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은 차갑고 낙엽은 쓸쓸하구나. 장부의 기상은 태산보다 높은데 영웅을 기리는 맘은 그립고 처연하도다. 아! 토마스 안중근~
1909년 10월26일 아침 9시40분, 오늘은 대한제국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 역전 플랫폼에서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던 한반도를 찬탈한 원흉인 조선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역사적인 날이다.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고양캠퍼스에서 자랑스러운 우리의 국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아! 불멸의 안중근 : 위국헌신 군인 본분]을 강연했다(2024.10.24). 구한말이나 대한제국시대나 작금이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구현되었다면 오늘날 한국ㆍ일본ㆍ중국은 EU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열강들의 패권주의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립체로 존립하고 있을까.
안중근 의사는 1910년2월14일, 관동 도독부 여순 지방법원에서 개정된 제6차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앞서 진행된 2월7일 공판에서 그는 세계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법원의 심리를 반박하며 이토 희로부미의 15가지 죄악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법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본은 1905년11월17일 을사늑약(을사조약ㆍ제2차 한일협약)을 조선을 보호하는 규약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언제 너희들의 보호를 원했는가? 우리가 원한 것이라면 조선 땅에 수많은 의병과 우국지사들이 왜 들고 일어났단 말인가?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고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군대를 해산한 것이 조선을 보호하는 일인가? 이토는 영웅이 아니라 침략자고 범죄자며 간웅이다."
안 의사가 사형을 이십 여일 정도 앞둔 1910년 3월, 옥중에서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남긴 "조선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한 최후의 유언"과 아내인 김아려 여사에게 쓴 마지막 편지(1910.2.14)가 심금을 울린다. 2월14일 이날은 여순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진 날이다. 두 개의 유언장을 삼가 읽어본다.
[2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
내가 한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 해외에서 삼년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나니 우리 조선 2천만 동포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실업을 진흥하고 내 뜻을 이어서 자주독립을 회복하면 죽는자 유한이 없겠노라.
내가 죽은 뒤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독립이 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사형 전 아내 김아려 여사에게 쓴 마지막 편지]
주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 천주의 안배로 그대와 부부가 되어 다시 주님의 명으로 헤어지게 되었으니 머잖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만날 것을 믿소.
부디 감정에 괴로워 말고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더욱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께 효도하고 두 동생들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에 영원의 즐거움을 함께 하기 바라오.(중략) 많고마는 이야기는 천당에서 만난 뒤에 기쁘게 즐겁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오. 1910년 경술 2월14일 장부 도마 드림.
[출처: 이창호(2016), "구국의 별, 평화의 횃불 안중근 평전", 벗나래, pp. 290~291.]
어지러운 시대에 하얼빈 의거 115주년을 맞이하니 안중근 의사가 더욱 그리워진다. "살아서 백 년, 죽어서 천 년"을 간다는 경구가 있다. 위정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위국헌신 정신을 본받아 정파나 계파에 치우친 정략적 접근이 아닌 대한민국의 자강자립과 안녕을 위해 지혜를 모으고 혜안을 갖추어야 할 절박한 시대이다♧.
♤사진1~8은 강연 관련 사진 및 전경이고 사진9는 필자의 경희대 연구실에 있는 윤봉길 의사와 안중근 의사 영정 사진이다.
첫댓글 이런 훌륭한 선열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평안한 시대에 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