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40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시각에는 절대, 아무것도 부탁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엄마는 출근 준비로 바쁘다. “엄마, 나 숙제장 다 썼어. 돈 줘.” “아침에 그런 거 말하지 말랬지. 엄마, 바쁘잖아.” 한쪽 눈썹을 그리면서 엄마가 대답했다. 엄마에게는 시간이 중요하다. “숙제장 꼭 사야 해. 돈 줘.” “스타킹을 어디다 뒀더라?” 엄마는 들은 척 만 척 거실로 뛰어갔다. 가족이 모여 있는 시간에 진정으로 따뜻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지만 나는 왠지 더 외롭다. 식구들 모두 내가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아, 좀 비켜. 아빠한테 가서 달래.” 현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만지는 엄마를 보며, 나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숙제장을 오늘도 안 가져가면 벌써 세 번째다. 우리 선생님은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다가 그 길로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른다. “엄마, 간다! 조심조심 다녀.” ‘응.’ 마음 속으로만 작게 대답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젯밤, 오락에만 정신이 팔렸던 게 후회되었다. 쿵! 엄마가 현관문을 닫고 나가니 ‘아빠’라는 단어가 잠시 내 마음을 흔들었다. 살짝 갈등이 됐다. 하지만 역시 아빠를 깨우는 건 무리다. 아빠는 이번 주에 아침 퇴근이다. 아빠는 택시 기사인데 한 주는 아침에, 한 주는 저녁에 퇴근한다. 지난 주에는 저녁에 들어왔으니 이번 주는 아침이다. 아침 6시쯤 잠이 들면 점심 1시 정도에 일어난다. 일어나면 아빠는 운동을 한다. 줄넘기, 역기 들기, 복싱, 태권도, 합기도, 수영, 보디빌딩 등을 거쳐 차근차근 발달된 아빠의 근육을 보면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아빠 근육을 풀어 내면 지구를 스무 바퀴 반은 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평소에는 다정다감하다. 알통을 보여 주며 씩 웃는 아빠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멋지다. 하지만 아빠 모습은 그게 다가 아니다. 아빠는 ‘갑자기 화내기’를 잘 한다. 형은 그런 성격을 다혈질이라 부른다고 했다. 아빠가 새벽에 들어오는 날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아침에 자고 있는 아빠를 깨우기라도 하면, 아빠가 변하기 때문이다.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러는 거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변신한 아빠’ 이 분은 꽤 무시무시하다. 그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욕설과 폭력 수행 능력의 일인자라고나 할까. 그런 분을 깨운다? 그건 이른 아침부터 목숨을 누군가에게 맡기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잠자는 아빠를 깨우라니, 우리 엄마는 너무 사는 걸 모른다. 안방 문을 빠끔 열어 봤다. 아빠가 단잠을 자고 있다. 역시 혼자 깨우기는 벅찬 일이다. 나는 변신한 아빠에게 ‘제거 인물 1호’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다. 형?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니 제외시키고 싶지만,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형, 나 숙제장 사게…….” “어쩌냐? 나 쓸 용돈도 모자라.”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형이 대답했다. “선생한테 한 대 세게 맞고 끝내. 쪼다같이 울지는 말고, 크헤헤.” 킬킬거리는 형을 올려다보며 내가 떠올린 생각은 단 한 가지. 주먹으로 얼굴 갈기기. 정말 그러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형을 무찌를 수 없다. 초등 학생이 중학교 3학년생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뒤에 멋지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사람이 살면서 인내를 배운다는 건 아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아무 종이에라도 숙제해서 검사 맡으면 되지 않나? 어떤 어린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은 절대로 그런 방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선생님은 책임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숙제장’이라고 쓴 공책에 깨끗하게 또박또박 쓴 글씨. 이것이 5학년에 맞는 책임감이라고 우리 선생님은 생각한다. 아무 종이나 삐죽 내밀었다가는 벌을 받게 된다. 아침 시간이니 벌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책상 앞에 서서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숙제가 깔끔하게 정리된 공책이 책상 위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당연히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집을 나왔다.
학교
“이번에 새로 온 교장선생님 동시 쓰는 시인이래.” 자리에 앉자마자 황서현이 내게 말했다. 새로 온 교장선생님은 지난 주 개학식 때 봤다. 그래서 그랬나? 교장선생님은 좀 특이했다. 보통 교장선생님들처럼 딱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물러서 존경심을 감당 못할 어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아,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나도 헛갈린다. 여하튼 내가 잘 모르는 뭔가가 있는 분 같았다. “아! 나도 동시 좋아하는데. 신나, 랄라.” 이 아이는 내 짝이다. 지난 학기부터 쭉 짝이다. 황서현은 인간 세계에서 한 발짝 벗어난 듯한 말들을 자주 쓴다. “검은 물감 하나를 모조리 짜 먹은 것 같다니까.” “하하! 오늘 학교 오는 길에 나비가 나를 알아봤어!” 이런 말은 기본이다. 황서현이 나와 짝꿍이 되었을 때 나는 아주 기분이 나빴다. 정말 불쾌했다. 이 쪼그만 여자애가 하는 소리가 모두 나를 놀리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너, 내가 우습게 보이냐!” 나는 최대한 거칠게 짐승처럼 말했다. 황서현은 나를 한참 빤히 보더니 대답했다. “아니. 그냥 너는 조태백처럼 보여. 우리 반에서 제일 글 잘 쓰는 조태백. 너한테는 늘 문장 냄새가 풍겨.”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황서현의 말과 행동은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고학년에 올라온 이후로 나는 칭찬이란 걸 들어 본 역사가 없었으니까. 내가 글을 잘 쓴다는 건 나도 모르고, 선생님도 모르고, 우리 가족도 모르고, 진짜 아무도 모르는데 이 아이는 그 날 나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여하튼 지금은 황서현에게 종종 내 비밀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많이 친해졌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발랄하게 웃는 황서현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나도 빙긋 웃고 있다.
수업 시간
3교시가 무사히 지나갔다. 쉬는 시간 운동장에서 날뛰는 저학년들을 보면서 나는 ‘부디 4교시가 끝나고 내 기분도 저랬으면.’하고 바랐다. 하지만 역시 고난은 나를 피해 가지 않았다. “조태백. 숙제는?” 선생님이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대로 말한다면 나는 분명히 그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숙제를 깜빡하고 못 했다는 말을 하면 우리 선생님은 “그게 다 머리가 맑지 않아서야.”라고 말한다. 우리 선생님은 요가 마니아다. 벌은 바로 ‘사자 자세’라고 하는 요가다. 즉 이실직고를 하게 되면, 교실 뒤로 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 다음에는 허리를 벽에 댄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 뒤가 무척 곤란하다. 사자 학생(우리는 벌 받는 아이를 이렇게 부른다)은 양쪽 귀 옆에 손바닥을 대서 사자 갈기를 만든다. 그러고는 혀를 빼물고 눈을 뒤집으며 “하!” 하고 입을 크게 벌려야 한다. “더 크게! 더 크게!” 선생님은 숨을 더 크게 내쉬어야 머리가 맑아진다고 사자 학생을 격려한다. 혀를 더 내밀고 눈도 더 뒤집어야 한다. 불쌍한 사자는 이 동작을 한 시간 동안 반복한다. 사자가 포효하는 모습을 본땄다는 이 자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에게 특히 좋으며 호르몬 분비를 왕성하게 하고 심장과 소장의 기운을 안정시킨다고, 선생님은 누누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5학년인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단지, ‘창. 피. 하. 다.’ 또는 ‘죽. 기. 보. 다. 싫. 다.’란 생각만 들 뿐이다. “집에 두고 왔어요.” 나는 쥐가 찍찍거리는 것처럼 아주 작게 대답했다. “그래? 벌써 삼 일째구나. 지난 주 수요일, 금요일 그리고 오늘. 그렇지?”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생각들이 오가는지 선생님은 다 알고 있다는 말투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숙제! 오늘은 검사해야겠구나. 집에 가서 가져와!” 교실은 깃털 하나가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듯 조용해졌다. 수업 중에 집에 가서 숙제를 가져오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현이가 어떡해, 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반 아이들이 모두 내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억울해서 돌아버리기 직전의 아이들이 하는 행동 ‘교실 뛰쳐나가기’를 시도해 보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억울할 건 없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건 나니까. 나는 ‘엊저녁 오락할 때 일 초만 숙제 생각할 걸….’을 이백 번도 넘게 중얼거리며 학교를 빠져 나왔다.
집
집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4교시에 들킨 것이 오히려 잘된 일처럼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12시 10분이었다. ‘열두 시가 넘었으니까 아빠를 깨워도 많이 혼나진 않을 거야. 돈을 받아서 공책을 사고, 숙제를 최대한 빨리 해서 학교로 가는 거야. 점심 시간일 테니까 검사를 맡고 밥을 먹으면 되겠어.’ 숙제를 삼 일치나 해야 하니 서둘러야겠다 싶어 뛰었다. 뛰니까 조금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삑삑삑. 현관의 비밀 번호를 순식간에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아빠!” 나는 미친 듯이 아빠를 불렀다. 없다. 안방에도 화장실에도 없다. 다급해져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빠, 어디세요?” “너, 왜 집에 있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구요!’ 답답해서 꽥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점심 시간이라 잠깐 집에 왔어요. 숙제장 살 돈 좀 주세요.” “아빠, 지금 친구 만난다. 숙제장 내일 사.” 뚝. 띠띠띠띠. 전화가 끊겼다. 맙소사.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걸까?’ 나는 즉시 십 년 고행 수도승의 길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혹시 동전이라고 긁어모으면 공책을 살 수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온 집 안을 다 뒤졌다. ‘집을 모조리 뒤지면 동전 몇 개는 나올 거야. 그게 나를 구해 줄지도 몰라.’ 최면을 거는 것처럼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 이렇게 하면 동전이 저절로 굴러 나올 것만 같았다. 옷장을 뒤지고 서랍을 다 들어냈다. 금세 집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나중에 엄마한테 뭐라고 얘기하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백 원짜리 세 개, 오십 원짜리 두 개, 십 원짜리 다섯 개. 사백 오십 원. 오십 원이 모자랐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학교에 가서 숙제장이 없다고 하면…… 아마 모두들 나를 거짓말쟁이라는 눈으로 바라볼 거야. 내가 거짓말한 건 사실이지만. 이게…… 그게…….’ 악!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두가 나를 멸시하는 눈빛으로 볼 것을 생각하니 이대로 없어지는 게 낫다 싶었다. 그 순간, 내 머리를 휭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112를 눌렀다.
경찰서
“그래, 공범은 없었니?” “네. 혼자더라구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잡혀 있었니?” “잘 모르겠지만…… 아마 40분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1시 20분에서 2시까지?” “목격자는?” “없어요. 아, 있다. 아파트 도착해서 집에 들어갈 때 아래층 할아버지를 마주쳤어요.” “숙제장을 가지러 집에 갔는데 하필 그 순간 도둑이 들었다. 집을 다 뒤집었는데 돈이 나오지 않았다. 없는 돈 대신 너를 잡아갔다?” “네.” “그러나 너는 범인이 잠시 자리를 뜬 사이 도망쳤다. 흠…… 일단 학교에 전화를 걸어 보마.” 형사 아저씨는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나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까지 여기에 불려오게 되면 큰일이었다. ‘어떡하지.’ 그 날처럼 경찰과 형사들을 많이 본 날도 없을 것이다. 잠시 뒤 엄마가 와서 울고불고 “내 새끼 조태백!”을 외쳤고, 나도 같이 울고 싶었지만 (정말 울고 싶었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으니까.) 애써 태연하게 범죄자들이 가득한 경찰서에 앉아 있었다. “태백아, 너 왜 이렇게 얼굴이 하얘진 거야? 우리 애가 놀라서 그런가 봐요.” 엄마는 눈물을 찍으며 하소연했다. 나는 엄마 때문에 순간 이동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졌다. “네, 네, 선생님. 그냥 나와서 진술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별 일 아닌 것 같아요.” 전화 통화 내용을 듣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보세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우리 애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는 얘기예요?” 엄마가 소리를 쳤다.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냥 그렇다는 건 또 뭐예요, 네?” 형사 아저씨는 엄마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최 형사! 사건 발생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섣불리 판단하지 마. 보호자 분은 저쪽에서 커피 한잔 하시죠. 잠깐 숨 좀 돌리세요.” 다른 형사 아저씨가 엄마를 데리고 갔다. 최 형사 아저씨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컴퓨터 자판을 탁탁 두드리다가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얘야,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 여기서 일하는 아저씨들이 바보로 보이니?”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너, 어서 바른 대로 말해. 거짓말이지?” “아니에요. 진짜라구요. 진짜란 말이에요!” 나도 모르게 울먹이고 말았다. 최 형사 아저씨는 한숨을 푹 쉬더니 자기 머리를 거칠게 비볐다. “그래, 일단 태백이 네가 집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보겠다. 202동 103호 할아버지랬지?” 최 형사 아저씨가 수첩을 챙겨 일어났다. 아저씨가 사라지자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 날 밤 엄마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소문은 정말 빨랐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먼 친척, 엄마 친구에 아빠 친구들한테까지 전화가 왔다. 따르릉따르릉,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잠을 못 자고 계속 뒤척였다.
학교
우리 선생님은 하룻밤 사이에 눈 밑이 새까매져서 교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혼자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했다. 나는 이제 선생님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5교시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래. 네가 조태백이로구나? 아저씨는 MKB 뉴스 기자 오보철이란다. 오늘 몇 시에 끝나니? 인터뷰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니?” 아저씨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반 친구들이 모두 그 광경을 봤다. 황서현도 나를 보고 있었다.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몸이 붕 떠서 교실 천장을 한 바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운동장
‘무슨 이야기를 하지?’ 점심 시간에 나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인터뷰 때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탕 먹을래?” 황서현이었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재밌어. 이거 불량 식품이라서 먹으면 혀가 빨개져.” 황서현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게 뭐가 재밌냐?” 내가 피식 웃었다. 황서현은 내 손에 빨강 사탕을 쥐어 주며 말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사람하고만 말하고 싶어. 근데 그게 안 되니까…… 가끔 우울할 때 이렇게 빨강 사탕을 먹어. 혀가 빨개진 다음에 말을 하면 빨강 말을 하게 되잖아. 빨개진 혀를 거울로 보면 기분이 좀 좋아져.” 나는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궁금했다. 황서현은 내 옆에 앉아서 빨강 사탕을 오물거렸다. “아, 조태백! 파랑 말 하고 싶어서 그러니? 파랑 사탕 있어.” 생각났다는 듯이 황서현이 나에게 파랑 사탕도 내밀었다. “아니야. 나는 빨강 말, 파랑 말 말고 내 말 할 거다.” 황서현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그 애 특유의 자세를 한 뒤 말을 이었다. “어디 그냥 네 말만 하게 되니? 사람들 기분 맞춰서, 상황에 맞춰서 적당히 말해야 할 때도 있잖아. 그래서 거짓말도 하는 거고.” 나는 뜨끔했다. 운동장 반대편만 바라봤다. 황서현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심장이 빨갛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운동장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황서현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 전속력으로 다 뱉어 내고 싶었다. 내 마음을 황서현이 탁탁 털어서 햇볕에 말려 줬으면 하고 바랐다. “서현아, 나…….” 딩동댕. 딩동댕. 딩동댕. 그 때 수업 종이 울렸다. 저쪽에서 고무줄을 하던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황서현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 순간, 너무 외로웠다.
집
나는 기자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왔다. 카메라 기사 아저씨와 조명 기사 아저씨도 집 안으로 들어와 이 방 저 방을 찍었다. 내 인터뷰는 아파트 복도에서 했다. “오늘 9시 뉴스에 나오니까 꼭 보렴. 탈출을 축하한다, 조태백.” 기자 아저씨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다시 기분이 붕 떴다. 인터뷰를 했다는 내 말에 엄마는 일찍 퇴근했다. 형도 엄마의 호출로 학원도 빠지고 집으로 왔다. 우리는 7시부터 텔레비전 앞에 앉아 9시 뉴스를 기다렸다. 드디어 9시 뉴스. “모 초등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납치되었다 풀려나는 사건이 어제 오후 1시경에 발생했습니다. 피해 어린이는 당시 숙제장을 가지러 집으로 왔다가 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를 했고, 목소리는 변조해 이상하게 들렸다. 나는 삑-삑-삐빅, 말했다.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모자이크가 안 된 목은 태어나서 한 번도 씻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야, 너 진짜 꾀죄죄하다. 크헷.” 형 말이 맞았다. “와하하! 내 방이다, 내 방!” 형이 소리를 쳤다. 형은 자기 동생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신 연령-표기 불가능. 형의 생활기록부에 쾅, 도장을 찍는 상상을 했다. “엄마, 근데 우리 집 원래 저랬나?”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형이 물었다. “진자 드러워. 크흐흐.” 우리 집이 화면발을 그렇게 못 받을 줄 정말 몰랐다. 설거지 쌓아 놓은 싱크대, 이불이 돌돌 말려 있는 내 방, 신발이 빼곡한 현관까지 진짜 너무했다. ‘아, 창피해. 황서현이 보면 어떡하지.’ 엄마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멍하니 텔레비전만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어린이 보호를 좀더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MKB 뉴스 오보철이었습니다.” 갑자기 윙,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정말 오랜만에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썩은 배추와 콩나물을 꺼내 음식 쓰레기봉투에 담고,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하고, 찬장 속 그릇들까지 모조리 끄집어내 광을 냈다. 나도 엄마를 거들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화장실을 닦았다. “형도 같이 해.” 나는 길게 누워서 과자나 와삭거리며 먹고 있는 형에게 말했다. “싫어. 난 드러운 집이 좋아. 크흐흐.” 자기가 한 말이 뭐가 그리 웃긴지 형은 킬킬댔다. “형은 참 웃을 일이 많아서 좋겠다.” 옆에서 내가 비아냥거려도 형은 계속 웃었다. 말한 내가 바보였다. 방을 한참 치우고 있는데 엄마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욕실에 나를 밀어 넣으며 엄마가 말했다. “밀어, 깨끗이!” 때수건을 건네는 엄마 눈에서 이글이글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엄마는 새 옷을 잔뜩 사왔다. 요일 별로 입는 옷을 정하고, 옷장도 모두 뒤집어서 정리했다.
학교
“조태백, 너 도대체 인터뷰는 언제 한 거야?” 우리 선생님은 어제보다 더 눈 밑이 시꺼매져서 물었다. “어제요.” “너, 왜 선생님 허락도 안 받고 인터뷰 했어?” “그것도 허락 받아야 하나요?” 나는 정말 의아했다. “아니다. 됐다.” 선생님은 갑자기 울먹거리는 것 같았다. 머리를 한 손으로 짚고 눈을 지그시 감은 선생님이 불쌍해 보였다. “조태백. 너, 교장선생님이 오래.” 황서현이었다. 황서현은 어제 이후로 나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마음이 계속 쓰였다. 애들은 모두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황서현만 무관심했다. 서현이는 자기 자리에 앉아 새치름한 표정으로 책만 들여다봤다. ‘어제 뉴스를 보고 저러는 걸까?’ 삑-삑-삐빅, 말하는 모자이크 조태백이 생각나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언젠가 오보철 아저씨를 다시 만난다면 정말 크게 화를 내리라 다짐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황서현이 저렇게 구는 건 좀 찜찜했다. 나는 교장선생님이 왜 나를 부를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황서현이 정말 왜 저럴까?’ 하는 생각만 하며 교장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요.” 교장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네가 태백이로구나?” 교장선생님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책상에는 신문이며 서류가 엄청나게 많았다. “자리에 앉으렴.” 나는 소파에 앉은 뒤 교장실을 두리번거렸다. 책이 참 많았다. 황서현이 좋아하는 동시집도 많았다. “초코 우유랑 요구르트가 있는데 뭐 마실래?” 교장선생님은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초코요.” 교장선생님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커트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초록색 플레어스커트가 교장선생님의 하얀 머리카락과 참 잘 어울렸다. 황서현도 늙으면 저런 모습일까? 잠시 생각했다. “음, 태백아. 오늘 교장선생님이 너를 부른 건 그 동안 네가 겪었던 일을 듣고 싶어서란다." “어제 9시 뉴스에 나왔는데 못 보셨어요?” “응. 어제 나왔다고 하더구나. 유감스럽게도 못 봤어.” “흠. 정말 유감이네요.” 나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나와 버렸다. ‘거짓말을 하고도 뻔뻔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9시 뉴스에 나왔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기자가 찾아왔다던데 인터뷰는 교실에서 했니?” “아뇨. 교실에는 안 들어오고 복도에서 명함을 줬어요.” “그래, 그랬구나. 다행이구나.” 교장 선생님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초코 우유는 참 맛있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내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럼, 인터뷰했을 때처럼 나한테도 말해 주겠니?” 나는 빨대로 우유 한 모금을 쪽 빨아 마신 뒤 말을 시작했다. “제가 깜빡깜빡 잘해요. 선생님은 저를 오해하더라구요. 제가 숙제를 안 하고 거짓말하는 거라고 말이에요. 숙제장에 분명히 숙제를 했는데 말이죠. 숙제장을 집에 두고 온 거였어요, 정말.” 잡혀간 이야기이며, 탈출하고 경찰에 전화한 일, 조사를 받은 일, 인터뷰했던 일을 모두 교장선생님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듣는 교장선생님 반응은 꽤 다양했다. 어이쿠, 저런, 오! 주여, 정말 그랬단 말이니? 휴……, 하면서 들었다. 내 걱정만 해서 그러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살짝 받기는 했지만,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교장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나를 신나게 했다. “그래, 정말 힘들었겠구나. 고생했다, 태백아.” “네. 알아주시니 감사해요.” 나는 다시 초코 우유를 쪽 빨았다. “숙제는 왜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그걸 왜 하는 걸까요? 다 아는 걸 쓸데없이. 종이 낭비, 샤프심 낭비, 시간 낭비예요. 그 날도 숙제장이 없어서 결국 이렇게 된 거잖아요.” 순간 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멍청이가 돼 버린 기분이었다. 아, 내가 너무 방심했다. 교장선생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각 사각 사각. 교장선생님의 플레어스커트가 소리가 들렸다. “초코 우유 하나 더 마시렴.” 교장선생님이 초코 우유를 하나 더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진땀이 흘렀다. “그래, 이제 가 보렴. 수업 시작했겠다.” 나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이제 끝이구나.’ 힘없이 교장실 문을 나서는데 교장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조태백. 앞으로 일 주일에 한 번씩 교장실에 들르려무나.” 손이 후들후들 떨려서 문고리를 잡기 힘들었다. 목이 문틈에 끼인 것 같아 잘 닫을 수도 없었다. 복도를 올라오며 이제 곧 끝이 날 내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복도에 끝도 없이 길고 검은 카펫이 깔린 것 같았다. 맨 끝에 다다르면 낭떠러지가 있는 그런 카펫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아빠, 엄마, 황서현, 형, 선생님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런데 문득 ‘일 주일에 한 번씩’이라는 교장선생님 말이 생각났다. 왜 일 주일에 한 번씩 나를 오라는 거지? ‘일 주일에 한 번씩 나를 고문하려고 하는 건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교장실에 거꾸로 매달려서 회초리 맞는 모습이 떠올랐다. 교장선생님이 웃음지으며 찰싹, 찰싹, 찰싹 나를 때리는 모습이었다. 난 정말, 이제 죽었다.
놀이터
거짓말은 결국 탄로 난다.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는 엿새째 되는 날 저녁에 경험했다. 따갑고 무시무시하고 춥게. “나가!” 사실을 알게 된 아빠는 순식간에 변신했다. 아빠에게 내가 들은 말은 그 뒤에 더 많았다. 굳이 욕을 쓸 필요는 없겠다. 욕이 뭐 거기서 거기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변신한 아빠, 이 분이 하는 욕은 차원이 다르다. 한 번 들으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턱턱 막힌다. 한 번도 이런 욕을 들어보지 못한 어린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 기절하는 어린이가 속출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욕을 생략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다혈질 아빠 밑에서 사는 내가 가끔 불쌍하지만, 겨울을 보내지 않고는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말도 있으니까. 일단 견뎌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욕뿐만 아니라 날아오는 신발과 베개, 휴지통을 막아 내며 집을 나왔다. 힘겨운 탈출이었다. 나는 놀이터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조금 있다가 들어가면 될 거야. 형도 가끔 그러니까.’ 나는 나를 위로했다. 목이 따가웠다. 아까 티슈 박스에 목이 긁혔나 보다. 저녁노을이 어둠에 묻혀 사라지고 밤이 되었다. 여름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꽤 공기가 찼다. 쌀쌀한 공기에 나는 더 서글퍼졌다. 벌레는 오늘따라 ‘처량하다, 처량하다, 조태백.’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첫날 숙제장을 가지러 집으로 오던 길이 생각났다. 숙제장 살 돈을 103호 할아버지에게 빌려 달라고 했어도 됐는데, 길에 500원짜리가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달려오느라 못 봤을 거야, 바보.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야, 들어오래.” 형이었다. 나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여기 있다 들어오는 건 어떻게 알았냐? 새끼, 뻥치는 꼴하고는.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음 한 대 맞고 끝나잖아. 미련해 가지고는.” 형이 타박을 줬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렇게 고마웠을까? 나는 그네에 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냥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으면 조금 혼나고, 마음도 편하고, 숙제장 사는 일도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야. 맞아. 형 말이 맞아. 흑흑. 내가 왜 그랬지? 엉엉.” 형은 내가 한참 동안 울도록 내버려 뒀다. 그리고 내가 그네에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줬다. 한 번도 형이 나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날 형은 나를 꽤 오랫동안 기다려 줬고 돌아오는 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문 앞에서 망설이자 형이 말했다. “아빠, 일 나갔어.”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은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형, 형은 내가 안 미워?” “미워. 왜 안 밉냐? ‘니 동생 다 뻥이었다면서?’ 친구들이 막 그럴 텐데. 다들 킬킬 댈걸? 물론 나도 같이 웃겠지만, 큭. 여하튼 미우나 고우나 가족은 가족이야. 이런 일로 너 안 내쫓으니까 쫄지 마, 멍청아.” 나는 형이 좀 달라 보였다. 형이 왜 형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뒷이야기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우리 선생님은 요즘 나한테 말을 안 시킨다. 이해할 수 있다. 선생님 눈 밑은 점차 살구 빛으로 돌아오고 있다. 나는 사건이 마무리되는 동안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들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벌을 내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말을 걸었을 때 친구들이 나를 외면할까 봐 두려워 애들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힘든 시간이었다. 황서현은 내가 말을 잘 하지 않자 무척 서운해 했다. 화를 내기도 했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턴가 화를 내지도, 한숨을 쉬지도 않았다. 대신 서현이는 내 서랍 속에 색깔 사탕을 하나씩 넣어 놓기 시작했다. 112 허위 신고 벌금이 그저께 나왔다. 나는 요즘 아빠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빠가 또 변신하면 큰일이니까. 가끔은 엄마 눈에도 안 띄게 조심해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형은 물론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아빠는 잠을 자고 있다. 어제와 오늘은 밤 근무다. 오늘은 개교기념일이라,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맥코맥 씨, 우리에게는 이제 시간이 사흘 정도 남았습니다.” 나는 부엌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나는 볕이 드는 부엌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한다. “파악한 사건의 전모를 보자면, 이 사건의 범인은 K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니 오늘 다시 범행 현장을 찾아가 보도록 하세.” 일 주일에 한 번씩 회초리를 맞을 줄 알았는데 교장선생님은 내게 책을 빌려 주었다. 나는 일 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었다. 요즘은 한꺼번에 서너 권씩 빌려 오기도 한다. 벌써 열여섯 권 째다. 이번 주는 추리소설을 빌려 왔다. 어제, 점심 시간에 교장실에 갔다. “이제 곧 6학년이 되겠구나, 태백아.” “네.” “오늘은 교장선생님이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교장선생님 동시집이란다. 직접 사인도 했어.” 교장선생님은 사인을 보여 주며 웃음지었다. “교장선생님은 나중에 태백이가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땐 태백이 네가 직접 사인한 책 교장선생님 줘야 한다, 알았지? “네.” 나는 아주아주 작게 대답했다. 내가 작아져서 그렇게 대답한 게 아니다. 목이 메어서였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바보같이……. 울긴 왜 울었을까? 겨우겨우 참아 왔는데.’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나는 동시집을 펼쳤다. 교장선생님 사인을 다시 봤다.
추리소설 작가, 조태백.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 추울 때는 왜 추울까, 그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있단다. 추위를 이겨 내는 방법을 태백이가 발견하길 바란다.
추신- 나중에 교장선생님도 등장인물로 넣어 주렴.
반 친구들은 사건 전과 별 다름없이 나를 대하지만, 가끔 비난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안다. “정말 후회하고 있다고. 정말이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시간이 흘러 나를 좀더 나은 사람으로 바라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내 짝꿍 황서현에게는 그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교장선생님에게도, 형에게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 책에게도.
황 현 진 1977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으며, 숭의여자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2006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동시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대학원 동화미디어창작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7시 40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시각에는 절대, 아무것도 부탁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엄마는 출근 준비로 바쁘다. “엄마, 나 숙제장 다 썼어. 돈 줘.” “아침에 그런 거 말하지 말랬지. 엄마, 바쁘잖아.” 한쪽 눈썹을 그리면서 엄마가 대답했다. 엄마에게는 시간이 중요하다. “숙제장 꼭 사야 해. 돈 줘.” “스타킹을 어디다 뒀더라?” 엄마는 들은 척 만 척 거실로 뛰어갔다. 가족이 모여 있는 시간에 진정으로 따뜻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지만 나는 왠지 더 외롭다. 식구들 모두 내가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아, 좀 비켜. 아빠한테 가서 달래.” 현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만지는 엄마를 보며, 나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숙제장을 오늘도 안 가져가면 벌써 세 번째다. 우리 선생님은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다가 그 길로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른다. “엄마, 간다! 조심조심 다녀.” ‘응.’ 마음 속으로만 작게 대답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젯밤, 오락에만 정신이 팔렸던 게 후회되었다. 쿵! 엄마가 현관문을 닫고 나가니 ‘아빠’라는 단어가 잠시 내 마음을 흔들었다. 살짝 갈등이 됐다. 하지만 역시 아빠를 깨우는 건 무리다. 아빠는 이번 주에 아침 퇴근이다. 아빠는 택시 기사인데 한 주는 아침에, 한 주는 저녁에 퇴근한다. 지난 주에는 저녁에 들어왔으니 이번 주는 아침이다. 아침 6시쯤 잠이 들면 점심 1시 정도에 일어난다. 일어나면 아빠는 운동을 한다. 줄넘기, 역기 들기, 복싱, 태권도, 합기도, 수영, 보디빌딩 등을 거쳐 차근차근 발달된 아빠의 근육을 보면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아빠 근육을 풀어 내면 지구를 스무 바퀴 반은 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평소에는 다정다감하다. 알통을 보여 주며 씩 웃는 아빠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멋지다. 하지만 아빠 모습은 그게 다가 아니다. 아빠는 ‘갑자기 화내기’를 잘 한다. 형은 그런 성격을 다혈질이라 부른다고 했다. 아빠가 새벽에 들어오는 날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아침에 자고 있는 아빠를 깨우기라도 하면, 아빠가 변하기 때문이다.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러는 거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변신한 아빠’ 이 분은 꽤 무시무시하다. 그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욕설과 폭력 수행 능력의 일인자라고나 할까. 그런 분을 깨운다? 그건 이른 아침부터 목숨을 누군가에게 맡기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잠자는 아빠를 깨우라니, 우리 엄마는 너무 사는 걸 모른다. 안방 문을 빠끔 열어 봤다. 아빠가 단잠을 자고 있다. 역시 혼자 깨우기는 벅찬 일이다. 나는 변신한 아빠에게 ‘제거 인물 1호’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다. 형?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니 제외시키고 싶지만,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형, 나 숙제장 사게…….” “어쩌냐? 나 쓸 용돈도 모자라.”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형이 대답했다. “선생한테 한 대 세게 맞고 끝내. 쪼다같이 울지는 말고, 크헤헤.” 킬킬거리는 형을 올려다보며 내가 떠올린 생각은 단 한 가지. 주먹으로 얼굴 갈기기. 정말 그러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형을 무찌를 수 없다. 초등 학생이 중학교 3학년생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뒤에 멋지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사람이 살면서 인내를 배운다는 건 아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아무 종이에라도 숙제해서 검사 맡으면 되지 않나? 어떤 어린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은 절대로 그런 방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선생님은 책임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숙제장’이라고 쓴 공책에 깨끗하게 또박또박 쓴 글씨. 이것이 5학년에 맞는 책임감이라고 우리 선생님은 생각한다. 아무 종이나 삐죽 내밀었다가는 벌을 받게 된다. 아침 시간이니 벌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책상 앞에 서서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숙제가 깔끔하게 정리된 공책이 책상 위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당연히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집을 나왔다.
학교
“이번에 새로 온 교장선생님 동시 쓰는 시인이래.” 자리에 앉자마자 황서현이 내게 말했다. 새로 온 교장선생님은 지난 주 개학식 때 봤다. 그래서 그랬나? 교장선생님은 좀 특이했다. 보통 교장선생님들처럼 딱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물러서 존경심을 감당 못할 어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아,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나도 헛갈린다. 여하튼 내가 잘 모르는 뭔가가 있는 분 같았다. “아! 나도 동시 좋아하는데. 신나, 랄라.” 이 아이는 내 짝이다. 지난 학기부터 쭉 짝이다. 황서현은 인간 세계에서 한 발짝 벗어난 듯한 말들을 자주 쓴다. “검은 물감 하나를 모조리 짜 먹은 것 같다니까.” “하하! 오늘 학교 오는 길에 나비가 나를 알아봤어!” 이런 말은 기본이다. 황서현이 나와 짝꿍이 되었을 때 나는 아주 기분이 나빴다. 정말 불쾌했다. 이 쪼그만 여자애가 하는 소리가 모두 나를 놀리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너, 내가 우습게 보이냐!” 나는 최대한 거칠게 짐승처럼 말했다. 황서현은 나를 한참 빤히 보더니 대답했다. “아니. 그냥 너는 조태백처럼 보여. 우리 반에서 제일 글 잘 쓰는 조태백. 너한테는 늘 문장 냄새가 풍겨.”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황서현의 말과 행동은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고학년에 올라온 이후로 나는 칭찬이란 걸 들어 본 역사가 없었으니까. 내가 글을 잘 쓴다는 건 나도 모르고, 선생님도 모르고, 우리 가족도 모르고, 진짜 아무도 모르는데 이 아이는 그 날 나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여하튼 지금은 황서현에게 종종 내 비밀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많이 친해졌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발랄하게 웃는 황서현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나도 빙긋 웃고 있다.
수업 시간
3교시가 무사히 지나갔다. 쉬는 시간 운동장에서 날뛰는 저학년들을 보면서 나는 ‘부디 4교시가 끝나고 내 기분도 저랬으면.’하고 바랐다. 하지만 역시 고난은 나를 피해 가지 않았다. “조태백. 숙제는?” 선생님이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대로 말한다면 나는 분명히 그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숙제를 깜빡하고 못 했다는 말을 하면 우리 선생님은 “그게 다 머리가 맑지 않아서야.”라고 말한다. 우리 선생님은 요가 마니아다. 벌은 바로 ‘사자 자세’라고 하는 요가다. 즉 이실직고를 하게 되면, 교실 뒤로 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 다음에는 허리를 벽에 댄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 뒤가 무척 곤란하다. 사자 학생(우리는 벌 받는 아이를 이렇게 부른다)은 양쪽 귀 옆에 손바닥을 대서 사자 갈기를 만든다. 그러고는 혀를 빼물고 눈을 뒤집으며 “하!” 하고 입을 크게 벌려야 한다. “더 크게! 더 크게!” 선생님은 숨을 더 크게 내쉬어야 머리가 맑아진다고 사자 학생을 격려한다. 혀를 더 내밀고 눈도 더 뒤집어야 한다. 불쌍한 사자는 이 동작을 한 시간 동안 반복한다. 사자가 포효하는 모습을 본땄다는 이 자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에게 특히 좋으며 호르몬 분비를 왕성하게 하고 심장과 소장의 기운을 안정시킨다고, 선생님은 누누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5학년인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단지, ‘창. 피. 하. 다.’ 또는 ‘죽. 기. 보. 다. 싫. 다.’란 생각만 들 뿐이다. “집에 두고 왔어요.” 나는 쥐가 찍찍거리는 것처럼 아주 작게 대답했다. “그래? 벌써 삼 일째구나. 지난 주 수요일, 금요일 그리고 오늘. 그렇지?”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생각들이 오가는지 선생님은 다 알고 있다는 말투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숙제! 오늘은 검사해야겠구나. 집에 가서 가져와!” 교실은 깃털 하나가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듯 조용해졌다. 수업 중에 집에 가서 숙제를 가져오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현이가 어떡해, 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반 아이들이 모두 내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억울해서 돌아버리기 직전의 아이들이 하는 행동 ‘교실 뛰쳐나가기’를 시도해 보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억울할 건 없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건 나니까. 나는 ‘엊저녁 오락할 때 일 초만 숙제 생각할 걸….’을 이백 번도 넘게 중얼거리며 학교를 빠져 나왔다.
집
집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4교시에 들킨 것이 오히려 잘된 일처럼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12시 10분이었다. ‘열두 시가 넘었으니까 아빠를 깨워도 많이 혼나진 않을 거야. 돈을 받아서 공책을 사고, 숙제를 최대한 빨리 해서 학교로 가는 거야. 점심 시간일 테니까 검사를 맡고 밥을 먹으면 되겠어.’ 숙제를 삼 일치나 해야 하니 서둘러야겠다 싶어 뛰었다. 뛰니까 조금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삑삑삑. 현관의 비밀 번호를 순식간에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아빠!” 나는 미친 듯이 아빠를 불렀다. 없다. 안방에도 화장실에도 없다. 다급해져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빠, 어디세요?” “너, 왜 집에 있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구요!’ 답답해서 꽥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점심 시간이라 잠깐 집에 왔어요. 숙제장 살 돈 좀 주세요.” “아빠, 지금 친구 만난다. 숙제장 내일 사.” 뚝. 띠띠띠띠. 전화가 끊겼다. 맙소사.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걸까?’ 나는 즉시 십 년 고행 수도승의 길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혹시 동전이라고 긁어모으면 공책을 살 수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온 집 안을 다 뒤졌다. ‘집을 모조리 뒤지면 동전 몇 개는 나올 거야. 그게 나를 구해 줄지도 몰라.’ 최면을 거는 것처럼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 이렇게 하면 동전이 저절로 굴러 나올 것만 같았다. 옷장을 뒤지고 서랍을 다 들어냈다. 금세 집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나중에 엄마한테 뭐라고 얘기하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백 원짜리 세 개, 오십 원짜리 두 개, 십 원짜리 다섯 개. 사백 오십 원. 오십 원이 모자랐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학교에 가서 숙제장이 없다고 하면…… 아마 모두들 나를 거짓말쟁이라는 눈으로 바라볼 거야. 내가 거짓말한 건 사실이지만. 이게…… 그게…….’ 악!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두가 나를 멸시하는 눈빛으로 볼 것을 생각하니 이대로 없어지는 게 낫다 싶었다. 그 순간, 내 머리를 휭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112를 눌렀다.
경찰서
“그래, 공범은 없었니?” “네. 혼자더라구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잡혀 있었니?” “잘 모르겠지만…… 아마 40분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1시 20분에서 2시까지?” “목격자는?” “없어요. 아, 있다. 아파트 도착해서 집에 들어갈 때 아래층 할아버지를 마주쳤어요.” “숙제장을 가지러 집에 갔는데 하필 그 순간 도둑이 들었다. 집을 다 뒤집었는데 돈이 나오지 않았다. 없는 돈 대신 너를 잡아갔다?” “네.” “그러나 너는 범인이 잠시 자리를 뜬 사이 도망쳤다. 흠…… 일단 학교에 전화를 걸어 보마.” 형사 아저씨는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나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까지 여기에 불려오게 되면 큰일이었다. ‘어떡하지.’ 그 날처럼 경찰과 형사들을 많이 본 날도 없을 것이다. 잠시 뒤 엄마가 와서 울고불고 “내 새끼 조태백!”을 외쳤고, 나도 같이 울고 싶었지만 (정말 울고 싶었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으니까.) 애써 태연하게 범죄자들이 가득한 경찰서에 앉아 있었다. “태백아, 너 왜 이렇게 얼굴이 하얘진 거야? 우리 애가 놀라서 그런가 봐요.” 엄마는 눈물을 찍으며 하소연했다. 나는 엄마 때문에 순간 이동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졌다. “네, 네, 선생님. 그냥 나와서 진술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별 일 아닌 것 같아요.” 전화 통화 내용을 듣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보세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우리 애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는 얘기예요?” 엄마가 소리를 쳤다.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냥 그렇다는 건 또 뭐예요, 네?” 형사 아저씨는 엄마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최 형사! 사건 발생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섣불리 판단하지 마. 보호자 분은 저쪽에서 커피 한잔 하시죠. 잠깐 숨 좀 돌리세요.” 다른 형사 아저씨가 엄마를 데리고 갔다. 최 형사 아저씨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컴퓨터 자판을 탁탁 두드리다가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얘야,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 여기서 일하는 아저씨들이 바보로 보이니?”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너, 어서 바른 대로 말해. 거짓말이지?” “아니에요. 진짜라구요. 진짜란 말이에요!” 나도 모르게 울먹이고 말았다. 최 형사 아저씨는 한숨을 푹 쉬더니 자기 머리를 거칠게 비볐다. “그래, 일단 태백이 네가 집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보겠다. 202동 103호 할아버지랬지?” 최 형사 아저씨가 수첩을 챙겨 일어났다. 아저씨가 사라지자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 날 밤 엄마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소문은 정말 빨랐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먼 친척, 엄마 친구에 아빠 친구들한테까지 전화가 왔다. 따르릉따르릉,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잠을 못 자고 계속 뒤척였다.
학교
우리 선생님은 하룻밤 사이에 눈 밑이 새까매져서 교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혼자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했다. 나는 이제 선생님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5교시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래. 네가 조태백이로구나? 아저씨는 MKB 뉴스 기자 오보철이란다. 오늘 몇 시에 끝나니? 인터뷰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니?” 아저씨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반 친구들이 모두 그 광경을 봤다. 황서현도 나를 보고 있었다.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몸이 붕 떠서 교실 천장을 한 바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운동장
‘무슨 이야기를 하지?’ 점심 시간에 나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인터뷰 때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탕 먹을래?” 황서현이었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재밌어. 이거 불량 식품이라서 먹으면 혀가 빨개져.” 황서현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게 뭐가 재밌냐?” 내가 피식 웃었다. 황서현은 내 손에 빨강 사탕을 쥐어 주며 말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사람하고만 말하고 싶어. 근데 그게 안 되니까…… 가끔 우울할 때 이렇게 빨강 사탕을 먹어. 혀가 빨개진 다음에 말을 하면 빨강 말을 하게 되잖아. 빨개진 혀를 거울로 보면 기분이 좀 좋아져.” 나는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궁금했다. 황서현은 내 옆에 앉아서 빨강 사탕을 오물거렸다. “아, 조태백! 파랑 말 하고 싶어서 그러니? 파랑 사탕 있어.” 생각났다는 듯이 황서현이 나에게 파랑 사탕도 내밀었다. “아니야. 나는 빨강 말, 파랑 말 말고 내 말 할 거다.” 황서현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그 애 특유의 자세를 한 뒤 말을 이었다. “어디 그냥 네 말만 하게 되니? 사람들 기분 맞춰서, 상황에 맞춰서 적당히 말해야 할 때도 있잖아. 그래서 거짓말도 하는 거고.” 나는 뜨끔했다. 운동장 반대편만 바라봤다. 황서현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심장이 빨갛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운동장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황서현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 전속력으로 다 뱉어 내고 싶었다. 내 마음을 황서현이 탁탁 털어서 햇볕에 말려 줬으면 하고 바랐다. “서현아, 나…….” 딩동댕. 딩동댕. 딩동댕. 그 때 수업 종이 울렸다. 저쪽에서 고무줄을 하던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황서현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 순간, 너무 외로웠다.
집
나는 기자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왔다. 카메라 기사 아저씨와 조명 기사 아저씨도 집 안으로 들어와 이 방 저 방을 찍었다. 내 인터뷰는 아파트 복도에서 했다. “오늘 9시 뉴스에 나오니까 꼭 보렴. 탈출을 축하한다, 조태백.” 기자 아저씨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다시 기분이 붕 떴다. 인터뷰를 했다는 내 말에 엄마는 일찍 퇴근했다. 형도 엄마의 호출로 학원도 빠지고 집으로 왔다. 우리는 7시부터 텔레비전 앞에 앉아 9시 뉴스를 기다렸다. 드디어 9시 뉴스. “모 초등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납치되었다 풀려나는 사건이 어제 오후 1시경에 발생했습니다. 피해 어린이는 당시 숙제장을 가지러 집으로 왔다가 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를 했고, 목소리는 변조해 이상하게 들렸다. 나는 삑-삑-삐빅, 말했다.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모자이크가 안 된 목은 태어나서 한 번도 씻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야, 너 진짜 꾀죄죄하다. 크헷.” 형 말이 맞았다. “와하하! 내 방이다, 내 방!” 형이 소리를 쳤다. 형은 자기 동생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신 연령-표기 불가능. 형의 생활기록부에 쾅, 도장을 찍는 상상을 했다. “엄마, 근데 우리 집 원래 저랬나?”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형이 물었다. “진자 드러워. 크흐흐.” 우리 집이 화면발을 그렇게 못 받을 줄 정말 몰랐다. 설거지 쌓아 놓은 싱크대, 이불이 돌돌 말려 있는 내 방, 신발이 빼곡한 현관까지 진짜 너무했다. ‘아, 창피해. 황서현이 보면 어떡하지.’ 엄마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멍하니 텔레비전만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어린이 보호를 좀더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MKB 뉴스 오보철이었습니다.” 갑자기 윙,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정말 오랜만에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썩은 배추와 콩나물을 꺼내 음식 쓰레기봉투에 담고,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하고, 찬장 속 그릇들까지 모조리 끄집어내 광을 냈다. 나도 엄마를 거들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화장실을 닦았다. “형도 같이 해.” 나는 길게 누워서 과자나 와삭거리며 먹고 있는 형에게 말했다. “싫어. 난 드러운 집이 좋아. 크흐흐.” 자기가 한 말이 뭐가 그리 웃긴지 형은 킬킬댔다. “형은 참 웃을 일이 많아서 좋겠다.” 옆에서 내가 비아냥거려도 형은 계속 웃었다. 말한 내가 바보였다. 방을 한참 치우고 있는데 엄마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욕실에 나를 밀어 넣으며 엄마가 말했다. “밀어, 깨끗이!” 때수건을 건네는 엄마 눈에서 이글이글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엄마는 새 옷을 잔뜩 사왔다. 요일 별로 입는 옷을 정하고, 옷장도 모두 뒤집어서 정리했다.
학교
“조태백, 너 도대체 인터뷰는 언제 한 거야?” 우리 선생님은 어제보다 더 눈 밑이 시꺼매져서 물었다. “어제요.” “너, 왜 선생님 허락도 안 받고 인터뷰 했어?” “그것도 허락 받아야 하나요?” 나는 정말 의아했다. “아니다. 됐다.” 선생님은 갑자기 울먹거리는 것 같았다. 머리를 한 손으로 짚고 눈을 지그시 감은 선생님이 불쌍해 보였다. “조태백. 너, 교장선생님이 오래.” 황서현이었다. 황서현은 어제 이후로 나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마음이 계속 쓰였다. 애들은 모두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황서현만 무관심했다. 서현이는 자기 자리에 앉아 새치름한 표정으로 책만 들여다봤다. ‘어제 뉴스를 보고 저러는 걸까?’ 삑-삑-삐빅, 말하는 모자이크 조태백이 생각나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언젠가 오보철 아저씨를 다시 만난다면 정말 크게 화를 내리라 다짐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황서현이 저렇게 구는 건 좀 찜찜했다. 나는 교장선생님이 왜 나를 부를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황서현이 정말 왜 저럴까?’ 하는 생각만 하며 교장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요.” 교장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네가 태백이로구나?” 교장선생님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책상에는 신문이며 서류가 엄청나게 많았다. “자리에 앉으렴.” 나는 소파에 앉은 뒤 교장실을 두리번거렸다. 책이 참 많았다. 황서현이 좋아하는 동시집도 많았다. “초코 우유랑 요구르트가 있는데 뭐 마실래?” 교장선생님은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초코요.” 교장선생님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커트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초록색 플레어스커트가 교장선생님의 하얀 머리카락과 참 잘 어울렸다. 황서현도 늙으면 저런 모습일까? 잠시 생각했다. “음, 태백아. 오늘 교장선생님이 너를 부른 건 그 동안 네가 겪었던 일을 듣고 싶어서란다." “어제 9시 뉴스에 나왔는데 못 보셨어요?” “응. 어제 나왔다고 하더구나. 유감스럽게도 못 봤어.” “흠. 정말 유감이네요.” 나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나와 버렸다. ‘거짓말을 하고도 뻔뻔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9시 뉴스에 나왔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기자가 찾아왔다던데 인터뷰는 교실에서 했니?” “아뇨. 교실에는 안 들어오고 복도에서 명함을 줬어요.” “그래, 그랬구나. 다행이구나.” 교장 선생님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초코 우유는 참 맛있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내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럼, 인터뷰했을 때처럼 나한테도 말해 주겠니?” 나는 빨대로 우유 한 모금을 쪽 빨아 마신 뒤 말을 시작했다. “제가 깜빡깜빡 잘해요. 선생님은 저를 오해하더라구요. 제가 숙제를 안 하고 거짓말하는 거라고 말이에요. 숙제장에 분명히 숙제를 했는데 말이죠. 숙제장을 집에 두고 온 거였어요, 정말.” 잡혀간 이야기이며, 탈출하고 경찰에 전화한 일, 조사를 받은 일, 인터뷰했던 일을 모두 교장선생님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듣는 교장선생님 반응은 꽤 다양했다. 어이쿠, 저런, 오! 주여, 정말 그랬단 말이니? 휴……, 하면서 들었다. 내 걱정만 해서 그러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살짝 받기는 했지만,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교장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나를 신나게 했다. “그래, 정말 힘들었겠구나. 고생했다, 태백아.” “네. 알아주시니 감사해요.” 나는 다시 초코 우유를 쪽 빨았다. “숙제는 왜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그걸 왜 하는 걸까요? 다 아는 걸 쓸데없이. 종이 낭비, 샤프심 낭비, 시간 낭비예요. 그 날도 숙제장이 없어서 결국 이렇게 된 거잖아요.” 순간 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멍청이가 돼 버린 기분이었다. 아, 내가 너무 방심했다. 교장선생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각 사각 사각. 교장선생님의 플레어스커트가 소리가 들렸다. “초코 우유 하나 더 마시렴.” 교장선생님이 초코 우유를 하나 더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진땀이 흘렀다. “그래, 이제 가 보렴. 수업 시작했겠다.” 나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이제 끝이구나.’ 힘없이 교장실 문을 나서는데 교장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조태백. 앞으로 일 주일에 한 번씩 교장실에 들르려무나.” 손이 후들후들 떨려서 문고리를 잡기 힘들었다. 목이 문틈에 끼인 것 같아 잘 닫을 수도 없었다. 복도를 올라오며 이제 곧 끝이 날 내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복도에 끝도 없이 길고 검은 카펫이 깔린 것 같았다. 맨 끝에 다다르면 낭떠러지가 있는 그런 카펫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아빠, 엄마, 황서현, 형, 선생님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런데 문득 ‘일 주일에 한 번씩’이라는 교장선생님 말이 생각났다. 왜 일 주일에 한 번씩 나를 오라는 거지? ‘일 주일에 한 번씩 나를 고문하려고 하는 건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교장실에 거꾸로 매달려서 회초리 맞는 모습이 떠올랐다. 교장선생님이 웃음지으며 찰싹, 찰싹, 찰싹 나를 때리는 모습이었다. 난 정말, 이제 죽었다.
놀이터
거짓말은 결국 탄로 난다.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는 엿새째 되는 날 저녁에 경험했다. 따갑고 무시무시하고 춥게. “나가!” 사실을 알게 된 아빠는 순식간에 변신했다. 아빠에게 내가 들은 말은 그 뒤에 더 많았다. 굳이 욕을 쓸 필요는 없겠다. 욕이 뭐 거기서 거기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변신한 아빠, 이 분이 하는 욕은 차원이 다르다. 한 번 들으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턱턱 막힌다. 한 번도 이런 욕을 들어보지 못한 어린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 기절하는 어린이가 속출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욕을 생략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다혈질 아빠 밑에서 사는 내가 가끔 불쌍하지만, 겨울을 보내지 않고는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말도 있으니까. 일단 견뎌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욕뿐만 아니라 날아오는 신발과 베개, 휴지통을 막아 내며 집을 나왔다. 힘겨운 탈출이었다. 나는 놀이터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조금 있다가 들어가면 될 거야. 형도 가끔 그러니까.’ 나는 나를 위로했다. 목이 따가웠다. 아까 티슈 박스에 목이 긁혔나 보다. 저녁노을이 어둠에 묻혀 사라지고 밤이 되었다. 여름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꽤 공기가 찼다. 쌀쌀한 공기에 나는 더 서글퍼졌다. 벌레는 오늘따라 ‘처량하다, 처량하다, 조태백.’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첫날 숙제장을 가지러 집으로 오던 길이 생각났다. 숙제장 살 돈을 103호 할아버지에게 빌려 달라고 했어도 됐는데, 길에 500원짜리가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달려오느라 못 봤을 거야, 바보.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야, 들어오래.” 형이었다. 나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여기 있다 들어오는 건 어떻게 알았냐? 새끼, 뻥치는 꼴하고는.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음 한 대 맞고 끝나잖아. 미련해 가지고는.” 형이 타박을 줬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렇게 고마웠을까? 나는 그네에 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냥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으면 조금 혼나고, 마음도 편하고, 숙제장 사는 일도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야. 맞아. 형 말이 맞아. 흑흑. 내가 왜 그랬지? 엉엉.” 형은 내가 한참 동안 울도록 내버려 뒀다. 그리고 내가 그네에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줬다. 한 번도 형이 나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날 형은 나를 꽤 오랫동안 기다려 줬고 돌아오는 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문 앞에서 망설이자 형이 말했다. “아빠, 일 나갔어.”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은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형, 형은 내가 안 미워?” “미워. 왜 안 밉냐? ‘니 동생 다 뻥이었다면서?’ 친구들이 막 그럴 텐데. 다들 킬킬 댈걸? 물론 나도 같이 웃겠지만, 큭. 여하튼 미우나 고우나 가족은 가족이야. 이런 일로 너 안 내쫓으니까 쫄지 마, 멍청아.” 나는 형이 좀 달라 보였다. 형이 왜 형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뒷이야기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우리 선생님은 요즘 나한테 말을 안 시킨다. 이해할 수 있다. 선생님 눈 밑은 점차 살구 빛으로 돌아오고 있다. 나는 사건이 마무리되는 동안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들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벌을 내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말을 걸었을 때 친구들이 나를 외면할까 봐 두려워 애들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힘든 시간이었다. 황서현은 내가 말을 잘 하지 않자 무척 서운해 했다. 화를 내기도 했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턴가 화를 내지도, 한숨을 쉬지도 않았다. 대신 서현이는 내 서랍 속에 색깔 사탕을 하나씩 넣어 놓기 시작했다. 112 허위 신고 벌금이 그저께 나왔다. 나는 요즘 아빠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빠가 또 변신하면 큰일이니까. 가끔은 엄마 눈에도 안 띄게 조심해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형은 물론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아빠는 잠을 자고 있다. 어제와 오늘은 밤 근무다. 오늘은 개교기념일이라,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맥코맥 씨, 우리에게는 이제 시간이 사흘 정도 남았습니다.” 나는 부엌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나는 볕이 드는 부엌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한다. “파악한 사건의 전모를 보자면, 이 사건의 범인은 K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니 오늘 다시 범행 현장을 찾아가 보도록 하세.” 일 주일에 한 번씩 회초리를 맞을 줄 알았는데 교장선생님은 내게 책을 빌려 주었다. 나는 일 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었다. 요즘은 한꺼번에 서너 권씩 빌려 오기도 한다. 벌써 열여섯 권 째다. 이번 주는 추리소설을 빌려 왔다. 어제, 점심 시간에 교장실에 갔다. “이제 곧 6학년이 되겠구나, 태백아.” “네.” “오늘은 교장선생님이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교장선생님 동시집이란다. 직접 사인도 했어.” 교장선생님은 사인을 보여 주며 웃음지었다. “교장선생님은 나중에 태백이가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땐 태백이 네가 직접 사인한 책 교장선생님 줘야 한다, 알았지? “네.” 나는 아주아주 작게 대답했다. 내가 작아져서 그렇게 대답한 게 아니다. 목이 메어서였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바보같이……. 울긴 왜 울었을까? 겨우겨우 참아 왔는데.’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나는 동시집을 펼쳤다. 교장선생님 사인을 다시 봤다.
추리소설 작가, 조태백.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 추울 때는 왜 추울까, 그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있단다. 추위를 이겨 내는 방법을 태백이가 발견하길 바란다.
추신- 나중에 교장선생님도 등장인물로 넣어 주렴.
반 친구들은 사건 전과 별 다름없이 나를 대하지만, 가끔 비난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안다. “정말 후회하고 있다고. 정말이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시간이 흘러 나를 좀더 나은 사람으로 바라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내 짝꿍 황서현에게는 그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교장선생님에게도, 형에게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 책에게도.
황 현 진 1977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으며, 숭의여자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2006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동시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대학원 동화미디어창작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