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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신나무골 성지
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칠곡대로 2189-20 대구대교구
4번 국도에 있는 신동 초등학교에서 왜관 방향으로 약 3.3km 정도 가면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 성지 입구가 나온다. 예로부터 단풍나무의 한 종류인 ‘신나무’가 많아 ‘신나무골’로 불린 이곳은 대구 외곽에 자리하고 있으나 교통의 요지였다.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20km가량 떨어진 유서 깊은 교우촌인 이곳은 좁게는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를 중심으로 한 ‘신나무골’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도암 · 완정 · 왜관의 가실 · 동명의 어골 등 인근의 교우촌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필수 조건인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라는 점 외에도 대구 읍내에서 하루거리라는 점에서 교통의 편리성 또한 매우 큰 장점이었다.
신자들이 처음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 등의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들 중 많은 신자가 배교를 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했지만 33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가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崔良業) · 다블뤼(Daveluy) · 리델(Ridel)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 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Chastan)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곤 했다.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쓰러진 후에는 다시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이 지역을 맡아 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 일어나면서 신나무골의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신나무골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삼남 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아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金保祿) 신부가 순회 선교를 시작했다. 특별히 경상 지역 선교를 위해 1885년 후반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지어 정착한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자 이곳 신나무골을 거점 삼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이로써 대구 본당이 설립되었고, 곧이어 1888년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 상리동)로 본당을 옮겨 본격적인 대구 읍성 전교에 나선 로베르 신부는 임시 요셉 성당을 거점으로 사목하며 계산동에 십자형 한옥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1898년 6월 말에 완공된 한옥 성당은 불행히도 1901년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듬해 로베르 신부는 그 자리에 두 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 양식으로 새 성당을 완공해 1903년 11월 1일 축성식을 올렸다. 이 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현 계산 주교좌성당의 원형이 되었다. 이렇게 30여 년에 걸친 로베르 신부의 사목 활동은 대구 지역에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남지방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이른바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8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4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성 학교의 전신인 한한 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 학교였다.
신나무골은 1894년 왜관 가실 본당 소속 공소였다가 1926년 왜관 본당에 소속되었고, 1968년 신동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다시 신동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신나무골 성지는 그동안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관할하며 1, 2차에 걸쳐 개발한 바 있고, 2015년에 대구대교구로 이관되었다.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며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이어 2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원래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는 1860년 경신박해 때 포졸들에게 쫓기다 체포되어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안양동) 산 21번지에 있는 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대구 지역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2차 개발을 완료했는데, 이때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명상의 집) 등을 복원하고, 마당 한쪽에 로베르 신부의 흉상도 건립했다.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남편은 성산 배씨(星山裵氏) 가문의 배정모로, 원래는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 1860년 경신박해의 여파로 경상도 지방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특히 칠곡 읍에는 칠곡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官衙)가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꽤 심했다. 배정모의 가족은 박해를 피해 칠곡 읍에서 20여 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신했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경황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 그리고 세 아이는 한티 쪽으로 총총히 쫓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2월 말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이들은 갖은 고생 끝에 한티의 사기굴이라는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따라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성교(聖敎)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라고 엄포를 놓자 겁에 질린 배정모는 이내 배교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과 맏아들 스테파노(속칭 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라 모자(母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남편은 가슴을 후벼 파는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맏아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묻었다가 얼마 후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체만 이장했다.
대구대교구는 2018년 2월 28일 기존의 복원 사업을 통해 성지 내에 복원했던 로베르 신부 사제관과 대구 본당 초가를 철거하고 3차 신나무골 성지 개발에 들어가 2019년 5월 2일 한옥 성당 봉헌식을 올렸다. 새로 단장한 성지에는 로베르 신부가 현 계산 주교좌성당 자리에 지었던 옛 한옥 성당(1901년 화재로 소실)을 재현한 것이 특징이다. 교구의 첫 성당이었지만 지진에 의한 화재로 소실된 역사를 본당이 처음 시작되었던 곳에 다시 세우고 그 의미를 순례자에게 전하려는 의미이다. 성당 바로 옆에는 로베르 신부와 세 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머물던 초가를 올려 사제관을 복원하고, 순례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성당 외벽에는 로베르 신부의 일대기와 대구 교회 관련 역사를 담은 김옥수 신부(부산교구)의 타일 성화를 설치해 순례자들의 성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4월 18일)]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 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이곳은 대구 본당 설립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경상도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에게 첫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왜관 지역에서는 1973년부터 이곳을 사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선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4년에는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무덤을 옮겨 와 안장하였다. 한편 한티에는 그 후 유명 · 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되고, 1983년에는 피정의 집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가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1월호]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 - 이선이(엘리사벳) 순교자의 마지막 용맹한 증언
대구에서 팔달교 또는 매천교를 지나 왜관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10여 분을 달려 신동을 지나면 ‘신나무골성지’ 안내판이 오른쪽 길가에 보인다. 길가에 성지가 있어 차를 세우고 이선이(엘리사벳) 순교자 묘지에 참배를 할 수 있고 잘 가꾸어진 묘지 왼편에는 옛날의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대구 첫 본당터가 있다. 신나무골 성지는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성지로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중화리를 중심으로 교우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때이다.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영양, 봉화 일월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 등 경상도 북부지방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은 배교자의 고발로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경주와 안동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옥사를 하거나 석방되었고 이들 중 33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끌려 왔다.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과 인척, 또는 석방된 교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몇몇 가정이 대구와 하루거리에 있는 신나무골로 들어왔다. 이들이 신나무골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대구 감영에서 문초를 당하고 옥살이를 하는 가족, 친지 등 교우들의 옥바라지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신나무골에 모셔져 있는 이선이 순교자의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묘비에는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의 장부 성산 배정모 일가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고조 때부터 칠곡으로 옮겨와 골배 마실과 내서 등지에 살면서 부친 때부터 천주교를 믿게 되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61년 경상도 지방에 교난(경신박해)이 일어나자 배정모는 부인 이선이와 장남 스테파노(속칭 배도령 16세), 차남 용철(11세), 삼남 용덕(4세)을 데리고 한티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뒤쫓아 온 포졸들에게 사기굴에 숨어있던 일가족은 체포되었다.
이때 남편 배정모는 배교함으로 즉시 석방되었으나 부인 이선이와 장남 스테파노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 하면서 굳은 신앙을 고백하고 그 자리에서 장렬히 치명하였다. 때는 서기 1861년 음력 2월 8일이었다. 정모는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임시로 한티에 매장하였다가 후일 부인의 시신만 칠곡 안양동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장남의 묘소는 한티에 남아 있을 터이나 현재 그 위치를 알지 못한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신앙의 후예들은 거룩한 순교자 이선이의 묘소를 1984년 7월 8일 연고 성지인 이곳 신나무골로 옮겨 모시고 그 신앙 충성을 우리 모범으로 기리고자 한다.”라고 쓰여 있다.(김구정 선생의 묘비문에서)
묘비에 써놓은 글귀를 읽고 잠시 생각해 본다. 순교와 배교,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으로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늘 방황하는 것 같다. 얼마 전 구일기도 특강 중 파스카의 신비에 대한 강의가 생각난다. 파스카의 신비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고통이 지나면 기쁨이 오고 절망이 지나면 희망이 있고 차디찬 겨울이 지나면 따스한 봄이 찾아오듯 우리의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에 이러한 어려움을 겪지 않고서는 결코 기쁨이나 희망, 따스한 봄을 맞이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신앙인인 우리는 결코 죽음에 이르는 극심한 고통을 맛보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에로 옮겨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순교하기까지 온갖 형벌로 배교를 강요당하는 어려움을 겪은 후에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안에서 이루어짐을 깨닫게 한다.
또한 이 신나무골의 역사를 보면 우리 대구대교구에서 가장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순교자 이선이 묘소 참배를 마치고 성지 아래쪽 대구 첫 본당 터로 자리를 옮겨 사제관, 10년 전 태풍으로 없어진 연화서당 흔적을 밟으며 대구 초대본당 김보록(로베르) 신부님의 흉상 앞에 서서 잠시 대구교구의 역사와 프랑스 교회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을해박해 이후 교우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이곳에 1831년 조선교구가 창설된 후 1836년부터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 신부들이 한국에 나와서 전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1837년에는 샤스땅 신부님이 한반도 남쪽지방을 맡으면서 언양과 신나무골 등지에 순회 전교를 하신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샤스땅 신부님과 모방 신부님께서는 교우들을 살리기 위해 자수하여 그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기해박해가 끝나고 1845년 김대건 신부님이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을 받으시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님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여 6년여 동안 목자 없이 버려진 어린 양들을 보살피러 이 땅에 오셨다. 다블뤼 신부님은 삼남지방, 즉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셨는데 이때 이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 그 후 1849년부터 1861년 6월 최양업 신부님이 과로로 쓰러질 때까지 12년 동안 이곳을 다니시며 성사를 주시고 교우들을 보살피셨다. 다시 다블뤼 주교님께서 1865년 초까지 맡고 계시다가 병인박해 직전까지 리델 신부님이 경상도 지방을 맡으면서 이곳 신나무골까지 순회 전교 하셨다.
병인박해로 인하여 이곳 신나무골 신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박해가 잠잠해지자 다시 돌아와서 살게 되었다. 이후 1882년부터 이곳에 순회 전교를 하신 김보록 신부님은 1885년 대구본당이 설립되면서 대구의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이곳 첫 본당 터인 이이전(안드레아) 회장의 집으로 부임하였다. 1889년부터 보두네 신부님이, 1890년에는 조죠 신부님이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이곳에서 성무를 집행하면서 계셨다.
김보록 신부님은 이곳 신나무골을 순회 전교 하실 때 일명 [연화학당]이라고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세우셨는데 신학문과 구학문 및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던 학교로 일찍이 구한말 우리나라 개화기에 설립된 많지 않은 신식학교 중에 하나로 꼽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한국 교회를 위하여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기신 일들이 많다.
100여 년 전 아니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견하며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교회가 쇠퇴하여 지금은 성직자·수도자 성소자가 없어 우리나라에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과거 우리가 받은 그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온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은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어 씁쓸하기만 하다.
얼마 전 우리 대구대교구에서는 프랑스 교구의 요청을 받아들여 초대 본당 신부인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 교구인 프랑스 벨포르 교구에 사제 한 명을 파견하였다.
‘로베르 신부님! 당신께서 애써 가꾸어 놓으신 대구교구가 이렇게 발전하여 신부님의 고향 교구에 사제를 파견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늘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도록 전구해주시고 프랑스 교회가 다시 재건할 수 있도록 저희들도 열심히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멘!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4년 5월호, 박철수 보니파시오(경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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