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신에 이어 주야신의 등장입니다. 낮과 밤에 수많은 신들이 화엄회상에서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시간과 공간에 의해 조성되는 어떤 환경 속에는 수많은 인연의 집합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연의 집합이 나눠지면 하나, 하나가 신비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개체적인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를 은유적으로 신으로 표현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낮과 밤은 음양(陰陽)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요. 상대성 원리로 쓰이는 말처럼 되어 있는 것이 음양입니다. 하늘과 땅 또는 해와 달을 음양으로 짝을 지어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기가 양극 음극이 합쳐져야 불이 밝혀지듯이 음양의 화합에서 모든 것이 생성되는 것이라 하지요.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수컷과 암컷도 음양으로 구분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넋을 혼백(魂魄)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도 음양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혼을 양이라 하고 백을 음이라 한답니다.
이러한 상대적 차이 다시 말하면 현상적 분별이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항상 이원적(二元的)으로 느껴집니다. 둘로 나누어 이것과 저것으로 구분해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 때문에 번뇌가 치성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무자성(無自性)임에도 특정 대상을 선호해 거기에 집착해 미혹을 일으켜 깨달음의 장애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물론 불교 전반의 핵심 대의라 할 수 있는 것이 불이관(不二觀)입니다. 이는 곧 중도관(中道觀)으로 깨달음을 통해 얻는 지혜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어떤 사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빠져 자기 선호하는 것만 내세우고 다른 것은 무시하고 배격을 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아집(我執)을 갖고 또한 법집(法執)을 가져 중도를 잃어버립니다.
중도를 잃어버리면 엄격히 말해 불교가 아니며 사법(邪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는 중도이며 부처님은 중도를 실현한 분입니다.
불교의 교리나 경전의 말씀이 모두 중도법문입니다. 이 중도법문이 불이법문입니다.
중생의 마음이 본래 중도입니다. 이를 달리 본각진심(本覺眞心)이라 합니다. ‘본래 깨달은 상태의 참된 마음’이라는 뜻이지요.
불교의 수행이란 이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선가귀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본래의 참 마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정진이다 (守本眞心 第一精進)”
본래의 청정한 마음, 분별이 쉬어지고 나서 망념에 흔들리지 않는 탐, 진, 치 삼독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이 진심입니다. 이 마음에 돌아가려고 무념(無念)을 닦고 무심(無心)을 닦는 것입니다.
오조 홍인대사로부터 밤중에 몰래 법을 전해 받은 노행자(盧行者)였던 육조 혜능이 스승의 권유에 따라 황매산을 떠나 남쪽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이튿날 대중이 노행자가 의발을 전수 받아 떠난 것을 알고 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절에 온지 8개월 밖에 안 된, 스님도 되지 않은 행자가 조사위를 전해 받아 갔다니 말이 안되고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상장군 출신으로 출가했던 몽산(蒙山)이 어서 가서 잡아 와야겠다고 말을 타고 추격했습니다.
드디어 대유령(大庾嶺)이란 산고개에서 노행자를 보았습니다.
“거기 섰거라.”
노행자가 가지고 가던 의발을 바위 위에 놓고 숲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습니다.
다가온 몽산이 바위에 놓인 발우를 집어 들러 할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발우가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집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몽산이 깜짝 놀라 크게 뉘우치며 숲을 향해 외쳤습니다.
“행자여, 행자여! 어서 나와 나에게 법을 설해 주시오.”
육조가 숲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것도 생각하지 말고 나쁜 것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럴 때 그대는 누구이겠습니까? (不思善不思惡 當恁麽時 那箇是上座本來面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