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라쉬 핵심 수행은 아래와 같다
1. 나에게 어떤 생각,느낌이 일었났다.
2.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 났는가?
3. 나에게 일어났다.
4.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질문하면서 밖으로 향한 의식을
나의 내면으로 조금씩 자동으로 향하게 된다
왜냐면 나라고 믿어던 생각,느낌등이 점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아지랭이 같은 것들이고
이런 경험들이 모여서 나라는 마음을 만든것을 점점 알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수행이 익숙해 지면
지금 눈앞에 있는 현상만 있고
현상을 분별하지 않고 알기만 하는
앎이 조금이 점점 더 확실해 진다.
점점더 고요해지고 선명해진다.
우리나라의 선과 같은 맥략인것 같다.
"이 뭐꼬?"
불교로 해석해 본다.
1. 내 눈앞에 대상이 나타 났다. 생각이 일어난다.
이 생각은 대상에 나의 의식 사이에서 일어났다.
(참고로 기억도 대상이다.)
2. 나에게 물체를 만져다 => 딱딱한 감각이 일어났다.
이 딱딱한 감각은 나의 감각과 대상 사이에서 나온 딱딱함이다.
물체에서 손을 접촉을 하지 않으면 바로 사라진다.
3.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다 => 어떤 맛이 일어났다
이 맛은 나의 감각과 음식 사이에서 나온 맛 이다.
음식을 삼키면 바로 맛은 사라진다.
4. 앞에 향수가 있다 => 좋은 냄새가 난다.
이 냄새는 나의 감각과 향수 라는 대상 사이에서 냄새가 생성되었다.
향수를 치우면 바로 냄새가 사라진다.
5. 누군가 종을 친다. =>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종의 울림인 주파수와 나의 감각 사이에서 소리가 생성되었다.
더 이상 종을 치지 않으면 소리는 바로 소멸된다.
6. 앞에 빨간색 차가 지난간다. => 빨간색이 보인다.
이 빨간색은 나의감각과 차라는 대상 사이에서 일어났다.
위의 글에서 파랑색 내용들과 결합된 감각,느낌등이 기억되어 그것을
우리는 나의 마음이다, 나의 자아이다. 내가 있다라고 착각한다.
감각도 대상도 홀로 존재 못하는 실체가 없습니다.
반드시 감각과 대상이 만났을 때만 그 둘이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이 둘사이에서 일어난 생각,감정등은 당연히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실체없는 것을 나로 착각하고 살아 갑니다.
중생의 삶입니다.
불교에서 이 기억들이 모여서 아뢰야식이 되고, 아뢰야식에 의지해
말라식인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있음으로 인하여, 남도 있고 대상도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치를 알고 사유해 보면 파랑색 내용중
어디에도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모든게 대상과 감각사이에서 나온 허망하고 일시적으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생각,감정,느낌)
그 어디에도 고정된 '나'라고 인식 할만한 것이 없다.
또한 대상은 감각이 있어야 존재하고, 감각도 대상이 있어야 존재한다.
둘다 사유해 보면 한 덩어리이다.
이런 이론이 확실히 정립되면
감정,생각,분노,우울함 등이 생기면 즉시
이것들이 누구에게 일어 낫는가?
나에게 일어났다.
나는 누구인가?
(이론을 알고 있으므로 점점 생각, 감정등에 자유로워 진다)
마하라쉬에 의하면 위와 같이 2년 정도 열심히 정진하면
의식이 각성이 일어나서 나의 본래의 모습에 늘 머물수 있다고
합니다. 즉 깨달음
즉 생각은 허망함하고, 일시적이면, 생긴곳도, 멸하는 곳도 없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접속햇을때 일어나는 느낌과 같다는 것을 알아
생각과 몸이 '나'라는 생각의 견해가 바뀌어
그 모든것을 아는 각성 상태의 앎에 항상 머물수 잇습니다.(본삼매)
본 삼매:
온 세계는 나의 앎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 함과
이전의 나를 몸과 마음(기억의 덩어리)을 나로 생각한던 것에서
견해가 바뀌어 모든것을 아는 허공 같은 앎을 '나'로 인식되며,
모드것을 환희 비추기만 하는
본래의 '나'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상태
즉 지금이 현상 자체 바로 나의 앎이자, 진아이자,
대상과 앎이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님을 알수있다(불이)
개인 적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첫댓글 아침 행복선
유튜브(동영상)를
통해 법문을 듣고
오늘 부터
법문을 읽고
댓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영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