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병원 아저씨 / 나 인 구
몇 년 전 아내가 편안하게 신으라며 캐주얼 화靴(casual shoes) 한 켤레를 사 왔다. 평생 처음 신어 본 신발이었다. 퇴직 후 자유롭게 신을 수 있어서 계절도 날씨도 상관없이 줄곧 신고 다니다 보니 구두 밑창이 닳아 버렸다. 발바닥의 균형이 어긋나 팔자걸음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백화점 신발가게에 가서 밑창을 보수하려니 5만 원을 내라 했다. 수선비가 비싸서 포기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니 동네 은행 앞에 구두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창문에 <구두병원, 광택, 수선, 굽갈이> 등을 써 붙여 놓았는데 한 평도 안 되는 컨테이너 부스였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60대 후반의 아저씨가 오래된 구두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구두 굽을 갈아주는 데 얼마냐고 물으니 만 오천 원이라고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니까 사오십 분은 기다리라고 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 구두를 맡기니 헌 구두로 만든 슬리퍼를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구두병원 안 쪼끄마한 간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나이가 몇이며, 어느 곳에 사는지 물으며 시간을 메우고 있었다. 간간이 아가씨들과 중년 부인들이 샌들이나 구두 굽갈이를 맡기고 한두 시간 뒤 찾아가곤 하였다. 나도 다른 신발을 가지고 와서 맡기고 일을 본 뒤 찾아갈 걸 그랬나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뒤 굽을 칼로 잘라내고 있는 걸 어쩌랴. 그래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기료장수는 건강이며 세상 살아가는 방법들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위장에는 부추(전라도에서는 솔, 타지방에서는 정구지)를 삶아 먹어야 하고, 호박이나 가지를 많이 먹어야 좋다는 등 단방약에 관한 처방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구두 손질은 멈추지 않았다. 얼핏 들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돈을 벌어서 불우이웃을 돕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땐, 뭐 그런 것을 다 묻느냐며 얼버무렸다. 이 신기료장수는 독신으로 살면서 가난한 이를 돕고, 손수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온다고 들었다. 이야기 중에도 신발을 칼로 자르고 페이퍼로 닦고 문지르며 손끝으로 곱게 다듬다가 밖에 나가 숫돌에 문지르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한 뒤 강력 접착제로 붙이며, 송곳으로 꿰매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그런데도 새로 오는 손님의 일감을 주문받으랴, 수선한 신발을 내주랴 바삐 움직였다. 나는 대충 되었으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멀었단다. 신발을 신다가 잘못되어 창이 떨어지면 안 된다며 깔창을 뜯어내더니 다시 송곳으로 밑창을 꿰매는 게 아닌가.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널따랗고 두꺼운 보자기를 올려놓고 한 번도 하늘을 향해 본 적이 없는 구두 밑바닥을 뒤집어놓고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단단히 끈을 조이고 정성을 다하는 게 아닌가.
고무신이나 운동화는 빨아서 말릴 때 뒤집어 밑창이 하늘을 볼 수 있게 하건만, 가죽구두는 어디 그렇던가. 구두를 닦고 약칠을 하면서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택도 내며, 입김을 불어 살살 문지르고, 깔창은 씻어 말리지만, 밑창은 항상 땅에 엎드려 그 음침한 곳에 붙어있다. 그리고 늘 젖은 곳이나 더러운 곳만 밟는다. 깨끗하고 번들번들한 구두 밑창을 이 구두병원장(?)은 가장 가까이에서 소중하고 튼튼하게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만지면서 일을 한다. 갈 곳이 있다며 재촉했으나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더니 구두 뒤축에 징을 박으면 오래간다고 했다. 얼마냐고 물으니 3천 원이라고 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고 기다리니 이번에 또 구두손질을 하지 않는가. 됐다며 돈을 주려고 하니 또 뒤축을 페이퍼로 갈고 있었다. 직업 정신인가 아니면 내 구두를 가지고 캐주얼화 임상시험(?)을 하는 것인가?
구두병원장의 투철한 직업 정신이 돋보였다.
그 구두병원 아저씨를 보니 윤오영 님의 수필 <방망이 깎는 노인>이 문득 생각났다. 맡겨진 일에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 자세가 믿음직했다. 우리 모두가 이 아저씨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맑고 밝아지지 않을까 싶다.
[나인구] 수필가. 대한문학 시, 수필 등단
전북문협, 전북수필, 전주문협, 영호남수필.
대한문학, 은빛수필 회장 역임
* 시집《간주곡의 서정》 수필집《그런 돌이 되고 싶다》외
* 대한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 전주문학상, 은빛수필문학상 등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감동을 받지요. <방망이 깎는 노인>에 버금가는 장인정신이네요.
코로나19로, 기상이변으로 많이 어려운 시기입니다.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 얻은 소재로 이웃들에게 따뜻한 글로 위안을 주셨습니다.
첫댓글 구두병원장!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 분이 계시니 이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나인구 수필가님
이해숙 선생님 감사합니다.
백신 맞고 고생하셨으니, 면역력이 많이 많이 만들어 지십시오^^^
따뜻한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구두병원 아저씨 보다 "신기료장수" 너무 정겨운 말을 꺼내 주셨네요.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책에 나온 말 ~
잘 읽었습니다.
늘 좋은 글 올려주시는 이해숙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