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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 외병도의 달
박 형 구
1.
‘외병도 우정의 위문 사절’ 현수막이 갑판에 펄럭인다. 화물선『페가수스』호가 팡파르를 울리며 포구에 닿았다….
사절단 일행이 외병도(外竝島)에 도착한 때는 예정된 오후 세시였다. 환영 깃발이 나부끼는 선착장 텐트와 그늘 막 둘레에는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확성기에서 국민가요가 멎고, 안내방송이 포구에 울렸다.
“여러분, 주목하십시오. 구호선박『천마 페가수스』호가 방금 우리 섬 마 을에 도착했습니다. 우렁찬 박수로 환영합시다…!”
이 소리에 끌려 갯가에 왁자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각종 위문품(구호용) ㅡ양곡, 의약품, 의류, 가전제품ㅡ 외에 10여명(실무진, 사물놀이패, 보도진)이 탄 갑판 위에서, 손을 흔드는 일행 가운데 초등학교 여자 어린이가 두 팔을 넓게 흔들어 보였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저 갑판 위의 송현애 어린이는…,”
준비된 원고 아닌, 즉흥연설이 모두의 가슴을 통째로 울렁거리게 한다.
“우리의 현애 어린이는 곧 이 외병도 섬 마을의 작은 달입니다! 비록 저 하늘의 태양과 견줄 수 없다 해도, 브라이트 문! 빛나는 작은 달은 곧 어둠을 밝히는 위대한 영상이 되고 남습니다…!”
천둥소리 같은 박수에 잠깐 멎은 연설이 다시 도도히 흘러나온다. “ㅡ저 선물은 이제 우리 마을 모든 가구가 빠짐없이 분배 받게 됩니다.
우리는 다 함께 아름다운 치장으로 별들이 뒤따르는 푸른 나라 높은 곳의 궁전, 외병도의 등불을 기리는『파란 마음 하얀 마음』축가로 환영합시다.”
하고, 송현애를 알리는 방송이 끝나자, 어효선 동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노래가 흘러나와 이에 일제히 합창하기 시작했다….
배에서 내린 일행이 동행한 사물놀이패의 주악과 방송 취재반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만국 깃발의 환영회장 텐트 안에 들어섰다. 소녀의 두 눈이 백사장에서 바라보이는 내구산(137m) 언덕 산마루에 날며 활짝 빛났다.
사절단이라 해도 취재진과 사물놀이 패를 빼면, G대 명예총장, 재해대책본부장, J대 병원 간호부장, 젊은 여변호사 외에 송현애가 모두였다. 마을 주민들은 만국기가 펄럭이는 별도의 그늘 막 안에 모여 간소한 세리머니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절단 대표의 환영 후, 재해대책 본부장과 조도면에서 온 면장 사이에 구호양곡. 의연 금품 배정에 따른 서류 체결이 있을 때였다.
몇몇 유지와 나란히 앉은 영광스러운 좌석에서 이날만은 목포에 함께 나가 이발하고, 새로 사 입은 남빛 무늬 화려한 티셔츠의 아빠와 미장원에서 파마하고 차려 입은 연초록 줄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엄마가 딸을 맞았다.
현애는 가슴이 터지도록 뿌듯했다. 아빠가 건강해서다. 아빠의 손을 꼭 잡고 활짝 웃으며 묻는다.
“아빠, 나 안 반가와…?”
“너 보려고, 염라대왕께 천천히 잡아가시라며 빌고 왔어요ㅡ.”
비아냥대는 아빠의 익살이 조금도 밉지 않았다, 환자란, 의기소침해 타인의 건강을 부러워 할 정도고 보면, 귀여운 딸에게 던진 아빠의 서운한 말투에는 훨씬 과거에 만성이 돼 있었다.
아빠의 허리를 휘감고 응석부리듯 얼굴을 비벼댔다. 아빠가 싫지 않았다. 소녀 쪽에서 서두르지 않고 아빠의 노여움을 삭히듯 숫기 좋은 버릇이 더 앙증스러웠다.
“하지만 아빠의 밥상머리에서 올 여름, 나 물 말은 꽁보리밥에 오이고추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지내고 싶다….”
이때 아빠의 웃음소리가 처음으로 가슴을 울렸다. 너무 아름다워 현애도 따라 웃었다. 지팡이로 땅을 두들기며 날리는 웃음은 듣기에 희한했다. 마치 뱃고동 소리 같은 폭소에 마을 사람들이 의아해하지 않는가…!
늘씬한 키로 접근해오는 변 명예총장이 현애의 아빠 앞에 짐짓 웃으며 성큼 악수를 청했다. 현애 쪽에서 얼른 아빠께 귀띔했다.
“그날 전화 문병하셨던 변미숙 선생님 아버님이셔요!”
딸아이의 소개에 후다닥 당황하는 아빠의 몸을 소녀 쪽에서 고추 세우자, 세련된 웃음으로 화려한 인사말을 유유히 부드럽게 수놓았다.
“참 훌륭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놀랐어요. 농담 좀 할까요? 이 영특한 현애가 친 딸 모양 귀여워 양녀로 삼고 싶을 만큼 정이 들었어요.”
언제 변 간호사가 올라왔는지 현애를 와락 힘껏 껴안아 보였다.
“아저씨, 착한 현앨 두셔서 얼마나 행복하셔요?”
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섬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는 이유는 단지 예상외의 ‘많은 선물의 답지’라는 사실에 있지 않았다. 이를 통해 어떻게 부흥과 재건으로 이상향을 촉진해 나갈까, 필요한 결의와 각오를 새롭게 해 사절단 일행을 반겨했다.
마을의 번영, 나아가 지역발전의 원동력은 주민의 애향심에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웃사랑의 정신으로 서로 받들고, 섬기는데서 발전이 가능하다고 변 명예총장은 주장하고 싶었다.
다행히 외병도는 주민결속에 바른 이해를 지닌 모두의 협력으로 무한한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다 할 설비도 없는 이 낙도 벽지 황량한 남녀의 인정 풍속의 오늘이 무궁한 향상의 기대감, 그 전부였다….
이제 도서 갱생을 위해 미력한 자세로 더욱 뭉쳐 일 하려고 긴축주의를 채택해, 즐거운 잔치까지 마음의 환영으로 감사하고 있어, 사절단의 마음을 더없이 훈훈하게 적시고 남았다.
2.
어둠이 섞갈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갯마을이 발끈 뒤집혔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바닷소리…! 딸, 엄마. 할머니를 부르는 지친 목소리로, 그 요란한 어둠을 쫓듯 등불이 한들한들 춤을 추고 있었다.
돌아오거나, 마중 나온 가족들이 왁자하게 낮은 구릉을 타고 휘청거렸다.
송현애의 모습이 허둥지둥 당황해하는 군중 안에 겹쳐 울먹이는데 엄마는 그곳에 보아지 않았다….
이태 동안 가뭄에 찌들어 낮 밤을 걸러온 엄마였다.
“어딨어, 엄마ㅡ!”
엄마는 지쳐 해안선 가까이서 쉬는지 모른다. 근래에 부쩍 쇠약한 상황이었다. 현애는 손전등을 치켜들고 한달음에 해식애 밑 파식대로 뛰어갔다.
“엄마! 내 소리 그새 잊은 거야? 목청이 터지도록 찾았는데…”
짐작한 대로 엄마는 바위 위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현애는 바짝 다가들며 와락 껴안듯 반갑게 소리쳤다,
딸아이의 호들갑에, 목이 죈 말투로 짧게 탄식하듯 어린것의 손목을 더듬는데 엄마의 두 눈이 반짝했다.
“현애냐…? 오ㅡ 네가 왔구나,”
“많이 아파요? 어서 업혀요, 약국에 가게—!”
“난 괜찮다, 동생들을 돌보지 않고 왜 나와?”
“엄마가 아프면 싫어! 내일부터 내가 할 거야…”
“고맙다만, 안돼요. 아직 바다에 들기에 위엄해!”
엄마의 속삭임은 처음부터 솜털처럼 아늑했다. 현애에게는 그것이 쓸쓸한 생각을 불러 일으켜 싫었다. 엄마의 발끝에 흩어져 있는 후줄근한 미역 뭉치가 한결 무겁도록 부풀어 있어 현애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네 눈엔 미역 뭉치가 작아 뵐 거다. …글쎄 물때가 늦어 많이 벨 수 없 어. 이걸 네가 이고 가야겠다.”
하고 딸에게 미역 뭉치를 이어주며 손전등을 받아든 엄마가 한 걸음 앞서 파식대를 걷는다, 모은 것 없이 가난해도 딸에게는 그것을 탓하지 않고, 살아보려는 엄마의 마음씨가 더 없이 흐뭇해 보였다.
“엄마 내일 낮부터 내가 나갈게—!”
그 제의에 펄쩍 뛰는, 해학적인 엄마의 반전…!
“싫다. 나더러 너 대신 이 나이에 학교 공부나 하라고?”
현애는 엄마의 익살 섞인 농담이 듣기 좋았다. 때문에 이 때다 싶어 —다음과 같은 계획을 들춘다는 의도가 불효한 줄 알면서도ㅡ 불쑥 서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나 이해해 주겠지?”
“뭘? 글쎄 바다라면 안 된다니까…!”
“나 광주 가게 해줘…! 날 데려가겠다는 분이 오시지 않았겠어?”
“학교도 마치지 않고, 남의집살이 생각을 해?”
“식모는 무슨ㅡ? 양녀가 될지 누가 안다우?”
“양녀…? 그래 널 대학까지 가르치겠다던—?”
“이따가 우리 집에 오신댔어.”
현애의 얘기에 엄마는 짐짓 흥미를 싹 잃고 말았다. 찾아올 사람이 젊은 여성이란 선입관에서 인지 모른다. 엉뚱한 생각에 미리 말끝을 끊었다.
“아빠가 참치 잡이 잘 하시는지 몰라! 오시려면 아직 한 열흘 더 기둘러 야 해… 나로선 널 내보내지 않겠다.”
그 답변은, 현애에게도 토끼 풀(Shamrock)에 스쳐가는 바람만큼이나 무의미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영국함대가 진도해역을 항해하다 이 외병도를 보고 ‘샴록 아일랜드’(토끼 풀 섬)로 지도에 표기할 만큼 역사성이 있다.
외병도는, 진도에서 서쪽으로 동경 125°56’ 북위 34°22’에 있는, 산자수려한 다도해국립공원 해안선 6km의 백사장 멀리 새벽이면 들려오는 파도소리 해조음 따라 소철 모양 바람도 웃음도 다 접은 채 섬사람이 늙어온다….
코를 찌르는 해초냄새에도 우리의 송현애는ㅡ, 은금의 모래알이 빛을 잃지 않았으며, 봄 동백이 진 뒤 오월의 해안에 어우러진 해당화 향기를 거르지 않고, 똑딱선 위로 나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큰 꿈을 은밀히 가꾸어 왔다.
면적 0.60㎢의 쟉은 섬은, 생김세가 갈매기를 닮았다. 그래서 소녀는 바깥 갈매기라며 늘 함께 밖으로 뛰어날고 싶어 해왔다….
저녁상을 물릴 때, J대 병원 부장 변미숙 간호사가 찾아왔다. 조각처럼 강렬하고 선명한 야성적인 얼굴인데도 그녀의 말재간이 명주처럼 능란했다. 현애가 마음에 든 까닭을, 친 동생 혜숙이를 쏙 빼닮은 이유에서였다.
“현애를 동생 삼으려는데 가서 함께 살 수 없을까요?”
물론 그 정도로 설복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 다시 용기를 불러 모았다,
“얘는 이 섬에 두면 크지 못해요, 도회지에 나가 마음껏 뛰고, 날게 해 야 합니다. 예속 보다는 독립을, 순종보다는 나를 가꾸고 되찾는 무한한 가능성에 현명한 눈을 뜨도록 똑바로 보살피고 싶습니다.”
“나는 못 보내요! 얘 아빠와 상의해서 결정할지 어떨지….”
변 간호사는, 그러나 더 망설이지 않고 내일 함께 떠날 결론을 받아냈다. 현애는 기뻤고, 엄마는 울음으로 밤을 퍼내듯이 쉬지 않고 눈물을 닦아낼 도리밖에 더 없었다….
3.
마을을 떠나던 날—, 현애는 밤사이 놀랍게 성숙할 만큼 몰라보게 예뻤다. 풀 기운 깔깔한 새하얀 무명 블라우스에, 쪽빛 무명 짧은 스커트로 150cm의 신장이 삼복더위를 홀랑 몰아내듯 청초해 보였다….
종이에 싼 마른 미역 뭉치를 변 간호사 몫으로, 또 옥수수와 감자 등 점심 도시락을 따로 보자기에 싸주었다. 그리고 엄마는 당부했다.
“너 변 선생님 눈에 나지 않게 고분고분 잘 지내야 해, 응? (변 간호사 에게) 우리 현애 믿고 맡길 게요, 방학 끝나기 전에 꼭 집에 한번 보내셔 요, 아빠를 만나게 해야 되니까요….”
“약속하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그리고 현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 엄마께 직별 인사 해야지?”
“엄마, 잘 다녀오겠습니다. (또 동생들에게 손을 흔들며) 복돌아, 영애야, 다들 울면 안 돼, 엄마 말 잘 듣고, 또…,”
현애는 목이 메, 다음 내용을 더 잇지 못하고 흐느끼며 돌아섰다. 변 간호사 쪽에서 현애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배에 올랐다.
외병도는 변덕스런 계절풍으로 날씨가 고르지 못한데 그날은 여름철 쾌적한 바람에 코발트블루로 구름 한 점 보이 않아 섬 북동쪽에 우뚝 솟은 내구산이 한결 수채화처럼 쾌적했다.
동화의 세계로 유혹하던 서남쪽 길쭉한 해안선의— 파도에 깎여 형성된 높다란 해식애(海蝕崖 Sea Cliff) 경관이 그날따라 달려가고 싶은 충동으로 소녀를 썩 몽롱하게 했다…,
목포항 도착 3시간 뱃길은, 외병-내병-목도-성남-쉬미-목포로 이어진다.
정오 넘어 목포항에서 내린 변 간호사와 현애는 번화가에서 스파게티로 점심을 때우고, 도시락 꾸러미는 풀어 보기조차 생략했다.
그들은 기차를 타려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 고속버스 표를 끊었다.
“넌 마음이 살찔 것 같지 않니? 창밖으로 스치는 저 들판ㅡ! 뭐겠어? 쌀 이 되는 벼라는 거야.”
“가뭄에, 홍수에…, 다들 바쁜데 제가 기회를 잘못 얻은 게 아냐요?”
그 반응에 변 간호사는 소녀의 입술을 가볍게 튕겨보였다.
“요 깍쟁이…! 이제부터 광주에선 머릴 푹 식히는 거야.”
변 간호사의 저택은 남구 봉선동 울창한 숲속에 있었다. 십자가 표지『천주교 교우의 집』문장이 붙은 정면 현관의 격자문 기둥이 호화로웠고, 문 안 노거수 은행나무에서는 현애를 환영하는 매미소리가 엄청 요란했다….
현애 자신이 TV 드라마에서 본 귀족사회 풍토를 현실로 체험하기는 난생 최초였다. 변 간호사를 닮은, ㅡ오른 팔목에 하얀 진주 묵주를 낀ㅡ 우아한 노부인이 현애를 보자 선득 피붙이를 맞듯 반색했다.
“옳아, 네가 그 현애 어린이구나! 어쩌면 혜숙이로 그냥 착각하겠다.”
하면서, 노부인의 코믹한 표현에 현애도 반사적으로 으쓱할 만했다.
소녀가 명랑해지기는, 며칠 후 칠월 셋째 주일이 가까워서였다. 변 간호사도 그렇지만 가족 가운데 노부인과 할아버지의 친절이 도착하던 날의 예상보다 흡족하게 손녀를 보살피듯 챙겼다.
그런 환경에도, 이해심 적은 아빠 생각, 때로는 고향 일로—, 켕기는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분히 적응하기에 버거운 일로 어쩔 수 없이 성격이 바꿔진다지만, 그래도 피맺힌 가족과 다르지 않았다.
성격이나 식성, 소질 등을 참작해 동화되고 싶은 이 귀족 집안의 어른들이 너무 높은 제도의 벽을 의식하게 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학총장을 지낸 학식이나 교양이 몸에 밴 영향에서의 생활의 반응 탓만도 아니었다….
근엄한 할아버지가 모처럼 현애를 향해 ㅡ어떤 의도에서였든지 온가족이 모여 앉은 오랜만의 아침식탁에서—, 갑작스런 기발한 이벤트를 제의했다.
“귀여운 현애공주를 맞아, 한발에 신음하고 있는 외병도 섬마을 주민을 돕는 서민적 삶의 찬미 아닌, 부조리를 청산하고 싶구나ㅡ”
“대응 방안으로 ‘자선 예술의 밤’ 의연행사에 착수하게 해주세요!”
하고, 딸 쪽에서 선뜻 자기 결심을 굳혔다. 이에 노부인도 흔쾌히 찬의를 표해 모두 박수로 이를 채택했다.
그 불타는 의지나 이미지는— 아버지 변 명예총장의 착상을 기대하던 와중에 얼굴 가득 채운 일련의 가벼운 흥분을 지우지 못했다. 평소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해온 입안자답게 즉석에서 구상 플랜을 브리핑할 만했다.
상기된 눈빛이 두드러지게 밝아진 변 부장 쪽에서 각지의 의대 동아리를 모두 동원하겠다고 별렀다. 변 총장은 재해대책 협의회 상담역을 맡았기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 의기양양했다.
‘가톨릭 농민주일’ 날 아침—, 그는 일부러 침묵해 있던 소녀의 손을 번쩍 들어, 아침 식탁에서 만장의 주역임을 홀연히 일깨웠다. 그러면서 ‘식전기도’ 앞에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ㅡ‘저희 보호자이신 희망의 주님, 미증유의 한발 재해로 고통과 불황을 겪고 있는 외병도 송현애의 애향농민들을 위로해 주시고 보살피시며 무 더위에 건강을 잃지 않게 하시고, 사랑의 손길로 저들의 재활을 도와주시 며…,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생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을 저희로 하여 찾아 실천하게 하소서.’
처음부터 침묵을 일관해온 현애는 다만 국외자로 존재하고 싶었을까…? 더욱이 ‘식후기도’ 후, 변 부장이 소녀를 위해 엄숙하게 마음의 징을 울렸다.
“우리 송현애 공주님은ㅡ, 국외자처럼 을씨년스러우신데, 아니야, 이 행 사의 주빈이거늘! 장미 중의 장미, 이벤트의 진주임을 선포하노라…!”
그 찰나, 찡ㅡ 하게 소녀의 고막이 울렸다, 할아버지와 그 가족의 열광적인 박수소리…. 여기 송현애 어린이의 첫 감사 말씀 내용을 옮긴다—.
“ —남해안의 이름 없는 외병도 주민과 저를 위한 찬양의 말씀에서 몸 둘 곳을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또 선생님! 참으로 감격스러운 격 려의 말씀과 뜨거운 박수에 왈칵 눈물이 복받쳤습니다.
저는 이 찬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요. 하지만 훌륭하신 어르신들께 서 사랑으로 북돋아주신 저 송현애 또한 외병도 황량한 섬마을의 무명 소녀로, 조금은 애향민의 가난한 딸로ㅡ 용기를 일구어주신 도민 여러분 을 위해 제 온 힘을 아낌없이 마을 재건에 바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남구문화예술회관—.
팔월의 풍경을 내리 질러, 중후하게 문화의 전당 정면에 ‘재해지 외병도 주민 돕기 자선문화의 밤’ 대형 무명천 플래카드가 지레 꿈을 헹구고 있었다.
광장층계를 올라, 이층 로비에서 보는 현란하고 정교한 서예, 공예품의 짜임새 있는 진열…. 변 명예총장의 간곡한 권유로 저명 작가들이 출품한, 지력과 색체 감각이 투철한 자선전 앞에 응결된 진지한 군상을 본다.
주최 측 개막 취지에 공명하는 추세에서도 성공적인 아이디어였다. 저 영혼 깃든 견실한 자기 수련으로, 이 나라의 약진도상에 공해의 근원인 반상품 산업 폐기물이 더 기웃거리지 않기를 웅변하고 있었다.
잠시 후, 홀 안 확성기에서 공연 안내 방송이 울려나왔다. 관람석을 꽉 메운 입장자…, 백의의 두 천사가 갈매기 섬(외병도)을 보듬은 무대장막이 팬터마임에 대표되는 조소적 수사법으로 군계일학 격이었다.
저녁 일곱 시— 아직 해는 회관 빌딩 비상계단에 걸려 있었고, 냉방이 가동된 밝은 홀 안은 줄잡아 성인 육백 명이 앉아 있었다. 대충 정부기관. 사회단체, 중소기업 간부와 유지 일행이다.
송현애와 그 일행이 맨 앞자리에 보였다. 특히 우물 안 올챙이 같은 소녀는 애초부터 가슴이 쿵쿵거려 앉아 견디기에 마비될 만큼 벅찼다. 곧 징이 울리면서 커튼이 오르고, 서막이 열렸다….
울긋불긋 눈부신 서늘한 한복—, 합주단의 흙색 알토C 거위 형 도자기 13 구멍 악기가 이채로웠다. 자주운영 악단 백 명의 여성 오카리나 합주단이 관중을 긴장하게 했다.
변 부장의 사회로 첫 연주가 시작됐다.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팡파르』(R. G. 시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ㅡ. 오카리나 연주단의 찬연한 뉘앙스, 우아하고 델리킷한 메커니즘이 새로운 특징이었다.
뛰어난 역량이 인정된 여성 멤버 구성 오카리나 합주단은 전체 음향의 융합에 악센트를 둔ㅡ, 유쾌하면서 고상하고 정열적인, 섬세하고 완성된 앙상블…, 수준 높은 세계의 연주를 긍지로 단아한 품위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두 번째는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레퍼터리가 바뀔 때마다 청순한 감동, 환희와 긴장으로 듣는 이의 감정을 부시게 했다.
“다음은ㅡ”
하고, 사회 쪽에서 현애를 보다 말고, 일렁이는 말투로 소녀를 소개했다.
“오늘의 꼬마스타 송현애 어린이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송양은 우리나 라 서남해안 다도해 국립공원 외병도가 배출한 천재 소녀 웅변의 달인으 로 모처럼 올리는 은혜의 보답 인사에서, 감명을 받으실 것입니다.”
사회의 예정된 안내, 현애의 무대 등장 따라… 전광석화이듯 박수와 갈채가 어쩌면 새벽 햇살의 빛 무늬처럼 반짝 불타올랐다. 마이크 가까이 다가서는데 씻은 듯이 조용해진 침묵과 적료….
텅 빈 진공지대가 된 장내는 마치 약속된 기다림으로 숨죽어 있었고, 단비가 묻어오듯 마치 망각의 들판에 소녀의 목소리가 촉촉이 흘러내렸다ㅡ.
“저는 전남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맨 끝 서북단 외병도에서 온 조도초등 학교 육학년 열두 살, 송현애입니다.”
그리고 탁자의 글라스를 보며, 입술을 축인 후…
“…지도에조차 전혀 표시되거나 기록돼 있지 않는 섬, 한 면소재지에 유 인도 서른다섯, 무인도 백스무 섬이 바다에 촘촘히 박힌, 마치 새떼 와 같다는 조도열도에서 올라왔어요.”
하고, 고개를 꾸뻑했다. 우스갯소리 같은지 객석에서 모두 웃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희 외병도 마을 재해 돕기에 분에 넘치도록 왕림 해 주시어, 못 산다는 가난에 짓눌려 울면서 고통 받는 몸부림이 더 없어 야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몇 차례고, 반복해 다짐해 보았어요.”
마치 영전(榮典)을 수여하는 칙서 같이 현애에게 이번엔 소나기로 몸을 적시는 환호와 박수의 함성…! 소녀는 해학적인 어조를 재간 있게 구사했다.
“…빛나는 모래톱과 비단 같은 해송으로 남국의 꿈이 가득한 저희 외병 도 주민은, 그러나 극심한 가뭄 식수난에 목말라 여러분을 기디립니다.”
흥건한 빗물에 젖는 밭곡식만큼이나 감동된 청중의 눈빛ㅡ,
연단을 내려오는 소녀는 자기 목소리가 자꾸만 떨려 불쾌하게 느꼈어도 뉘우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자리에 돌아와 앉자, 총장 할아버지가 현애의 손을 덥석 쥐고 흔들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네 인사말, 아주 훌륭했다! 아침식사 때 네 엄마가 보내주신, 뽀드득 씹 힌 돌미역 냉국이나 미역무침의 감칠 맛 만큼 아주 썩 상쾌했어요.”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돌아가면 꼭 엄마께 전하겠어요.”
현애는 가슴이 화끈할 만큼,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제 이부 사회가 바뀌었다. 녹색 투피스의 여성은 팸플릿에 변호사로 소개된, 변 간호사와 대학동문이었다. 관능적이고 자유분방한 체격에 차가운 고전미를 띄고 있었다.
막이 오르면서— 명작 발레『호두까기 인형』무용수들이 출연했다. 그때 무대 옆 비상구에서 변 부장이 손짓으로 현애를 불러냈다. 외삼촌이 보였다. 웬 일인가, 말라붙은 고구마 밭에 물을 대고 있어야 할텐데…?
외삼촌의 귓속말은—, 오키나와 근해 어장에서 참다랑어 선박이 전복돼 아빠가 위독하다고 했다. 이 충격이 현애를 바로 실신하게 했다. 외삼촌이 무대 뒤 대기실에서 한참 만에 회복된 소녀에게 조심스레 그 전말을 밝혔다.
“시방 집에 누워계신다. 내게 너만 데려오라고 엄마가 저리 성화셨다. 다 분히 절망적일지도 몰라—.”
아니, 지금 쯤 운명하셨다면? 순간 소녀는 눈앞이 캄캄했다….
5.
변 총장 부부가 딸의 연락을 받고, 대기실로 달려왔다.
“그래, 방금 들었다만 우리 현애 공주! 얼마나 상심이 크니?”
핸드폰 통화를 건네고 있는 수척한 외삼촌—. 그 곁에 현애가 암담해 있는 광경을 보고, 창백해진 노부인이 침통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냉큼 통화를 끝낸 외삼촌이 노부인 내외에게 깍듯이 인사드리고, 여유 있게 웃음 띈 말투로 분위기를 일전시켰다.
“걱정을 끼쳐 죄송해요. 제 자형께서는 이제 약간 우선하십니다.”
반백의 머리에 변 총장이 쌍꺼풀 진, 갈색 눈을 번득이며
“그만해서 얼마나 다행이겠소? 돌아가면 이쪽 병문안 잘 전해 주시고, (이번엔 소녀를 향해) 내일 아침 널 목포 병원에 내려 보낼까 했는데, 할 일 이 좀 많다. 부모님께는 위로전화 올리고, 공연장으로 가자.”
그들이 행사장에 돌아올 때ㅡ 제 이부 순서가 끝날 무렵이었다. 광중은 무대의 흥겹고 요란한 사물놀이 한 마당에 혼연일체 넋을 잃고 있었다.
변 부장이 급보를 알렸다, 난파 원양어선 현애아빠의 슬픈 소식이었다. 누군가 일어서서 반사적으로 외쳤다. 출입구에 의연금 모금함을 마련하자는 긴급동의였다. 기뻐하는 쪽은 객석의 탄성과 갈채의 폭발이 아니겠는가…!
이 폭발적 피날레 ‘행동의 궤적’이ㅡ, TV 지상파와 ‘종편’까지 머리기사로 파급돼, 이제 세계인의 휴양시설, 캠프장 활용의 명소(?) 등…, 일약 몸바꿈 하게 될 다큐멘터리 에세이로 군림할지 모른다.
천 팔백 년대『대동여지지』에 ‘징섬’ 또는 ‘장기미’로, 영국지도에 ‘토끼풀 섬’이라고 쓰였던 외병도의 그 진상(眞相)이— 이제 본격적으로 일깨워졌다. 물질산업이 생성한 그것은, 또 하나의 풍속 사상으로 전환된 것이다.
활자·영상·오디오·비디오,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가 외병도를 매스컴으로부터 다이렉트 한 기회를 탈회화한 경향이었다.
업계는 섬 마을로 시판 생수의 대량 수송에, 의료업계는, 하절 방역을 위한 의약품과 기술 제공, 공해 방지와 생활개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극한 상황의 사회도의가 저널리즘의 허구화 노정 상업주의에 함몰되는 경향이다.
전국 규모 이만여 명의 호응으로 방대한 구호금품(양곡·의류·의약품·선박유류·가전제품 오십억 원 상당과 현금 십억 원)이 답지됐다. 변 명예총장 가족의 기획 섭외와 전국 재해대책 기구의 협조, 그리고 무수한 독지가의 성금이 그 전부였다.
구호품은 목포해운회사에 의뢰한 전세 운항 화물선『천마 페가수스』호 편에 미리 발송하고, 다음날 일행이 무안 행 여객기를 이용하는데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기뻐 외치는 쪽은 변미숙 간호사였다.
“오우ㅡ 외병도에 비를 몰고 가는 전천후 사절단이네…!”
하면서, 세상 처음 비를 보듯, 우쭐거리는 현애를 껑충 들어 상기된 뺨에 소나기처럼 몇 번이고 뽀뽀를 퍼부었다…. ♠
■ 박형구(德庵 朴馨丘 1928ㅡ)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아동문학회 회원. 소설집 《환상,그 빗속을 향하여》 《그 지성의 창변》 장편소설 《구름아, 저 구름아》 동화집 《별난 나라 여행기》 시집 《종이여 울려라》 소년소설 《녹색혁명》 《카인의 환상》등. 2011 梅泉 黃玹文學大賞 등 수상. 503-758 광주 남구 봉선중앙로 46. 107동 1207호(봉선동. 삼익아파트) 062-675-0891. 010-3641-0891. homepage: http://blog.daum.net/journal-9. ⟪銀河의 宮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