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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이란 평화, 즉 주님의 평화를 말하는데 악인에게는 없다고 합니다.선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평화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주 안에서 살고 주 안에서 행동할 때, 일어나는 마음 속의 평화로움을 말합니다.
1. 겸손한 사람에게는 용기를
겸손한 사람은 마음이 순박하여 남에게 소위 건방지다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게서 저 높은 곳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고 스스로 영광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이사야57장 15절 말씀에 "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라고 하였습니다. 왜 용기를 주셨을까요? 겸손한 자는 마음이 연약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언뜻보면 순박하여 보일지라도 그는 마음을 온순하게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좋아하십니다. 자만하지 않고 그릇되고 오만하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의 결함과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더욱 찾고 의지하며 그분의 힘에 대해 인정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알게 됩니다. 또한 이와 같이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인도 하시고 받아들여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을 닞추는 사람이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겸손한 자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 걸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순종을 배워가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이 세상을 건설하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경험하고 사랑을 전파하고 내 주변과 하나님께 낮은 자리에서 임하라고 배우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기 22:29)”고 강조했습니다. 겸손한 자는 “눈이 낮은 사람”을 의미힙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작게 생각하고 겸손한 사람은 다윗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 말을 받아들입니다.
시편 22:6-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또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라고 바울사도는 말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악보다 자신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죄악을 더 잘 보기 때문에 타인을 더 낫게 여깁니다. 자신에게서는 부족함을 발견하려 하고, 타인에게서는 선함을 찾아내려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자신의 안일함과 연약한 기도에 대해서는 회개히먀 순정힙니다. 가장 좋은 순간에도 여전히 죄에 의해 넘어질 수 있고, 최선의 노력에도 여전히 너무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겸손의 미덕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예수의 제자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믿음을 율법적 의무가 아닌 주님의 사랑과 감사에 마음을 둡니다. 위선자가 자신의 선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겸손한 영혼은 항상 자신에게 악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식이 점점 늘어날수록 자신의 무지와 믿음이 부족함을 알기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부르짖게 됩니다.
가장 힘든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런 고통스런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욥은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떤 불공평한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끝은 더 많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욥의 고난을 가장 힘든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힘이듭니다. 겸손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욥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2.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마 23:12)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 행태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무거운 짐을 사람의 어깨에 지우기만 하고 자신들은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는다고 묘사하셨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이 너무도 다양한 전통과 규례들이 실제로 너무도 지기 버겁고 복잡했다. 당시 바리새파 유대 윫법주의자들은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규칙들을 부과하고 정작 자신들은 자유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지도계충에 있는 자들이 "법대로" 를 외치는 그들이지만 정작 자신들에게는 법대로의 잣대를 대지 않습니다. 툭검이 왜 필요합니까? 법을 법대로 행하지 않고 치외법권에 앉자서 법을 누리기만 하고 자기는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먼저 그들은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려 입고 다닙니다. “경문 띠”는 성경구절을 담은 조그마한 상자를 몸에 부착하는 띠인데 이 띠가 잘 보이도록 그 폭을 넓혔다는 것입니다. 옷술은 겉옷 단에 달아낸 술인데 그것을 길게하여 인위적으로 경건함을 자아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결국 자신의 신앙심으로 겉으로 드러난 주님의 시선을 길게하여 모두 자신의 신앙심을 겉으로 드러내어 하나님과 사람을 기만하는 위선이자 외식입니다. 겉모습을 꾸며대기만 합니다.
둘째로 스스로 높이는 행위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잔치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무리들과 자신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누렸습다.
셋째는 시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문안받고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문안”은 단순히 인사치레가 아니라 “존중과 공경의 의례”이자 랍비는 그에 걸맞는 칭호였습니다.
누가복음 14장 7-11절 /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인 지도자의 한 사람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리고 이곳에서 수종병이 든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그 자리에는 식사 초대를 받은 다른 손님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는 자리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랫자리보다는 윗자리를 선호하였습니다. 주인과 가까운 자리일수록, 그래서 주인의 눈에 쉽게 잘 들어오는 윗자리일수록 더 좋은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윗자리에 앉으려고 자리를 골랐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나서 예수님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너희는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마라. 혹시 너희보다 더 높은[귀한] 사람이 초대받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사람이 왔는데,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너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이 너희에게 다가와서는‘손님,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는 손님이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이 분을 위해서 준비된 자리입니다. 하오니,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시고 다른 자리를 찾아 앉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낮은 자리로 내려가 앉게 되는 창피를 당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초대를 받으면 너희는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주인이 와서‘친구여, 어서 이리로 올라와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다른 모든 손님들 앞에서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설교 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가 윗자리인지 아랫자리인지 분별도 하지 못하고 마음이 교만해서 윗자리에 앉았다가 아랫자리로 쫓겨나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가 되지 말고 처음부터 아랫자리에 앉는 겸손함을 보이면 주인이 그런 그를 윗자리에 앉도록 정중히 청할 테니 그때 윗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며, 성도가 겸손한 마음에 있으면 그를 주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며 영광스러운 높은 자리에 앉히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겸손한 자가 될 것을 가르치는 인성 교육의 교훈으로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누구든지 먼저 된 자는 나중 된 자가 될 것이고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는가 하면(마 19:30, 막 10:31; 마 20:16; 눅 13:30), 본문에서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마 23:12; 눅 14:11; 눅 18:14).
이때 이러한 말씀을 주시는 것에는 각각 이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을 말씀하실지라도 문맥에 의해서 그때마다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와 그때마다 말씀을 하시는 의미가 각각 다릅니다.
본문은 그 핵심적 구절이 마지막 절에서 보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에 있으며,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를 위하여 정해지고 준비된 환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겸손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자주 겸손하면 버릇이 되고 그 버릇은 언제부터인가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주님의 제자기 되어가는 신앙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3.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사57:21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악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킹 제임스 성경번역본
제1절에서 의인은 멸망하니 아무도 그것을 마음에 새기지 아니하며 자비로운 사람은 빼앗기고 의인이 장차 올 악에서 빼앗기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을 시작하여 끝절(사57:21)에서는 악인에게는 주님의 평화가 없다고 하십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런데 왜 평화가 없을까요? 그렇습니다. 악인은 평생을 악의 스올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플라톤의 동굴에 비유에서 보듯이 그림자만 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동굴안에 비친 자기의 모습은, 그림자만 있을 뿐, 자기의 본 모습은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만나성도 여러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멸망하는 것 같지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영원한 형벌입니다. 로마서 2:13말씀에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은 율법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씀을 잘 새기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귀로듣고 마음에 새기고 열심으로 행하는 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잘 듣기만 하고 행동은 따로따로 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겉치례 외식적 믿음입니다. ~~~ 하는 척 듣는 척 하는 것은 악인의 상투적인 외식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영원에 거하시는 높고 높으신 분이요 그 이름이 거룩하시니라. 나는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가진 그분과 함께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여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고 하노라."(사57: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함께 다시 한 번 더 봉독하십니다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고 합니다. 때때로 매우 생명이 없고 불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 은혜는 약하다. 죄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고 여러 가지 고난과 섭리의 불리한 경륜의 시대를 겪으셨으니 이제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셔서 그들을 소생시키시고 소생시키시느니라. 그는 은혜로운 임재로 그렇게 합니다.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은혜의 발견으로; 귀중한 약속을 적용함으로써;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많이 주어 그들이 영혼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은혜의 새로운 행사와 의무를 수행하도록 깨달음으로써 주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말한 것입니다.
- 결론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만나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 중에 소망을 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갇힌 몸이요 소망의 꿈을 잃지 않는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지켜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오늘의 힘든 나날에 용기와 지혜와 꿈과 사랑이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만나인을 위하여 주신 말씀은 살전 5:16-18입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