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란, 그것이 아무리 좋은 역사라 할지라도 언제나 뭔가 시체와 같은 마치 묘지에서 나는 냄새를 풍긴다(괴테의 말이라고 기억하지만). 원효의 시대를 향해 사방에서 풍겨오는 묘지의 냄새, 그것이 원효로 하여금 역사를 새로이 보게 하였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백제의 공격으로 마을이 타고 사람들이 죽었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슬픔과 아픔이 남겨졌다. 문화나 과학면에서 그 시대보다 훨씬 앞선 오늘날일지라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지금도 캄보디아, 유고슬라비아 등 전쟁의 아픔에 시달리고 있는 곳이 지구상에는 많다. 지금 우리가 전쟁에 시달리고 있지 않더라도 매일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살인, 방화, 교통사고, 뺑소니, 산업재해, 지도자급 인사들의 비양심적 범죄행위 등등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이 많은 묘지를 보고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를 맡는다. 원효가 밤새 잠 못 이루고 시달렸던 묘지의 냄새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인류의 역사는 문화적으로 진보발전한다고 하지만, 이런 생생한 현실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맹목적으로 발전이라 생각하고는 행여 뒤질세라 수레바퀴의 안쪽을 부지런히 돌고 있다. 수천 년 동안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초등학생이 여름방학을 보내듯이 부지런히 흘러왔었다. 여러 가지 발명으로 인한 발전, 그럴 듯한 문화와 종교와 철학을 지니면서도 그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려하지 않고 표면에서만 맴돌았다. 그 표면에다가 껍데기까지 씌워놓았다. 수박 겉핥기는 그래도 수박이라도 만진다. 거기에다가 라카칠을 하고서는 만족해 한다. 마치 보지도 않을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책으로 장식된 넋 나간 사람의 거실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인류에게 신선한 광명을 비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지하고 겸허하게 보는 것이다. 그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하지만, 보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불교의 실천덕목은 팔정도에서 비롯되는데 그 첫번째가 정견이다. 그리고 정사유로 이어지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쳇바퀴를 도는 것이 아니라 실로 진지하게, 진실로 겸허하게 관찰하여야 한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 인류에게 광명을 비추는 것은 결코 대중운동이라든가 그런 류의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겸허하게 보는 데에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은 지혜이며, 지혜는 자비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무한한 자비에 바탕을 두지 않은 지혜는 진정한 지혜가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관자재(觀自在)'라 하는 것이다. 관자재는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서양의 지혜와 불교의 지혜는 여기서 그 개념을 달리한다.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 이것이 서양이라면, 불교는 주관적인 실험과 관찰이다. 예를 들면, 어느 고찰에 낡은 범종이 있다. 이것을 분석하고 관찰하는데, 그 구성비율이 구리가 몇 %이고 주석이 얼마이고 납과 인 등 기타 어떤 성분으로 되어 있으며, 다시 크기와 경도, 공명의 조건 등을 정확히 관찰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것도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진실을 본 것은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지혜이다. 냉철하고 명쾌하다. 이것이 인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라면 앞에서 말한 초등학생의 여름방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시 지루하게 역사의 쳇바퀴를 돌아야 한다. 범종이 한 번 울리면 그 소리는 골짜기를 울리고 마을을 스친다. 울리고 스치는 그 종소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였는가. 아픔을 달래며 같이 아파했고, 슬픔을 어루만지며 같이 슬퍼하였다. 사람과 종은 하나가 되어 자연 그대로가 된다. 모든 수식과 장식을 떼어버리고, 모든 유위를 떨치고 무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지혜이다. 불교의 관찰이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여기 수재민이 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수재민이다. 재산도 다 떠내려가고, 일가 친척이 모두 피해를 입은 데다가 남편도 죽고 자식도 죽었다. 그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서양의 지혜다. 그것을 나의 아픔으로 관찰하는 것이 불교의 지혜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아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식주관이 대상을 객관화하지 않고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자비 없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관자재는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지혜이어야 하는 것이다. 원효가 얻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진정 얻으려 하거든 먼저 버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버린 다음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버릴 것은 다람쥐 바퀴 돌듯이 돌아가는 상식, 윤리, 계율, 깨달음이며 선택하는 것은 오직 여래본원에 대한 신심인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중생과 하나가 될 수 있었고, 계율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상식이나 윤리, 도덕은 인간을 구제하지 못한다. 구제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수레바퀴의 다른 한쪽일 따름이다. 더욱이 기도나 주문 따위로 현세의 안락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 진지하고 겸허하게 보아야 한다. 원효에게 구도자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던 원동력은 자비와 지혜의 자각이다. 시체의 냄새가 풍기는 것을 고약하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체의 냄새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비가 있었기에, 그 악취 삼독번뇌를 통해서 지혜가 샘솟는 것이다. 그래서 점잖고 위엄 있는 원효대사를 버리고, 중생과 하나일 수 있는 복성(卜性) 거사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체의 냄새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시체일 수 있고 시체의 냄새일 수 있어야 한다. 악인을 악인이라 손가락질하고 `심판' 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며, 불자의 갈길이 아니다. 그 악인의 아픔을 같이 아파할 수 있는 진지함과 겸허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더한 악인이지만 선인인 척하는 위선자일 따름이다.'라고 나의 내면을 비춰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참회해야 한다. 원효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참회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그것을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들은 이 유일하고 진실한 삼보의 세계에 있다. 어떤 죄악도 더러움도 없는 세계에 있으면서도 귀머거리나 장님처럼 그 아름다운 세계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있다. 부처의 생명이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무명으로 인하여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밖으로 객관세계를 만들고 있으며, 나다 혹은 나의 것이다 하고 집착하여 온갖 업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스로 부처의 생명을 덮어버리고 진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은 마치 아귀가 강을 보고 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이제 부처님 앞에 깊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발보리심하고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참회해야 한다. 나와 중생은 다 함께 무한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무명에 취해서 그 지은 죄가 헤아릴 수 없다. 오역, 십악에 이르기까지 짓지 아니한 것이 없다. 스스로 지을 뿐 아니라, 그것을 남이 하도록 하여 놓고, 사람의 죄악을 헐뜯으며 기뻐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은 죄를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그것은 모든 부처와 성자들이 모두 알고 있다. 이미 지은 죄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아직 짓지 아니 했거든 지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大乘六情黎悔》
남에게 '나쁜 짓 하지 말라.'라고 할 게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나는 나쁜 짓만 골라 했던 악인이었다.'고 나무라며 스스로 안으로 부끄러워하고, 밖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참회할 수 있는 용기는 마치 《금광명경(金光明經)》 <사신품(捨身品)>에 나오는 마하살타(摩 薩 왕자의 용기와 같은 것이다.
원효는 스스로 중생임을 자각했다. 그것도 '하지하(下之下)'의 극악무도한 '복성(卜性)' 중생임을 자각하였다. 그리고 절망하며 방황하였다. 몇 번이고 '나는 대원효이다. 성자원효이다.' 라고 외치며 달아났지만, 원효의 절망은 더 깊어지기만 하였다. 그 절망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였으며, 버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린 그 순간 원효는 자연이 되었고, 우주가 되었고,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가 되었다. 그리고 본원진실(本願眞實)의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원효가 본 것이 아니라 눈을 떴을 따름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오탁악세를 윤회하는 것도, 피안에 이르러 열반하는 것도 모두가 큰 꿈이다. 눈을 떠라. 생사열반이 하나인 것을. 《無量壽經宗要》
본원진실의 세계, 그것을 정토라 한다. 본원진실이야말로 바로 정토사상의 핵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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