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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실패했어도
2009년 3월 15일 / 요 21:1-14
■ 한 마취과 의사가 쓴 재미있는 수필 한 편을 먼저 소개합니다. 병원에서 어떠한 종류의 수술이든지 수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수술 전 마취라고 합니다.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그 수술은 헛수고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수술 후에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환자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고, 전신마비가 되어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쯤이면 의사도 초조하게 기다릴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가족들도 숨을 죽이고 환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떤 환자들은 마취에서 깨어날 때 어떤 소리를 지르거나 말을 하는데, 이 의사의 수필 내용은 그 환자들이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첫 번째로 부르짖는 말들을 듣고 적어놓은 것입니다. 어떤 환자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아픈 것을 표현하는 신음소리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아마 마취에서 깨니까 이제 수술 자국에 통증이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어떤 환자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오! 하나님, 주님.”하면서 주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환자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아내를 찾으며 “여보, 고마워. 당신에게 그 동안 미안했소.”하고 아내의 손을 붙잡는 남편도 있다고 합니다. 또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분노를 터뜨리며 “이 새끼야, 너 죽어. 가만히 안 둘 테야.”하며 고함을 치는 환자도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환자는 마취에서 깨는 순간 “순옥아, 너 날 버리면 안 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아내가 “여보, 순옥이가 누구에요?”라고 다그치며 묻자, 그 환자는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랍니다. 그 환자의 아내가 얼마나 실망스러웠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둥절했겠습니까?
▶ 성경에 보면 주님을 실망시키고 주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5병2어를 가지고 5,000명을 먹인다든지, 물위를 걷는다든지,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든지,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다든지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과 이적을 수도 없이 많이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입술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며 강하게 부인했습니다(마 26:74).
베드로,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예수님 앞에 다시 설 수도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풍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한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실패했던 베드로를 다시 세워주십니다.
본문에는 주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재기시켜 주시는 장면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가 우리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것 이상으로 우리 또한 실패할 가능성도 있고, 실제 삶의 현장 가운데에서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실패한 베드로를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다시 세워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또한 다시 세워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고, 실패한 우리들을 재기시키시는 하나님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실패자를 방치하지 않으신다
먼저 찾아오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배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게 붙잡혔을 때에 다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또 그렇게도 큰소리치며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던 수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였던 배신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막 16:7을 보면 더 구체적인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흰옷 입은 천사가 무덤에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기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가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먼저 가서 기다리시는 예수님, 언제나 앞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 창세기 3장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아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을 먼저 찾았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먼저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창세기 4장에서 동생을 죽인 가인이 하나님을 먼저 찾았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가인을 먼저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시내 광야 호렙산까지 도망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낙심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먼저 찾았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낙심한 엘리야를 먼저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낙심한 엘리야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두 번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눅 15장을 보면 가출한 둘째 아들이 먼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습니까? 아니면 아버지께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을 먼저 용서하셨습니까? 눅 15:2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보자마자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달려가’ 이 얼마나 극적인 장면입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측은히’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측은히’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compassion’은 ‘함께’라는 의미의 ‘com’과 ‘느끼다’라는 ‘passion’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공감하다’, ‘연민’, ‘깊이 느끼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들의 아픔에 깊이 동참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나타난 단어입니다. 이와 같이 집 나간 아들을 먼저 용서하고 받아주신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먼저 발을 씻겨 주셨고, 먼저 섬기셨고, 먼저 고난을 받으셨고, 먼저 죽으셨고,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실패자를 찾아오신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회개하자,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마치 눅 15장에서 가출한 둘째아들을 문밖에서 기다리시며 아들이 용서를 구하기 전에 이미 둘째 아들을 용서하신 아버지처럼, 주님은 이미 용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시기에 먼저 갈릴리로 달려가신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3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주님은 제자들의 요구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실패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실수한 성도를 배척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자를 왕따 시키고 골탕 먹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수하여 낙망하고, 실패하여 주저앉아 있을 때에도 방치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실패하여 주저앉아 낙망하고 있는 자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 1절을 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여기 ‘그 후에’라는 말은 요한복음 20장에 언급된 사건이 있은 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시고, 그 날 저녁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다락방에 나타나시고, 그로부터 여드레 후 다시 의심 많은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숨어있는 다락방에 찾아오셨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3가지 사건이 있은 후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호수가 워낙 넓어서 바다라고도 불리는 디베랴바다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3절 /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고 뭐고 틀렸어.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갈 거야. 내가 배운 것이 이 짓인데. 내 주제에 무슨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고. 모든 것이 끝장났어.”라고 하며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함께 있던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야고보와 요한)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제자 둘, 이렇게 해서 도합 6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베드로를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를 포함하여 7명 전부가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였지만, 도마와 나다나엘은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왜 베드로를 따라갔습니까? 남이 간다고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것입니다.
남이 호주로 이민 간다고 하니까 아무 목적과 계획도 없이 호주로 이민 간 사람들이 후회한다고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잘 된다고 하니까 아무 연구도 없이 그 프로그램 도입했다가 중도에 흐지부지 하며 없었던 것으로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혹은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나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사람들이나 가정들이나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후회합니다만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유행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주신 삶의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물고기 잡으러 가는 베드로를 아무 의미 없이 따라 물고기 잡으러 갔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건만 헛수고였습니다. 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이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왜 찾아오셨습니까?
실패자를 회복시켜 주신다
실패한 자리에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자를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잃었던 삶의 목표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에게 주셨던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1:17).”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일약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위대한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실패를 맛 본 후에 그가 다시 물고기나 잡는 어부로 돌아가자, 목숨 걸고 달려야 할 사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디베랴 바다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실패한 제자들로 하여금 재차 시도하게 하십니다. 결국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 그물을 끌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153마리나 되는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분이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은 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배를 타고 육지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육지에 이상한 것이 보였습니다. 육지에 돌아와서 보니 숯불이 놓여있었습니다. 이 숯불을 본 베드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피워놓은 숯불을 보고 “야, 예수님이 캠프파이어하며 기분 내고 계신다.”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밤새도록 추위에 떤 우리들을 배려하는 예수님은 역시 짱이야”라고 생각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피워놓은 숯불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심문을 받던 장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요 18:1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쬐더라.” 여기 숯불 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본문 9절에 등장하는 숯불은 예수님의 의도가 담긴 숯불 같습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숯불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패한 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진정한 회복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숯불을 다시 베드로 앞에 등장시킨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그 현장을 준비하셨습니다. 과거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던 그 현장이 어디였습니까? 숯불 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숯불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까?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까?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너 베드로, 네가 나의 수제라고 웃기는구나! 너 왜 나를 부인했어. 나를 저주한 이유가 뭐지?”라고 따졌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그마한 소리도 듣기 싫어하고, 또 제 3자로부터 내가 하지 않은 소리가 들리면 당당 쫓아가서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 억울해서 미치겠다, 3자 대면시켜라.”하며 난리법석을 부립니다. 사실 서로 따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언성만 높아지고 문제만 커집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와서 조반을 먹으라. 같이 조반을 먹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반을 다 드신 후에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야’라고 부르시지 않으시고 그의 옛 이름인 “시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게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몬아! 다시 출발해. 이제는 나를 사랑하란 말이야. 그러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단다.” 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3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베드로가 역시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씩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에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래,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3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의 실패해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용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들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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