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5월 14일(토) 열왕기하 12:4-16 찬송 347장
4. 어느 날 요아스왕은 제사장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여호와의 성전에 바치는 예물,
곧 정규적으로 거둬들이는 인두세와 서약으로 바치는 예물과 백성들이 자진해서 바치는 모든 돈을 모아
5. 성전을 수리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시오.’
6. 그러나 요아스가 나라를 다스린 지 23년이 될 때까지 제사장들은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다.
7. 그래서 그는 여호야다와 다른 제사장들을 불러 물었다. ‘어째서 당신들은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소?
이제부터 당신들이 거둬들인 돈을 보관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어 성전 수리를 하게 하시오.’
8. 그래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돈을 직접 받지 않고 자기들이 성전을 직접 수리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9. 그때 제사장 여호야다는 상자 하나를 가져다가 뚜껑에 구멍을 뚫어 성전 정면의 우측 단 곁에 두었다.
그래서 성전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성전에 가져오는 모든 돈을 받아 그 헌금함 속에 넣었다.
10. 그리고 헌금함에 돈이 많이 모이면 궁중 서기관과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그 돈을 계산하여
11. 성전 수리 담당자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 돈으로 목수와 건축자와
12. 채석공의 임금을 주고 성전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목재와 돌을 사고 그 밖의 필요한 곳에 사용하였다.
13. 그러나 여호와의 성전에 바친 돈은 은대접이나 불집게나 주발이나 나팔이나 그 밖의 금은 그릇을
만드는 데 쓰지 않고
14. 오직 성전을 수리하는 데만 사용하였다.
15. 그리고 성전 수리 담당자들이 아주 정직하게 일했기 때문에 회계 보고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16. 그러나 죄와 잘못을 씻는 속건제와 속죄제의 예물은 그 헌금함에 넣지 않고 제사장들에게
주어 쓰게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
40년간에 걸친 요아스의 통치 행적 가운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전 수리가 오늘 말씀에 소개되고 있다.
바로 이 사건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생존해 있을 때 일어난 것으로서
우상 숭배자 아달랴에 이해 훼파된 성전을 복구하기 위한 조처였다.(대하24:7)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 먼저 요아스는 제사장들의 주관하에
모든 일을 진행시켰으나 23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4-6절)
따라서 요아스는 모든 백성의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조처를 새롭게 취함과 아울러
성전 수리의 책임을 제사장이 아닌 전담자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서 헌금된 돈이
오로지 성전 수리 외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뜻한 바대로 일을 진척시킬 수 있었다.(7-16절)
한편 이와 같은 요아스의 성전 수리는 아사 왕이
여호와의 단을 중수한(B.C.910년경) 이래로 처음 있는 일로서(대하15:8)
아달랴의 통치 기간 동안에 만연해 있던 우상 숭배의 풍조로부터
유다 백성들의 관심을 여호와 종교로 돌리고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제사장들의 주관하에 진행된 1차 시도가 무위에 그치고
모든 백성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함으로써 진행된 2차 시도에서
성전 수리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① 하나님 나라의 일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헌신과 봉사를 통해 성취된다.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 할지라도
혼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는 노릇이며
실제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목숨을 바쳐 싸우는 병사들이듯이
훌륭한 목회자와 전도자들의 도움과 지도하에 사단의 세력과 싸우는
성도들의 헌신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앞당기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② 세상적인 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일에 있어서도
철저한 사전 계획과 효율적인 업무 분담이 요구된다.
실패로 끝난 1차 시도와는 달리 2차 시도가 성전 수리의
완수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훨씬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헌금 수납과 집행의 담당자를 구분하여
성전 수리비가 유용되는 일이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처음에는 구제 사업을 직접 담당하다가
말썽이 생기자 일곱 집사를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제 사업을 담당케 하고
자신들은 기도와 전도에 전념함으로써 훨씬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원리였다.(행6:1-6)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에서 대다수의 성도들은
방관하는 위치에 서게 되고,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모든 일이 처리되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16절)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돌렸더라」
이 말씀은 성전 보수 공사를 주제로 하는 단락의 마지막 절이다.
그리고 이 말씀의 내용은 1차 성전 보수 때의 실패를 조장했던
제사장들의 궁핍한 생계를 배려한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이같은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 성전 보수 공사를 이야기하는
단락의 결말로 들어가기에는 어딘지 어색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같은 내용을 마지막에 배치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앞선 15절은 성전 보수 공사를 일꾼들이 성실히 감당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6절은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을
성전 보수 공사에 사용하지 않고 제사장에게 돌렸다고 언급한다.
이는 과거에 생계가 곤란하여 성전 보수 공사에 사용해야 할
은까지 유용했던 제사장들의 생계를 보장함으로
그들이 사역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전을 보수하는 자들이 성실하게 일했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섬기며 일하는 제사장들도
자기들의 본분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성전 보수 공사가
얼마나 혁혁한 공적을 따라 마무리되었는가보다 이를 위해 일하는 자들
그리고 거기서 지속적으로 섬기며 일해야 할 제사장들이
바로 세워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성전 보수 공사가 올바로 마무리되고 빈틈없이 보수되었다 해도
거기서 일하는 제사장들이 여전히 생계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불성실하게 성전을 섬겨야 한다면
그같은 성전 보수 공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그런 성공에는 수리된 건물 외에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도 적용해 볼 수 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업적 지상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떤 일을 얼마나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느냐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일의 성공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일의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람을 소홀히 여긴다면
그같은 업적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과는 무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일을 이루시는 것보다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것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보다
모세 한 사람을 바르게 세우는 일을 먼저 실행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속전 속결(速戰速決)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약속의 성취를 맛보게 하기보다 그들로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받도록 하기 위해 40년의 광야 생활을 주신 분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아도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님은 더 나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훌륭한 업적들을 이루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행한 일은
열두 명의 제자를 훈련시키고 그들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다.
물론 우리가 맡은 사명, 감당해야 할 일들에 대해
심혈을 기울이며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남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만일 내(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 이용하거나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만 생각하고 사람을 소홀히 여긴다면 그같은 업적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이기적인 바벨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맡겨지든지 그 일을 성실하고
지혜롭게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그 일을 이루어감에 있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