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출장준비로 자료를 조사하다가, 이런 글자를 발견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벵갈어! 타고르의 언어.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와 타밀이라는 언어를 만났을 때도 몹시 놀라웠지만, 형태학적
완전성만을 따지고 본다면 서남아시아의 언어들이 웬만해서는 벵갈어를 뛰어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글. 좋은 문자다. 단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웬만한 의지와 노력없이는 한글을 성심껏 써내려 가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추사의 ‘언간문’ 모음집을 살펴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한자쓰기의
달인마저도 한글 앞에서는 어찌 할 수 없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됨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한글쓰기의 달인들은 소위 사대부들이 아닌,
그들의 그늘에 숨어 살던 이름없는 몇몇 여인들뿐이었고, 이들이 이 남다른 글의 꼴을 얻기 위해 규방과 궁궐에 갇혀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만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글은 그 글꼴이 남다른 형태를 얻을수록, 내용 역시도 더불어 깊어진다. 이야말로 긍정적인 '꼴값'의 좋은 예로서, 다른 언어에서는 쉬이 접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입말의 성격이 강한 일본어에도 비슷한 지점이 포착되긴 하나, '매력과 실력의 동반상승'이라는 환상이 한글에서처럼 일상다반사로 나타나는 언어를 찾아보기란 극히 어렵다. 한글의 '낯'은 그 자체로 이미 '실력'이다. 한자의 낯과 그 문자를 부리는 이들의 마음이 쉽사리 어긋나는 것과는 영판 다른 상황으로서, 나는 한글을 일종의 '거짓말 탐지기'로 여겨보기도 한다. 싸구려 필상학 같은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한글을 거친다면, 물론 '제대로 된' 한글을 통해서라면, 언어주체가 '거짓'과 '허영'을 언어화 시키려는 의도가 한글 내부의 구조적 screening 시스템을 통해 자연스럽게 걸러지거나, 언어 수용자의 귀와 눈에 매섭게 포착되어야 마땅하다.
(k선생님의 어휘를 빌려 설명하자면) 한자쓰기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인’이 되어야 하지만, 한글쓰기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內聖外王의
한자는 언제나 눈부시지만, 그의 '한글'은 보장할 수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한자의 달인에서 한글의 달인으로 ‘회심’ 가능성은, 법장보살의
그 유명한 48원(四十八願)
중 18원과도 같은 남다른 의욕의 발심여부에 달려 있다.
한글을 잘 부리는 인간이 되는 일이란, 한자가 선사하는 구조적 '완벽함'을 향해 존재론적으로 저항하는 일이다. 성불보다 더 귀하고 중하고 급한 임무가 있음을 크게 외치며, 부처와 '맞장' 뜨는 일이다.
十八願: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 세계의 중생들이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제 이름[아미타불]을 다만 열 번만
불러도 제 나라에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좋은
인간을 만나 말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내 자신이 상대방의 말로 인해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음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듯, 문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자는
그 문자를 붙들고 있는 까닭에 더 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벵갈어나 중국어와 같은 문자들은, 인간이 그 문자를 매만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커질 수 있는 도구다. 이쯤이면, ‘문자’ 자체가 ‘선생’이나 다름없다.
안타깝게도, 한글에서는 그러한 heuristical teaching/learning의
알고리즘을 한눈에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한마디로, 한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그 수용자에게 아무런 ‘사건’도 ‘성장’도 발생할 수
없다. 한글은 언어사용자로 하여금 사용 그 자체만으로 더 좋아지도록 돕긴 힘든 언어라는 한계를 지닌 동시에, 원천적으로 더 나빠질 수 없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언어라는 가능성 또한 지니고 있다. 자기 자신을 무어라 '생각'하든, 한글을 제대로 쓰고 싶은 이라면, 한글 앞에서 무조건 아이가 되어야 하고, 여성이 되어야 하며, 노인이 되어야 한다. 그제야 한글이 지닌 '비밀의 문'은 빼꼼히 열린다. 이러한 한글의 특수성을 알지 못한 채, 어떠한 ‘태도’를 지닌 채 성심을 다하여 기도하듯 쓰지 아니하면, 한글은 한 평생 먹고 사는 일에
통용되는 ‘나랏말’로 그럭저럭 존재할 뿐이다. 한글의 가능성은 한국인들의 일상언어라고 하는 실용주의적 기반의 너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한글에 담긴 신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한글에
신비가 있다’고 하셨던 유명모 선생 같은 분은, 짐작컨대, 이제 다신 한국인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이다. 한국인들이
그러한 선지식을 더는 간절히 ‘호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불러야 오는 법’.
한글은, 태생적/발생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그 근간이 ‘겸허함’이다. 겸허함이 없다면, 한글의 세계에는 멋들어지게 진입할 수가 도무지
없다. 소월이 남겨놓은 ‘입말’로서의 한글과,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언해>(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諺解)가 담고 있는 ‘글말’로서의 한글의 엄청난 가능성은, 여전히 어딘가에 숨어 있을 뿐이다. 오늘, 내가, 우리가 만나는 한글은 그 거죽만 한글일 뿐, 한글의 정수에는 조금도 닿지 못하고 있다.
성불이
능사가 아니다. 성불을 수기 받은 후에도, ‘저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성불, 필요없다’고 부처를 협박하며 '협상'할 수
있는 실력이, 그 ‘품’이
진짜 부처다. 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는 길, 한자의 달인이
한글이라는 여리고 어린 글자 앞에서 공손히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이 평생 갈고 닦은 모든 필법을 잊고 포기하며, 그
여림을 환대하는 일. 이 그윽한 풍경을 잠시 상상하려는 순간, 서방정토가
내 안에서 찬란히 放光하신다.
한글이라는 신비의 한 꼭지가 바로 여기로구나.
* 그나저나, 출장 준비 하다 말고, 이 무슨
‘헛짓’인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