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젠가 그림 임근재 서양화가젠가 -홍다미우리는 즐거움을 쌓기 시작했죠딱딱한 어깨를 내어주며 무너지지 않게 한 계단 한 계단 다짐을 쌓았죠 대나무가 마디 www.mdilbo.com
우리는 즐거움을 쌓기 시작했죠 딱딱한 어깨를 내어주며 무너지지 않게 한 계단 한 계단 다짐을 쌓았죠 대나무가 마디를 쌓듯 빌딩이 올라가고 집값이 올라도 내일 모래 글피 그글피를
오지 않는 내일을 오늘처럼 지금처럼
집값이 무작정 올라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고나면 거짓말 좀 보태서 백만 원씩 쑥쑥 올라갔죠. 아파트 붐이 일어서 전국의 아파트 가격이 월급 수십 년을 모아야 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거기에 매달렸죠. 지금도 서울 강남의 아파트는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곳이죠.
거꾸로 가는 놀이를 해볼까요
쌓아놓은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놀이
자, 그렇다면 쌓기만 했던 걸 빼내면 어떻게 될까요? 이게 '젠가'라는 게임의 본질이죠.
장난감을 빼버리면 아이는 자라서 부모 눈물을 쏙 빼버리고 최저임금을 빼내면 알바는 끼니를 빼먹고 잠을 빼내면 기사님은 안전이란 블록을 빼내고야 말겠죠
빼내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군요. 아이에게는 꿈을, 알바생에게는 끼니를, 기사에게서는 안전을 빼앗는 일입니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겠어요.
언젠가 도심 백화점도 한강 다리도 이 놀이를 즐기다 쏟아졌고
모닝 키스도 굿나잇 인사도 기념일도 블록으로 빼내면 연애도 와장창 무너지겠죠
삼풍백화점 붕괴를 기억하시죠, 성수대교도 마찬가지고요. 와르르 무너진 것들. 잘못 올린 것들은 쉽게 무너지죠. 사랑도 마찬가지죠. 삐끗하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들이 너무 많군요. 물질도 관계도 사랑도.
한순간 한 방이면 끝나는 게임
손끝의 감각을 믿기로 해요
쌓아 올린 우리가 와르르 무너질까봐
우린 서로의 빈틈을 살짝 비껴가는 중이죠
현대인은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삐끗하면 모조리 무너지는 걸요. 우린 쌓아올린 것들의 빈틈을 살짝 비껴가고 있어요. 위태합니다.
'젠가'를 통해서 현대의 기후 위기, 도시화의 위기를 알려주는 경고 시입니다. 한순간 무너지는 것들은 튼튼한 뼈대가 없기 때문이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뼈 없는 순살 아파트가 조롱거리가 되니 할 말이 없기도 합니다. 안전불감증은 늘 우리 주변에 맴돌며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엄청난 위험이 다가오는 내용을 '젠가'라는 놀이를 통해 담담하게 풀어갑니다. 처음엔 아파트로 나중에는 사랑으로 그리고 인간의 관계로 그 내용을 확장시켜갑니다. 시인의 세계관이 드러납니다. 이런 시를 읽고 나면 시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