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표 청백리' 청련 이후백 선생…공정 인사ㆍ국론 통합 힘쓴 경세가
주진 기자2022-08-30 08:34:46공유하기기사 프린트글씨 크게글씨 작게
이후백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등 행사 개최…박보균 문화부 장관 "이후백 선생의 삶ㆍ정신, 5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서인ㆍ남인 당쟁 격화 시기, 성리학적 학습 기반을 정치 현장서 실천청탁 엄격히 배격ㆍ임용시엔 신중…이순신 공직관에 큰 영향
[사진=인터넷]
[이코노믹데일리]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공직자, 인사 운영이 탁월한 리더십, 국민 통합 실천가, 뛰어난 학문적 성취, 글을 잘 쓰는 문장가. 이후백 선생의 삶이 펼쳐내는 드라마는 5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조선 중기 대표 청백리이자 학자인 청련(靑蓮) 이후백 선생(중종 15년∼선조 11년, 1520~1578)은 곧고 맑은 성정에 뛰어난 학식과 빼어난 문장으로 사림들에게 추앙을 받았으며 도승지, 대사간, 이조·호조·형조판서를 지내며 인사권을 공정하게 행사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은 강직한 관료이자 선비로 한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다.
◆공정·공익에 직분 다한 공직자·근검절약 검소한 삶 실천한 청백리 표상
1555년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간 이후백 선생은 1558년 호남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는데 이후백이 강직하고 명철하다는 소문만 듣고 스스로 사직하고 떠난 지방의 탐관오리가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1578년 6월 1일 ‘선조수정실록’에는 이후백에 관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후백이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대화 중에 벼슬을 부탁했다. 이후백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줬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친척 이름도 그 속에 기록돼 있었다.
이후백은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요.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라고 말했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봤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랏일을 그르쳤구나’라고 했다.”
이후백 선생이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1576년 함경도 삼수 고을 동구비보권관(종9품 경비대장)이었던 이순신이 여진족 침범을 막는 데 소임을 다하고 활도 잘 쏘아 관찰사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부 역사학계에서는 청렴강직한 이후백의 성정이 이순신의 위대한 영웅적 면모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추론도 하고 있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은 <이순신 파워인맥>이라는 책에서 ‘강직·청렴한 이후백이 이순신의 공직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1580년 7월 이순신은 전라도 고흥군 발포만호로 영전했는데, 당시 전라 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 하니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라고 연락했다. 이순신은 ‘이 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 키워온 나무를 하루아침에 벨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며 거절했다. 이는 이후백의 청렴과 강직을 본받은 행동이었다.
이후백은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백성들을 위해 세금과 부역을 대폭 감면했다. 그리고는 관원들 부정부패를 철저히 척결(剔抉)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당시 이후백이 너무나 지나치게 세금 등을 감면하였기 때문에 감영 창고가 텅 비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백 선생은 1577년 10월 함경도 관찰사에서 이조판서로 영전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1577년 10월 1일 선조수정실록에는 “청렴 근신하고 밝게 살피어 시정(施政)에 조리가 있었고,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의 선정을 사모해 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고 적혀 있다.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를 물러난 지 8년쯤 뒤 암행어사 허봉(許葑)이 함경도를 순찰하였을 때 길에서 만난 백성들이 모두 이후백의 안부를 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백이 이조판서라는 막강한 지위에서 공정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부귀와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공인정신을 완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율곡 선생은 ‘공직의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청고(淸苦)함을 지키니 육경(六卿)의 지위에도 가난하였지만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고 뇌물을 일절 받지 않아 손님이 와도 밥상이 초라하였다.’고 전했다.
이후백은 명종에게 ‘검소하면 씀씀이가 자연 번다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임금이 한번 부국(富國)에 뜻을 두면 세금을 거두는 신하가 으레 먼저 자신의 사욕을 채울 것이니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고 부국에 성심을 다할 자가 또한 몇이나 되겠습니까’라고 아뢰어 임금이 솔선해 검소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대우관 각당헌에서 열린 청련 이후백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뒷줄 왼쪽 넷째),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앞줄 오른쪽 둘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앞줄 오른쪽 넷째) 등이 참석했다. 사진 연안이씨 청련공파도문회 제공[사진=인터넷]
◆영·호남 지역 갈등, 서인·남인 간 당쟁에 국론 통합을 위해 애쓴 경세가
이후백 선생은 영남·호남, 서인·남인 간 대립 등 갈등을 해소하고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애쓴 경세가로도 존경받는다. 명분을 현실에 맞게 불편부당한 자세로 구현하고 실천하는 이론가였기에 이러한 관점과 태도를 정치 파쟁, 서인 기호학파와 남인 영남학파 간 당쟁을 완화하고 화합시키는 데 앞장섰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그는) 이율곡과 송시열, 류성룡에게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은 유일한 경세가였다”며 “을사사화 사후 정리를 파사현정 원칙으로 마무리해 당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은 것도 빛나는 공로”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후세 학자들은 ‘이후백 선생이 살아나신다면 조선의 사색당파가 사라질 것’이라고 아쉬워했다”고 전했다.
박보균 문화부 장관은 이후백의 통합 행보에 대해 “선생은 서인 기호학파와 남인 영남학파 간 대립이 격화하던 시대에 화합과 균형의 가치를 내면화해 가풍으로 확립한 보기 드문 인물”이라며 “지역과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요즘 시대가 반성적으로 본받아야 할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강제훈 고려대 교수는 ‘16세기 사림계 관인 이후백의 관직 생활과 그 의미’라는 주제 발표에서 “이황이나 기대승 같이 사상적 성취를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성리학적 학습에 기반을 두어 정치 현장에서 실천했다는 점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관인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연안이씨 청련가(靑蓮家)의 가풍과 그 계승 양상'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난 이후백이 전라도 강진으로 이주한 뒤 주요 활동기는 서울에서 보내면서 인적 연결망이 선대는 경상도, 후대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형성되게 됐다"면서 "서인 기호학파와 남인 영남학파 간 대립이 격화하던 시대에 이후백과 청련가는 화합과 균형의 가치를 내면화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내려온다. 바로 호남의 대표적인 문신(文臣)이자 가사문학 대가인 송순 선생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신 일이다.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1493∼1583)은 50여 년 관료 생활을 했지만 1533년 권신들이 나라를 어지럽히자 바로 고향 담양으로 내려가 정자를 짓고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비롯해 강호제현(江湖諸賢)들과 학문이나 국사를 논하며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 등 후학을 길러냈다. 또 송순은 이곳에서 시와 시조를 읊고 풍류를 즐겼는데 면앙정은 가사문학의 산실로 일컬어진다.
송순이 87세 되던 해에 송순의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방연(回榜宴)이 면앙정에서 열렸다. 전라도 관찰사를 비롯해 명사 100여 명이 모일 정도로 성대한 잔치였는데 잔치가 끝난 후 송순이 정자에서 내려올 때 당대 명인들이자 제자인 정철·임제·고경명·이후백이 손으로 가마를 만들어 스승을 메고 언덕길을 내려왔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면앙정에서는 연례적으로 ‘면앙정 송순 회방연 재현 행사’가 열리고 있다.
네 제자는 후일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이후백 선생 역시 한시의 대가였다. 이름도 당나라 시선 이백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라 하여 후백이라 했고, 호도 이백의 호 청련을 그대로 썼다. 정조대왕문집 ‘홍재전서’에서도 그를 뛰어난 문장가로 적시했고, 그의 문집인 ‘청련집’에는 한시 100여 수가 전하고 있는데 문학적으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랑비 주룩주룩 내려 돌아갈 길을 잃었는데(細雨迷歸路)
나귀 타고 가는 십 리 길 바람이 부는구나(騎驢十里風)
가는 곳마다 들매화가 늘어지게 피어 있는데(野梅隨處發)
은은한 향기 속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네(魂斷暗香中)'
매화는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운다 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절개를 상징하며 고결하고 맑은 선비 정신을 잘 나타내는 꽃이다. 이후백 선생의 꼿꼿한 청백리 선비 정신은 오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윽한 매화 향기로 남아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후백 선생 묘소[사진=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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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덕망 높은 관료로 평가…청련 이후백 선생의 학문과 관료정신 조명
기수정 문화팀 팀장입력 2022-08-21 00:00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서슬 퍼런 임금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관료'.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청련(靑蓮) 이후백(1520∼1578)에 대한 평이다. 이후백 선생은 '도승지'와 '판서'를 역임했고, 국가 주요 현안의 실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시대적 소명과 여론을 대변하는 안목과 자격을 지닌, 덕망 높은 관료로 평가된다.
이조‧호조‧형조 3판서를 지내면서 인재를 등용할 때는 반드시 아랫사람들에게 물었고, 의견이 일치하면 기용한 이후백 선생. 그러고도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내가 주상을 속였다", "내가 국사를 그르쳤다"고 자책했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이의 귀감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선생의 청렴한 성정 덕이리라.
올해는 이후백 탄생 502주년이다. 한국계보연구회와 연안이씨 청련공파도문회는 이를 기념해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대우관 각당헌에서 이후백을 학술적으로 조명했다. 주제는 '청련 이후백의 학문과 관료정신'이다. 당초 이후백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개최하려고 했으나, 코로나19 확산 여파에 올해로 연기했다.
축사하는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축사자로 나선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문과에 급제한 뒤 뛰어난 문장과 학식을 바탕으로 공정한 인사를 펼쳐 한 시대를 이끌었던 걸출한 인물이다. 16세기 명종, 선조대에 학문과 실천에서 모두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경세가로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이율곡, 송시열, 유성룡 등 당대 인물들의 평가도 한결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보균 장관은 "이후백 선생은 서인 기호학파와 남인 영남학파의 대립과 적대가 격화되던 시대에 화합과 균형의 가치를 깊게 내면화해 통섭과 통합의 행보를 가풍으로 확립한 보기 드문 인물"이라며 "지역과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요즘 시대가 본받아야 할 대목"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