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廟 李世玧 李奎煥 李秉健 創建興學堂 李挺柱 成爾鴻 愛民奬學 趙明勖 任安世 宋輝明 兪彦宗 李復祥 移建興學堂 閔百能 李昌遠 善治 宋溥淵 李應重 柳光翼 韓文洪
★李星會 正廟善政 尹晦東 李性重 趙祥逵 李釆 有碑 李秉淳 徐惇修
★蘇洙中 純廟善治 李光斗 金熙臣 朴祖壽 金益秀 李龜星 李鼎耉 安廷喜 李羲升 宋錫老 洪淳謨 有碑 洪膺疇
★憲廟 尹膺善 成載璜 崔鍾駿 有碑 鄭虁和 有碑 尹滋一 有碑 金在鶴 善治 鄭紀承 勤農興學 洪肯謨 柳敎祚
이병순(李秉淳,1746~) [생1768] 본관 전주. 字경질(景質)
■가계
>33세 ③인평대군 이요(1622~)
>34 북녕군 이욱(1639~)
>35 의원군(義原君) 이혁(李爀, 1661~1722)
>36 안흥군(安興君) 이숙(李埱,1693~). 오호도총관
>37 이진익(李鎭翼,1728~)[생1753] 字운경(雲卿) 1780년 경주부윤시 환곡축재로 파직
>38 ①이병순(李秉淳,1746~)[生1768] 지례현감
>39 이낙중(李樂重)[文]
>40 입후 이연응(李沇應,1818~ ) [문1866] 字연수(蓮壽). 시호효정(孝靖)
>38 ②이병원(李秉源,1752~)[생1783] 配연일일 정의환(鄭義煥)의딸
>39 ②남연군 이구(李球/초명 李采重,1788~1836) 출계 1815년 은신군에 입후
配좌의정 민정중의4대손 민경혁의딸
>40 ①흥녕군 이창응(李昌應)
>40 ②흥완군 이정응(李晸應)
>41 입후 이재면(李載冕,1845~1912) ▷이재황(고종)의 입적으로 흥선군에 복적됨.
>40 ③흥인군 이최응(李最應) 임오군란시 피살
>40 ④흥선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
>38 ③이병준(李秉濬,1755~)[生1777] 字경질(景質)
■관력
1779태릉참봉, 1781종묘서부봉사, 광흥창봉사 1791북부도사, 내첨직장, 1792형조좌랑, 1793형조정랑, 지례현감
1794제용판관, 한산군수, 1798부사과, 사재첨정, 1798영천군수,
■기록
○승정원일기 1718책 (탈초본 91책) 정조 17년 6월 14일 을해 42/50 기사 1793년
李秉淳爲知禮縣監
○승정원일기 1725책 (탈초본 91책) 정조 18년 1월 4일 임진 9/31 기사 1794년
○ 李羽晉啓曰, 問啓事, 命下矣。問于順天府使洪述祖, 仁川府使閔百準, 信川郡守李素, 沃川郡守丁載運, 知禮縣監李秉淳處, 則皆以爲, 差使員之隨駕, 格例茫昧未知, 不得進參云矣, 敢啓。傳曰, 名以蔭官者, 若得一縣, 則所知者唯犯法違憲之事也, 懲貪之典, 徒及於李喆運·具純輩, 若此而何以使所謂蔭倅者知懼乎? 如是之致, 凡於供職, 唯以怠慢爲工謀之欛, 豈不萬萬駭然乎? 今因此輩還下去, 試問之, 則法典所載陪從應行之事, 亦敢闕却, 不但爲渠輩罪上添罪之端。渠輩異於京職, 皆有牧民之責焉, 自上猶且不憚憊勞, 躬詣社壇, 虔將祈穀之祀, 此示民重農之意也, 尋常動駕, 則渠輩雖或息偃在家, 敢於爲民祈穀之幸, 其敢不參乎? 今於問啓之下, 曰以不知前例云者, 尤爲放恣, 以祗迎等說發明者, 亦甚無嚴, 赦典纔過, 而國綱所係, 民事所關, 豈可以此闊狹乎? 五邑差使員, 爲先刋削其職, 卽其地方分配, 當日內發送後, 草記事, 分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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吟贈夕陽樓主人李奉事 秉淳
윤기(尹愭,1741~1826)
夕陽閣下夕陽多 석양각(夕陽閣) 아래에 석양이 좋지만 /
喬木寒聲柰若何 높은 나무 불어오는 찬바람을 어이하랴 /
寓目書當人舊好 눈 붙여 읽는 책은 오래된 벗과 같고 /
照心氷似鏡新磨 맑은 얼음은 막 갈아낸 구리거울 같구나 /
滄江客語樓雲水 푸른 강가 나그네는 운수관(雲水觀)에서 담소하고 /
野墅兒嬉洞薜蘿 시골집 아이들은 덩굴 풀 덮인 골짜기에서 노누나 /
剩羨君今存一樂 부러울사 그대는 첫째 즐거움 누리나니 /
勝吾九樂強名他 억지스런 내 집 이름 구락헌(九樂軒)보다 낫네 /
李有江亭。號曰雲水觀。又有鄕舍。妻子在焉。而京第則父母兩弟俱存。故詩及之。九樂余以名軒者也。
이병순에게는 강가의 정자가 있는데, 이름이 운수관이다. 또 시골집이 있어서 처자식은 그곳에 있고, 서울 집에는 부모와 두 아우가 함께 살고 있다. 그래서 시에 이를 언급한 것이다. 구락(九樂)은 내 집 마루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