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아첨을 하지 않아야 능력 있는 사람이다
위소보는 연회석을 크게 차려 명주를 맨 윗자리에 앉히고 조양동을 그 다음 자리에 앉혔다. 자기는 주인석에 앉아서 그들을 상대했다. 그리고 다른 천진위 무사들은 세 탁자에 나누어 앉혔다. 백작부의 주연은 매우 푸짐했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창극을 하는 사람 이 연희석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 서울로 들어은 천진위의 무장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하찮은 파 총(把總) 벼슬에 있었을 뿐인데 털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백작부에서 병부상서와 백작대인을 모시고 함께 술을 마시며 창극을 구경하게 되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인연이었다. 조양동은 성질이 뻣뻣하긴 해도 위인됨이 대단히 똑똑했다. 위소보가 주석에서 어떤 일을 상의할지 들먹이지 않자 그 역시 입을 열지 않았 다. 그저 위소보가 나찰국의 기이한 풍속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생 각했다. (어린애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구나. 남녀가 어찌 여러 사람이 보 는 앞에서 껴안고 춤을 춘단 말인가? 천하에 그토록 수치를 모르는 사 람이 있겠는가?)
명주는 몇 잔의 술을 마시고 한 토막의 창극을 구경한 후에 몸을 일으 켜 작별을 고했다. 위소보는 그를 대문까지 바래다 주고 대청으로 돌아 와 창극이 끝날 때까지 무관들과 더불어 구경을 하며 술과 밥을 배불리 먹었다. 그런 후 조양동을 안쪽 서재로 데리고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조양동은 서가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존경심이 우러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어린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학문은 꽤나 깊구나. 그야말로 우리같이 조야한 사람보다는 훨씬 고명한 편이겠다.) 위소보는 그가 서적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웃었다.
[조형, 솔직히 말해서 이 책들은 모두 장식용으로 갖다놓은 것이오. 형 제가 알고 있는 글자는 전부 합쳐도 열 자가 되지 못하오. 위소보라는 내 자신의 이름 석 자만 해도 함께 쓴다면 어찌되었든 알아보지만 따로 때어놓는다면 알 수가 없다오. 그렇기 때문에 책이라고 하면 나는 그저 눈뜬 장님이외다.]
조양동은 껄껄 웃으며 다시 마음이 느긋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 젊은 도통이 성격이 매우 솔직하고 시원하며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위 대인, 소장이 먼젓번 위엄을 거역한 데 대해서 너무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위소보는 웃었다.
[어찌 탓하겠소? 그대와 나는 형제로 칭호하도록 합시다. 그대가 나이 가 더 많으니 나는 그대를 노형이라 부르고 그대는 나를 위 형제라 부 르도록 하십시다.]
조양동은 재빨리 일어나 인사를 하고 말했다.
[도통 대인께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것은 소인의 수명을 단축시키 는 일입니다.] [어서 앉으시오. 나는 그저 운이 좋아 우연히 황상의 마음에 드는 일을 몇 가지 했을 뿐이오. 그대는 내가 정말 무슨 재간이 있는 줄 아시오? 내가 이 벼슬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나는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오. 조 형이 칼과 창으로 피땀을 흘려 세운 공로가 진짜지, 나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오.]
조양동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위 대인, 저는 조야한 사람입니다. 그대에게 어떤 일이 있다 하면 아 무쪼록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소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목 숨을 걸고 해치우겠습니다. 설사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노 력하겠습니다.]
위소보는 흐뭇해 했다.
[나에게도 뭐 별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오. 그저 지난번 천진위에서 조형을 만났을 때 조형의 모습이 당당하고 재주가 있어 보여 인재라고 여긴 것이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아첨을 떨었지만 유독 조형만은 내 체면을 세워 주려고 하지 않았소.]
조양동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장은 거친 무인이라 상관을 추켜올리는 데 능하지 못합니다. 결코 일부러 흠차대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탓하지 않았소.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대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 오. 나는 무릇 재간이 없는 사람들은 아첨을 떨어서 벼슬이 오르고 재 물을 긁어모을 수 있기를 바라고, 아첨을 떨 줄 모르는 사람들은 반드 시 어떤 재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위 대인께서 하시는 말씀은 정말 시원시원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장은 재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허풍을 치고 아첨을 떠는 것을 보면 울화가 치민답니다. 그리하여 상관에게 죄를 짓고 동료들과 언쟁 을 벌여 벼슬이 오르지 않았는데 이 모두 저의 황소 같은 고집 때문이 죠.]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가 아첨을 떨지 않는 것을 보면 반드시 재간이 있을 것이오.]
조양동은 입을 벌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를 낳으신 자 는 부모이지만 정말로 나를 아는 사람은 위 대인이라고 느껴졌다. 위소 보는 서재에서 주석을 베풀도록 분부했다. 두 사람은 대작을 하면서 환 담을 나누었다. 조양동은 자기의 내력을 말했는데 그는 협서성 사람이 었고 군대 출신으로,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등 공을 세워 부장에 올랐다고 했다. 위소보는 그가 전쟁에 능한 것을 알고 무척 기뻤다. (내가 과연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나.) 그는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산 위를 공격하는 방법을 물었다. 조양동은 병서를 읽지 않았으나 전쟁터의 오랜 경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위 소보가 묻는 말을 듣고 즉시 자기의 재간을 시험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많은 설명을 하면서 한창 흥이 나 서가에 꽂혀있는 사서오경 등의 책을 한권 한권 옮겨서 산봉우리와 산골짜기, 그리고 냇물이나 도로의 형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어느 곳에다 매 복을 하고, 어느 곳에서 공격을 하는척 가장하고, 어느 곳에서는 어떻 게 가로막고 나서며, 어떤 곳에서 돌격을 하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쌍방의 병력이 대등했을 때의 전법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위소보는 물었다.
[만약 적에게는 천여 명이 있고 우리에게는 오천 명의 병마가 있을 때 어떻게 공격해야 반드시 승리할 수 있겠소?] [싸움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병력이 적보다 몇 배 더 많을 때 만약 소장이 이끌고 싸운다면 그야말 로 필승입니다. 적을 모조리 사로잡아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지 않도록 합니다.]
위소보는 하인에게 수천 문의 동전을 가져오라고 해서 동전으로 병마를 삼았다. 그리고 조양동에게 진법을 펼쳐 보도록 했다. 위소보는 그의 말을 마음속에 기억한 후 그날 밤 그를 백작부에서 머물도록 조처했다. 그 이튿날 강희를 만나러 가서 서재에다가 똑같이 진을 쳐 보였다. 위 소보는 감히 함부로 서재의 책을 움직일 수 없어 조잡한 기구들을 가지 고 비슷한 규모를 만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강희는 잠시 동안 생각해 보더니 물었다.
[이 방법은 누가 그대에게 가르쳐준 것이지?]
위소보는 속이지 않고 조양동의 일을 이야기했다. 강희는 명주가 밤을 도와 스무 명이나 되는 털보 군관들을 천진에서 불러와 그에게 선택하 도록 했다는 말을 듣고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조양동에게 재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가?]
위소보는 털보가 아첨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 황상께서 소신을 천진으로 보냈을 때 저는 털보가 군사를 이끌 고 조련을 익히는 것이 퍽이나 흘륭하다고 생각하고 언젠가 오삼계를 상대로 군사를 사용하게 되면 이 털보가 대단한 인재가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느꼈습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오삼계를 상대하겠다는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니, 그 것 정말 장한 노릇일세. 조정의 그 늙은이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오삼 계에게 빌붙을까 하는 것만 염두에 두고 어떻게 뇌물을 받아 낼까 하는 점에만 신경을 쓰고 있단 말이야. 그 조양동은 지금 부장이라고 했으니 그대는 돌아가서 그에게 약속하게. 그의 벼슬이 오르도록 천거를 하겠 다고 하란 말일세. 그러면 내가 적절히 성지를 내려 그를 총병으로 올 려 그로 하여금 그대에게 빛을 지도록 하고 이후 진심으로 그대의 일을 도와 처리하도록 만들겠네.]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황상께서 신하를 돌보심에 있어서 정말 알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백작부로 돌아와서 조양동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며칠이 지 나자 병부에서는 과연 빙장(憑狀)을 보내 왔는데 조양동을 총병으로 올 리며 도통 위소보로 하여금 조양동을 지휘토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양동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는 속으로 이 젊은 상사를 따른다면 아 첨을 떨지 않아도 벼슬이 무척 빠르게 오를 것이니 이는 실로 인생에 있어서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다.
이 며칠 동안 조정 안의 대신들은 세 번왕이 성지를 받들어 번왕에서 물러나느냐 아니면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느냐 하는 소식에 귀기울 이며 모두들 속으로 불안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어느 날 위소보가 조양 동과 함께 백작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누가 뵙기를 청했다. 알 고 보니 바로 부마 오응웅이 자기 집으로 와서 주연을 함께 하자는 청 이었다. 손님을 청하러 온 그 심복은 말했다.
[부마께서는 오랫동안 위 대인을 뵙지 못해 매우 그리워하며 아무쪼록 위 대인께서 얼굴을 보여 주시기를 기다리십니다. 부마께서는 위 대인 이 중매를 서 주셨는데도 아직 술 한턱을 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제 부마 나으리는 유명무실한데 뭣하러 중매쟁이에게 사의를 표한다 는 것일까? 하지만 사의를 표하려 한다면 너희들 오가는 나에게 한잔의 술을 사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을 데니 한번 가 보는 것도 좋겠지. 그 바람에 돈이나 잔뜩 생긴다면 나쁠 것도 없지.) 즉시 그는 조양동과 효기영의 친위병들을 데리고 부마의 저택으로 갔 다. 오응웅과 건녕 공주는 혼례를 올린 이후 저택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먼젓번 잠시 거처하던 상황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오응웅은 몇 명의 군관들을 데리고 나와 대문에서 그를 영접하며 말했 다.
[위 대인, 우리들은 한집안의 형제와 다름없지 않소? 오늘 모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또 그렇다고 외부의 손님도 없답니다. 지금 운 남에서 몇 분의 친구들이 왔는데 그들로 하여금 조 총병을 상대로 술을 마시게 하면 될 것이외다.]
몇 명의 군관들은 서로 통성명을 하고 소개를 받게 되었다. 수염을 기 르고 겉모양이 위풍당당한 사람은 바로 운남의 제독 장용(張勇)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부장이었는데 매우 다부지게 생긴 사람의 이름은 왕진 보(王進寶)였고, 온화하고 공손하게 생긴 사람의 이름은 손사극(孫思 克)이라고 했다. 위소보는 처음 보는 왕진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왕형, 그대 이름에도 보 자가 들어 있고 내 이름에도 보 자가들어 있 소. 하지만 그대는 대보(大寶)이고 나는 소보(小寶)요. 우리 두 형제가 그야말로 보물 한 쌍이니 돈을 땄으면 땄지 잃지는 않겠구려.]
운남의 세 장수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위소보의 성질이 활달한 것을 보고 모두 좋게 생각했다. 위소보는 장용에게 말했다.
[장형, 지난번 형제가 운남에 갔을 때 어찌하여 세 분을 만나지 못했 소?]
장용은 말했다.
[그때 왕야께서는 마침 소장들 세 사람을 내보내 각 지방을 순찰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남에서 위 대인을 시중들지 못했지요.] [아! 무슨 대인이고 소장이오? 그러지 말고 시원스럽게 나는 그대를 장 형이라 부르고 그대는 나를 위 형제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형제들끼리 서로 잘 지내는 것이고 만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장용은 웃었다.
[위 대인께서는 그와 같이 말씀하시지만 저희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 니까?]
사람들이 웃으며 대청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집안 사람들이 차를 날 라왔다. 다른 하인이 다가와 오응웅에게 말했다.
[공주께서는 부마에게 위 대인을 모시고 들어와 뵙도록 하라고 하셨습 니다.]
위소보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공주를 만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옛날 그녀와 함께 운남으로 가는 동안 감미롭던 정경을 상기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은 신혼부부처럼 행세하지 않았던가? 그 런 일들을 떠올리자 그만 피가 끓어오르며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오 응웅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주는 종종 우리의 인연은 위 대인께서 만들어 준 것이니 반드시 크 게 한턱내어 사의를 표해야 한다고 하셨소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장용 등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편히 앉아 계시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위소보를 데리고 내당으로 들어갔다. 대청을 지나 한 칸의 상방 에 이르자 오응웅은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 대인, 이번 일은 반드시 그대가 도와 줘야 하겠소이다.]
의소보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생각했다. (고자가 되어 공주에게 남편 노릇을 할 수 없으니까 나보고 좀 도와 달 라는 것인가?)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건....이건....여간 겸연쩍은 일이 아니오.]
오응웅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만약 위 대인이 의리로 도움의 손길을 뻗쳐서 이 다급한 어려움을 풀 어 주지 않는다민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능력이 없을 것이외다.]
(틀림없이 공주가 그를 몰아세워 나에게 부탁을 하도록 한 것일게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나에게 반드시 도와 달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안 된다고 하겠는가?) 오응웅은 위소보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그가 도움의 손길을 뻗 쳐 주려고 하지 않는 줄 알고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 나 역시 매우 처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이 일이 성공하면 부왕과 형제는 위 대인이 우리에게 베푼 호의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어째서 오삼계마저도 나에게 고마워한다는 것인가? 아, 그렇구나. 오 삼계는 손자가 없으니까 나에게 그를 도와 손자를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이겠군. 그러나 손자를 낳고 못 낳는 것은 그 누구도 정확을 기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부마 나으리, 이 일은 자신이 없소이다. 왕야와 그대가 미리 고맙다는 말을 하는데, 만약 해내지 못하면 미안한 노릇이 아니겠소?] [상관없소이다. 위 대인께서 그저 힘만 써 주신다면 우리 부자는 똑같 이 고맙게 생각할 것이며 공주 역시 고마워 어쩔 줄 모르게 될 것이외 다.]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가 나에게 힘을 쓰라고 하는데 한번 써봅시다.]
그는 다시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성공 여부를 제쳐 두고 나는 반드시 입을 꼭 다물겠으니 왕야 와 부마 나리께서는 백이십 번이라도 안심하십시오.] [그거야 물론이죠. 누가 감히 조금이라도 누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 찌되었든 위 대인께서 도와 주셔서 일이 빨리 성사될수록 좋습니다.]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겠소?]
(아이쿠! 큰일났다. 내가 그를 도와 아들을 낳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들 부자 두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면 그들 온 가족이 몰살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내 아들마저도 단칼에 참수형을 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소황제는 건녕 공주까지 죽이지는 않겠지. 공주의 아들이라면 자연히 이런저런 면을 봐서 용서하실 수도 있겠지.) 오응웅은 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펴졌다 하는 것을 보고 한걸음 나서 며 나직이 말했다.
[부왕을 번왕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일은 아직 운남에 전해지지 않았소 이다. 장제독 일행도 모르고 있소. 만약에 위 도통이 서둘러 황상에게 말씀을 드려 부왕을 번왕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다는 명령을 거두어들이 고 육백리가급문서(六百里加急文書)로 운남으로 달리면 부왕이 번왕에 서 물러나도 좋다는 유시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오.]
위소보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대는....그대의 부왕이 번왕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렇소. 지금 그보다 큰일이 어디 있소? 황상은 위 대인의 말은 그야 말로 어떤 말이라도 듣는 편이 아니오? 그러니 위 대인이 나서야 기울 어지는 대세를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이외다.]
(나는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정말 웃긴다.) 그는 참을 수 없어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오응웅은 아연해졌다.
[위 대인께서는 어쩨서 웃으시오? 내가 말을 잘못했소?]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외다. 아니외다. 미안하오. 나는 갑자기 다른 우스꽝스런 일이 생 각나서 웃었소이다.]
오응웅은 얼굴에 노기를 띠고 이를 갈았다. (지금은 네가 기고만장하도록 놔두고 있지만 부왕이 파죽지세로 북경으 로 공격해 올 때 네 녀석을 붙잡아서 천갈래 만갈래로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성을 갈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부마 나리, 내일 아침 일찍이 나는 긍으로 들어가 황상을 뵈옵고 평서 왕은 황상의 존친(尊親)이니 가관진작을 시키지는 않는다해도 존친의 작위를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야말로 그것은 공주에게 미안한 노릇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소이다.]
오응웅은 무척 기뻐했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위 대인께서는 정말 머리가 빨리 돌아가십니다. 일시삼각에 마땅한 이유까지 생각해 내셨군요. 모든 것을 부탁드립니 다. 자, 그러면 우리는 공주를 뵈러 가도록 하지요.]
그는 위소보를 데리고 공주의 방 밖에서 뵙기를 청했다. 공주의 방에서 궁녀가 나오더니 위소보에게 방 옆의 화청(花廳)에서 기다리라는 분부 를 내렸다. 얼마 후 공주가 화청에 이르러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소계자,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나를 찾아와 주지 않다니, 죽고 싶은가? 빨리 이리 굴러오지 못하겠어?]
위소보는 인사를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공주께서는 그 동안 옥체만강하셨습니까? 소계자는 매일같이 공주님을 생각했습니다만 황상께서 저를 공무로 파견했기 때문에 나찰국까지 갔 다가 며칠 전에야 겨우 돌아왔습니다.]
공주는 눈가를 붉히며 말했다.
[그대가 매일같이 나를 생각했다고? 엉터리 소리. 나는....]
그러더니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위소보는 공주의 얼굴이 야위 었으며 신색이 초췌해진 것을 보고 그녀가 오응웅과 혼례를 올린 이후 외롭게 지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응웅이라는 녀석은 태감인데 태감에게 시집을 갔으니 즐거움이 있을 수 없겠지.) 공주가 그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옛날의 정이 끓어올라 측은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공주께서 황상을 염려하시고 황상께서도 공주를 염려하고 계십니다. 며칠 후 공주를 궁으로 불러들여서 남매의 정을 나누도록 하겠다는 말 씀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거짓으로 성지를 내린 것이었다. 강희는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건녕 공주는 이 몇 달 동안 부마의 저택에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위소보의 그 말을 듣자 매우 기 뻤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대가 황제 오라버니에게 내일 내가 그를 보러 가 겠다고 전해줘요.] [좋습니다. 부마 나리께서 한 가지 일을 저에게 부탁하여 내일 황상께 어쭈도록 하셨는데 나는 그때 황상께 청하여 공주를 궁 안으로 모시고 오라고 말씀올리지요.]
오응웅 역시 기뻐서 말했다.
[공주가 옆에서 도우면 황상께서는 반박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흥! 나는 그저 황제 오라버니와 일상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이지, 그대를 도와 국가대사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오응웅은 웃으며 말했다.
[좋소.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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