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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3박 4일
글/김덕길
-휴가 1일차.
폭양에 시름시름 앓는 제주가 들썩였다.
펜션 예약 마감, 휴양림 통나무집 및 야영장 예약 마감, 민박 예약 마감, 제주는 온통 마감 투성이였다.
50여일에 걸친 중부지방의 장마는 사람들의 휴가를 8월 1일로 집결시켰다.
영동고속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할 때 경부고속도로의 차량은 늘어선 줄의 끝이 없었고 남해안 구석진 도로에도 차가 줄을 이었다. 벼 포기 사이 김을 매던 할아버지가 밀짚모자를 추켜올렸다.
“아따 뭔일이다냐? 차들이 징허게 많네잉”
해운대 인파가 50만 명을 넘을 때 제주로 들어오는 항공기 대부분은 빈자리가 없었다.
서울에서 남해까지 자가용으로 하루 종일 운전해서 가는 것 보다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제주도를 젊은이들은 선호했다.
라디오에선 올 휴가 비용이 20만 원 선이면 좋겠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아내가 휴가를 제주에서 보내겠다고 제주에 사는 나에게 연락했다. 표가 없을 거라는 나의 말에 아내도 이에 질세라 한 달 전에 예약을 했다. 나는 제주에 있고 아내와 대학생 아들은 용인에서 살고 있다. 떨어져 산지 반년이 되어간다. 좀 아끼려고 제주에서 사는 데 더 쓰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아내는 나보고 방을 잡으란다.
이미 펜션이나 호텔은 비싼 곳 빼곤 마감이다. 모텔이나 텐트를 선호했지만 취사도 해야 하고 샤워도 해야겠기에 아무 곳이나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성산 일출봉근처에 민박을 얻었다. 해룡민박이다. 세 명 하루 민박 55,000원이다.
트럭을 몰고 가족을 태우러 공항에 도착하니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한쪽 길가에 대기하고 있는데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차를 급히 대고 가져온 가방을 실었다.
혼자 사는 나를 위해 아내가 한 것은 반찬을 만들어오는 것이었다. 멸치 반찬에 열무김치, 마른반찬을 민박집에 꺼내놓으니 푸짐하다.
민박집은 없는 것이 없었다. 호텔 부럽지 않았다.
제주에 오면 회는 먹어봐야겠고 흑돼지도 먹어봐야 제주에 왔구나! 한다는데 민박에 눌러앉아 밥이나 해먹자고 하면 얼마나 섭섭해 할까?
우리는 성산 맛집을 검색해서 결국 한군데 횟집을 찾아 갔다. 일출봉 주차장 앞 삼거리에 있는 식당이다. 광어 10만원 이란다.
식당에 사람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과연 10만원의 가치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107,000원이 나와서 현금으로 계산을 하는데 7,000원을 깎아준다.
배불리 먹고 나니 시간이 밤 아홉시를 넘었다.
우리는 산책도 할 겸 암흑속의 성산일출봉을 걸었다. 정상에 오르기는 너무 늦어서 일출봉 아래 보트 타는 곳으로 갔다.
바다에 나간 오징어잡이 배에서 쏟아내는 빛은 바다의 물마루를 타고 뛰어오더니 성산일출봉 해안 단애에 부딪혔다. 일출봉 절벽이 한껏 드러났다.
일출봉의 해안단애가 받은 빛을 거침없이 토해낼 때 맞은편 절벽은 암흑이었다. 빛을 등지고 있는 절벽은 얼마나 어두운지 먹빛이었고 그 빛은 죽은 빛 이었다. 저렇게 검은 먹빛을 본적이 있는가 생각해 봤는데 기억을 못하겠다. 바람은 시원했고 사람이 없는 바다는 적막했다. 적막은 고독과 친구여서 자정이 되면 우울증처럼 번진다. 적막이 멀미할 때 멀리 우도의 등댓불이 멀미를 받아주었다. 성산포에서 딱 한 달만 살겠다던 시인 이생진님의 그리운 성산포가 나를 멀미나게 했다.
이 죽일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
.
.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
.
.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 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시를 찾아 읽는 나의 눈동자가 뜨겁다.
민박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누웠는데 선풍기가 필요 없었다. 창 밖에서 부는 바람은 선풍기보다 시원했다. 우리 가족은 내일일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휴가 2일 차
아내는 성산일출봉을 오르겠다고 큰소리치더니 결국 늦잠을 자고 아침식사를 차린다는 핑계로 오르지 않았다.
나와 아들은 차를 가지고 백약이 오름을 올랐다.
오름으로 오르는 계단은 소가 장악해서 계단은 쇠똥으로 가득 찼다.
방목해서 키우는 소나 말의 똥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풀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똥에서는 잘 익은 풀냄새가 났다.
똥은 선 채로 소나 말의 엉덩이에서 떨어지는 것이라 그 낙차가 크다. 엉덩이에서 빠져나온 똥이 바닥에 떨어져 부딪힐 때 바닥에서는 철퍽하는 파열음이 났다.
나는 소의 똥에서 나뭇잎을 발견했고 꽃봉오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선사시대의 아련한 빗살무늬를 발견했다. 어쩌면 빗살무늬 토기가 소의 똥에서 착안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들이 소가 커서 무섭다고 물러설 때 나는 앞으로 나가 소를 몰았다. 소는 길을 비켜주었다. 어릴 때 소를 몰고 방죽으로 가서 소의 풀을 뜯길 때 나는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내 미욱한 노래가 방죽의 물무늬에 점점이 퍼질 때 방죽의 물은 노을을 안고 흔들렸다.
아침 식사는 민박집에서 해 먹었다.
아내가 만든 반찬으로 밥을 먹은 지가 얼마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아쿠아플라넷으로 출발했다. 잠수함을 타고 물속을 들여다보는 거나 표를 내고 수족관 안으로 들어가서 들여다보는 거나 훔쳐보기는 마찬가지 같았다.
인간은 인간의 눈으로 물속을 훔쳐보고 싶었고 물속의 고기들의 언어를 훔쳐보고 싶었고 고기들의 사랑 놀음을 훔쳐보고 싶었다.
인간이 인간의 속살을 훔쳐보려 한다면 성희롱으로 단정 지을 테지만, 인간이 물고기를 훔쳐보는 것은 인간의 법으론 무죄였다.
나는 물고기의 희한 얄궂음 보다는 수족관의 크기에 감탄했다.
영화관 화면보다 더 큰 수족관속에서 물고기들이 높이에 따라 각자 영역을 차지할 때 물갈퀴를 찬 사람은 높이를 모르고 오르내렸다. 지금만큼은 저 사람도 물고기가 아닌가 싶었다.
수족관 터널에서 고기떼가 아수라를 이룰 때 사람의 눈동자는 혼이 나간 듯싶었다.
수중 공연을 한다기에 우리는 우르르 몰려가 공연을 보았다.
물속에서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싱크로나이즈라고 하는 듯싶었다.
공연은 어설펐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수영도 못하는 내가 그들의 춤을 허전함으로 치부하는 게 얼마나 옹졸한 것인지 글을 쓰면서도 미안했다. 물 위에 줄을 매달아 동춘 써거스 단원 몇 명을 데려다 아리랑 음악에 맞춰 혼을 빼는 공연을 펼친다면 애국심이 절로 우러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것은 단지 나만의 생각이니 만인의 생각은 아닐 것이었다.
우리는 구경을 하고 김영갑 갤러리에 들렸다.
제주가 좋아 제주에서 뼈를 묻고자 했던 사진작가 김영갑님의 생애는 아프고 먹먹했다.
좌보미 오름을 오르며 용눈이 오름을 오르며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아직도 오름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그의 말은 하나마나 한 말이었다. 나조차 나를 모르는데 어찌 너를 이해하랴.
그의 대부분의 사진은 풍경이었다. 나는 풍경이 아닌 사람을 찍고 싶다.
사람이 풍경이 되고 풍경이 사람이 되는 사진을 찍고 싶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반겨주는 것이 있었다.
양철 판지를 원피스처럼 입고 굴뚝 환기통을 모자로 만들어 쓴 소녀가 하는 말이 감동이다.
-외진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진 곳…….
소설가 신경숙이 ‘외딴방’을 쓰면서 구로공단의 척박한 공장 근로자의 삶을 노래할 때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을 썼다.
김훈의 자전거가 전국의 외진 곳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며 ‘자전거 여행’을 쓸 때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 를 썼다.
나는 ‘노점일기’를 쓰면서 소설 ‘전봉준’을 쓰면서 외진 곳을 어루만졌다. 내 어루만짐의 깊이가 그 끝을 닿지 못해 몸 밖에서 겉돌 때 김영갑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을 향해 억새처럼 손짓했다. 그의 절박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아직도 갤러리에는 많은 이들이 방문한다. 이제 그곳은 더는 외진 곳이 아니다.
민박집에 들어와 라면에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해수욕을 하러 나갔다.
종달리 해수욕장이다.
그늘이 있고 사람이 적고 파도가 잔잔해서 사람이 놀기에 안성맞춤인 곳, 우리는 그곳에서 영화 파라다이스와 푸른 산호초를 노래했지만, 내 젊은 날은 이미 20년 전이었기에 나는 나보다 젊은 신혼들의 풋풋함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폭양에 피부가 탈까 봐 선글라스에 수건에 토시에 수선을 떠는 걸 보면 이러는 내가 우습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다.
그렇지만 모처럼 원 없이 놀았다. 튜브와 십오 년 전에 산 파도타는 기구는 우리를 물에 뜨게 해 주었다.
두어 시간을 놀고 우리는 집에서 샤워한 후 한밤의 성산일출봉을 올랐다.
해가 없는 일출봉은 한적하고 좋았다. 바람도 시원했다.
일출봉에 올라가 늦은 밤 일몰의 여운을 느끼는 우리는 이상한 가족이 맞는 것 같다.
일출봉에서 내려와 흑돼지 구이를 먹고자 했지만, 시간이 밤 아홉시가 넘어서 영업장은 이미 끝나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무뼈 닭볶음을 사서 맥주에 지친 더위를 식혔다.
-휴가 3일 차
제주에 10번 이상 오면 딱히 새로울 것이 없다.
우리는 최대한 그동안 가지 않은 곳을 향해 갔다. 아침을 먹고 민박집 예약이 끝나서 방을 비워주었다.
작가 김영갑이 그토록 자주 오르내렸다는 용눈이 오름을 향했다.
신혼 때 다랑쉬 오름을 올랐었다.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애잔하기에 용눈이 오름도 나름 기대를 했다. 바로 근처이기 때문이다.
거문 오름이 밀림 숲이라면 용눈이 오름은 온통 초원이다.
알프스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봉우리 두 개가 솟아 있고 아래로 능선이 이어져있는데 거침없는 초원과 뻥뚫린 시야가 다시 보면 무릉같고 다시 보면 천상같았다.
정상에 올랐다. 바람이 가녀린 풀잎을 하염없이 건들었다. 멀리 성산 일출봉이 우뚝하다.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오름 아래로는 들과 평야와 산이 어우러져 온통 초록물결이다.
시야에 잡히는 곳에 신식 건물은 없었다. 모두가 자연이었다.
한라산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보면 온통 점으로 보이지만 이곳은 높이가 낮아 세상이 뚜렷하다.
솔 오름이 숲속의 아기자기함을 즐긴다면 용눈이 오름은 초원 자체를 즐기면 원이 없겠다.
나는 오름에서 무한한 감동을 느꼈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가슴이 벅차서 이제 가슴 안에 오름을 숨겨 놓으련다.
가려거든 꼭, 흐린날 어둠이 이슥하기 전, 아니면 이른 새벽에 올라가 보라. 모든 풍경 그 중심엔 언제나 빛이 있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서 날씨에 따라서 풍경은 변한다.
가는 길에 성읍 민속마을을 들렸다.
제주 전통 초가와 마을은 너무 좋은데 여기저기 해설사의 말과 판매점은 장삿속이 보이는 것 같아 좀 씁쓸하다.
점심은 서귀포 보목 마을의 어진이네 횟집으로 향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맛있다고 해서 찾아간 집이다.
한치물회를 시켰다. 1인분이 12,000원이다. 한치는 거의 보이지 않고 채소만 가득하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 그런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들은 맛있단다.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사람은 많은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라는 말이 실감난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내가 자주 가서 잠을 자는 보목동 근처 소천지로 갔다.
바닷가에 있는 백두산 천지이다. 나는 너무 좋아서 노래를 불렀던 곳인데 아들과 아내는 갸우뚱한다. 거기에서 물놀이를 즐기자 했지만 파도가 심하다고 나가잔다.
방파제의 여인을 찍었던 자리인데 아내는 해가 뜨겁다고 방파제에 내려가기 싫단다.
다시 소정방 폭포로 차를 몰았다. 더위를 피해 서귀포 주민들이 폭포를 몸으로 맞던 곳이다. 폭포 속으로 들어가자는 나의 말에 아들이 주저한다.
내가 먼저 들어가 물 폭포를 온몸으로 맞았다. 얼마나 시원한지 명치끝이 얼얼하다.
아들이 그제야 들어온다. 폭포수의 물은 시릴 정도로 차갑다. 우리는 원 없이 폭포를 맞았다. 소정방 폭포는 정방 폭포에서 올레 6코스를 따라 남원쪽으로 10분만 걸으면 바닷가에 있는 작은 폭포이다. 물론 무료다.
차는 다시 돔 배낭골을 향했다.
돔 배낭골 바닷가에도 폭포가 있는데 이미 샤워를 해서 그곳까지는 가지 않았다.
오늘의 잠자리는 서귀포 자연휴양림에서 텐트를 치기로 했기에 우리는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소나기가 퍼붓는다. 폭포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데 다시 소나기를 뚫고 텐트를 치기에는 영 내키지 않았다.
표를 끊고 차를 휴양림 안으로 몰았다. 길이가 매우 길었다. 중간에 텐트를 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우리는 중간에 차를 세우고 전망대까지 걸었다.
우거진 숲을 따라 통나무 데크가 연결되어 있고 그 중간에 전망대가 있었다. 안개비에 갇힌 전망대는 신비스러웠다. 마치 우리가 구름위에 뜬 기분이었다.
아내는 차에서 자고 아들과 나는 걸었다. 아들은 아들과 아내의 다툼을 나에게 이야기했고 나는 그 다툼을 해결하지 못했다.
서귀포 휴양림은 오래오래 걸으면 좋을 듯싶었다.
내려오는 길에 잠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수박을 먹었다. 앞에 버스가 한 대 서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내려왔다.
버스를 집으로 개조해서 전국을 떠도는 여행자란다.
나비를 수집해서 사진을 찍는 게 취미란다. 낚시도 못하고 산행도 못하고 약초도 모른단다.
부부가 다니는데 제주에 온지 보름정도 되었단다.
나는 자꾸 어딘가 찾아다니는 게 취미라면 취미인데 그 아저씨는 나비와 곤충을 찍는 게 취미라는데 나랑은 틀려도 너무 다른 취미이다. 세상에서 가장 심심한 취미라고 내가 말했더니 그분도 수긍을 하면서 박장대소한다.
마지막 저녁이라 오늘은 흑돼지를 먹기로 했다.
우리 가게에서 강냉이를 팔아준 새섬갈비 식당에 들어갔다. 서귀포에서 갈비집으론 아마 제일 맛있지 않을까 싶다. 생오겹살 2인분에 양념갈비를 시켰다. 후식으로 냉면을 먹고 있는데 식혜를 한 병이나 주신다. 밥을 먹고 새연교에 들렀다.
섬과 섬을 연결한 다리인데 서귀포의 명물이다. 야경을 보고 싶었는데 야경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부산 광안리의 광안대교야경은 너무나 화려해서 별로고 이곳 새연교는 너무 어두워서 뭔가 부족해 보인다. 인천대교의 야경을 보라 얼마나 은은한가.
새연교는 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연결한 다리와 비슷하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의도에 들려서 그 다리를 걷고 소무의도 둘레길을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어촌의 아름다운 풍경이 심금을 울려서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월드컵 경기장 아래 찜질방에 들어가는데 축구 경기를 하고 있다.
철근 벽에 매달려 한참동안 축구 경기를 보았다. 조명과 사람의 함성과 축구선수의 박진감이 서귀포를 달구었다. 찜질방은 잠을 재우긴 했지만 찜질 기능은 포기했는지 가장 뜨거운 방의 온도가 33도이다. 우리는 샤워를 한 후 선풍기 앞에 자리를 깔고 잠을 청했다.
몇 번 깼지만 아침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휴가 4일 차
벌써 마지막 날이다.
에어컨이 되지 않는 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
낮에 공항에 가야 비행기를 탈 수 있기에 우리는 서둘러 출발했다.
중문 색달 해변에 잠시 들렸다.
파도타기를 하는 젊은이들이 마냥 신기했다.
색달 해변의 파도는 모래를 움켜쥐고 밀려왔다 내려가는 것이라서 모래는 파도 안에서 뒤집어졌고 뒤집힌 모래가 다시 기어올랐다.
해변 위로 하얏트 호텔 건물이 보이고 근처에 쉬리의 언덕이 보였다. 제주는 어디를 가나 아름답다. 정말 말은 경마장으로 보내고 사람은 제주로 보내라는 신조어가 틀린 말은 아닐 성 싶다.
선인장이 가득한 마을을 구경시켜주고자 했는데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곳을 가리켜서 지나치고 말았다.
협제를 지나 곽지 과물 해변을 내려서 돌아보고자 했는데 역시 지나쳤다.
모슬포 부두식당에 잠시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오토바이 일주 때 폭풍 검색으로 찾았던 부두식당은 우럭 매운탕이 7,000원인데 우럭을 두 마리나 주었다. 난 너무 맛있어서 다시 찾았다.
역시나 맛있다. 다른 요리도 많이 저렴하다. 맛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고 서빙 하는 연변 아가씨의 미소도 정겹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내년 봄 까지는 제주에 나는 머물러야 하고 가족은 용인에 계속 살 것이다.
전생에 역마살이 끼어 어디든 떠나야만 떠날 자리가 내 자리인가 싶어서 나는 돌아다녔다. 그러나 사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이미 머물기로 했으니 나는 제주에서 견딜 것이고 아내와 아들 또한 용인에서 견딜 것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견딜 테지만 견딘다는 것은 단단해지는 것일 테니 우리 이제 많이 단단해 지자. 세파에 내 놓아도 넘어지지 않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일어서거든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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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역마살이 끼었는지 지금껏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
가끔씩 찾아오는 정기휴가 때 나 가족을 만나볼까나 . 다음주면 한국에 가네요 ~ 루루라라 쿠웨이트 현장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