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은 자신의 주거공간에 명칭을 부여하여 삶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때로는 철학적인 의미를, 때로는 문학적인 의미를 더하여 수양과 풍류를 겸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강 용산에 있던 풍산 홍씨 집안의 정자 임한정과 그 인근의 건물에 부여한 이름과 그 의미를 보도록 한다.
정자의 이름을 임한정(臨漢亭)이라 한 것은 옛날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나의 5대조 회계공(晦溪公)께서 이미 임한정을 지었는데 고조부 수은공(睡隱公)께서 다시 한강 남쪽 압구리(狎鷗里)에 정자를 짓고 숙몽정(夙夢亭)이라 하셨다. 임한정과 마주하되 서로 보이지는 않았다. 임한정을 새로 짓고 편액을 옮기게 되어서는 마주 바라보이게 하여 서로 읍을 하는 것처럼 하고는 마침내 임한정의 남쪽 정자를 구몽정(鷗夢亭)이라 하고 또 그 남쪽에 있는 정자를 읍몽정(挹夢亭)이라 하였다. 모두 우리 조상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정자가 셋이 되었는데 내가 그 북쪽에 거처하면서 살던 방을 연경재(硏經齋)라 하였다. 연경재 위로 다락이 있어 책을 보관할 만한데, 이름을 부앙루(俯仰樓)라 하였다. 주자(朱子)의 <서루(書樓)> 시에서 “그립다, 천년의 마음이여, 올려다보고 굽어봄에 몇 칸 집이면 족하다네(懷哉千載心, 俯仰數椽足)”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1) 독서를 함에 벗의 도움이 없으면 편벽되고 고루하여 통창하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오른쪽 방 이름을 지숙료(止宿寮)로 하고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 또한 주자(朱子)가 무이정사(武夷精舍)에 붙인 이름이다. 벗들이 모이게 되면 유유자적하며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므로 그 마루 이름을 영귀당(詠歸堂)이라 하였다. 산수와 경적(經籍), 벗의 즐거움 이 셋이 갖추어졌다 하겠다. 그러나 가족의 도움이 없다면 또한 오래 편안할 수 없으므로 이 때문에 구몽정의 방 이름을 해은실(偕隱室)이라 하였다. 능히 함께 은거할 수 있으면 편안할 것이므로,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말로 그 오른쪽 방 이름을 이안와(易安窩)라 하였다. 해은실 서쪽은 다락방이 붙어 있어 조망하기에 맞지 않고 누워 쉬기에 적합하므로 그 이름을 의침실(欹枕室)이라 하였다.
구몽정은 세 정자의 한가운데 있는데 눈길 끝까지 구름과 모래밭, 돛배들이 물결에 어리비친다. 이곳은 강산의 경치가 가장 빼어나서 저녁에는 달빛을 구경하기에 더욱 알맞다. 이에 그 다락의 이름을 영범루(影帆樓)라 하고 그 마루를 징벽헌(澄碧軒)이라 하였다. 이안와 동쪽 다락은 함영루(涵影樓)라 하였는데, 강 가운데 모래가 쌓여 물이 나누어지다가 읍몽정 남쪽을 지난 다음에 물이 다시 합쳐져서 서쪽으로 흐른다. 물결이 더욱 호한하여 볼 만하다. 이에 그 왼쪽 방 이름을 관란실(觀瀾室)이라 하고 그 마루를 쌍류각(雙流閣)이라 하였다.
나는 임한정을 바깥처소로 삼고 구몽정을 안처소로 삼으며 읍몽정은 나를 알아줄 이를 기다려 이웃으로 삼고자 한다. 이에 도연명의 <남촌(南村)> 시에 나오는 말을 빌려 오른쪽 방 이름을 신석사(晨夕舍)라 하였다. 또 두보의 <양서(瀼西)> 시에 나오는 말을 취하여 쌍류각 왼쪽 조금 높다란 곳을 허좌헌(許坐軒)이라 하였다. 머물러 쉬면서 완상하는 즐거움이 여기에 이르면 대략 갖추어졌다 하겠다. 이미 즐겁다면 경계를 할 줄 몰라서는 아니 되기에 이 때문에 신석사 동쪽 다락을 연빙루(淵氷樓)라 하였다. 연빙루에 오르는 자는 왼편으로 용연(龍淵)을 볼 수 있고 오른편으로 서빙실(西氷室)의 나루를 바라볼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천길 높이의 끊어진 벼랑이 있는데 겁이 나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없다. 대개 깊은 물에 임하여 엷은 얼음을 밟듯 두려움이 생긴다.
나는 늙고 병이 들어 다시 속세로 들어갈 생각이 없다. 이 정자에도 우연히 깃들여 살 뿐이다. 그러나 나는 하루라도 죽기 전에는 감히 우리 선조를 잊을 수 없고 또한 감히 성현이 전해준 바를 잊을 수 없기에 이에 정자의 이름을 선조가 이름한 대로 하고 그 서재는 연경재라 하였다. 영귀당은 논어에서 취하였고 관란실은 맹자에서 취하였다. 부앙루, 지숙료는 주자에게서 취하였고 마지막에 ‘연빙’으로 경계를 삼았으니 이로써 나의 경계의 뜻을 편 것이다.
이름이 정해진 후 지나다가 물어보는 이가 있었다. “영귀당 앞에 문이 있는데 흘러가는 큰 강이 마치 그 밑에서 나오는 것 같으니 당신이나 객이 왕래하고 출입할 때 또 모두 이를 경유하게 되는데 이것만 이름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마침내 그 이름을 벽시문(碧柴門)이라 하였으니 두보(杜甫)의 <춘수(春水)> 시 “푸른빛이 사립문에 일렁이네(碧色動柴門)”의 뜻을 취한 것이다.
어떤 이가 또 말하였다. “이 정자가 이름을 얻게 된 것이 마침 19개입니다. 그 하나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대꾸하여 말하였다. “대연(大衍)의 수는 하나를 비워두지 않았는가요?2) 말을 막지 않는다면 또한 할 말이 있습니다. 주자가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12편을 지었는데 그 하나는 어정(漁艇)입니다. 내가 막 이 강에 와서 위로 단구(丹丘, 丹陽)로 거슬러 올라가고 아래로 열구(列口, 江華)로 물길을 따라 내려가 우연히 <창랑가(滄浪歌)>나 <겸가(蒹葭)>와 같은 은자의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어3) 노를 저어가서 우리 도를 강론한다면 당신은 나를 위해 배를 사서 문 밖에 매어둘 수 있겠는지요? 내가 장차 이를 문진봉(問津篷)이라 하지요.4)
1)《회암집(晦菴集)》에는 제목이 <산속의 서재[山齋]>로 되어 있다.
2)《주역(周易)》 <계사(繫辭)>(상)에 "대연의 수가 오십이요 사용하는 것은 사십구이다.“라 하였다.
3) <창랑가>는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어부의 노래이며, <겸가(蒹葭)>는 《시경(詩經)》 <진풍(秦風)>에 실려 있는 은자의 노래다.
4) 원문에 ‘달빛 일렁이는 배(漾月之舫)’로 된 데도 있다고 하였다.
- 홍석주, <임한정의 역사(臨漢亭後記)>(《연천집(淵泉集)》권19)
<해설>
임한정(臨漢亭)은 홍석주의 5대조 홍중기(洪重箕)가 한강가에 처음 지은 정자다. 스승 송시열(宋時烈)로부터 편액을 받아 걸었다. 그 후 홍중기의 아들 홍석보(洪錫輔)가 1720년 강 남쪽 압구정 동쪽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정자를 새로 짓고 편액을 숙몽정(夙夢亭)이라 하였으나 정자를 완공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30년이 지난 1749년 홍석보의 아들 홍상한(洪象漢)이 숙몽정을 완공하고 장인 어유봉(魚有鳳)으로부터 기문을 받은 바 있다. 그 기문에 따르면 홍석보가 스무 살 때 꿈에 재상에서 물러나 강가에 이르러 “봄이 온 강물은 곱고도 깨끗한데, 봄날의 물결은 맑아 울음소리 없다네. 한강의 나루에 무한한 달빛 아래, 돌아가는 배가 강물을 치네(春水娟娟淨, 春波澹不鳴. 漢津無限月, 歸棹泝空明.)”라는 시를 지었다. 그후 10년이 지난 후 우연히 능허정(凌虗亭)에 올라보니 꿈속에서 본 바와 같아 그 땅을 사서 정자를 세우려 하였다고 한다.
또 위의 글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후 홍상한은 임한정이 허물어지자 이를 철거하고 숙몽정 동쪽에 다시 고심정(古心亭)을 짓고 숙사(塾師)였던 정내교(鄭來僑)가 지은 기문을 걸었으며, 다시 그 앞쪽에 세 칸의 서재를 지어 망기재(忘機齋)라 하고 안중관(安重觀)으로부터 기문을 받아 걸었다. 홍낙명(洪樂命)의 <제숙몽정벽(題夙夢亭壁)>이라는 글에 따르면 숙몽정은 10여 칸이 되는 건물이었다 한다.
다시 세월이 흐른 후 그 후손 홍현주(洪顯周)가 쌍포(雙浦)의 서쪽에 땅을 구입하여 정자를 새로 짓고 임한정이라는 편액을 다시 걸었는데 원래 임한정이 있던 곳에서 수 백보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 남쪽에 구몽정(鷗夢亭)과 읍몽정(挹夢亭)을 다시 지었는데, 숙몽정의 뜻을 이어 정자에 모두 몽(夢)자를 넣었다.
홍석주는 이외에 다시 연경재(硏經齋), 부앙루(俯仰樓), 지숙료(止宿寮), 영귀당(詠歸堂), 해은실(偕隱室), 이안와(易安窩), 의침실(欹枕室), 신석사(晨夕舍), 허좌헌(許坐軒), 연빙루(淵氷樓), 영범루(影帆樓), 징벽헌(澄碧軒), 함영루(涵影樓), 관란실(觀瀾室), 쌍류각(雙流閣), 벽시문(碧柴門), 문진봉(問津篷) 등 17곳과 함께 도합 20곳에 각기 이름을 부여하였다.
부앙루와 지숙료는 주자의 뜻을 따른 것이요,5)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남창에 기대어 고고히 즐기니, 무릎이나 들일 작은 집이 편안 쉬기 좋다네.(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 한 데서 이안와라 하였고, <집을 옮기고서(移居)>의 “깨끗한 마음 간직한 사람 많다고 하니, 아침저녁으로 자주 만나 즐기려 함이라(聞多素心人, 樂與數晨夕).”에서 신석사의 이름을 붙였다. 허좌헌은 두보의 <간오낭사법(簡呉郎司法)>에 “문득 친척들이 지나다 만날 곳으로 삼아서, 높은 다락에 앉아 자주 근심을 풀게 하노라(却爲姻婭過逢地, 許坐曽軒數㪚愁).”에서 온 것이고, 벽시문은 두보의 <춘수(春水)>에서 “아침에 모래언덕까지 묻히더니, 푸른빛이 사립문에 일렁이네(朝來没沙尾, 碧色動柴門).”에서 딴 것이다. 《논어》에서 “늦은 봄 봄옷이 이루어지면 아이 6-7명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쏘이고 읊으며 돌아오리라(莫春者, 春服旣成, 冠童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咏而歸).”라 한 데서 영귀당의 이름을, 《맹자》에서 “물을 관찰하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여울을 보아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이라 한 데서 관란헌의 이름을, 《시경(詩經)》에서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에서 취하여 연빙루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그 나머지도 이 글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출처가 있는 것이 더 있다. 해은실(偕隱室)은 포선(鮑宣)이 그 아내 환소군(桓少君)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는 고사를 취한 것이고, 문진봉(問津篷)은 《논어》에서 공자가 자로(子路)로 하여금 나루를 묻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취한 것이다. 연경재(硏經齋)는 완원(阮元)의 호로 유명하거니와 경전을 연찬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 학자들이 좋아하던 말이다. 의침실(欹枕室), 영범루(影帆樓), 징벽헌(澄碧軒), 함영루(涵影樓), 쌍류각(雙流閣) 등은 시어로 자주 쓰이는 말로 운치와 여유를 더한 표현이다.
조선의 학자는 이처럼 주거공간에 명칭을 부여하여 삶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홍석주의 이 글 한 편으로도 이러한 선비의 전범을 확인할 수 있다.
5) 주자는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에서 정사(精舍)ㆍ인지당(仁智堂)ㆍ은구재(隱求齋)ㆍ지숙료(止宿寮)ㆍ석문오(石門塢)ㆍ관선재(觀善齋)ㆍ한서관(寒棲館)ㆍ만대정(晩對亭)ㆍ철적(鐵笛)ㆍ조기(釣磯)ㆍ다조(茶竈)ㆍ어정(漁艇) 등을 두고 12수 연작시를 지은 바 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예전에 안동 낙동강 인도교 지나 언덕에 있는 영호루에 자주 놀러간 생각이 납니다. 선비들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과 멋을 느껴볼 수 있는 글이네요.. ^.@)
전 예전 울산 천전리 암각화 앞 개울 사이에 널찍하게 자리한 바위가 참으로 탐이 났었어영 마치 천렵하기 딱 좋은 자리라는 느낌을 무지 받았걸랑요 ㅋㅋㅋ
다산 선생도 "잘 나갈 때(곧 서울같은 대처에 있을 때) 한가한 시골에 집을 마련하고, 못 나갈 때(곧 한가한 시골에서 곤궁하게 있을 때) 대처에 나아가 견문을 넓히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곰곰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