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5 사순5주간 화 – 133위 110° 최제근 안드레아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어진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133위 110° ‘하느님의 종’ 최제근 안드레아
이름 : 최제근 안드레아, ‘하느님의 종’ 방 데레사 夫
출생 : 1848년, 목천
순교 : 1868년 7월(음), 교수, 죽산
최제근(崔濟根)[1] 안드레아의 본관은 강릉(江陵)으로, ‘제근’은 보명(譜名)이다. 충청도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출신으로, 1866년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최종여(보명은 嘉錫) 라자로[1.1]는 그의 부친이고, 최천여 베드로는 그의 중백부이다. 또 1910년에 사제품을 받은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는 최제근 안드레아의 후손이다.
최제근 안드레아는 병인박해 때 부친이 체포되어 순교한 뒤 소학골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였고, 이후 비신자 집을 전전하며 막일을 하여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순교한 교우의 아내로 의지할 데가 없던 용인 출신의 ‘하느님의 종’ 방 데레사와 혼인하였다.[2]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는 1868년 4월(음력)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최제근 안드레아는 포교가 형벌을 가하면서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을 밀고하라.”고 했으나, 이를 잘 참아 내면서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죽산 관아로 압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게 되자 잠시 마음이 약해졌지만, 아내 방 데레사의 권면에 힘입어 순교 원의를 다질 수 있었다. 그는 옥중에서 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고 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으나 주님을 위해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주님의 명에 따라 열심히 교리를 지키면서 본분을 잊지 않게 하고, 서로 우애 있고 화목하게 지내다가 죽은 뒤에 천국에서 서로 반갑게 만나도록 하자.”[3]
이후 최제근 안드레아는 옥에 수감된 지 3개월 만인 7월(음력)에 아내 방 데레사와 함께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다.[4]
[註]__________
[1] 최제근의 한자 성명은 후손 최병기(崔秉基, 시몬)가 기록한 「최씨 일가 순교자 가계도」(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소장)를 따랐다.
[1.1] 최제근(제만) 안드레아 가계도
[2] 『병인치명사적』, 23권, 75면. 공주 서재 요골(현 충남 공주시 유구면 명곡리 1구)에 사는 최제근 안드레아의 아우 최원심(崔遠心, 안드레아(보명은 濟萬)의 증언. 여기에는 최제근 안드레아가 방 데레사의 첫 번째 남편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며, 최제근 안드레아가 순교하고 방 데레사가 재혼한 내용은 물론, 이후의 순교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의 증언자가 최제근 안드레아의 동생인데다가 증언의 요점이 형 최제근 안드레아의 순교 행적이라는 사실에서 본다면, 최제근 안드레아는 방 데레사의 두 번째 남편이어야 맞는다.[2.1]
[2.1] 220211 연중5주간 금 – 133위 058° 최천여 베드로 ☞[2.1] 차기진, 『성거산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2007; 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133위 079° 문 막달레나 ☞[2.1] 죽산성지 순교자 연구/하성래(2010년,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원).
[3] 『병인치명사적』, 23권, 74-75면.
[4] 『치명일기』, 정리 번호 420번; 『병인치명사적』, 23권, 74-7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