 막걸리 집에 갔는데, 실컷 먹다가 이집 막걸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니 대구 불로 막걸리라고 해서 뒷맛이 씁쓸한 기억이 난다. 하긴 고령에 가서도 대구 막걸리를 마셨다.
사하촌 식당엔 어디서나 나물 반찬이 맛있다. 배추쌈도 좋다. 요즘처럼 밤중엔 살짝 얼었다가 낮에 다시 녹았다 반복하여 맛이 고소한 배추잎을 절여서 내놓는다. 이 식당엔 또 전어 김치가 유명하다. 김장 담글 때 전어나 꽁치를 통째로 넣어서 곰삭힌다. 전라도에 톡 쏘는 홍어가 있다면 포항엔 알싸한 전어 김치가 있다. 미국에서 온 원어민 교사인 '아라'가 한 입 먹어보고 질겁한 특미다. 먹어본 사람만이 맛을 안다. 주요리는 닭백숙이다. 한 마리에 4만원이니까 한 사람당 만 원 꼴이다.
(음식 사진을 찍으려다 '약 올리느냐'는 항의가 있어 생략)
닭을 먹고 나면 쌀밥에 된장국이 한 상에 한 그릇 나오고, 닭죽은 개별로 나온다. 이때쯤이면 배가 불러 남기는 사람도 제법 있다. 한 시간에 걸친 성찬으로 포식하고 슬슬 일어서기 시작한다. 밖으로 나오니 '벌떡주'라는 요상한 이름이 붙은 술도 보인다. 술 용기도 참 '남사스럽게' 만들었다.
산행팀과 목욕팀, 그리고 잔류팀으로 나뉘어진다. 산행팀은 나를 포함하여 세 사람. 오후 세 시가 넘은 산골은 어느덧 해가 넘어가는 중이다. 계곡을 오르기엔 너무도 늦은 시간이다. 모처럼 보경사 경내만 둘러봐야겠다. 일찌감치 보경사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내려오던 어링불 선생을 만났다. 그는 우리와 합류했다.
지난 봄 노무현 대통령 서거후 문상하러 찾은 이래 다시 발걸음 하는 길은 고요하다. 입구를 지키던 800년 할배 회화나무 거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녕 아쉬운 일이다. 노쇠한 회화나무를 살리기 위해 노거수회에서 무척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금 그 나무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야생화를 심고 사람들이 돌아가길 바라면서 세웠던 팻말도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나 한사람쯤이사 하면서 질러다닐 때마다 이 멋스런 고목은 죽어갑니다"
노거수회 이삼우 회장님이 직접 만든 글귀다. 함께 힘을 쏟았던 상록원 이정호 형도 얼마전 고인이 되었다. 모두가 사라져 버린다.
나무가 서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매끈하게 포장되었다. 이젠 돌아갈 필요도 없이 편리해서 좋다.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버린다. 아마 사람들은 언젠가는 잊을 것이다. 아름답던 흥해중학교 교정도 흙과 나무를 없애고 시멘트, 우레탄, 인조 잔디로 덮어버렸듯이.
실컷 닭을 잡아 먹고,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사찰문을 들어서려니 뭔가 찜찜하다.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사천왕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넘어섰다.
안내를 자청한 어링불은 적광전 후불 탱화가 한국 대표 불화라고 소개한다. 성보문화재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의 불화 명품선집> 표지화에 실렸다. 술기운 없을 때 조용히 들어가 보자.
대웅전으로 가는 길. 파란 하늘에 매가 빙글 빙글 돌며 뭔가를 노린다.
점판암에 새겨진 원진국사비는 보물 252호이다. 사선으로 칼자국처럼 나 있고, 비석엔 깨진 흔적이 보인다. 빗금이 자연적으로 갈라진 것인지 일부러 낸 칼집인지 확실치 않다. 김 선생은 칼집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느 시절에 무슨 연유로 겪은 상처일까 궁금해진다.
비문은 고려 고종 때 이곳 주지 스님이셨던 원진국사(1171∼1221)에 관한 내용이다. 1224년(고종 11년)에 비문이 완성되었다. 고려 고종(재위 1213∼1259)때는 무신이 정권을 잡은 상태에서 몽골의 침략을 받은 시기다. 나라가 세계 제국의 발톱 아래 신음하고 있을 당시 이 지역은 어떠한 상태였으며, 보경사는 무슨 역할을 하였을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살펴볼 일이다.
원진국사(속명 신승형)는 13세에 출가하였고, 27세(1197년, 명종 28)에 승과에 합격한다. 명종은 허수아비 왕으로 실권은 무인들이 쥐고 있었다. 승형은 상상품이라는 최고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그다지 벼슬에는 뜻이 없던가 보다. 이후 진리를 향한 여행과 꾸준한 수행을 계속한다. 자고로 배움에 나서는 길은 끝이 없어야 한다. 능엄경을 깨치고 능엄선의 개조가 된다. 평생 득도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승형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왕의 자문을 맡은 왕사도 역임하고, 드디어 45세인 1215년 대선사의 자리에 오르면서 왕명(고종)에 의해 청하 보경사 주지로 취임한다. 과거 급제 18년 만에 최고 자리에 등극한 셈이다. 50이 넘어도 말단을 면치 못하는 수두룩한 공무원을 생각하면 부러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보경사 주지로 주석한 것은 7년밖에 되지 않는다.
요즘 여러 지자체에서 자기 고향을 빛낸 인물을 찾으려 무척 공을 들인다. 원진국사 신승형은 문경에서 태어나 청도 운문사에서 출가하였으니, 문경이나 청도에서도 연고를 주장할 법도 하다.
보물 430호 원진국사 부도를 보러 올라갔다. '아라'는 소나무 숲이 멋지다고 한다. 길을 다듬지 않았으면 더욱 멋질 뻔했다.
소나무 숲이 울창한 흥덕왕릉에 데리고 갈까.
탑신에 새겨진 자물쇠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질문한다. 8각형은 팔정도를 자물쇠는 소중한 물건을 넣어둔 집을 나타낸다. 어링불은 팔정도(the eight fold fath), 사리(舍利, sarira) 등을 영어로 설명하려니 힘이 드는 모양이다.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차가운 날씨에 날이 저물고 경내는 한적하다. 아라 역시 이러한 조용한 풍경이 너무도 좋다고 한다. 경내 스님이 얼마나 되는가 물어본다. 아마 열 명쯤. 그러고보니 참 넓은 공간치곤 실제 거주하는 이는 무척 적다.
잎을 다 떨군 나무들이 석양을 아쉬워한다. 기대했던 산행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내연산 계곡 물이 참 맑을텐데.
아참! 밑창 떨어진 등산화를 새로 바꿔야지.
산문을 나서서 다시 세속으로 돌아왔다. 잔류팀이 남은 동해 동동주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