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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의 공동체 시장경제론과 民生
『민생 진보란, 진보를 외람되이 앞세워 분열을 만들고 우리사회 특권층이 그러하듯 합리성과 투명성 마저 무시하는 낡은 진보의 자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좌회전도 아닌 우회전도 아닌 오직 국민을 위해 전진하는 것이다.』
(손학규 2011. 5. 24 라디오 당대표 연설중에서)
서울 금천(광명)의 인물인 오리 이원익은 조선의 대표적 정치가이며 경세가이다. 조선사회의 최대의 민생개혁, 경제개혁, 재정개혁인 대동법은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100여년 걸쳐 추진되어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원익은 최초의 주창자 율곡 이이의 대공수미법을 개선하여 경기도에서 첫 실시를 하고, 대동법의 종결자 김육을 돕고 지원하여 전국적으로 실시되게 함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안정시킨다. 그는 『민생 이외의 기타 일은 모두 부수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1947년 11월 22일 경기도 시흥(현 서울 금천)에서 손학규는 교사였던 손병화, 양현자 부부 슬하의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병화는 교사로 생활하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교장으로 승진했지만, 그가 4살 되던 해인 195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후 손학규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손학규의 학생운동
1959년 경기중학교에, 1962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 손학규는 1964년 고등학교 3학년때 대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당시 국회의사당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 손학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끝나고 손학규는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1966년 대학 2학년 때에 삼성그룹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이 재벌기업 규탄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는 무기 정학을 받았다. 무기 정학 중에 데모를 해서 또 무기 정학을 받았다. 연이어 무기 정학을 받은 손학규는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나중에 학교로 돌아온 손학규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손학규의 노동운동
대학을 졸업한 손학규는 1969년 육군에 입대하여 1972년에 병장으로 제대하면서
군 생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세상살이의 산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군대에서 제대한 손학규는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구로공단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손학규는 진보적 기독교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박형규 목사를 만나 기독교 빈민선교운동에 투신한다. 도시산업선교를 통하여 노동자와 빈민의 인권문제를 위해 활동했다.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생활하던 손학규는 그 활동을 이유로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민주세력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유신독재체제는 박형규, 김관석, 권호경 목사 등을 구속시켰고 손학규를 검거하기 위해 현상금 200만 원에 2계급 특진을 걸었다.
수배자로 은신생활을 하던 손 지사는 원주농장에서 막노동을 했으며 합정동의 철공소에서는 용접일을 했다. 당시 동료 노동자를 얼마나 진실하고 겸손하게 대했던지 아무도 그가 수배자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 손 지사의 몸값이 집 한 채인 줄도 모르고 그를 좁은 방에서 끌어안고 잤다는 배옥열씨는 횡재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의 소탈함과 인간미에 끌려 아직도 당시 직공들 모임을 정기적으로 주선하고 있다.
대학시절 미팅에서 만나 7년간 연애끝에 결혼하였다. 군대, 피신, 감옥 등으로『면회』가 아니면 만나기가 어려운 커플이었다. 아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그는 쫓기는 몸이라 보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그는 몰래 공중전화를 이용하여 황진이 시(詩)에 곡을 붙인 『꿈길 밖에 길이 없어』를 부르곤 했다. 그러던 중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듣는다. 막내아들 학규를 키우기 위하여 동네의 인분을 모아 똥지게로 밭을 일구며 뒷바라지를 해주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쫒기는 생활로 점철된 막내아들 걱정으로 한시도 편한 세상을 못 사신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보려고 장례식에 왔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후 기독교 사회운동에 몸담았고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민주화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최성묵 목사 등을 만나 사후 대책을 논의하다가 수사당국에 검거된다. 김해 보안대로 연행되어 48시간을 무작정 두들겨 맞고 문초를 당하던 손학규는 유신독재체제가 붕괴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학자 손학규와 『우리의 딸, 권양』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봄, 손학규는 세계교회협의회(WCC)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서 영국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학위 과정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손학규는 5공 말기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여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키는데 기여했다.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다.
손학규는 1988년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진 고문에 처절했던 시간을 생각하며 학업에 매진하였다. 영국유학중 유럽여행 한번 못하고 귀국한 손학규는 1988년에서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1990년에서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교수로 역임했다. 교수 시절 동안 손학규는 진보적인 소장학자로 명성을 떨치며 최장집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한국 사회의 미래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손학규와 문민정부
교수로서 그는 마지막 수업시간에 『내가 무엇이 되는지를 보지 말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지켜봐 달라』 며 눈물을 머금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제자들을 위로했다. 1993년은 30여년간 지속된 군사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 대통령이 들어선 첫해였다. 김대중 총재는 대통령선거전 교수로 재직하는 서강대에 초청하여 후보와 학생들간 대화시간을 갖는 등 지원을 했지만 낙선한 김대중 후보는 선거에 떨어진후 정계은퇴선언을 하였다. 얼마 지나서 김대중 총재는 손학규 교수를 집으로 초대하여 도움에 고마운 마음을 표했고 이어서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의 90% 넘는 지지속에 문민개혁을 추진중이었다. 군부독재를 척결하겠다는『문민개혁』을 보는 손학규는 20~30대를 군부독재에 항거하며 처절하게 살아왔던 정치학자로서 문민개혁의 성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3년 4월 있을 광명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문민정부의 계속된 러브콜에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후보로 나서 국회의원이 되었다.초기의 김영삼 정부는 정치군인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 군사반란죄로 재판회부 등 이 땅에서 30여년간 지속되었던 군부독재를 척결하는 문민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해나갔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던중 그는 신한국당 대변인이 되었고 신한국당(민자당)과 국민회의(민주당)의 대립속에 진영논리속에서 정계복귀한 김대중 총재의 대응에 전면에 서야 했다. 1996년 11월 문민정부 마지막 내각구성하면서 약10개월간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어 현안인 한약분쟁 등을 무난히 마무리하고 모든 노동자의 기초적 사회보장인 4대 보험의 기초를 완성하였다.
2002년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된 손학규는 선거기간동안 『민생도지사』, ‘땀으로 경기도를 적시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고 지사 취임후 땀 흘리며 발로 뛰고 직접 협상에 나섰다. 이 기간 전국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의 71%를 경기도에서 창출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서울시는 지역내총생산(GRDP) 증가율은 연평균 2.83%로 일자리 증가수는 12만 2600여개였지만 손학규의 경기도는 연평균 7.55% 성장으로 같은 기간의 경기도 일자리 증가수는 74만 3600여개로 서울시의 6배가 된다. 2004년 4월 세계자동차 부품 1위 회사인 델파이 바텐버그 회장은 경기도와 투자협약을 체결하면서 “손지사는 추진력 있는 지도자이다. 미국에도 손 지사 같은 정치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손학규와 민주세력 통합
2007년 초 한나라당의 인기는 하늘높이 올라가고 열린우리당 인기는 바닦을 뚫고 내려갔다. 2007년 3월 그는 한나라당을 나왔다. 열린우리당과 여타 민주세력을 통합하여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는 데 역할을 하였으나,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정동영에게 패하며 낙선하였다.예상했던 바였다. 2008년 1월에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된 손학규는 대선패배후의 바로 이어진 18대 총선을 이끌었으나, 299석 중 81석을 얻는 데 그쳤다. 민주당 대표 손학규를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은 『50년 전통의 민주세력의 적자』라고 하였다. 민주세력의 적자란 서민의 편에서 이 나라 정치, 경제 민주화와 복지, 남북화해협력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고 실천하는 사람과 그 집단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통합민주당 대표직을 사임하면서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춘천으로 떠나 칩거했다. 2년여간의 칩거를 끝내고 두 번째 민주당 대표가 되었고 2011년 4월 분당에서 있었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며 국회에 복귀한다. 그는 민주당의 대표로서 2012년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대통합, 민주진보진영의 대통합을 반드시 이루겠다. 민주당은 희생과 혁신의 자세로 통합에 앞장설 것을 천명하고 시민사회, 한국노총 등과 끈질긴 협상을 통하여 야권의 대통합을 이루었다. 첫 번째 민주당 대표로서 통합을 추진할 때 언론은 독배를 마신다고 했다. 두 번째 민주당 대표에서 대통합을 완성하고자 자신의 작은 기득권도 모두 포기하였다. 통합을 이룬 민주당의 인기가 여론조사에서 7~8년만에 처음으로 새누리당보다 10%이상 높아졌다. 그러나 그 후 4.11총선은 민주당 공천과정에서 일부의 몫챙기기 등으로 이어져 참여한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고 국민들의 실망하였으며, 새누리당에 패배하였다.
손학규와 협동조합
손학규는 당 대표로서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와 보편적복지특별위원회를 가동하는 한편, 협동조합기본법을 만들기 위해 전문가들과 토론회를 수차례 열었다. 2011년10월 제정법인 협동조합기본법안을 민주당의원 73명과 공동 발의하였다.
이탈리아의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는 『협동조합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2009년 국제노동기구가 펴낸 보고서 ‘위기의 시대 강한 힘 협동조합 사업모델’에 따르면 2008년 국제금융위기 이후 협동조합은 각국에서 경제 위기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자리와 시장점유율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수많은 투자자 소유기업들이 경영진과 투자자를 위한 단기적 수익 창출에 몰입하다 연쇄 도산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이 같은 성과는 협동조합이 지속가능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100여년 넘게 검증된 성공적 사회경제 모델이다. 스페인의 명문 축구팀 FC바르셀로나, 미국의 AP통신, 썬키스트, 세계 최대 보험회사 알리안츠 등이 있다.
손학규는 박정희 유신독재와 맞서다 수배를 피해 도망간 곳이 강원도 원주였다. 당시 원주에서는 협동조합의 역사가 막 만들어지고 있을 때였다. 거기서 장일순 선생 등의 도움을 받아 과수원에 머슴으로 위장취업을 했고, 박재일 선생으로부터 한 살림 생활협동조합에 대하여, 이경국 선생으로부터 신용협동조합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다. 그는 협동조합의 공동 소유적 성격과 민주적 운영 원리가 경제민주화 정신에 잘 부합되고 매출액에 비해 고용비율이 높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민주당 동료의원들과 함께 만든 협동조합기본법은 2012년 12월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해방직후 조봉암 등에 의해 시작된 농업협동조합 운동, 1970년대 장일순 등에 의해 시작된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2010년대의 사회적 협동조합 운동은 힘없고 돈없는 서민과 중소상공인들이 사회연대경제를 통하여 숨이 턱턱 막히는 재벌중심경제를 극복하고 살 수 있는 활로를 찾길 기대하고 있다. 중소기업, 자영업자, 재래시장의 중소상인, 일용직노동자, 화물․택시기사, 대리운전기사 등이 협동조합을 설립해 이전보다 나은 경제활동, 대기업과 대등한 관계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은 항상 소수파 비주류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양반의 특권을 없애고 공평과세를 지향하며 국가재정을 반석위에 놓은 대동법은 백년이 걸려 이루었다. 착취의 대명사인 ‘지주제’를 폐지하고 농사꾼이 자기 땅을 갖고 농사를 짓는 경자유전의 토지개혁은 150년이 걸려 이루었다. 또 산업화와 민주화를 50년만에 이루었다. 그는재벌개혁, 경제민주화, 완전고용 복지국가도 협동조합이 한국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아 일익을 담당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손학규의 공동체 시장경제론
그는 2010년 8월 15일, 춘천을 떠나며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신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시혜적 복지, 잔여적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강조했으며 "진보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길이 추구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복지사회로서 공동체주의와 보편적 복지를 기본 이념으로 할 것"을 이야기 했다.그는 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며 자신의 철학과 정책을 담은 『저녁이 있는 삶』을 출간하였고 책에서 21세기 진보적 자유주의와 공동체 시장경제론을 주창하고 있다.
그는 20세기를 지배해 왔던 신자유주의의 철학적 오류를 말한다. 신자유주의 첫째 잘못은 사람을 도구화한 것이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단순히 경제행위나 돈벌이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회제도나 가치의 관행은 당연히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두 번째 잘못은 노동의 가치와 자본의 가치 사이에서 자본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풍조이다. 노동자를 경쟁과 효율의 노예로 삼으면 당연히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셋째 잘못은 개인주의를 절대화하는 사조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개인적 탐욕을 방치하고 공동체의 삶을 외면할 때 그 결과는 인간성 파괴와 파멸로 돌아온다. 개인은 이웃과 더불어 자유로울 때에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공동체 시장경제는 공동체 존립과 번영에 목표를 두고 국민의 행복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경제발전모델이다. 공동체 시장경제 역시 민주적 시장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한다. 공동체 시장경제의 핵심가치는 유럽형 복지국가의 핵심가치와 같이 사람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함께 협동해서 잘 사는 통합의 사회, 복지 공동체의 사회이다. 공동체 시장경제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원한다면 누구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완전고용 국가를 꿈꾼다. 또 공동체 시장경제는 1) 정의, 2) 복지, 3) 진보적 성장을 기초로 한다.
정의는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빈곤의 심화와 양극화, 불편등의 심화에 있고 이를 시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궁극적으로 경제민주화를 실현해 공정한 경제질서를 세우는 과제를 말한다. 재벌의 특권과 반칙을 바로 잡아야 한다. 재벌이 중소기업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하고 금융의 공공성, 건전성, 안정성도 강화해야 한다. 또 협동조합을 육성해 서민경제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협동조합운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회복과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업체의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계불안을 해소하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을 실현해야 한다.
두 번째 요소인 복지는 국민이면 누구나 혜택을 받는 보편적 복지의 길을 큰 원칙으로 삼고 사안에 따라 필요할 경우 선별적 복지를 추가하는 ‘함께 가는 복지’이다. 또한 복지와 고용이 함께 가는 복지를 지향한다. 일하는 동안 노후,질병,실업 등 비경제활동의 위험을 준비하도록 국가와 사회가 도움을 주는 생활 보장형 복지이다. 실업, 교육, 훈련, 육아, 가사, 은퇴, 장애 등에 관한 복지제도를 생애주기에 맞게 구조화함으로 국민의 취업을 돕는 고용친화형 복지이다. 이처럼 복지와 고용을 상호보완적 관계로 만들 때 성장도 하고 재정도 넉넉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세 번째 요소인 진보적 성장은 성장과실을 국민이 함께 나누어 갖는 경제를 뜻한다.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과실을 만들기 위한 성장도 진보의 과제이다. 유능한 진보에게서 국민은 안정감을 갖는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의 내용이다. 진보적 성장은 균형성장, 혁신성장, 평화성장을 추구한다.우선 진보적 성장은 균형 성장을 통하여 일자리를 만들고 고른 발전을 추구한다. 한국 경제는 물적 자본보다 인적 자본과 지식 자본의 축적에 의한 성장단계로 접어들었다.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혁신 성장이 동력이다. 생명과학, 로봇과학, 해양산업 등의 지식집약 산업이 중요하다. 또 에너지 다소비가 아니라 신재생에너지 그 자체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자연에너지는 에너지 문제 해결 뿐만 아니라 미래 산업 개발에도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다. 문화와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부가가치를 낳을 성장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이제는 평화의 성장이다. 세계경제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지만 한반도의 남단 한국은 사실상 섬이다. 이웃인 중국과 일본은 다르다. 한반도 평화는 진보적 성장의 필수 조건이자 새로운 성장 동력이다. 이러한 균형과 혁신과 평화를 바탕으로 하는 진보적 성장의 최종적 목표는 일자리 창출이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복지도 사회정의도 해결된다. 좋은 일자리를 통한 완전고용 국가이야말로 공동체 시장경제가 추구하는 이상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사람들의 운명도 좋아질까?
그는 말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인간의 운명이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의 조사 연구내용을 보면 기본적 필요를 충복시키는 소득수준을 갖게 된 이후에는, 경제가 성장해도 사람들의 행복감은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가 일정규모 이상으로 발전하고 나면, 그때 이후 정부정책의 목표는 경제성장 그 자체에 맞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누고 노사가 함께 협력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고, 개인의 삶과 사회의 발전이 병행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사회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 누구나『행복한 저녁이 있는 삶』이 주어저야 한다고 말한다.
저녁이 있는 삶
박치음 작사 ․ 작곡
하루 일을 마치고 비누향기 날리며
식탁에 둘러 앉아 웃음꽃을 피운다
떳떳하게 일하고 당당하게 누리자
모두 함께 일하고 모두 함께 나누자
저~ 녁~ 이~ 있~ 는~ 삶~
너의 기쁨과 슬픔은 나의 기쁨과 슬픔
이제 가슴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자.
출처 : 공감의 시대 원문보기 : http://blog.naver.com/shinepapa/60168949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