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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10) - 제 2장 선과 시의 만남 3.새로운 언어 인식
3. 새로운 언어 인식
명법에 의하면 선의 문자화, 곧 선이 문자로 표현되는 이런 변화는 시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련되고, 그것은 문자선의 언어 인식을 수용한 결과이다. 그것은 손가락과 달, 부호와 의의, 능지와 소지, 언어와 존재의 동일성 인식으로 요약된다. 말하자면 언어 기호를 구성하는 기표(말소리, 능기)와 기의(뜻, 소기)의 하나가 되는 언어이며, 나는 그것을 기호의 투명성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선의 시쓰기' 참고 바람) 다시 생각하자. 과연 기호의 투명성은 무엇인가? 조주 선사의 다음 공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그렇다.
학승: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 : 뜰 앞의 잣나무다.
학승 : 스님은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조주 :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학승 :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 : 뜰 앞의 잣나무다.
여기서 '뜰 앞의 잣나무'라는 선사의 말은 뜰 앞의 잣나무를 지시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가 된다. 무슨 뜻인가? 일반적으로 말(기호)은 지시물을 지시하고 그때 의미가 발생한다. 그러나 선사의 말은 뜰 앞의 잣나무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한다는 것은 당시 뜰 앞에 잣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승은 '스님은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경계는 식(識)의 대상, 쉽게 말하면 주관이 인식하는 객체, 대상, 사물이다.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사가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은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뜻.
그러나 학승이 다시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물을 때 선사는 다시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뜰 앞의 잣나무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는 대상을 지시할 때 의미를 생산한다.' '뜰 앞의 잣나무'는 '뜰 앞의 잣나무'를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그러나 선사는 다시 조사의 뜻, 불교의 근본을 묻는 학승의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뜰 앞의 잣나무'가 아니며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다. 말하자면 의미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잣나무이고, 이런 말은 지시물(대상)이 없기 때문에 말이 그대로 지시물이 되는 그런 말이다. 기호와 지시물의 거리가 소멸하고, 기호가 지시물이 된다. 손가락(기호)과 달(지시물) 사이의 거리가 소멸하고 손가락이 바로 달이 된다.
요컨대 기호의 투명성, 이른바 투명한 기호는 기호와 지시물, 언어와 대상의 거리가 소멸하고, 기호가 지시물을 지시하지 않고, 따라서 기호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러므로 기호가 바로 지시물이 되는 언어현상을 뜻한다.
앞에서 명법은 문자선의 경우 손가락과 달이 하나가 된다고 했는데 조주의 말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불교에선 흔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말, 문자)을 보지 말고 곧장 달(불성, 깨달음)을 보라고 한다. 부처님은 많은 설법을 했지만 설법을 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부처님은 <능가경>에 이르기를 '나는 깨달음을 얻은 후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자(一字)도 설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이른바 불설일자(不說一字), 이런 말씀은 깨달음이 문자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의 세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달마 대사는 교(敎)에 의해 종자를 깨닫는 자교오종(藉敎悟宗)에 대해 말한다. 자교란 교, 가르침, 공부에 의한다는 뜻이고, 오종은 종지, 본래 뜻, 불성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달마는 불립문자를 새롭게 해석한다. 불립문자나 불설문자가 있는 그대로 문자나 설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나 설법을 매개로 한다는 점이 새롭다. 그후 불리문자는 혜능에 의해 불리문자, 곧 문자를 떠나되 떠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교오봉이든 불리문자는 중요한 것은 불립문자의 정신이고, 따라서 자교오종의 경우 자교, 곧 문자, 가르침에 집착하면 안 되고, 이른바 직지인심(直指人心)이 강조된다.
직지인심은 곧장 마음으로 들어가라는 것, 그러니까 달(불성, 깨달음)을 가리키는 손가락(문자, 언어, 가르침)을 보지 말고 곧장 달을 보라는 뜻이다. 마조 도일 이후 조사선에 오면 이런 개념은 이른바 즉심즉불(卽心卽佛)로 발전한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 따라서 일상적 평상심이 바로 깨달음이 된다.
손가락과 달
문제는 손가락(指)과 달(月)이 하나가 되는 경우 손가락과 달의 거리가 소멸하고, 따라서 손가락(指)과 마음(心)의 거리도 소멸한다는 점에 있다. 지월(指月)은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곧장 보라는 것, 직지인심(直指人心) 역시 손가락이 아니라 마음을 곧장 보라는 것. 그러나 이런 단계가 심화되면 손가락이 달이고 손가락이 마음이 된다. 당나라 구지(俱지) 선사는 학승이 진리에 대해 물으면 언제나 손가락 하나를 쳐들었다. 이른바 구지일지(俱지一指) 역시 손가락이 그대로 마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다음은 구지 공안.
구지가 암자에 있을 때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구지 주위를 세 번 돌고 "말씀해 보시오. 바르게 말하면 삿갓을 벗겠소." 이렇게 세 번 묻지만 구지는 대답을 못한다. 비구니가 떠나려 하자 구지가 "날이 저물었으니 쉬었다 가시오." 말하자 비구니는 "한 말씀 하신다면 머물겠소." 말한다. 그러나 구지는 역시 대답을 못하고 비구니는 떠난다. 그후 구지는 탄식하며 말한다. "내 비록 장부의 탈을 썼으나 장부의 기상이 없으니 이곳을 떠나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야겠다." 그날 밤 산신이 꿈에 나타나 "이곳을 떠나지 마시오. 장차 육신보살이 와서 화상을 위해 설법할 것이오." 말한다. 열흘이 지나 과연 천룡(天龍) 화상이 온다. 구지가 절하고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자 화상은 한 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그 자리에서 구지 크게 때닫는다. 그후 학승이 진리에 대해 물으면 오직 한 손가락을 세울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구지 선사가 손가락 하나들 든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 역시 화두가 되지만 나는 지금 손가락과 달, 손가락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구지의 손가락 하나는 그의 몸일 수도 있고 몸이 일체 현상, 곧 제법이고 우주일 수 있다. 그러니까 손가락 하나가 우주이고 나와 우주는 다른 게 아니다. 그러나 손가락과 달, 손가락과 마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면 손가락이 달이고 손가락이 마음이 된다.
나는 앞에서 선의 시쓰기에 대해 말하면서 가리키기(指)의 방법, 곧장 가리키기(直指)의 방법, 그리고 선종에서 말하는 지사이문(指事以問)의 방법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런 방법들은 보여주기, 특히 곧장 보여주기(直示)의 방법을 극복한다. 곧장 보여주기(직시)는 일본 하이쿠처럼 설명, 정의, 설명적 묘사, 비유 등을 배제하고 사물이나 상황을 곧장 보여주는 방법이다. 그러나 가리키기(指)는 사물이나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손으로 가리키기만 한다. 이런 방법의 극단이 이른바 곧장 가리키기(直指)의 방법으로 이것은 '이거'라는 말도 없이 손으로 대상을 가리키기만 하고 이 단계에 오면 시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로 나간다.
초기 선종 조사들은 제자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변의 사물을 가리키며 '이게 무엇인가?'라고 곧장 질문하는 이른바 지사이문의 방법을 사용하고, 내가 말하는 직지의 방법도 크게 보면 비슷하다. 지사이문이 강조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분별을 버리고 사물의 당처에 증입하는 것, 곧 제자들의 깨달음을 시험하는 것으로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험한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선의 시쓰기' 참고 바람)
손가락과 달, 손가락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둘 사이의 거리는 소멸한다. 손으로 가리키기만 할 뿐 대상을 보여주지 않는 방법(直指), '이게 무언가?' 물으며 제자들의 깨달음을 시험하는 방법(指事以問)도 그렇다. 앞에서 해석했듯이 조주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다' 라고 하는 말도 그렇다. 이때 '뜰 앞의 잣나무'는 지시물(대상)이 없기 때문에 말이 그대로 지시물이 되는 그런 말이다. 기호와 지시물의 거리가 소멸하고, 기호가 지시물이 된다.
그런 점에서 선사가 말하는 '뜰 앞의 잣나무'는 직지의 방법, 곧, 곧장 가리키기만 할 뿐 언어를 떠난 경지이다. 언어(분별)을 떠났기 때문에 잣나무를 보여주지 않고, 사물에 대한 분별을 버리고 사물의 당처에 증입케하는 '이게 무언가?'라고 묻는 지사이문(指事以問)의 방법과 유사하다. 조주 선사의 말씀은 언어를 떠난 경지에서 사물을 지시하는 방법이고, 언어를 떠났기 때문에 자아와 대상의 거리가 소멸한다. 따라서 조주 선사의 말(기호)과 대상(지시물)은 하나이고, 기호는 대상이 된다.
잣나무를 가리키는 손가락(말)은 잣나무(대상)가 되고, 잣나무는 달이 되고, 결국 손가락은 달이 된다. 그러니까 잣나무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잣나무, 일체의 의미, 분별, 차별을 떠난 잣나무이고, 이런 잣나무가 마음, 도, 깨달음과 통한다. 시에 비유하면 주관(의)과 객관(경)이 하나가 되면서 깨달음의 계기가 된다. 그런 점에서 학승은 선사의 말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11) - 제 2장 선과 시의 만남 4.선시와 선적 어법
4. 선시와 선적 어법
송대 시학이 선종과 만나면서 새롭게 인식하는 언어, 시어의 특성을 명법은 손가락과 달, 부호와 의미, 능지와 소지, 언어와 존재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내가 조주와 구지의 공안을 살핀 것은 이런 어법 혹은 인식이 손가락과 달, 손가락과 사물, 손가락과 마음, 손가락과 우주가 하나가 되는 보기이고, 특히 깨달음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물론 공안은 선시가 아니다.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에서 시적 어떤 선적 어법(공안), 선시, 선의 시쓰기의 차이를 밝힌 바 있다('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 참고)
명법이 말하는 송대 시학의 새로운 언어 인식을 나는 기호의 투명성이라고 말한 바 있고, 그것은 언어 기호를 구성하는 기호와 지시물, 혹은 기표(말소리)와 기의(의미)의 거리가 소멸하면서 기호 자체가 전경화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기호와 의미, 능지(주체)와 소지(객체). 언어와 존재의 거리가 소멸한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선적 어법과 시적 어법의 관계이다. 내가 말하는 선적 어법은 선사들의 공안에 나타나는 선사들의 어법이므로 선시의 어법이 아니다. 나는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공안)의 차이를 크게 일상적 어법, 시적 어법, 선적 어법으로 나누어 살핀 바 있고, 그것은 실천적 기능과 미적 기능을 기준으로 한다. 간단히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의 차이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은 모두 기호의 투명성을 지향하는 시적 기능을 소유한다. 그러나 시적 어법은 미학을 강조하고(1차적 기능), 선적 어법은 선적 실천을 강조한다(1차적 기능). 둘째로 시적 어법은 청자를 움직이게 하는 이른바 언표 내적 기능(실천)이 상실되고 선적 어법에선 이런 기능이 강조된다. 셋째로 시적 어법은 비실천적이고 유희적이고 자율적인 세계(아이러니, 역설)이고, 선적 어법 역시 자율성을 소유하나 실천, 특히 선적 실천(깨달음)을 강조하고 유희적 창조성은 소멸한다. 그러므로 선적 어법의 자율성은 자율성을 부정하고 해체하기 위한 자율성이다.(이승훈,<선과 기호학> 한양대 출판부, 2005. 84쪽)
원래는 일상적 어법, 시적 어법, 선적 어법의 차이와 공통점을 해명한 글이지만 여기서는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의 차이만 다시 요약했다. 문제는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시적 어법은 현대시의 어법을 모델로 한다는 것. 현대시는 대상과 단절된 툭수한 미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요컨대 자율성 미학, 언어의 경우 기호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미학이고, 그런 점에서 근대시나 전통시를 배제한다. 한편 선적 어법은 선시의 어법이 아니라 공안에 나오는 전통시를 배제한다. 한편 선적 어법은 선시의 어법이 아니라 공안에 나오는 선사들의 어법을 말한다. 그러나 이재복은 내가 말한 이런 선적 어법의 특성이 선시에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다음은 그의 말.
선적 어법의 이러한 특성은 혜심 이후 하나의 양식으로 이어져온 선시의 경우에도 그것이 오롯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고려나 조선 시대의 선시뿐만 아니라 현대의 경우에도 선적인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시에서도 미적 기능이나 언어 내적 효력의 상실 그리고 자율적이고 자기 지시적인 어법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선시에서는 선적 어법과 시적 어법이 동시에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재복, <선의 원리를 통해 본 한국현대시의 리좀적 상상력>
<현대시> 2010년 7월
내가 말한 선적 어법은 공안에 나오는 선시들의 어법이고, 따라서 이런 어법이 선시에 그대로 드러나느냐, 드러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나의 주장과는 무관하다. 아니 나는 선적 어법의 특성이 선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이 책에서 내가 선적 어법과 선시의 어법에 대해 해명한 것은 선적 어법이 선의 어법과 다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선의 시쓰기' 참고) 그러나 이재복은 내가 말하는 선적 어법과 선시의 어법을 동일시하면서 고려, 조선 시대, 현대의 경우 모두 선적인 시에는 미적 기능이나 언어 내적 효력의 상실 그리고 자율적 자기 지시적 어법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첫째로 나는 선시의 어법에 대해 말한 적이 없고, 공안에 나오는 선사들의 어법을 선적 어법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나는 선시 혹은 선적 시의 미학에 대해 말한 적이 없고, 이 책을 쓰면서 이 문제를 나대로 해명한다. 다시 간단히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유형 1차적 기능 2차적 기능
일상적 어법 실천 미학
시적 어법 미학 실천
선적 어법(공안) 선적 실천 미학
선시 실천-미학
선의 시쓰기 수행-미학
시적 어법은 미학이 1차적 기능이고 실천이 2차적 기능이다. 그러나 선적 어법은 선적 실천이 1차적 기능이고 미학이 2차적 기능이다. 한편 선시는 이런 선적 실천과 미학이 동시에 1차적 기능이 된다. 그리고 선의 시쓰기는 선시가 아니라 시쓰기 수행이 되는 시인들의 경우에 해당된다. 선시가 돈오(頓悟) 시학의 범주에 든다면 선의 시쓰기는 점수(漸修) 시학의 범주에 든다.
그러니까 나는 선적 어법과 시의 어법을 다르다고 주장하고, 이때 선적 어법은 선시의 어법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선시에는 내가 말한 선적 어법의 특성(선적 실천)이 오롯이 드러나지 않고, 미학이 강조된다고 말한다. 선걱 어법의 1차적 기능은 선적 실천이고 2차적 기능은 미학이다. 그러나 선시의 경우엔 이런 실천과 미학이 동시에 함께 1차적 기능이 된다. 문제는 그가 내가 말하는 선적 어법을 선시의 어법과 혼동하고 동일시한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선적 어법(공안)과 시적 어법의 공통점과 차이이지, 이런 특성이 선시에 드러나느냐 드러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나의 주장을 비약해서 해석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선시에는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이 동시에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선시에도 미적 기능이 드러나고 언어 내적 효력이 사실되고, 자율적 자기 지시적 기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 역시 내가 말하는 선적 어법이 선시의 어법이지만 선시의 어법으로 옳지않다는 비판이다. 나는 선적 어법이 선시의 어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한편 선시에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이 동시에 드러난다는 그의 주장은 시와 선, 선과 시의 만남, 회통을 강조한 것이지만 나의 이론, 논리, 개념에 의하면 문제가 있다. 내가 말하는 선적 어법은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선적 어법을 선시의 어법과 동일시한다면 선시에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선시의 어법)이 동시에 드러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오류이다. 왜냐하면 선적 어법(선의 어법)이 이미 시적 어법을 내포하는 것이지 두 어법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시는 시와 선, 혹은 미학과 선적 실천의 만남이지 두 어법이 동시적 드러남이 아니다.
셋째로 이런 오독은 '언어의 내적 효력'이라는 말에도 드러난다. 나는 '언어의 내적 효력'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고 '언표의 내적 효력'이라고 했다. 언표의 내적 효력은 화행론(speech act)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특히 오스틴(Austin)이 사용하는 언표 내적 행위(illocutionary act), 곧 화자가 말하면서 수행하는 효력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실천이다. 시적 어법은 이런 효력의 상실이다. 시에서 '바다를 보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바다를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언어 내적 효력은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언어(Language)는 말(speech)이 아니고 더욱 언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내적 효력이 없고, 언어는 어디까지나 추상적 체계이다. 말과 언어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언표와는 다른 개념이다. 이런 오독은 문맥을 모호하게 한다. 제자가 이렇게 오독하는 것은 선생인 나의 책임도 크다.
넷째로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공안)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내가 주장한 건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 모두 미적 기능을 지향하지만, 전자는 미학을 강조하고 후자는 미학을 부정한다는 것, 시적 어법은 미학을 강조하고 선적 어법은 선적 실천을 강조한다. 시의 경우 미학이 1차적 기능이라면 공안의 경우 미학은 2차적 기능이고 실천, 특히 선적 실천이 1차적 기능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적 어법을 언표 내적 효력(실천)을 강조하고 시에는 이런 효력이 소멸한다. 그러나 그는 선시에도 언표 내적 효력이 상실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시는 선적 실천이 상실된다. 과연 그런가? 선시가 강조하는 것은 미학보다 선적 실천(언표 내적 효력)이고, 이때 실천은 깨달음의 실천이고 깨닫게 하는 시적 실천이다. 요컨대 선적 실천이 시적 실천이다. 선시는 깨달음의 시쓰기, 곧 깨달음과 미학이 동시에 존재하는 특수한 문학 장르이다. 그러므로 선시에도 자율적이고 자기 지시적 어법(미학)이 드러난다는 말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런 미학이 드러나는 방식이고, 나는 그것을 선적 실천과 함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글을 비판하는 것은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나의 주장을 오해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러니저러니 따지는 걸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위인이다. 그러나 학문이나 이론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최소한 내가 한 말, 나의 주장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필요가 있지 않은가? 최근에 나는 건강이 안 좋아 우울한 상태이므로 이런 글을 쓰면 더 우울해진다. 그러니 지금 나는 약을 먹고 더 우울한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울, 번뇌, 망상을 극복하기 위해 선이 있고 선시가 있지만 선시에 대해 글을 쓰면서 더 우울한 것은 말이 안 된다. 번뇌, 망상이 선이라지만 아직 나는 그런 경지를 모른다.
어제밤엔 내가 고문으로 있는 계간 <시의 세계>가 마련한 제3회 이상시문학상 수상식 기념식에 참석하고 뒤풀이까지 따라가 과음을 해서 지금 심신이 말이 아니다. 수상자는 시를 잘 쓰는 송찬호 시인. 나는 문학상 위원장이다. 올 겨울 나는 거실에 앉아 호프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화장실로 뛰어가 거울 앞에서 가위로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러나 솜씨가 서툴러 제대로 자른 부분도 있고 자르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다음 날 아파트 앞 남성 전용 이용소에 가서 스님처럼 머리를 박박 밀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젊은 총각은 1cm를 남기라고 해서 그렇게 머리를 깍고 지낸다. 그러니까 스님 머리가 아닌 이상한 머리가 되었다.
그런 머리에 부분 가발을 쓰고 아파트를 나갈 때 아내가 또 싫은 소리를 한다. '머리가 그게 뭐야요? 모자를 쓰고 나가지.' 다른 때 같으면 못들은 척 하고 나갔겠지만 '그만 해요! 꼭 어디 갈 때 왜 그래?' 한마디 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 때문에 심사가 편치 않은데 아내까지 뭐라고 하니까 갑자기 화가 난 모양이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오후 다섯 시. 희끗 희끗 눈발이 친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 우산을 찾는다. 평소에 들고 다니선 우산은 없고, 낯선 우산이 있다. 낯선 우산을 들고 계단을 내려간다. 현관에서 우산을 펴지만 제대로 펴지지 않는다. 아니 우산 펴는 방법을 모르겠다. 눈은 오고 어색하게 편 우산을 들고 강남역으로 간다.지하 계단 앞에서 우산을 접지만 이번에 접는 방법을 몰라 펴진 우산을 그대로 들고 계단을 내려간다.
종합운동장에서 전철을 내린다. 어둠 속에 비와 섞여 눈이 내린다. 아시아 공원을 조심조심 걷는다. 허리에 플라스틱 보조기를 했기 때문이다. 힘들게 식장인 송파문화원까지 갔고 아무튼 오랜만의 외출이 너무 좋아 식이 끝나고 2차 뒤풀이까지 따라가 과음을 해서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아내는 새벽에 오대산 상원사에 부처님 만나러 가고 나는 늦잠 자고 일어나 밥 하고 국 끓이고 빈 아파트 창 너머 흐린 겨울 하늘을 본다. 이런 날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선은 무엇이고 시는 무엇인가?
이제까지 나는 선의 시학, 선과 시의 관계, 특히 송대 선시의 언어 인식을 중심으로 선시가 나오게 된 계기, 선시의 언어 인식애 대해 살피고, 선적 어법과 선시의 어법에 대해 해명했다. 이런 사유가 토대가 되어 현대선시의 이론 혹은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싶지만 과연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나면 한 줄 쓰고 생각나지 않으면 덮어두고 그렇게 산다.
(제 2장 선과 시의 만남 끝)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12) - 제 3장 여래선과 조사선 1.선의 유형
1. 선의 유형
나는 앞에서 선과 시의 관계를 중도로 해석하면서 선시를 크게 게송류, 선시, 수행적 선시, 전위적 선시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게송류는 게송, 오도송, 염송 등을 말하고, 이들을 선시와 구분한 것은 작자의 문제 때문이다. 게송류는 작자가 선사들로 한정되지만 선시는 선사와 일반 시인들이 포함된다. 수행적 선시는 깨달음 자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강조한다. 문제는 전위적 선시다. 공안과 화두는 엄격하게 말하면 선시가 아니다. 선시의 경우 선적 실천(깨달음)과 미학이 동시에 1차적 기능이 되지만 공안과 화두는 선적 실천이 1차적 기능이고 미학은 2차적 기능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안과 화두를 전위적 선시에 포함시키는 것은 이들이 보여주는 파격 때문이다. 이런 파격은 선을 지향하는 전위적 현대시의 출구를 암시하고, 그런 점에서 선과 아방가르드의 회통이 가능하다.
게송류와 선시는 깨달음과 미학이 중도의 관계에 있고, 수행적 선시는 수행과 미학이 중도의 관계에 있고, 전위적 선시는 공안이나 화두를 수용하면서 언어를 버리고 사유를 버리는 현대시를 포함한다. 이상 네 가지 유형은 모두 선과 시의 중도를 지향하고 실현하고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방향, 곧 동양 사상, 특히 선불교를 매개로 서구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현대선시는 선시도 아니고 현대시도 아니고, 선시와 현대시의 관계 역시 중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현대선시는 전통적 선시를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 선시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과연 현대선시가 나갈 방향은 어디인가? 나는 그 방향을 전통적 선시의 비판과 극복에서 찾자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현대가 탈락된, 이 시대가 탈락된, 이 시대의 고뇌와 갈등을 동기로 하지 않는 무색무취한 고색이 창연한 고풍스런 선시, 서정시가 선의 옷만 걸치고 있는 시들, 혹은 소승적인 어조로 일관된 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 정신이 요구되고, 이 아방가르드 정신을 선과 결합시켜야 한다. 요컨대 내가 생각하는 현대선시는 전위적 선시이고, 이런 선시는 선승들의 공안이나 화두 혹은 어록을 공부하면서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이고, 조사선이 격외선이듯이 격외시, 곧 일정한 규범과 형식과 틀을 파괴하는 그런 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 많은 공안, 화두, 어록을 언제 공부할 것이며, 인도 선과 중국 선 역시 시대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띠기 때문에 우리 현대시의 방향을 선에서, 선과 함께, 선에 의해, 선을 수용하면서 시로 발전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인도 불교는 선종이 아니고, 선은 6바라밀, 곧 보시, 인욕, 지계ㅡ 정진, 선정, 반야 가운데 하나이다. 6바라밀은 보살의 여섯 가지 실천 수행 항목이다. 선종은 인도 불교가 중국에 수용되면서 유학 혹은 노장사상과 결합되어 발전하는 독특한 불교이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중국 선종을 중심으로 선의 몇 가지 유형으로 간추리면서 시쓰기를 구성하는 자아, 대상, 언어, 쓰기라는 네 요소를 살피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선은 크게 조사선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조사선 이전은 달마-혜가-승찬-도신-흥인의 여래선과 흥인에서 분화하는 여래선(북종)으로 부르고, 조사선은 6조 혜능에 의해 정립되고 흔히 남종으로 부른다. 그러나 조사선은 다시 고가(五家)로 등분되기 이전인 초불(超佛)조사선과 5가로 분등된 월조(越祖)조사선으로 양분된다. 분등(分燈)이란 부처님의 진리(등불)가 나뉘어진다는 뜻으로 5가란 당나라 때 선종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5개의 종파, 곧 위양종,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6조 혜능의 남종을 계승하지만 각각 독특한 문파와 지도 방법의 종풍을 형성한다. 초불조사선은 혜능의 제자들인 남악회양과 청원해사를 근거로 하는 남악계와 청원계로 나누어진다. 이 두 종파 가운데 다시 5가 선문(禪門)이 가지를 뻗고 이들을 월조조사선이라고 한다. 요컨대 초불조사선은 6조 혜능부터 5가 이전까지이고, 5가부터 월조조사선이라고 부른다.(이상, 菫群, <조사선> 김진무-노선환 역, 운주사,2000 참고)
앞에서 말했듯이 중국 선, 곧 선종에서 말하는 선은 조사선 이전과 조사선 이후로 양분된다. 여래선은 조사선 이전을 말하고 조사선은 6조 혜능에 의해 정립된다. 따라서 여래선은 달마로부터 5조 흥인까지 나타나는 선풍을 말하고 조사선은 다시 5가로 분등되기 이전의 초불조사선과 5가로 분등된 이후의 월조조사선으로 양분된다.
초불조사선은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남악회양과 청원행사를 두 근원으로 하며 초불(超佛)이란 즉심즉불(卽心卽佛), 곧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에 의지하지 않고, 부처를 뛰어넘어, 밖에서 부처를 구하지 말고 스스로 자성, 본성을 보고,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마조에 의하면 평상심이 도다. 그러나 5가로 분등된 시기에는 예컨대 임제종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암시하듯이 이런 초불조사 개념도 부정하고 상하, 범성, 귀천 등 일체의 차별을 초탈하는 참 사람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초불조사선도 극복하고, 조사 개념도 초월하는 월조(越祖)라는 말이 나타난다. 월조조사선은 인간중심주의다.
그러나 초불조사선, 월조조사선은 태하법사의 주장이고 사실 두 단계의 선은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되는 건 아니다. 모두 초불월조를 기본으로 하되 앞 단계는 종(宗)을 이루지 못하고 뒤의 단계, 곧 5가 분등에 의해 독특한 종풍을 더욱 강화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인순(印順)은 조사선 대신 조계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조계선 혹은 조계의 선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은 6조 혜능이 소주의 동쪽 35리에 있는 조계산에 살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초불조사선, 월조조사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특히 도신, 흥인(동산 법문)의 동산종과 법융의 우두종의 대립과 융합을 강조하면서 조계선을 설명한다.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조계 문하의 석두 계통은 특히 관계가 깊어서 최초에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기댈 언저리(邊)조차 없다(泯絶無奇)' 고 한다) 같은 종풍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조계선은 강남에서(회창 이후 강남은 거의 모두 석두의 법계로 점유되었다) 우두종을 병탄(倂呑)했기 때문에 우두선은 소멸하였다. 조계선이 우두선을 병탄했다고 하는 것은 바꿔 말하면, 노장(老莊)을 병탄하여 분별지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어떠한 작위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즉 자리(自利)만을 중요시하여 이타행을 뒤돌아보지 않는 '중국선'이 성립한 것을 의미한다.
-인순, 이부키 아츠시 일역, 정유진 한역, 운주사 2012, 22쪽
인순에 의하면 우두선과 강동의 현학(玄學)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우두종은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卽心是佛)', '마음이 청정하면 부처다(心淨是佛)'라고 주장하며 인도 전래의 (달마계) 동산종과 대립된다. 이런 주장이 조계 혜능의 문하에도 영향을 미쳐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 '무심이 도다' 라는 절충적인 주장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인순은 여래선(달마선)과 조사선의 차이, 곧 조사선이 보여주는 초불월조 사상보다 이 사상의 토대를 강조하고, 그것은 동산종(도신, 흥인)과 우두종(법융)의 대립과 융합, 특히 우두종과 현학(노장사상)의 관계이다.
이 글에서는 조계선을 조사선으로 부르고, 조사선 이전과 이후, 그러니까 여래선과 조사선의 차이, 그리고 5가 분등선에 대해 간단히 살핀다. 월조조사선에 해당하는 5가 분등선 가운데 제일 먼저 형성된 종파는 위앙종이다. 위앙종은 남악계에 속하는 남악-마조-백장의 계보에 속하는 위산과 앙산이 주도하며, 영우 선사가 위산에서, 혜적 선사가 앙산에서 종풍을 주도했기 때문에 위앙종이라고 부른다. 임제종은 남악-마조-백장의 계보에 속하는 위산과 앙산이 주도하며, 영우 선사가 위산에서, 혜적 선사가 앙산에서 종풍을 주도했기 때문에 위앙종이라고 부른다. 임제종은 남악-마조-백장-황벽의 계보에 속하는 임제가 주도하고, 조동종은 청원계인 청원-석두-약산의 계보에 속하는 조산과 양산이 주도하며, 양걔가 동산에서 그의 제자 본적이 조산에서 계승하기 때문에 청원 -석두-천황-덕산-설봉-현사의 계보에 속하는 법안이 주도한다.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법안종은 5가 가운데 가장 늦게 나타난다.
그러나 5가 종풍 가운데 임제종은 가장 오랫동안 전승되다가 양기와 황룡의 두 파로 나뉘게 되어 이른바 양기파와 황룡파가 나타난다.(이상 5가에 대해서는 황지약, <분등선>, 김진부-최재수 역, 운주사, 2002 참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