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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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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1,300여 리 물길 중 강의 이름이 되었을 정도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경천대. 는 깎아지른 절벽과 노송으로 이루어진 절경이 빼어난 곳으로, 하늘이 스스로 내렸다고 해 자천대(自天臺)라고도 한다. 그러나 채득기가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란 글을 새긴 뒤 경천대로 바꿔 불렀다. 조선조 이 지역 출신의 선비인 우담 채득기 선생이 지은 정자인 무우정(舞雩亭)이 절벽 위에 위치한다. 경천대 내에는 전망대, 인공폭포, 경천대 어린이랜드, 야영장이 있다. 경천대 입구에서 언덕을 넘어 강가로 나가면 그 길가에 식당, 매점이 있어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경천대는 절벽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대단히 멋진 곳으로, 휘어진 소나무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과 강변 기암괴석을 볼 수 있다.
경천대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조선시대 장군 정기룡이 하늘에서 내려온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정기룡이 바위를 파서 말먹이통으로 쓰던 유물이 남아 있다. 상주에서는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유명하여 김상헌과 이식·이만려 등의 문객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옥주봉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멀리 주흘산(1,106m)과 학가산, 낙동강과 백화산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전망대로 오르는 등산로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어 삼림욕장으로 알맞다. 인근에 경상북도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된 전사벌왕릉과 전고령가야왕릉(경북기념물 제26호), 충의사 등 문화재가 많다. 그리고 2001년 가을에는 경천대 남쪽 강가에 MBC 드라마 “상도”의 저자거리 세트장이 들어서서 또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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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尙州) 자천대(自天臺) 舞雩亭 채득기(蔡得沂)
이식(李植) 1584년(선조 17)~1647년(인조 25)
澤堂先生別集卷之五 / 記 / 舞雩亭記
蔡別提詠而。新卜居洛江之雩潭。求薦紳先生之文。以志其勝。自作歌詞。以敍其幽致。且屬余狗續亭記。按雩潭載國輿志。距商山治二十里。山之自嶺來者。得江而止。窪而爲谷。卽君所宅。矗而爲峯。上下皆石曰玉柱峯。峙而爲臺。上平可坐曰自天臺。皆從土人舊呼也。江之經流。遇山巖不能直瀉。環洄而爲潭。深靜不可測。自古相傳下有伏龍。故其地雖奇勝淸絶。人無敢俾而居之。以其舊嘗水旱有禱。故得名爲雩。不知何代事也。江中有巨石。狀如龜曝。故呼爲龜巖。峯下有石窟。可藏書鼓琴。未有名。此其大槪。而他遠近點綴朝晡景象。見於諸記者可略也。蔡君綜博奇士。探靑囊祕訣。以卜此居。直與神物爲隣。平分風月。共討魚蝦而無所懼。此俗人之所不敢爭也。其名亭以舞雩。因乎潭也。然而蔡君學通九流。泛濫而無所歸宿。故殆欲反而求之。上遡孔門風詠之樂。而尋其本源乎。余意君之先大夫。取沂字命君名。此豈非先啓之兆耶。夫山水之勝。君自有之。舞雩之趣。君自得之。不暇余一二談也。抑余復有所感焉者。君之高王父懶齋公。用博學壯節。遭遇明聖。至勒銘鍾鼎。而決意掛冠。退居咸寧。作快哉亭。亭卽雩潭上游也。世傳公坐化蟬蛻。然識者以爲公之急流勇退。亦神仙者流也。今君始得一命。不以進取爲念。將欲棲巖飮水龜龍之與友。豈非繼志之大者乎。嗟乎。蔡君得其所矣。先祖之遺則也。先君之肇錫也。可不勉乎。余於蔡君先世。有通家之契。少讀懶齋公快哉亭詩。竊有欣慕焉。今老矣。屬時艱稍定。方思引年納祿。歸骸故山。雖晩可遂也。因君是請。勉爲之書。君其自勉。而亦以勉余哉。是爲記。
택당선생 별집 제5권 / 기(記) / 무우정기(舞雩亭記)
채 별제 영이(蔡別提詠而)가 낙강(洛江)의 우담(雩潭)에 새로 살 집을 마련하고는, 천신 선생(薦紳先生)의 글을 구하여 그 빼어난 경치를 묘사하게 하고, 스스로 가사(歌詞)를 지어 그 그윽한 운치를 서술한 다음, 나의 변변찮은 글솜씨로 정기(亭記)를 지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살펴보건대, 우담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실려 있는 바, 상산(商山) 중심지에서 20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맥에서 뻗어 나온 능선 한 줄기가 강물에 가로막혀 멈추면서 움푹 패여 골짜기가 된 곳이 바로 군의 집터였다.
위아래가 모두 바위로 뒤덮인 묏봉우리 하나가 우뚝 서 있으니 그 이름이 옥주봉(玉柱峯)이요, 마치 흙을 쌓아 놓은 듯 위가 평평하여 앉아서 노닐 수 있는 높다란 대(臺)가 있으니 그 이름이 자천대(自天臺)인데, 이는 모두가 그 지방 사람들이 옛날부터 불러온 이름들이다.
강의 정상적인 흐름이 산의 바위를 만나 곧장 흘러내리지 못하고 고리처럼 빙 두르면서 담수(潭水)가 형성되었는데, 하도 깊고 고요하여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 물 아래에 복룡(伏龍)이 살기 때문에 그곳의 경치가 제 아무리 기막히게 좋아도 사람이 감히 그 근처에 터를 잡고 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 언젠가 큰 물이 지고 가뭄이 들었을 때 그곳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우(雩)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나, 그 일이 어느 시대 때의 일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강 복판에 있는 커다란 바위 모양이 마치 햇볕을 쪼이는 거북이 같다 하여 귀암(龜巖)이라 부르고 있으며, 봉우리 아래에 있는 석굴(石窟)은 책을 감춰 두고 거문고를 탈 만한 장소인데도 아직 붙여진 이름이 없다. 이상이 그 지형의 대략적인 내용인데, 그 밖에 멀고 가까이 이어지는 풍경들과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경치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에 실려 있는 만큼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채군(蔡君)은 박학다식한 기사(奇士)이다. 청낭(靑囊)의 비결을 탐색하여 이곳에 집터를 잡은 뒤, 곧장 신물(神物)과 이웃하여 풍월(風月)을 반절씩 나눠 갖고 맛있는 물고기들을 함께 잡아먹으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으니, 이는 속인(俗人)으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못낼 일이다.
정자의 이름이 무우(舞雩)인 것은 물론 우담(雩潭)이라는 명칭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채군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설에 두루 통하면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면서도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제자리로 다시 돌아와 안식을 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무우라는 이 이름 역시 공문(孔門)의 풍영(風詠)의 낙을 뒤쫓아 올라가 그 본원(本源)을 찾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도 여겨지는 것이다.
내 생각에, 군의 선대부(先大夫)께서 기(沂)라는 글자를 가지고 군의 이름을 지은 것 역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점지해 준 것은 아닐까 하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산수(山水)의 멋진 경치를 군 홀로 독점하고 무우(舞雩)의 정취를 군 스스로 터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한두 마디 말이 아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는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느껴지는 점이 있다. 군의 고왕부(高王父)인 나재공(懶齋公)은 박학다식한 데다 굳은 절조의 소유자로, 밝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고 종정(鍾鼎)에 이름이 새겨지기까지 하였었다. 그런데 만년에 결단을 내려 함녕(咸寧)에 물러나 은거하며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살았는데, 그 정자는 바로 우담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공이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죽어 마치 매미가 껍질을 벗듯 육신을 벗었다고도 하나, 식자(識者)들은 공이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한 것을 더욱 가치있게 생각하는데, 요컨대는 공 역시 신선자(神仙子)의 유파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지금 군이 비로소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마 하나 얻어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더 높이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장차 암혈(巖穴)에 은거하여 물이나 마시면서 귀룡(龜龍)과 벗하려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선조의 뜻을 크게 이어받는 일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채군은 이제 제대로 있을 곳을 얻게 되었다. 선조의 유칙(遺則)도 있고, 선군(先君)이 미리 점지해 준 이름도 가졌거니, 어찌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집안은 채군의 선대(先代)와 세교(世交)를 맺은 사이이다. 그래서 내가 어려서 나재공의 쾌재정 시를 읽고는 마음속으로 흠모해 왔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다 늙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어렵던 시대 상황도 조금 안정을 되찾고 있으니, 수명을 약간이나마 더 연장시켜 좋은 여생을 누릴 수만 있다면 벼슬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갈 생각인데, 아무리 늦더라도 이 일만은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 본다. 군이 기문(記文)을 청해 왔기 때문에 애면글면 이렇게 써 보았는데, 이는 군을 권면하는 동시에 나를 채찍질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로써 기문을 가름할까 한다.
[주-D001] 채 별제 영이(蔡別提詠而) : 별제는 6품 벼슬이고, 영이는 채득기(蔡得沂)의 자(字)이다.[주-D002] 상산(商山) :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주-D003] 채군(蔡君)은 …… 기사(奇士)이다 :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에 통달한 가운데,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고,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卜筮)ㆍ음률ㆍ병법 등에도 밝았다. 인조 14년(1636)에 천문을 관측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상주(尙州) 자천대(自天臺)에 들어가 두문불출 독서에 전념했으며, 병자호란 후 심양(瀋陽)에서 봉림대군(鳳林大君) 즉 효종(孝宗)에게 태공 병법(太公兵法)을 전수하고 함께 돌아왔다 한다.[주-D004] 청낭(靑囊) : 보통 의서(醫書)를 말하나, 여기서는 복서(卜筮)의 뜻으로 쓰였다.[주-D005] 공문(孔門)의 …… 낙 :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늦은 봄날 봄옷이 새로 만들어지면 여러 관동(冠童)들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쐰 뒤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겠다.[風手舞雩 詠而歸]”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풍영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주-D006] 나재공(懶齋公)은 …… 하였었다 : 나재는 채수(蔡壽)의 호이다. 예종(睿宗) 1년(1469) 추장 문과(秋場文科)에서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에 장원,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三場)에서 잇달아 수석을 차지한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성종(成宗) 9년(1478)에는 응교(應敎)로 있으면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외방으로 축출하였고, 중종(中宗) 1년(1506)에는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으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중종 6년에 그가 지은 패관소설(稗官小說) 《설공찬전(薛公瓚傳)》이 윤회설(輪廻說)로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불태워졌는데, 최근 발굴되어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주-D007] 함녕(咸寧) : 함창(咸昌)의 옛 이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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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원(黃景源) 1709년(숙종 35)~1787년(정조 11)
江漢集卷之十五 / 墓誌銘 / 徵士故朝散大夫氷庫別坐蔡公墓誌銘 幷序
公諱得沂。字詠而。姓蔡氏。仁川人也。高祖諱壽。官至禮曹參判兼弘文館提學。謚曰襄靖。曾祖諱紹權。官至刑曹判書。祖諱無己。官至軍資監正。父諱有終。官至直長。母曰固城李氏。牧使龜壽女也。公少好學。有高節。崇禎中。屛居尙州無知山。不應貢擧。王朝徵授氷庫別坐。辭不就。初孝廟爲大君時。與昭顯世子質于瀋陽。王朝求忠信之士。令往護之。公以白衣在選中。仁廟下敎敦召之。又辭不起。由是坐配報恩縣。三年始釋。觀察使趣公北行。公詣闕。上疏固辭。仁廟奬諭。因命强赴。公感激。卽日就途。至瀋陽。孝廟甚喜。日賦詩。與相唱酬以爲樂。是時。淸人入關門。圍京師。海內遂震。孝廟感憤。有掃淸瀋陽。匡扶帝室之志。公朝夕常侍左右。論天下事。孝廟大悅。嘗從獵。至女奚部。鑿氷丈餘。飮其水。獨與公俱。爲解錦裘以賜之。恩遇甚隆。昭顯世子嘗爲詩。思古劒客。公和進。因言。少康有衆一旅。而能復大禹之績。光武不階尺土。而能恢高祖之業。此無他。立志之堅也。晉之元帝。宋之高宗。以天下之衆。不能灑中國之辱。此無他。立志不堅故也。然不密則害生。燕丹不勝一朝之忿。卒以亡國。今虜勢方盛。豈一劒客所可圖也。宜勵志以俟其時。世子稱善。明年六月。公從還。孝廟謂公曰。子之才智。雖張子房,諸葛孔明。不能過也。欲請於朝而官之。公辭曰。昔李泌。爲帝王友。而不願仕也。如蒙不棄。惟得處帷幄足矣。遂歸鄕里。卒不仕。雩潭。在尙州洛江之上玉柱峰下。有江山巖石之勝。公治亭以居之。孝廟手書問起居。因命畵師。圖進其所居山水。勸公入都。公又辭以不敢私交。孝廟由是知其志。不强致焉。公少與杜谷處士洪君宇定。相友善。明亡。宇定亦不仕。隱居太白山中。數與公徒步往還。公嘗夜被隱者服。坐臺上彈琴而歌。未嘗不慷慨悲憤。往往乘舟浮大江。溯流上下。嶺南人至今稱公爲高士也。未幾遇疾。以丙戌四月二十二日卒于家。享年四十三。某月某日。葬于州西幕谷之原。孝廟冊爲王世子。聞公卒。爲之悼傷。遣使者賜祭致賻。公爲人剛介淸謹。事父母以至孝聞。愼交游。見人之不善。不與之語。人畏之輒相戒曰。爲不善無令某知也。公於書。博學强記。自天文至醫藥卜筮兵陣之書。無不神解。淸人圍南漢。公夜觀天象。大驚曰。主上必下城矣。已而果然。公娶靈山辛氏。某之女。公入瀋陽時。未有子。取從祖兄某子克哲爲後。公少有志於天下。當明室傾覆之際。從孝廟驅馳遼瀋。慨然以謀臣自許。及孝廟卽位公已卒。不得與議天下事。豈不惜哉。銘曰。
鑿玄氷兮丈餘。從孝廟兮奚之。徼孝廟東歸兮命還。夫漁釣洛水之沚兮。白雲凄凄。舟以爲家兮。無東無西。使者來聘兮。泝洄雲谿。山川雖可繪畵兮。莫知夫子之所棲。
강한집 제15권 / 묘지명(墓誌銘)
징사 고 조산대부 빙고별좌 채공의 묘지명 서문을 아우르다 〔徵士故朝散大夫氷庫別坐蔡公墓誌銘 幷序〕
공의 휘(諱)는 득기(得沂)요, 자는 영이(詠而)이며 성은 채씨(蔡氏)이고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고조할아버지 수(壽)는 벼슬이 예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증조할아버지 소권(紹權)은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할아버지 무기(無己)는 벼슬이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이르렀으며, 아버지 유종(有終)은 벼슬이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어머니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목사(牧使) 귀수(龜壽)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높은 절개가 있었다. 숭정(崇禎) 연간에 상주(尙州) 무지산(無知山)에 숨어 살면서 과거 시험에 응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불러 빙고 별좌(氷庫別坐)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전에 효묘(孝廟 효종(孝宗))께서 대군(大君)이었을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심양(瀋陽)에 인질로 갔었다. 조정에서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런 선비를 구하여 가서 호위하게 하였는데, 공이 벼슬이 없는 백의(白衣)로서 선발된 인원 속에 들어있었다. 인묘(仁廟 인조(仁祖))께서 하교하여 간곡하게 불렀으나 또 사양하고 일어나 나가지 않았고, 이로 말미암아 보은현(報恩縣)에 유배되었다. 3년 후에 비로소 풀려났는데 관찰사가 공에게 북행(北行)을 재촉하자 공이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인묘께서 장유(獎諭)하므로 왕명에 의해 억지로 가게 되었지만, 공은 감격하여 그날로 길을 떠났다.
심양에 이르자 효묘께서 매우 기뻐하며 날마다 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으며 즐거워하였다. 그때에 청인(淸人)들이 관문(關門)으로 들어와 경사(京師)를 포위하자 나라가 마침내 크게 흔들렸다. 효묘께서 분개하여 심양을 쓸어버리고 황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을 갖게 되었는데, 공이 아침저녁으로 항상 좌우에서 모시며 천하의 일을 논하니 효묘께서 크게 기뻐하였다. 한번은 사냥에 따라나섰다가 여계부(女奚部)에 이르러 얼음을 한 길 남짓 파서 물을 마셨는데 공하고만 같이 하고 비단 갖옷을 벗어 하사하였으니, 은우(恩遇)가 매우 융성하였다.
소현세자가 일찍이 시를 지어 옛날의 검객(劍客)을 그리워하자 공이 그에 화답하고 따라서 말하기를,
“소강(少康)은 1려(旅)의 군중만을 가지고서도 능히 대우(大禹)의 업적을 회복하였고광무(光武)는 한 자(尺)의 땅도 갖지 않고서도 능히 고조(高祖)의 위업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다른 것이 없고 세운 뜻이 견고한 것이요, 진(晉)나라의 원제(元帝)나 송(宋)나라의 고종(高宗)은 천하의 군중을 이끌고도 중국의 치욕을 씻지 못하였으니 이는 다른 것이 없고 세운 뜻이 견고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치밀하지 못하면 재앙이 생기니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하루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오랑캐의 세력이 바야흐로 왕성하니 어찌 일개 검객이 도모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마땅히 뜻을 가다듬어 그 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자 세자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다음 해 6월에 공이 따라 돌아오자 효묘께서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의 재주와 지혜는 비록 장자방(張子房)이나 제갈공명(諸葛孔明)이라고 해도 그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조정에 청하여 벼슬을 내리고자 한다.”
하였다.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이필(李泌)은 제왕의 친구가 되었으나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버림받지 않는 은혜를 입게 된다면 유악(帷幄)에 처해지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서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우담(雩潭)은 상주(尙州) 낙강(洛江) 가의 옥주봉(玉柱峰) 아래에 있어 강산과 암석의 승경(勝景)을 가졌는데 공이 그곳에 정자를 지어 거처하였다. 효묘께서 손수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묻고 화사(畵師)에게 명하여 그가 거처하는 곳의 산수를 그려서 바치게 하고 공에게 도성(都城)으로 들어올 것을 권하였다. 공이 또 감히 사사로이 교유할 수 없다며 사양하자 효묘께서 이로 말미암아 그의 뜻을 알고 억지로 부르지 않았다.
공은 소싯적부터 두곡처사(杜谷處士) 홍군 우정(洪君宇定)과 서로 가깝게 지냈는데, 명(明)나라가 망한 후 우정 또한 벼슬하지 않고 태백산(太白山)에 은거하면서 자주 공과 더불어 도보로 왕래하곤 하였다. 공은 일찍이 밤이 되면 은자(隱者)의 복장을 하고 대(臺) 위에 앉아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하면서 비분강개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왕 배를 타고 큰 강 위에 떠서 오르락내리락하였으니 영남(嶺南)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공을 일컬어 고사(高士)라고 한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려서 병술년 4월 22일에 집에서 졸(卒)하였으니 향년 43세였다. 모월 모일에 고을의 서쪽에 있는 막곡(幕谷)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효묘께서 왕세자로 책봉된 후 공이 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애도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제사를 하사하고 부의(賻儀)를 내렸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청렴, 신중하였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긴다고 널리 알려졌다. 교유를 신중히 하여 다른 사람의 좋지 못한 행실을 보면 더불어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경외하여 문득 서로 경계하며 “좋지 못한 일을 했을 때에는 아무개가 알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공은 책에 있어서 박학강기(博學强記)하여 천문(天文)부터 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병진(兵陣)의 책에 이르기까지 귀신같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청인(淸人)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였을 때 공이 밤에 천체의 현상을 보고 크게 놀라며 “주상께서 반드시 하성(下城)하실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후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영산(靈山) 신씨(辛氏)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공이 심양에 들어갈 때 아들이 없어서 종조형(從祖兄) 아무개의 아들 극철(克哲)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공은 젊어서 천하에 뜻이 있어 명나라 황실이 전복될 즈음에 효묘를 따라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일대를 말달리며 개연(慨然)히 스스로를 모신(謀臣)으로 자처하였다. 효묘께서 즉위하였을 때는 공이 이미 작고하여 더불어 천하의 일을 의논할 수 없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한 길 남짓 두꺼운 얼음을 파고 / 鑿玄氷兮丈餘
효묘를 따라 어디를 갔던가 / 從孝廟兮奚之
효묘가 돌아와 귀환토록 명하였으나 / 徼孝廟東歸兮命還
낙수 가에서 고기 잡으니 / 夫漁釣洛水之沚兮
흰 구름만 흘러갔네 / 白雲凄凄
배를 집으로 삼아 / 舟以爲家兮
동도 서도 없이 떠다니니 / 無東無西
사자가 맞아오려 / 使者來聘兮
구름 낀 시내를 거슬러 올라갔네 / 泝洄雲谿
산천은 비록 그릴 수 있으나 / 山川雖可繪畵兮
선생이 깃든 곳은 알 수 없었다네 / 莫知夫子之所棲
[주-D001] 징사 …… 채공 : 채득기(蔡得沂, 1605~1646)를 가리킨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ㆍ학정(鶴汀)이다. 경사백가(經史百家)의 글을 통독하여 역학(易學)에 정통하고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ㆍ음률ㆍ병법에도 밝았다. 1636년(인조14) 천문을 관측하여 병자호란을 예측하기도 하였다. 상주(尙州) 자천대(自天臺)에 살면서 독서에만 전념하며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는 왕자들을 호종하라는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보은(報恩)으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석방되어 세자를 시종하러 심양으로 떠났다. 이때 봉림대군(鳳林大君)에게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하고 돌아왔으며, 효종이 즉위하자 은총을 받았다. 1798년(정조22) 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상의사(尙義祠)에 배향되었다.[주-D002] 수(壽) : 채수(蔡壽, 1449~1515)를 가리킨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이다. 1469년(예종1) 삼장(三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에서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 감찰ㆍ예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때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다 좌천되었으며, 성종 때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였다가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서용되어 성균관 대사성ㆍ호조 참판 등을 지냈으며,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 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그 후에는 함창(咸昌)에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에 《난재집(懶齋集)》과 고전소설 《설공찬전(薛公贊傳)》이 있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주-D003] 소권(紹權) : 채소권(蔡紹權)을 가리킨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옹(拙翁)이다. 초명은 수동(壽童)이다. 1506년(연산군12) 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ㆍ집의ㆍ시독관ㆍ승지 등을 지냈다. 1524년(중종19) 홍문관 부제학으로 시폐오조(時弊五條)를 상소하였고, 이후 경기도 관찰사ㆍ대사헌ㆍ동지중추부사ㆍ한성부 좌윤ㆍ형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김안로(金安老)의 처남이나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었을 때 화를 입지 않았다. 저서로 《졸재집(拙齋集)》이 있다.[주-D004] 유종(有終) : 채유종(蔡有終, 1561~1606)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계겸(季謙), 호는 지헌(之軒)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채유희(蔡有喜)가 일으킨 의병에 가담하여 외삼촌 이봉(李逢)ㆍ조웅ㆍ장충범 등과 함께 싸웠고, 그 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605년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권(錄券)되었다. 어의(御醫)로 활약해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역임하기도 하였다.[주-D005] 숭정(崇禎) : 중국 명(明)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1644년에 해당한다.[주-D006] 옛날의 검객(劍客) : 중국 전국 시대의 협객 형가(荊軻, ?~기원전 227)를 가리킨다. 위(衛)나라 출신으로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식객이 되었다. 태자 단으로부터 진(秦)나라가 침략한 땅을 되찾아 주거나 진시황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진나라에 들어갔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죽음을 당하였다. 진나라로 들어가기 전 역수(易水) 근처에서 단과 헤어지며 “바람 쓸쓸하니 역수 또한 차갑구나, 장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노래를 남겼다.[주-D007] 1려(旅) : 중국 주(周)나라에서 병사 500명을 이르던 말이다.[주-D008] 소강(少康)은 …… 회복하였고 : 소강(少康)은 중국 고대 하(夏)나라의 제6대 국군(國君)이다. 하(夏)나라의 3대 국군 태강(太康)이 사냥에만 골몰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자 유궁씨(有窮氏)의 수령 후예(后羿)가 태강이 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왕위를 빼앗았다. 예는 태강의 동생 중강(仲康)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권력을 행사하다가 중강이 죽자 그의 아들 상(相)을 쫓아내고 자신이 직접 하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예는 태강과 마찬가지로 사냥에만 골몰하고 친신(親臣)인 한착(寒浞)에게 정사를 맡기고 돌아다녔다. 이에 한착은 예가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람을 보내어 살해하고, 예가 쫓아낸 상(相)마저 죽여 버렸다. 이때 임신 중이었던 상의 아내가 도망하여 본가가 있는 잉씨(仍氏) 부락으로 도망가 아들 소강(少康)을 낳았다. 소강이 성장한 후 한착이 잡으러 오자 다시 순(舜) 임금의 후예들이 사는 우씨(虞氏) 부락으로 도망쳤다. 소강은 우씨 부락 사람들을 단합시켜서 대오를 만들고, 충직한 대신과 부락민들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한착을 물리치고 왕권을 되찾았다. 소강이 집정한 후에 나라가 안정되고 국력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니, 역사상 이를 ‘소강중흥(少康中興)’이라고 한다.[주-D009] 광무(光武)는 …… 회복하였으니 : 광무는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기원전 6~기원후 57)를 말한다. 1세기 초에 왕실의 외척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빼앗고 신(新)나라를 건국하였다. 이에 각지의 군사가 일어났는데, 광무제도 유씨(劉氏) 문중과 호족의 지원을 받아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에서 봉기하였다. 이로써 23년에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에 낙양(洛陽)에서 후한을 세우고 즉위하여 한(漢) 왕조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아직 촉(蜀)의 공손술(公孫述)ㆍ농서의 외효(隗浴)ㆍ하서(河西)의 두융(竇融) 등이 할거하고 유적(流賊)이 날뛰고 있었으므로 즉위한 후 10년 동안 이들의 세력을 진압하였고, 36년에 드디어 전국을 평정하였다. 광무제는 즉위 후 왕망의 가혹했던 정치를 폐지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으며 유교 존중주의를 채택하여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기초를 다졌다. 때문에 이 시기를 ‘광무중흥(光武中興)’이라고 부른다.[주-D010] 진(晉)나라의 …… 못하였으니 : 진(晉)나라의 원제(元帝, 276~322)는 중국 동진(東晉)의 초대 황제이다. 유요(劉曜)가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민제(愍帝)가 죽자 진(晉)나라가 멸망하였다. 이에 원제가 317년에 건강(建康)에서 즉위하여 동진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5년 후 대장군 왕돈(王敦)이 유외(劉隗)와 조협(刁協)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무창(武昌)에서 병사를 일으켜 공격해왔고, 조정에 들어와 전권을 휘두르자 근심과 울분 속에 죽었다. 송(宋)나라의 고종(高宗, 1107~1187)은 남송(南宋)의 초대 황제이다. 1126년에 금(金)나라 군대가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아가자 송나라가 멸망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천도하여 적을 피하자는 주장을 좇아 임안(臨安)에서 즉위하여 남송(南宋)을 건국하였다. 처음에는 악비(岳飛)와 한세충(韓世忠) 등 항금(抗金) 명장을 기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화의를 구해 재상 진회(秦檜)와 함께 악비를 살해하고 장군들의 병권을 환수한 뒤 금나라에 영토를 떼어주고 자신을 신하로 낮추면서 납공(納貢)하였다.[주-D011] 장자방(張子房) : 장량(張良, ?~기원전 189)을 가리킨다. 중국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로, 자방(子房)은 그의 자이다. 한(韓)나라 때 재상을 지낸 집안의 후손으로, 진(秦)이 한을 멸하자 한의 회복을 도모하는 데 힘썼다.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제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후 이름을 고치고 하비(下邳)로 달아나 살았는데, 다리 위에서 황석공(黃石公)이란 노인을 만나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 후 유방(劉邦)을 만나 그의 모신(謀臣)이 되어 항우(項羽)를 멸하고 천하 통일을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기원전 201년(고조6)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황로(黃老)를 좋아하여 뜻을 이룬 뒤에는 속세를 벗어나 신선술을 익히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주-D012] 제갈공명(諸葛孔明) :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가리킨다.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로, 공명은 그의 자이다. 와룡(臥龍)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세력이 미약했던 유비(劉備)가 제갈량의 지혜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초빙하였다. 유비가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촉한을 창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724년에는 유교의 성인(聖人)으로 추존되었다.[주-D013] 옛날에 …… 않았습니다 : 이필(李泌)은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덕종(德宗) 때의 신하이다. 자는 장원(長源)이고 시호는 현화(玄和)이며 봉호는 업후(鄴侯)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 있고 민첩하기로 이름이 나 현종이 태자 숙종에게 포의교(布衣交)를 맺고 선생이라 부르게 하였다. 즉위 후 능력 있는 인재의 보좌가 필요했던 숙종이 은거하고 있던 이필을 불렀고, 숙종의 부름에 응한 이필은 젊었을 때처럼 손을 잡고 궁을 드나들며 숙종과 이마를 맞대고 조정의 대소사를 의논하였다. 숙종은 이필을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필이 고사하여 총참모장직에 해당하는 원수부의 행군장사(行軍長史)로 임명하였고, 이에 힘입어 안녹산의 난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에 숙종이 이필을 장안으로 불러들였으나 이필은 굳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형산(衡山)에 작은 집을 짓고 은거하였다.[주-D014] 유악(帷幄)에 처해지는 것 : 유악(帷幄)은 원래 군대의 장막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모사(謀士) 장량(張良)이 주로 장막 안에서 계획을 세워 “유악 안에서 산가지를 놓아 천 리 밖에서 결승한다.〔運籌策帷幄中, 決勝千里外.〕”라고 한 데서 나왔다. 《漢書 張良傳》 이에 국정 혹은 군사 기밀을 의논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유악에 처한다는 것은 모신(謀臣) 혹은 참모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주-D015] 홍군 우정(洪君宇定) : 홍우정(洪宇定, 1595~1656)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이다. 1616년(광해군8)에 진사가 되었으나 장인인 해주목사 최기(崔沂)가 해주옥사(海州獄事)의 괴수로 몰려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중도부처(中途付處)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모든 것이 무고로 드러나 석방되었으나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태백산에 은거하였고, 이에 영남인사들이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불렀다. 그의 절의가 조정에 알려져 태인 현감ㆍ공조 좌랑ㆍ사부(師傅)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20년(순조20)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두곡집》이 있으며, 시호는 개절(介節)이다.[주-D016] 하성(下城) : 항복한다는 의미이다.[주-D017] 종조형(從祖兄) : 육촌형을 말한다.[주-D018]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 원문의 ‘遼瀋’은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반도를 가리킨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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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金尙憲) 1570년(선조 3)~1652년(효종 3)
淸陰先生集卷之三十八 / 記 五首 / 蔡氏雩潭新亭記
蔡君詠而。以其新居雩潭之美。屬余記之。余徵其狀。其言曰。洛東之江。發源於黃池。經八九郡千數百里入于海。其間環江而屋者。殆不可數。人人自以爲得地之勝。然沂嘗歷觀而周覽之。若有未盡其奇者。偶於商山之北。檜谷之南。梅湖之下。得奧區焉。三峯峙其後。大江經其前。絶壁屛擁。奇巖環列。其中奫然而黑者曰雩潭。能興雲泄霧。旱禱有應。有石夷而可據者曰觀魚臺。以其水至淸。魚行可俯而數也。峻而自起者曰自天臺。以其奇巧絶異。非人工所可成也。新構亭其上曰舞雩。蓋取諸曾點浴沂之義。異世而同趣也。自天臺之下有石窟。窈窕寬平。容人五六十以上。當暑入之。凜然若懷氷。巖竇成門。厪通一跡。昔人避兵多得全。樵翁野叟至今傳之。旁有小窟。窟中淸泉甘洌。梵屋古跡尙存。自山而亭。自亭而潭。以白沙爲襟帶。以靑松爲藩籬。又有嘉木異卉名花奇草。春粧秋飾。交映上下。此一區之勝觀佳致。而固未暇一二談也。先是有力者爭欲得而居之。以潭之下爲龍所宅。懼不敢近。頃歲龍徙而沂適至。或以謂龍遜之沂。則以爲天與之。豈非有數存焉者耶。是不可以無記也。嗚呼。余嘗久客嶺南。屢道於商山檜谷之間。聞其有勝槩。欲一登覽而未及焉。每念疇昔。未嘗不神騖而心馳。倘賴天之靈。全歸故國。與君重遇於潭上。共擧一杯。賀君得此江山以娛老。而亦以賀江山得君爲重。則此又一奇也。不知造物者。竟如何也。遂書其所言爲之記。以塞其勤。且以自廣云爾。蔡君名得沂。仁川人也。
청음집 제38권 / 기(記) 5수(五首) / 채씨우담신정기(蔡氏雩潭新亭記)
채군(蔡君) 영이(詠而)가 새로 거처하게 된 우담(雩潭)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그곳의 모양새를 말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낙동강(洛東江)은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여덟아홉 고을을 거치면서 천 수백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 사이에는 강가를 따라서 지어진 집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사람들마다 각자 자신이 뛰어난 집터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두루 돌아다니면서 낱낱이 살펴보건대, 그 기이함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상산(商山)의 북쪽, 회곡(檜谷)의 남쪽, 매호(梅湖)의 아래에서 깊숙하고 그윽한 터를 얻었다.
그곳은 세 봉우리가 뒤에 우뚝 솟아 있고, 큰 강이 그 앞을 지나며, 절벽이 에워싸 안았고, 기암이 빙 둘러 있는데, 그 안에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검푸른 빛을 띠고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을 우담이라고 한다. 그 우담은 능히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뿌려서 기우제를 지내면 응험(應驗)이 있다. 평평하여서 디디고 설 수 있을 만한 돌이 있는데, 그곳을 관어대(觀魚臺)라고 한다. 그 물이 매우 맑아서 물고기가 움직이는 것을 고개 숙여 헤아려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높아서 절로 일어난 것을 자천대(自天臺)라고 하는데, 기묘하고 빼어나서 사람의 솜씨로 만들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 위에 새로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 이름은 무우정(舞雩亭)이다. 이는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한 뜻을 취한 것으로서,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취지는 같은 것이다. 자천대 아래에 석굴이 하나 있는데, 깊숙하고 넓고 평평해서 5, 6십 명 이상을 수용할 수가 있으며, 무더울 때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서늘한 기운이 돌아 마치 얼음을 품고 있는 듯하다. 석굴이 문이 되어 겨우 한 사람씩만 통과할 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이 병란을 피해 들어가 몸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시골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말을 전하고 있다. 그 곁에 작은 굴이 또 하나 있는데, 굴속에서 나는 맑은 샘물은 달고 차가우며, 불사(佛寺)가 있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산으로부터 정자에 이르고 정자로부터 우담에 이르는데, 흰모래로 금대(襟帶)를 삼고, 푸른 소나무로 울타리를 삼았으며, 또 아름다운 나무와 특이한 화초와 이름난 꽃과 기이한 풀들이 봄가을로 단장을 하여, 위아래에서 서로 비춘다. 그러니 이것은 한 구역의 뛰어난 경관과 아름다운 운치로서, 참으로 한두 마디의 말로는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서 세력 있는 자들이 앞 다투어 이곳을 차지하여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 아래에는 용이 살고 있다고 하여 두려운 마음에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근년에 용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내가 마침 이르러 왔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르기를, ‘용이 그대에게 양보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니 이는 하늘이 내게 준 것으로 어찌 운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아, 내가 일찍이 오래도록 영남 지방에서 나그네가 되어 상산과 회곡 사이를 나다녔다. 그런데도 그 훌륭한 경치가 있다는 것만 듣고 한번 올라가 바라보고자 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에 매번 지난날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정신과 마음이 그곳을 향해 치닫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하늘의 영묘함에 힘입어서 몸을 온전히 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그대와 더불어 우담 가에서 다시 만나 함께 잔을 들어 그대가 이 강산을 얻어 노년을 즐겁게 보내는 것을 축하하고, 또한 강산이 그대를 얻어 중하게 된 것을 축하할 것이다. 이것은 또 한 가지의 기이한 일이다. 모르겠거니와, 조물주는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드디어 말한 것을 써서 기문으로 삼아 채군이 정성스럽게 부탁한 뜻에 답한다. 그러면서 또한 이것으로 나 자신을 위로한다. 채군의 이름은 득기(得沂)로, 인천인(仁川人)이다.
[주-D001] 채군(蔡君) 영이(詠而) : 채득기(蔡得沂 : 1605~1646)이다.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자는 영이이며, 호는 우담(雩潭)ㆍ학정(鶴汀)이다. 학문이 일찍 성취되어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역학, 천문, 지리, 복서, 음률,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32세가 되던 해에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화산(華山) 선유동(仙遊洞)에 들어가 늙음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가 다시 상주(尙州)의 무지산(無知山)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전념하였다. 그 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게 되었을 때 호종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불응하여 3년 동안 보은(報恩)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인조의 권유에 의하여 심양에 가서 대군들을 잘 받들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는 몹시 총애를 받았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낙동강 가에 있는 옥주봉(玉柱峯) 아래에 복거하였다. 상주 상의사(尙義祠)에 제향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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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집 제13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우담십영(雩潭十詠) 별좌(別坐) 채득기(蔡得沂)가 새로 살게 된 곳이다.
꽃 심을 땐 뜨락 가득 심을 필요 없거니와 / 栽花不必滿階除
북쪽 언덕 꽃 보이고 남쪽 언덕 꽃 보이네 / 北岸看花南岸如
한밤 내내 부는 동풍 꽃망울을 터뜨리며 / 一夜東風開欲遍
봄빛 가득 싣고서는 나의 집을 향해 오네 / 摠輸春色向吾廬
이상은 회곡춘화(會谷春花)를 읊은 것이다.
가을이 온 빈 난간서 취했던 술 깨고 나자 / 秋生虛檻醉醒初
수면 위는 침침하여 그림자와 소리 없네 / 水面沈沈聲影無
한밤중에 낚싯배가 놀라 소리치는 곳에 / 半夜釣船驚叫處
강물 속에 옥부처가 잠겨 있는 게 보이네 / 江心倒見玉浮圖
이상은 우담추월(雩潭秋月)을 읊은 것이다.
보리 자라 밭 꽉 차고 곡우 비가 활짝 개자 / 壟麥初齊穀雨晴
집집마다 들밥 내어 밭 가는 이 먹게 하네 / 家家炊黍餉春耕
숲 우거진 남쪽 시내 사람 자취 없는 데선 / 南溪樹密無人處
하루 종일 꾀꼴 우는 소리만이 들리누나 / 盡日惟聞黃鳥聲
이상은 남간유앵(南澗流鶯)을 읊은 것이다.
가는 세월 도도하여 풀과 나무 쇠했으니 / 歲月滔滔草木衰
봄빛 찾아보려 하나 어디 가서 물으리오 / 欲尋春色問何之
복숭아 숲 버들 마을 유난히 더 쓸쓸한데 / 桃園柳巷偏蕭索
푸른 솔만 지난날과 같은 것이 보이누나 / 唯見靑松似舊時
이상은 동령한송(東嶺寒松)을 읊은 것이다.
첨 만들 땐 귀신 도끼 수고롭혀 다듬었고 / 經始應煩鬼斧裁
아름다운 이름은 또 천대에서 빌려 왔네 / 美名仍借自天臺
신선 한번 떠나간 뒤 쓸어 주는 사람 없어 / 仙翁一去無人掃
풍우 속에 매년 길이 푸른 이끼 끼어 있네 / 風雨年年長綠苔
이상은 천대이석(天臺異石)을 읊은 것이다.
강호에는 가을 물이 흡족하여 가없는데 / 江湖秋水淼無涯
갈대 잎은 쓸쓸하게 양쪽 언덕 꽃 피웠네 / 蘆葦蕭蕭兩岸花
서리 오기 전과 뒤에 기러기 떼 몇 무리나 / 霜後霜前幾群鴈
밝은 달과 서로 짝해 찬 모래에 묵을 건가 / 月明相伴宿寒沙
이상은 평사낙안(平沙落鴈)을 읊은 것이다.
우뚝 솟은 외로운 돌 강 복판에 서 있으며 / 亭亭孤石半江中
풍이 사는 깊은 궁에 그림자를 드리웠네 / 影落馮夷無底宮
맑은 새벽 흰 구름이 스치어서 지나가매 / 淸曉白雲搖曳過
요동 땅의 신선 학이 변한 건가 의심되네 / 却疑仙鶴化遼東
이상은 옥주조운(玉柱朝雲)을 읊은 것이다.
태사께서 주나라를 안 따르고 동쪽 오매 / 太師東渡不從周
하늘에서 거북 보내 구주 등에 지게 했네 / 天遣神龜負九疇
흐르는 물 가게 하고 비바람을 전송하며 / 流水行之風雨送
지금에도 낙동강의 강 머리에 아직 있네 / 至今猶在洛江頭
이상은 귀암모우(龜巖暮雨)를 읊은 것이다.
회곡이나 매촌 마을 모두 어옹 사는 데라 / 檜曲梅村盡釣翁
배 가득한 등불 빛이 강물 붉게 비치누나 / 滿船燈火倒江紅
누가 알리 한밤중의 어부 사는 집의 흥이 / 誰知半夜漁家興
일찌감치 시인 읊는 시 속으로 들어온 걸 / 早入詩人賦詠中
이상은 전탄어화(箭灘漁火)를 읊은 것이다.
달은 뜨고 안개 깔려 만산이 다 비었는데 / 月上烟沈萬籟空
앉은 채로 깊은 솔숲 풍경 소리 듣고 있네 / 坐聞淸磬出深松
오고 가는 산승 자취 찾아볼 수 없거니와 / 山僧來往尋無跡
남봉이나 북봉 속에 있다는 걸 알겠구나 / 知在南峯定北峯
이상은 원암청경(圓庵淸磬)을 읊은 것이다.
[주-D001] 채득기(蔡得沂) : 1605~1646.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자는 영이(詠而)이며 호는 우담(雩潭) 또는 학정(鶴汀)으로 충주(忠州) 출신이다. 학문이 일찍 성취되어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역학(易學), 천문(天文), 지리(地理), 복서(卜筮), 음률(音律), 병서(兵書)에도 조예가 깊었다. 병자호란 뒤에 화산(華山) 선유동(仙遊洞)에 들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살고자 하였다가 다시 상주(尙州)의 무지산(無知山)에 들어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전심하였다. 그 뒤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한 세자와 대군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게 되자 심양에 가 대군들을 잘 받들었다. 귀국한 뒤에 임금의 소명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낙동강 가의 옥주봉(玉柱峯) 아래에 복거하였다.[주-D002] 옥부처〔玉浮圖〕 : 부도(浮圖)는 탑(塔)으로,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시에 이르기를, “하늘 기댄 높다란 산 옥부처가 솟아서는, 팽랑기와 더불어 소고산이 되려 하네.〔倚天巉絶玉浮圖 肯與彭郞作小姑〕” 하였다.[주-D003] 풍이(馮夷) :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황하(黃河)의 신 하백(河伯)으로 수신(水神)을 가리킨다.[주-D004] 요동(遼東) …… 의심되네 : 한나라 때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온 고사가 있다. 한(漢)나라 때 요동 사람인 정영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가 천 년이 지난 뒤에 학이 되어 요동으로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울었다는 고사가 있다.[주-D005] 태사(太師)께서 …… 했네 : 태사는 은나라가 망한 뒤에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우리나라로 건너왔다고 하는 기자(箕子)를 가리키고, 구주(九疇)는 기자가 지었다고 하는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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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22년 무오(1798) 10월 5일(을미)
22-10-05[18] 고(故) 숭정 처사(崇禎處士) 채득기(蔡得沂)를 우선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 전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고 숭정 처사 채득기는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을 당하여 어느 날 밤 천상(天象)을 관찰하더니 크게 놀라 말하기를 ‘대가(大駕)가 성을 내려왔다. 백성들이 모두 도륙당하지는 않겠으나 강상(綱常)으로 본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고는 곧장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빙고 별좌(氷庫別坐)에 천수(薦授)되었으나 한번 사은하고는 바로 돌아와 가솔을 이끌고 낙강(洛江) 부근으로 옮겨 살았는데, 자천대(自天臺) 바위 위에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 여덟 자를 새겨 자기의 뜻을 보였습니다. 조정의 명령으로 인하여 심양(瀋陽)으로 가서 질관(質館)을 조호(調護)하며 시로써 서로 이어서 화답하였으니 이것이 세상에서 일컫는 《군신언지록(君臣言志錄)》입니다. 효종(孝宗)께서는 더욱 재능을 인정하여 높이 평가하고는 장자방(張子房),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부류라고 허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가(御駕)를 배종하여 고국으로 귀환하기에 이르자 효종께서는 자주 손수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물으셨고 화사(畫師)에게 명하여 그가 사는 곳의 산수(山水)를 그려 오게 하였으며, 이어 도성으로 들어올 것을 바랐으나 채득기는 감히 사사로운 교분을 맺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관직으로 부르지 않고 모두들 숭정 처사라고 불렀으니 그의 훌륭한 행적과 고상한 절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효종께서 즉위하기 전에 요절하였으며 더구나 지금과는 세대가 점점 멀어져 사적이 민몰(泯沒)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포숭(褒崇)의 은전이 있어야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해당 조로 하여금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아직까지 특별한 은전이 없었다니 매우 흠이 되는 일이다. 우선 증직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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