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3 부활팔일축제 목 – 부활 신앙은 어린이가 되어야···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루카 24,38).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로 속이 더 복잡해졌다.
스승님께서 유언하고 돌아가셨으면 다 끝난 것인데, 다시 살아나시니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라는 마르타의 말은 신앙인의 상식이다.
그런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라고 하시며 그 상식을 뒤집으셨다.
한편, 루카와 마르코 복음은 ‘수난과 부활에 관한 두 번째로 예고’(마르 9,32-33; 루카 9,43-45)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마르 9,33-37; 루카 9,46-48)를 연이어 놓았다.
마르코와 루카 복음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가장 큰 사람’이 상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어린이 같아야 가장 큰 사람이 되고, 가장 큰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편집 의도가 있다고 하겠다.
사실 어른들은 복잡하다.
지식과 경험이 많이 축적되어 있고, 유불리에 따라 그 많은 지식과 경험을 이렇게 저렇게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행적들도 정신의 복잡화 과정을 거쳐서 기억되고 재구성된다.
말이 기억이고 재구성이지 제멋대로 여기저기 구겨서 넣어놓았다가 꺼내서 잔뜩 멋을 부리며 개작을 한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는 말씀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빛나는 자리를 찾아 ‘걸어 다니는 회칠한 무덤’(마태 23,27)일 수 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내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