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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2017년 국가 브랜드 1위 독일
국가브랜드 순위
국가 브랜드는 국민, 기업, 민간활동을 향상시킬 수 있고,
국가의 국가 홍보와 관리 등으로 인하여도 향상될 수 있다.
국가 브랜드는 한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대 소비자 감성을 자극하는.,브랜드/이미지.
기업 마케팅은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광고 등의 행위로써 나타나며 그것으로
상품 가치 및 경쟁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품질과 디자인의 제품이라도,
브랜드가 떨어지는 기업 및 국가 생산제품보다
국가 브랜드가 높은 국가 제품이 경쟁력이 높다.
국가 브랜드는 국가적 차원에서 경쟁력을 의미한다.
또한 국가 관광 수입 증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Made in USA, Made in JAPAN, Made in KOREA 등.
'우리나라 국가 브랜드는 무엇일까?'
2017년 '국가브랜드 대상'
스포츠 부문 수상., 박인비
2015년 국가브랜드 대상.,김수현 & 김연아.
일월오봉도.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에서
5번 출구 방향으로 걷다보면
'국립 고궁박물관'으로 가는 길.
고구려 고분벽화
일월오봉도.
'경복궁역 5번 출구 방향' 불로문을 지나면
사실 상, 여기서부터 시작되는.,고궁 박물관.
고궁박물관 내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겸 카페 '고궁뜨락'을 지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기기에 적당
호젓하게 산책하기 좋은 코스이다.
탁 트인 넓은 녹지 공간이 시원하다.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릴 국가 브랜드가
다양하게 전시되어야 할.,여백의 공간 같다.
장차, 이곳 미완성의 공간은 어떻게 채워질까?
고궁박물관 내 녹지 및 야외공간은
아직 다른 용도로 쓰일., 미완성 공간.
경복궁과 담 하나 사이에 둔.,고궁박물관.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면.,고궁박물관.
광화문 안, 고궁박물관은 경복궁 곁에 있다.
고궁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일월오봉도>.
'일월오봉도'는
조선왕조 519년간
국가의 브랜드이자
역대 조선 왕의 상징.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러한 사실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일월도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건국에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실 문화유산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경복궁이 대원군에 의해 103년 만에 중수된 이후
1970년 6월에 단장된 비원에 이어 경복궁 중수 착공.
근정전 용상 뒤.,일월도는 모조품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광화문 담장 안에 있어,
이곳에 가면, 조선시대에 와 있는 것 같다.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12 (휴관일 월요일)
조선 왕조 계보의 주인공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조선 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09:00~18:00(주말, 공휴일은 한 시간 연장, 운영).
특히,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은
519년 조선역사의 굴곡이 담긴 궁궐.
인근 세종마을 서촌 수성동계곡을 비롯
조선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세종대왕 재위 당시 유감동 사건.
성종 & 어우동.
연산군.,경회루 & 흥청망청.
조선 개국 초 2차례 '왕자의 난'을 비롯해
구한 말, 명성왕후(민비)가 살해된 곳이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경복궁 집현전.
세종 재위 당시 유감동 사건
성종 재위 당시 어을우동 사건.
연산군 당시 경회루 흥청망청 등.
숙종 & 장희빈.,향원정.
이곳 고궁박물관에서는 사극에 등장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먼저 눈에 보이며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어좌 뒤편에 위치한 병풍.
고궁박물관., 오봉일월도
하늘 땅 바다
우주 삼라만상
중심에 있는 왕
'三 + I = 王'
만약, 왕이 없다면
우주 삼라만상은 병풍일 뿐이다.
왕이 있어야 만 완성이 된다는.,오봉일월도.
.................
.................
한자어 그대로 해와 달,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그림.
왕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그림.
그 옆으로는 어보, 어책, 교명이 있다.
모두 국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어보는 왕실 권위를 나타내는 의례용 도장.
어책은 누군가를 책봉할 때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
책봉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기록하고 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곤룡포도 전시되어 있다.
곤룡포는 1444년부터 조선 말기까지,
왕이 집무할 때 착용하였던 의복이다.
고궁박물관.,곤룡포.
곤룡포를 입을 때는 허리에 옥대를 두르고,
가죽에 옻칠해 만든 검은색 익선관을 썼으며
'목이 긴 신발'인 목화(木靴)를 신었다고 한다.
역대 왕들의 필적을 모은 책과
족보인 『선원록』도 눈에 띈다.
조선은 1897년을 기점으로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이후
새로운 국호를 가지게 된다.
'대한제국과 황실실'에서는
이러한 변화상을 볼 수 있다.
1층 로비에는 순종 황제와
순종효황후의 어차도 전시.
특히, 아이들과 봐야 할 유물.,'자격루'.
'스스로 치는 시계'라는 뜻인 자격루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장영실이 완성한 것.
'천문과 과학 2실'에서 이를 재현해놓았다.
실제 원리대로 만들어져,
매 시간마다 자격루가 작동.
현대 시계와 비교해 1~3분 오차.
'왕실의 회화실'에는 궁중 회화인 어진(임금의 초상화),
궁중 기록화, 병풍, 장식 벽화, 궁궐도, 지도 등을 전시.
이외에 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이
여가나 취미활동으로 그린 그림과
감상 목적 소장품인 명작들도 있다.
'궁중의 음악실'에서는 각종 의례가 행해질 때
사용한 축, 나각, 태평소, 절고 등 악기들도 있다.
카페 레스토랑 '고궁뜨락'에서 음식도 먹을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다른 박물관에 비해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경복궁이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 때문.
조선 왕조는 1392년 제1대 왕 태조에서 시작되어
1910년 순종을 마지막으로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되었고 계보도 속에 실타래처럼 이어져
어느 왕후의 자손이 보위를 이었는지 등을 볼 수 있다.
선조 어필.
숙종 어필.
영조 어필 & 홍삼.
영조는 생부 숙종의 어필을 물려받았고
무수리 어머니로부터 건강을 물려받았고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했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손자 정조에게 양위한 왕.
정조 어필.
'숙종, 영조' 선왕의 어필을
잘 이어 받았다는.,정조 어필.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일월오봉도’는 어진 뒤에 배경으로 그려
왕의 권위와 존엄성을 상징하는 그림이며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고종황제어진>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화.
옥좌에 앉은 고종 황제 뒤로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제작한 본래 목적은
궁중(宮中)의 기록화(記錄畵)를 그리게 되어있는데
왕의 얼굴을 용안(龍眼)이라하여 매우 신성시 했는데
용안을 그려 놓았다가 훼손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옥좌 또는 어진 뒤에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후, 차차 이 그림을
군주의 상징으로 여기었고
관례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일월오봉도는 왕의 상징물로 관례화 되어
왕과 관련된 곳은 어디든지 이 그림이 등장했다.
조선 후기에는 민화의 범주에서 병풍에도 등장했고
일상 생활 소품에 장식 용도로서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근정전 천정.,칠조룡.
경복궁 근정전 천정에 보면.,'7발가락' 칠조룡.
근정전 뒤의 사정전에는 발가락이 넷 달린 용.
백자청화구름용무늬항아리 용은 발가락이 3개.
중국 황제는 5발가락 5조룡.
중국 제후는 4발가락 4조룡.
중국 세자는 3발가락 3조룡.
원래, 조선은 청 황제의 제후로 여겨
사정전 일월오봉도 위 천장 용 그림에
'4 발가락' 사조룡(四爪龍)을 그려 넣은 것.
그러나, 고종 때 중건한 근정전에는 칠조룡(七爪龍).
중국 황제를 뛰어넘는 당당한 황제로서 위엄을 보인 것.
대한제국 선포 후, 청 연호를 따르지 않고 독자 연호를 사용.
붉은색 곤룡포가 아닌 황룡포를 입은 것도 같은 맥락.
칠조룡을 보면서 고종황제의 당시 모습을 되새겨본다.
왕이 살아계실 때의 모습을 그린 어진의 배경에는
장막을 드리우거나 일월오봉도를 그리는 것이 상례.
일월오봉도는 오직 어진 뒤에만 그릴 뿐
황태자의 초상화 뒤에는 설치하지 않는다.
경복궁 내 어좌 뒤의 병풍에 그려진 오봉일월도는
조선 건국과 함께 만들어졌으며 왕의 자리를 상징.
이성계가 고려 말 조선 건국의 <명분>을 얻기 위해
전국의 명산을 찾아 기도했다는데 마이산에 이르러
산신이 꿈에 나타나 '금으로 된 자'금척(金尺)를 주며
"이 자로 삼한의 영토를 헤아려 보라"고 말했다 전하며
그래서, 마이산이 <일월오봉도>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
또는 야외 행사 때에는 천막 안의 옥좌 뒤에,
국왕의 사후에는 빈전(殯殿)에, 진전(眞殿)에는
초상화 뒤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병풍 .,일월오봉도.
4첩, 8첩, 혹은 좁은 한 폭 짜리 협폭(挾幅),
또는 삽병(揷屛) 형식 등 형태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국왕의 일상생활이나 궁중의 각종 의례에서
오봉병(五峯屛)이 차지하는 막중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 도상(圖象)이나 그 유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몇몇 학자들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천보(天保)
시에 묘사된 5종류의 산봉우리, 즉 산(山), 부(阜: 언덕),
강(岡: 산등성이), 능(陵: 큰 언덕), 그리고 남산(南山)에서
오봉(五峯)의 도상(圖上)이 유래한 것임을 제시한 바 있다.
'천보' 시는 신하들과 귀빈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고
그를 위하여 하늘과 조상의 축복을 기원하는 시이다.
“여(如)◯◯...” 형식으로 9 자연 현상이나 물체를 언급.
그중 5 물체.,산(山), 부(阜), 강(岡), 능(陵), 천(川).
이들 5물체는 하늘이 내린 왕을 보호하는 물체들이다.
나머지 네 가지는 통치자가 자신의 미덕을 실행하는 법.
이들은 초승달이 차츰 차올라오며 보름달이 되는 것,
매일 아침 어김없이 떠오르는 해(日), 남산(南山)의 장수.
'소나무와 잣나무' 즉, 송백(松柏)의 번성과 4철 푸르름이다.
즉, 이들은 자연의 일상(日常)이자 불변의 법칙이다.
오봉병의 다섯 봉우리는 ‘보호’와 관련된 네 종류의 ‘산’과
미덕과 관련된 무궁함으로 상징되는 남산(南山)으로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후기 이전의 것으로
현재의 오봉병과 같은 그림은 발견되지 않았다.
12세기 남송(南宋) 마화지(馬和之)가 그린.,천보(天保)
천보(天保)보다 더 형식화된 형태는 1605년 초간(初刊)된
정씨묵원(程氏墨苑)은 먹(墨) 표면에 찍는 목판화로 그린 것.
.
정씨묵원에 적힌 제목은
천보구여(天保九如)이다.
천보구여란 시경에 천보라는 장에 나오는 시.
천보(天保) 란 요즘으로 친다면.,'대통령 찬가.'
전쟁을 치르고 온 병사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준
군주(君主)의 덕(德)을 칭송하는 시(詩)가.,천보구여.
9가지 소망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뜻으로
'如'자는 되게 해 달라고 기원할 때 사용한다.
아홉 가지 '如'
여산 (如山:산과 같이),
여부 (如阜:언덕과 같이),
여강 (如岡:높은 산등성이와 같이),
여릉 (如陵:산모퉁이와 같이),
여월지긍 (如月之 :차오르는 상현달과 같이),
여일지승 (如日之升:솟아 오르는 태양과 같이),
여남산지수 (如南山之壽:오래 사시기로는 남산과 같이),
여송백지무 (如松柏之茂:건강하시기로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무성함 같이)
(끝에는 소나무와 잣나무여서.,'如' 가 두개)
정씨묵원(程氏墨苑)은
먹(墨) 표면에 찍는
목판화로 그린 것.
이 판화 산봉우리들이 형식화되지 않았고, 반달이다.
실제로 시에 표현된 “차오르는 달”을 보다 정확하게 묘사.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어진 뒤에 4첩 병풍이
그 구도(構圖)로 보아 다른 병풍과 큰 차이를 보인다.
4폭의 크기가 모두 같지 않고 가운데 두 폭은 247×86cm.
양쪽 가의 두 폭은 247×78cm로서 전체 크기는 247×333cm.
물결무늬로 가득한 물과 흰 포말부분이 병풍의 전체 높이의 반.
이 병풍에서 오봉과 일월이
마치 바다 위로 떠오르는듯..
두 폭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전주 경기전 한옥마을
.
'전주 경기전'의 오봉병은
임진왜란 후 파괴되었던 것을
1614년 복원하여 어진을 봉안한듯.
전주 경기전에 있는.,태조 어진.
1674년 현종대왕 빈전도감의궤
1758년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도설(圖說)에는 당가의 그림은 있으나
오봉병의 그림은 없고 일월경을 걸되
새로 만들어야 할 경우 금니(金泥)와 은니(銀泥)로
칠하라는 말이 있어 원래 모종의 금속으로 만들어 쓰던 것을
영조(英祖)가 비용절감 차원에서 새로운 규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영조(英祖)의 어진(초상화)
한편 선조 23년(1590)에 문정전(文政殿)에 도둑이 들어
어좌 일월경과 문장(門帳)을 도둑맞아 피의자 체포 명령.
어좌에도 일월경을 사용했던듯
오봉병과 일월경의 관계는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봉병은 현재 각 궁궐의 정전 어좌 뒤에 대형 병풍,
1921년 창덕궁에 건립된 신선원전 12개 감실(龕室)에는
팔첩 오봉병과 협폭(挾幅) 오봉병이 당가(唐家) 안에 배치.
또한, 오봉병은 조선시대 국왕이 참석한
각종행사 국왕이 앉는 자리에 그림 속에서
화중화(畵中畵)의 형식으로도 볼 수 있다.
그 밖에 개인 소장으로 크고 작은 오봉병이 남아있다.
그 밖에도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오봉병이 있고 최근 공개된 문짝 형태의 오봉병도 있다.
오봉병은 조선시대 궁궐 의례와 관련되는 중요한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독특한 형태로 발달
왕의 존재를 상징하는 궁중회화 대표 그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관찬 기록에는
일월(日月)보다 오봉도(五峯圖)·오악도(五岳圖).
해와 달보다 5산의 형상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또 영조 때까지 해와 달은 그림으로 그리지 않고
그 모양을 본뜬 금속판 일월경(日月鏡)을 따로 만들어
철사줄에 묶어 걸었는데 궁궐은 단조로운 벽면을 선호해
벽화를 그리는 경우가 드물어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부벽화.
일월(日月)의 상징성은 장수(長壽)와 다남(多男)이지만
사실, 궁중 장식화는 온통 상서로운 의미로 가득 차 있다.
해 달 산봉우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최고 권력 상징물은 도끼.
중국은 고대부터
도끼 문양의 병풍은
왕이 가는 곳마다 등장.
고려시대 연등회, 팔관회 때 왕이 앉은 자리에,
선왕의 신주를 모신 태묘에 도끼 병풍을 둘렀다.
붉은 비단에
자루 없는 도끼를
흑백으로 수놓은 '단의'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책문(哀冊文)에는
'영원히 텅 빈 단의'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
조선 초기에는
태조 이성계와 세조가
각각 타던 말들이 팔준도(八駿圖)로
자주 그려졌는데 이는 단순한 말 그림이 아니라
개국공신과도 같은 태조의 말을 그린 초상의 일종이었다.
꽃과 풀, 새의 아름다운 자태를 묘사한
화조화(花鳥畵)는 궁중 장식화로서 으뜸이다.
새의 보드라운 솜털과 빳빳한 깃털, 가는 꽃술과 여린 잎맥,
까칠한 줄기의 질감을 화려하게 표현해서 여성의 공간에 들어갔다.
선조의 비 인목왕후,
선조의 첫째 딸 정명공주,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서화에 관심이 많았다.
궁궐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욕구는
19세기 들어 한궁도(漢宮圖)로 꽃피웠다.
한궁도(韓宮圖)는 실존하는 궁이 아닌 중국풍.
한궁도는 이국적인 전각들을 계화(桂花)로 그린
상상화이며 자를 이용해 사물의 윤곽선을 정밀하게
그리는 계화 기법은 조선에서 흔치 않아 눈길을 끌었다.
...............중국 계림...................
계림(鷄林)은 신라 국호이기도 하고
현재, 중국 윈남성에 속한 옛 남송 영역.
베트남과 국경선이 인접한.,한나라 영역.
........................................................
기원전 3세기 무렵 진(滇)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초 장군 장교(庄跤)가 장강 상류를 통해 들어간 후
많은 중국인들이 계속해 이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 통일
제국의 판도를 남쪽으로 확장한 후
윈난지역에도 몇 개의 군이 설치된다.
쓰촨에서 시작되는 오척도(五尺道)라는 길은
성 동부 취징(曲靖) 부근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곽창을 보내 익주군을 설치.
당시 버마와 인도를 상대로 한 무역 관계를 확대하려
한무제는 당몽(唐蒙)을 보내 오척도를 지키고 확장했다.
이때 윈난 지역 농업이 눈에 띄게 발전해 청동농기구 사용.
소, 말, 양, 염소, 돼지, 개 들의 가축을 길렀고
이 사람들은 타이족과 연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국시대 윈난성 지역과 쓰촨성 남부 지역은., 남중.
한족의 중앙집권체제가 이 지역의 전통 사회에 들어가
윈난지역 자치권 강화와 지역 부족 구조의 강화 등의 변화.
225년 촉의 제갈량이 3개 군단을 이끌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
이 지역 맹주 맹획을 제갈량이 7번 잡아 풀어준 .,칠종칠금 민담.
4세기 북중국이 유목민족에 의해 완전히 엎어진다.
당나라 때 남조가 출현해 통일왕국을 형성하였으며,
1253년 송대 대리국은 몽골 쿠빌라이에 정복되었으며,
1276년 운남행성 설치, 쿠빌라이 서자 '후게치' 세습 영지.
명 홍무제에 의해 양왕국이 멸망되었을 때,
명나라로 편입후, 남조 독립왕국 역사는 마감.
명나라 때 운남포정사 설치, 청 때 윈난성이 성립.
명대 이후 한족이 대량 유입되어 한족의 땅이 되었다.
중일전쟁 기간은 원장루트를 둘러싸고 중국 국민당군과
일본군과의 사이에 맹렬한 공방전(납맹-등월 전투)이 전개.
중국 계림
계림 황산
중국.,계림 & 계수나무꽃
월궁(月宮)의 계화(桂花) & 계림 소수민족(여인들)
.
계림 민족공연.
계림민족공연 쇼
계림 문화공연 & 양수오 테마공원.
중국 계림., 다양한 과일 & 민속공연.
왕실의., 모란도& 곽분양행락도.
왕실의 모든 의례에 쓰였던 모란도,
다복과 태평을 기원하는 곽분양행락도,
왕실의 만수무강의 뜻이 담긴 요지연도,
서실 분위기를 연출하는 책가도 등.
왕실의 요지연도 & 왕실 서실의 책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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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화전 일월오봉병.
조선시대 여러 가지 의궤(儀軌) 기록에 의하면,
이 병풍은 ‘오봉산병(五峰山屛)’, ‘오봉병(五峯屛)’.
문헌기록의 명칭을 따라 오봉병(五峯屛)이라 불렀다.
일월오봉도 별칭으로 오봉병(五峯屛),
일월오봉병, 일월오악도, 일월곤륜도.
일월도 (日月圖), 곤륜도 (崑崙圖) 등.
일월곤륜도 & 중국 곤륜산.
곤륜산은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청해성[淸海省]에서 사천성[四川省]
서북부를 거쳐 신강[新疆]과 티베트를 관통하는 산.
불사영약 천도복숭아가 자생한다는.,곤륜산.
칠성(七星)의 정기가 응한다는.,곤륜산 7봉.
불사(不死)의 선녀 서왕모가 산다는.,곤륜산.
서왕모(西王母)는 중국 신화 속에 나오는 여신.
생사(生死)와 미(美)를 주관하는 여신.
표범 꼬리와 호랑이 이빨을 갖고 있으며
불로불사(不老不死).,영생(永生)하는 서왕모.
조선시대 일식은 재이(災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 전통적으로 관측되고 기록.
또한 일식이 있을 때는 근신하고 반성하여
이 흉조가 재앙을 가져오지 않게 하려 애썼다.
일식은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여긴 때문.
태양은 제왕을 상징하고, 태양이 그 빛을 잃는 것은
곧 제왕이 그 본래 빛을 잃는 것과 통한다고 여긴 때문.
삼국사기에는 67건의 일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3건은 삼국 가운데 두 나라가 함께 기록.
고려사는 천문지 첫머리에 고려시대의 일식을 조사 기록.
고려사 기록에서는 일식에
공자의 권위를 인용하고 있다.
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일식이나
별의 위치나 빛에 일어난 이상을 모두 기록.
고려 475년 동안 모두 132건의 일식이 있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역대의 일식 기록이
신라 29회, 고구려 11회, 백제 26회 등 66회.
고려시대 131회, 조선시대에는 190회가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는 일식 기록은
이보다 많은데, 연구가 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 역사의 첫 일식 기록은 기원전 54년
신라 혁거세 4년 4월 초하루 - 삼국사기 기록 -
조선시대 일식이 일어날 경우에는
이로 인한 재앙을 예방하는 의미에서
궁중에서 구식의(救食儀)가 행하여졌다.
고려사 예지(禮志)에 의식이 적혀 있는데,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백관은 소복을 하고
북소리를 울렸으며 또한 신하들은 검은 관에
소복을 차려 입고 시립(侍立)하면 왕이 역시
소복하고 들어와 재배하며 의식을 진행했다.
이는 유교적 재이사상의 영향으로
일식을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여기는
풍조는 조선 후기까지 심각하게 지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 1503년(연산군 9) 8월 23일 기록
“전교하기를 ‘일식이나 월식, 지진은 모두 재변
옛사람은 일식을 기록 월식을 기록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월식도 지진이나 같은 재해일 것이다.’라고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태양은 양의 정기(精氣)로서
인군(人君: 임금)의 형상이니 이것이 가려지면 특서(特書)해서
계훈(戒訓)으로 남기는 것이요, 달은 음의 정기이니만큼 양에게
자극을 받아 가려지더라도 예삿일이므로 기록을 않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월식이 일식과는 달리 예사로 생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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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1744년(영조 20) 9월 월식 기록에서 보면,
“이번 월식은 식분이 1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재해로 생각하지 않고 당초에 구식의 의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식에 친히 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라 하였다.
1791년(정조 15) 4월 신축의 월식 기록에서도
“월식이 1분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지평선 아래에서
일어난 월식의 전례에 따라 재계하고 구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진이라는 용어가 1800여건 검색되며
지진으로 많은 어려움과 복구과정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지진 등은 정치현상으로 연결시키는 경향(傾向)이 강했다.
태종실록 1410년(태종(太宗) 10년) 3월 15일
기상관측 등을 관장하던 서운관(書雲觀)에서
미진이 있었다고 아뢰자 태종은 이것은 원통하고
억울한 백성들의 옥사(獄事) 때문이다. 혹독한
형벌을 가하지 말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조선시대 지진이 가장 심하게 일어난 시기.
1518년(중종 13년) 4월 18일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에 큰 지진이 ‘유시(酉時)에 세 차례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인마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이 무너지고
도성 안 백성들이 모두 놀라 어찌 할 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노니
노인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했으며
조선 팔도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중종실록 -.
당시 현장에 있던 조광조 성리학자도
그의 문집(文集)인 정암집(正庵集)에서
1513년 4월 16일에 재상(宰相)이 친히
정사를 보는데 지진이 세 번 일어났다.
전각 지붕이 요동을 쳤다고 이날 지진을 기록
중종 임금은 자신이 정치를 잘못한 것이 지진의
원인이 됐는지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 선조(宣祖)는 지진의 원인을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고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지진을
과학적인 기준보다 정치나 도덕적 기준으로 삼다보니
지진은 하늘과 백성을 무서워하는 두려운 존재로 여겼다.
조선시대 일식 월식 지진 해일 대홍수 가뭄 등.
천재지변 까지 왕의 권위와 부덕의 소치로 해석했기에
역대왕의 초상화 뒤에 있어야 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신라시대에는 첨성대를 만들어 측후에 대비하였고
고려 초 천문관서 태복감(太卜監)·태화국(太火局)을 두고
뒤에 사천대,·사천감,·관후서, 서운관(書雲觀) 등으로 바꿨다.
조선 초 1425년(세종 7) 관상감이라 개칭해 예조에 속.
연산군 때 '사력서'로 개칭 후, 중종 때 관상감으로 환원.
경국대전에 따르면, 관원으로
영사(領事)는 영의정이 겸임하고,
제조(提調) 2인, 정(正, 정3품) 1인,
부정(副正, 종3품) 1인, 첨정(僉正, 종4품) 1인,
판관(判官, 종5품) 2인, 주부(主簿, 종6품) 2인,
천문학·지리학 교수(종6품) 각 1인, 직장(直長, 종7품) 2인,
봉사(奉事, 종8품) 2인, 부봉사(副奉事, 정9품) 3인,
천문학·지리학 훈도(訓導, 정9품) 각 1인,
명과학(命課學) 훈도(정9품) 2인, 참봉(종9품) 3인.
이 밖에 산원(散員)이라 하여
천문학·지리학·명과학 분야로 나누고
임시직 인원을 다수 채용하였다.
세종 때 경회루 북쪽에 천문관측기구
간의대(簡儀臺)를 만들었고,
선조 때 흠경각(欽敬閣)을 지었다.
또 영조 때 다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석각(石刻)의 천문도(天文圖)를 설치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상감은 폐지되고
관상소(觀象所)가 설치되었는데, 기구가 축소되어
소장·기사·기수·서기 등 약간 명만 두어졌다.
관상감은 지금의 기상청과 천문대에 해당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휘문중고)에
그 유적인 일영대(日影臺)가 남아 있다.
일영대는 조선 세종 때 발명, 제작되어
궁궐 안과 사람이 많이 오가는 거리 등에 설치하여
구한 말까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온 최초 공용 해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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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오봉일월도(五峰日月圖).
오봉은 음양오행설에서 오행에 해당되며, 이를 산에 비유하면
동 금강산, 서 묘향산, 남 지리산, 북 백두산, 중앙 삼각산(북한산)
'산과 바다, 파도, 소나무, 폭포, 해와 달'
오봉일월도는 용상의 병풍에 그려졌는데
창경궁의 명정전에 그려진 것이 대표적이다.
일월오봉도가 놓이는 위치는 용상 뒤.
장식성이 강한 일월오봉도는 왕권을 상징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의도에서 제작.
2007년 발행 10,000원 지폐 앞면에
세종대왕 초상화와 함께 그려져 있다.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나다".,천원지방(天圓地方)
'천(天), 인(人), 지(地)' 삼원일체(三源一體)의 사상을
본질로 하여 한 민족(民族)사상을 본체화했던.,조선시대.
즉, '천(天), 인(人), 지(地)' 삼원일체 사상이
유교관과 더불어., 조선시대 국가의 통치이념
조선시대 왕은 날마다 ‘오봉병’ 앞에 앉아
경건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정사에 임했단다.
왕은 오봉병 앞에서 올곧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왕은 하늘과 땅. 사람을 꿰뚫는 이치를 갖춰야 한다.
그때, 삼재를 관통하는 우주의 원리가 완성된다는 믿음.
흔히, 군주를 "지존"이라고 한다.
지극히 존귀한 '존자'라는 뜻이다.
군주는 그리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다.
하늘의 뜻, 천명을 받아
만백성의 어버이 노릇을
제대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극히 존귀한 지위만 생각해서
그 자리 만을 보전하려는 임금이라면
곧 역성혁명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순자나 맹자는 한목소리로
‘민심을 잃은 군주는 곧 쫓겨나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를 했으니
조선의 왕이 되려는 세자나 왕자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부왕)와 어머니는 태어날 왕자를 위해
합궁일까지 받았으며, 임신 후에는 태교에 돌입.
‘10개월 태교가 출생 후 10년 공부보다 중요하다’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
성군이 되기 위한 공부에 불철주야
매달려야 했던 조선왕조 역대왕들은
과연, 어떠한 공부를 해야만 했었을까?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태조 초 설치된 세자관속(世子官屬)을 뒤에 개칭.
왕세자를 모시고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강의.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한.,세자시강원
관원은 사(師, 정1품), 부(傅, 정1품), 이사(貳師, 종1품),
좌우빈객(左右賓客, 정2품), 좌우부빈객(左右副賓客, 종2품),
찬선(贊善, 정3품), 보덕(輔德, 정3품), 겸보덕(兼輔德, 정3품),
진선(進善, 정4품), 필선(弼善, 정4품), 겸필선(兼弼善, 정4품),
문학(文學, 정5품), 겸문학(정5품), 사서(정6품), 겸사서(정6품),
설서(說書, 정7품), 겸설서(兼說書, 정7품), 자의(정7품)가 각각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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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재위때 측우기를 비롯
천문기기 등이 비약적으로 발달.
보현봉은 '조선시대 '초기~중기' 태양관측소.
세종 재위 때 한양의 일식, 월식 등을 관측한 곳이다.
세종의 명을 받은 3왕자 중 수양대군 만 보현봉에 올랐다.
3왕자 중 가장 무예, 담력이 출중했고
훗날, '문종의 장남'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로 즉위하여 왕권을 찬탈한.,수양대군.
세조가 즉위한 이후 일월오봉도는
보현봉이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산 보현봉을 오르는 길은 매우 험하다.
일반인이 오르기에는 어려운 암릉길의 연속.
그러므로, 보현봉 암릉은 조난사고 다발지역.
2016년 현재 정년휴식 구간이며 출입금지구역.
암벽장비가 없던
조선시대 보현봉은
오늘날보다 오르기가
훨씬 더 어려웠으리라.
평창동을 거쳐서
보현봉 사자능선을 지나면
보현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한양 도성에서부터 정상까지 올랐다면
반드시 거쳐야할 곳은.,보현봉의 사자능선.
수양대군은 어느 루트로 보현봉을 올랐던걸까?
북한산 보현봉 사자능선.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올랐다는 보현봉 루트는
위 사진에 붉은 선..바위길.
훗날, 문종으로 즉위한 세자는 병약해 중도 포기
3남 안평대군은 보현봉의 험한 산세 탓에 등반 포기
차남 수양대군 만 용맹하게 정상을 올랐다는.,보현봉.
창덕궁 정문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보현봉.
평창동 능선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보현봉.
조선시대 보현봉은 한성을 보호하는.,성지(聖地)
보현봉은 도성 군량미를 비축한 평창(平倉)을 감싼 곳.
경복궁을 품은 백악산은 보현봉에서 뻗어내린 한 줄기.
조선시대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으리라.
고종 때 보신각 이름은 개성 보현사에서 유래된듯.
임진왜란때 8도 승병장으로 명성을 날렸던.,서산대사.
서산대사가 말년에 입적한 사찰이.,'국보사찰' 보현사.
우리나라 역사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 제4국' 가락국의 국보사찰.,칠불암.
'지리산 칠불암을 품은 봉우리'가.,보현봉(普賢峰).
'낙남정맥의 분수령' 영신봉 지명은
원래, 보현봉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오늘날, 북한산 보현봉은 조선시대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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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오봉일월도(五峰日月圖).
항상 용상의 뒤에 놓여있던 그림이며
왕이 죽을 때 또한 함께 묻혔던 병풍이다.
그리하여, 용상 뒤에 오봉일월도는
'병풍 만 있을 때에는 완성된 그림이 아니며,
왕이 용상에 앉아 있어야 만 그림이 완성된다' 했다.
다른 해석으로는., 월화수목금토일
'해와 달 & 오행 화수목금토'의 결합.
우주 만물을 상징하는 그림.,오봉일월도.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를
그린 청록 산수화풍의 그림이.,五峰日月圖
조선시대 왕이 살던 궁궐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궁중 문화를 익힌다면, 어린이에게는 소중한 체험.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리라 여겨진다.
창덕궁 적막이 흐르는 고궁의 밤,
궁궐 인정전에 찾아온.,어린이 손님들
왕이 앉았던 옥좌, 그뒤에 놓인.,오봉일월도.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머물던 낙선재에
20년 만에 이부자리가 펼쳐지고, 불이 꺼지자
고궁에는 다시 적막이 깃들며 하룻밤이 지나간다.
조선왕조 519년 역사가 막을 내린.,낙선재.
창경궁.
문화 소외지역 어린이를 대상으로
궁궐 숙박체험은 문화재청이 앞으로
확대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조선시대 오봉일월도는
중국의 곤륜산을 그린걸까?
아니면, 상상화(想像畵)였을까?
아직까지 사실이 밝혀진 바가 없다.
조선시대
오봉일월도는
진안 마이산(馬耳山)
또는 도봉산의 오봉을
바탕으로 그린듯 여겨진다.
왕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인간이 오를 수 없는
봉우리를 그린듯 하다.
진안 마이산.,암마이봉 &숫마이봉.
진안 마이산.,등반루트 개념도,
진안 마이산은 1979년 10월 전라북도 도립공원 지정
깎아지른 듯한 수마이봉 기슭의 숲속에 은수사(銀水寺)
그 밑에 또 다른 명물인 탑사(塔舍), 또한 2003년 10월에
산태극·수태극의 중심지로서 국가지정 명승 제12호로 지정.
마이산 은수사 & 이갑용 돌탑
약 100여 년 전 이갑용이 쌓아올린 80여 기 돌탑
마이산탑(전북 지방기념물 제35호)으로 이뤄졌는데,
불규칙한 자연석을 모아 원추형 혹은 기둥 모양으로 쌓은 것.
마이산., 은수사 & 금당사.
그 남쪽에 있는 신라시대 고찰 금당사(金塘寺)에는
은행나무에 조각된 금당사목불좌상(金塘寺木佛坐像)과
14위 관음보살상을 그린 9m 길이 금당사괘불탱(金塘寺掛佛幀),
금당사석탑(金塘寺石塔, 전라북도 지방문화재자료 제122호)이 소장.
이산묘(駬山廟)는 이성계(李成桂)가 등극 전에
임실 성수산 100일기도 후 내려와 마이산에 들어설 때
말을 매어놓았던 자리로, 단군성조와 태조·세종·고종의
위패를 모신 회덕전(懷德殿), 조선 시대 명신·거유를 모신
영모사, 한말 지사(志士)와 의병장 33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
그 외 은수사에는 이태조가 심었다고 전하는
진안마이산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와
진안마이산줄사철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380호).
마이산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창업과 관련 깊은 영산.
마이산
서울 도봉구 도봉산의
서북쪽 사면에 있는.,5봉.
북한산국립공원 중앙에 위치.
고려 공민왕 때
한양천도를 고려하여
궁궐을 지은 현재 창경궁 터.
그당시부터 도봉산의 오봉은
'고려~조선'시대 영산으로 여겼다.
그후 대한제국 말까지
영산으로 여겼던.,오봉.
오봉은 암릉이 매우 험한 곳이라
조선시대까지는.,처녀지였으리라.
오봉 산세는 일월오봉도와 유사하다.
도봉산 오봉.
도봉산에 위치한., 오봉(五峰)은
진안 마이산 암마이봉 숫마이봉보다는
조선시대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와 유사.
아울러, 도봉산 오봉 형태는
그 위용이 왕의 위엄을 갖춘듯.
이곳이 일월오봉도 모델 아닐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 은신처., 오봉 석굴암.
오봉 석굴암은 우이령에서 접근 용이.
조선시대 우이령은
한양과 궁궐을 지키는
요충지이자 군사주둔지.
'북한산과 도봉산'
병풍 같은 암봉들.
일월오봉도와 유사.
..............우이령(牛耳嶺)..............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이다.
이곳으로 우이령길이 지나고 있어
'양주~서울'은 빠르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69년 1·21 사태로 인해 우이령길이 폐쇄되면서
'서울~양주' 은 의정부를 거쳐 가야 하는 불편함이 생겼다.
2008년 우이령길 통행을 재개해야 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환경 훼손을 이유로 우이령길 재개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2009년 7월 10일에 탐방객 수를
제한하는 조건으로 우이령이 개방.
고르고 평탄한 길은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제한적 개방이기 때문에 목책으로 경계를 지었지만
그 넘어 우거진 숲과 흐르는 물소리는 청량감을 준다.
멀리 오봉을 바라보며 40여분을 걸으면.,석굴암삼거리.
.........................................................................
오봉은
송추에서
여성봉 가는
길로 올라가면
가장 접근이 쉽다.
오봉은 북한산국립공원 지역 내에서
구중궁궐 속에 있는듯한 느낌이 드는 곳.
신의 영역과 인간세계의 경계선 같은 선계(仙界)
도봉산 주능선에서 한참 벗어난.,오봉.
1봉에서 5봉에 이르는 클라이밍 루트는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등반하기 어렵다.
오봉은 군부대 지역 내에 있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군사요충지였던 곳.
선계와 같은 비경지대이지만
전해오는 전설은 하나뿐이다.
한 마을의 다섯 총각들이
원님의 어여쁜 외동딸에게
장가들기 위해 오봉산 뒷면의
상장능선에 바위를 오봉에 던져서
올리기 시합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현재, 모습의 봉우리가 만들어졌단다.
상장능선은 오봉 전망대이다.
오봉으로 접근하는 길이 없다.
오봉이 한눈에 보이는 상장능선.
상장능선 역시
휴식정년 구역이며
군작전지역 내에 위치.
우이령 동네 주민이나 다닐뿐이며
일반 등산객의 발길은 끊긴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비슷했으리라.
............
상장능선
............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서는
가장 조망권이 빼어난 곳이며
일반 등산객이 오르기 힘든 암릉.
그래서,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하다.
2016년 현재, 휴식정년 구역.
구파발역에서 704버스를 타고
'노고산 예비군훈련장'을 지나
'솔고개'에서 하차하면.,상장봉.
상장군(上將軍)의 위용을 갖춘
암봉이 앞장서 있는듯 하여.,상장봉.
상장봉이 있는 능선이라 하여.,상장능선.
상장능선에서 바라본.,오봉.
....................상장능선............................
도봉산과 북한산 사이를 가로지르는.,상장능선
산의 생김새가 장수 같아., 상장봉(上將峰)이라며
여기서 상장산· 산장산· 산정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상장봉은 시루봉· 메주봉· 갈비봉 등으로 이어졌다.
메주를 닮아 메주봉, 시루를 엎어놓은듯 하여 시루봉.
갈비봉의 원래 이름이 갈미봉이라고도 하는데,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곳 "가을뫼" 또는 "갈미".
인수봉· 백운대·원효봉·만경대·노적봉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 2~3㎞에.,'상장봉능선'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서 북한산과 도봉산으로부터
각기 비슷한 거리에 떨어져 있으며 가을에 아름답다.
상장봉 동쪽 바로 옆에는 소귀고개(우이령)가 있으며
장흥면 교현리에서 우이령을 넘어가면 강북구 우이동.
상장봉(513m)은 북한산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상장봉에서 가까운 원효봉이나 노적봉이나 오봉산 등은
돌산이라서 전문 지식을 갖춘 등산객들이 주로 찾는데 비해,
상장봉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아 일반 등산객들도 오를 수 있다.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달현마을
또는 다리고개에서 올라갈 수 있다.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봄가을 상장봉에 올라와 산신제.
1970~1990년대에는 가을[음력 9월 초]에만
산제를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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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능선 ~ 육모정 삼거리~ 영봉허릿길~사기막골
사기막골 옥녀탕.
북한산 사기막골 입구에.,청담동
청담동은 군부대 작전지역 내 위치.
군부대 정문 위병소를 거쳐야 출입 가능.
사기막골은 조선시대 백자를 굽던 곳이며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군부대 주둔지이다.
현재, 1군단 유격훈련장 및 군단휴양소로 사용.
북한산성 12성문 내 면적과
거의 비슷한 면적 사기막골은
장마철마다 홍수 피해가 극심한 곳.
그래서, 지금도 사기막골 초입에
민가 몇채가 외딴 마을을 이룰 뿐.
사기막골 안산에서 바라본
'인수봉 후면' 설교벽능선과
숨은벽능선은.,북한산 제1 비경.
설교벽 & 숨은벽.,능선.
설교벽능선.........숨은벽능선.........염초봉능선.
'설교벽암릉과 숨은벽암릉' 사이에 위치한
설교벽계곡은.,낙석이 극심한 협곡이며 너덜지대.
'고려~조선'시대 지진에 의한 낙석도 찾아볼 수 있다.
숨은벽능선은 설교벽능선과 염초봉능선 사이에
나즈막하게 숨어있는듯 하다고 하여.,숨은벽능선.
3능선이 합쳐져 거대한 여근 형태로 보이는 비경지대.
마치, 조선왕실이 적통 왕손이 귀할 때
다산을 기원하는 일월오봉도 그림 같다.
이곳 설교벽계곡은 협곡이며 여근곡(女根谷).
낙석의 위험, 눈사태, 폭우 등에 고립되기 쉽다.
겨우내 쌓인 눈이 가장 늦게 녹는 북한산의 얼음골.
북한산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설교벽계곡.
들어가보면 집체만한 바위돌들도 여기저기.
산산조각 난 파편 낙석들도 흔히 볼 수 있다.
낙석다발구역 위에는., '인수봉 숨은벽' 7루트.
설교벽 인수봉.,숨은벽
인수봉 북쪽에
상장능선이 있다.
상장능선.,왕관봉.
송추 솔고개에서 출발할 경우에
상장능선 초입에 위치한.,왕관봉.
송추 ~ 솔고개~상장(봉)능선
~ 영봉(능선)~하루재~ 우이동.
상장능선
상장능선에서 영봉 가는 길.
인수봉 바위길들이 마주보이는.,영봉.
영봉.,남근석,
영봉.,야영장.
인수봉 바위길에서
산화한 故 클라이머들의
비문 시비가 많이 있었던 영봉.
1970/80년대에는 비문에 적혀있던
시비를 읽다보면 시집 한권을 읽는듯.
지금은 거의 대부분 철거되어 사라졌다.
그 대신에 북한산 무당골에는
산악인 합동 추모공원이 있다.
인수봉에서 산화한 산악인의 묘.
상장능선 영봉에서 바라본.,인수봉.
상장능선에서 바라본.,
우이동 복한산 인수봉 &
도봉산 관음봉 및 오봉 일대.
조선시대 일월오봉도와
거의 유사한 도봉산 오봉.
.................
도봉산 오봉.
.................
도봉산 주능선에서 바라보면 오봉 능선을 따라
서북쪽으로 나란히 놓인 5 봉우리를 볼 수 있다.
마치 다섯 손가락을 펼친 것처럼 생긴 오봉은
봉우리 위에 바위를 올려놓은 듯 얹혀 있는 형상.
경기도 양주시에서 송추 남능선을 따라
자운봉으로 오르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오봉은 우람한 남성을 상징한다 하고,
오봉 서쪽에는 오봉의 남성성에 대응하는
여성의 성기와 거의 유사한 여성봉이 위치.
여성봉은 일반 등산객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다.
서왕모(西王母)는 전설에 의하면,
여신으로 본래 인간과 비슷하지만
표범 꼬리와 호랑이 이빨을 갖고 있으며
생사(生死)와 미(美)를 주관하는 여성 산신령.
이곳 여성봉은
서왕모의 전설을
떠오르게 하는 곳.
여성봉
도봉산을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은
약한 암석은 풍화되어 떨어져 나가고
단단한 기반암 만이 남아 우뚝 솟아 있다.
따라서 봉우리는 암봉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경사가 매우 급해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다.
최고봉인 제1봉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봉은
각각 70~80m 높이의 화강암 바위로 되어 있다.
오봉(660m)은 전문 등산인들이 자주 찾는 봉우리
어느 방향에서 바라 보더라도 절경을 볼 수 있다.
장비를 갖춘 전문가만이 오를 수 있는 암장이 형성.
2인 이상 보호 장구를 소지해야만
오봉에서의 암벽 등반이 허용된다.
제1봉 근처에는 오봉 샘터가 있다.
오봉 가운데 있는 봉우리.,제3봉은
거북이가 산을 기어 올라가는 모습.
3봉(남근봉) 오르는 길.
얼핏 보면, 오르기 쉬워 보이지만
막상 오르다보면 결코 쉽지 않은.,크럭스.
두세번 헛발짓하며 용을 써야 등정을 허락한다.
정작, 3봉에서 가장 오르기 어려운 루트는
3봉 정상 위에 얹혀있는듯한 남근석 선바위.
오봉에서 3봉 남근석으로 올라가면
그곳 정상에는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4인1조 클라이머들에게는 아늑한 휴식처.
.
무인고도 외딴 섬에
고립되어 있는.,느낌.
'백년고독(百年孤獨)일까?'
'천년고독(千年孤獨)일까?'
3봉(남근봉).,정상.
............'3봉~4봉' 티롤리안 브릿지...............
3봉과 4봉의 정상에 설치된 피톤에 자일을 연결해
허공다리로 이동하는 등반 기법이.,티롤리안 브릿지.
애기봉(사이봉) 가는 길.
애기봉(사이봉)
애기봉 오버행 하강.
제5봉의 정상
암봉 등반 루트.
오봉에서.,제5봉 오버행 하강루트.
오봉에서 제5봉 아래로 내려오면
"끝봉" "말봉" '관음봉'으로 가는 길.
관음봉의 중턱 아래에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
........................석굴암...................................
석굴암(石窟庵)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1번지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오봉산 관음봉 중턱에 위치한 석굴암은 나한기도 도량.
절 뒤로 펼쳐진 훤출한 산세가 그렇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 또한 맑고 깊다.
군부대 초소를 통과해야만 갈 수 있어,
아직까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도봉산 천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봉산 서쪽에 있으며, 석굴암 위로는 관음봉
그 뒤로 또 다섯 암봉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석굴암(石窟庵)은 관음봉(觀音峰)의 중턱에 있다.
석굴암 가람의 지세는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이 모여 마치 여러 별이 모여
북극성을 떠받들고 있는 크고 뛰어난 산세이다.
물 맑고 골이 깊어 수도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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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은 주봉인 자운봉(紫雲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 선인봉(仙人峰)
서쪽으로., 오봉산 석굴암(五峰山 石窟庵)이 있고
우이령 상장봉능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산을 접했다.
도봉(道峰)은 풍수지리상으로 왕관(王冠)의 형상.
오봉은 주봉을 호위하는 장군기마상(將軍騎馬像).
석굴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 창건설.
또는 신라 말, 도선국사 창건설도 전해온다.
고려 공민왕때 왕사 나옹화상이 3년간 수행.
장흥을 지나다 한번씩 우러러 보았다던 오봉.
석굴암이 자리한 관음봉 중턱은 선풍 수도처.
조선시대 무학의 제자 설암관익(雪庵寬益)대사가 주석하며,
석굴에 지장과 나한 두 존상을 조성했으며, 1455년 단종왕후가
왕세자를 위해 왕후원찰로 중수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끊임없이
고승들이 주석하며 선맥을 이어 갔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그후, 이 가람은 일반인들에게 잊혀진 사찰이 되었다.
근래에 초안스님의 불사와 기도, 그리고 그의 상좌인
도일스님 원력으로 나한기도 도량으로 찾아 가고 있다.
석굴암 & 관음봉.
오봉전망대
문사동계곡.
....................도봉서원.........................
도봉동 산 512번지., 도봉 서원(道峯書院)은
서울 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서원.
서울에 하나뿐인 전통 교육기관으로 의미가 크다.
1573년(선조 6) 양주 목사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이
영국사 터에 조광조 학문, 행적을 기리는 도봉서원 건립.
300여 년간 서울· 경기 선비들의 주요 교유처가 되었으나,
조선 말,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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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도.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던 서원으로
주변 계곡에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남긴 글씨들이 많다.
선조 이후 사림이 급성장 할때 분위기를 반영하는 서원.
1574년 9월 조정 부제학 유희춘 등이 사액을 요청.
선조는 서원 첩설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여러 사림들의 청원에 결국 ‘도봉’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사액을 받은 도봉 서원에는 막대한 전답이 지급되었는데,
본래 영국사 전지 외에도 호남 면세지 100결이 추가 지급.
이후에도 조광조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경제 지원.
도봉서원은 명사들이 계속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유력 가문 자제들의 수학처, 학문 토론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효종 대 이후부터는 송시열·김상헌(金尙憲)·이단상(李端相)·
권상하(權尙夏)·윤봉구(尹鳳九)·김수항(金壽恒)·김창협(金昌協)·
박세채(朴世采) 등 서인 사류들이 많이 다녀갔고, 노론과 소론의
분기가 이뤄진 후에는 도봉서원을 둘러싸고 정치적 대립이 발생.
송시열의 도봉서원 향사 여부를 둘러싼 노·소 간의 논쟁이 그것이다.
송시열은 1696년(숙종 22) 도봉서원에 조광조와 나란히 배향되었지만,
1723년(경종 3) 출향 후, 1725년(영조 1) 재배향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775년(영조 51) 영조가 ‘도봉서원(道峯書院)’ 현판을 친필로 하사.
문묘에 배향된 조광조· 송시열 양현(兩賢)을 모신 최고 서원의 위상.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선인봉 루트 개념도.
선인봉
선인봉.
선인봉의 바윗길 루트들은
마치, 신성불가침 구역 같다.
절대권력자 영역인듯한 느낌.
도봉산 선인봉 & 북한산 인수봉
국내 클라이머들의 요람이자 쌍벽.
인수봉.
귀바위 등반.
기원 전 소서노가
비류 온조 두 아들과
함께 올랐다는.,부아악
500){this.width=500;}">
"소서노(小西奴)는 한산(韓山)에 이르러
비류,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에 올랐다."
.
-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 -
.
비류는 기원전 18년 미추홀(인천)에 거점을 두고 비류백제를 창건.
온조는 같은 해 하남(한강 이남) 위례성을 거점으로 온조백제를 창건.
BC18년 소서노는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을 올라 도읍지를 정했다는 전설.
.
한산(韓山)은 소서노의 최초 백제 도읍지.
부아악은 인수봉의 옛 지명일 가능성이 높다.
예나 지금이나 범접이 어려운 곳이.,성지(聖地).
.
해뜰 무렵, 하루재를 넘어 파도치듯 밀려오는 운무.
구름 바다에 반쯤 잠긴 북한산 일대는 다도해 같이 변모.
이때 인수봉은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인자한 어머니 모습.
부아악(負兒岳) 지명이 가슴에 닿는.,인수봉
전설 속 소서노를 연상케 하는.,위풍당당한 인수봉.
두 아들(비류, 온조)을 거느린듯한 산세.,부아악(負兒岳).
만경대에서 바라본.,인수봉,
고려 말 이성계는 무학과 국망봉에 올라
'조선 창업을 구상했다.'는 곳.,북한산 만경대.
그 구전은 '소서노(小西奴)의 전설'을 모방한듯 하다.
'조선시대 일월오봉도는
소서노의 전설을 모방한
한산 부아악에서 비롯되어
도봉산의 오봉을 그렸던걸까?'
북한산의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일컬어.,삼각산(三角山).
백운대 정상 인근의 뜀바위는 갈라진 틈새 건너편 바위 너머는
낭떠러지여서 웬만한 담력으로는 뛰기 어려운데, 한양 자제들은
이곳 뜀바위를 뛰어넘음으로써 담력과 함께 성인으로 인정받던 곳.
조선 초, 안평대군이 백운대 뜀바위를 뛰어넘었고
수양대군은 만경대를 올라 성인식을 치뤘다 전한다.
성인식은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의식이다.
만경대 정상에도 백운대 뜀바위와 유사한 갈라진 바위가 있다.
백운대 뜀바위로 오르는 길목에 .,결단암(決斷岩).
조선시대 백운대를 오르거나 뜀바위를 오르기 전에
최종적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곳이라하여.,결단암.
.
현재 백운대로 오르는 길목에서
쇠난간이 시작되는 곳이.,결단암.
움폭 패인 곳이 옷을 벗어두던 곳.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같은 시설물이 없어
대단한 담력이 없으면, 백운대 등정이 불가.
조선시대 극소수 위인들 만 올랐다는 뜀바위.
원래 백운대 뜀바위에서의 성인식은
통일신라시대 화랑의 성인식에서 유래.
백운대 뜀바위 성인식 유래는 의외로 길다.
백운대 뜀바위는
백운대 정상부에서
마당바위 곁에 있다.
백운대 마당바위.
북한산 북악산.
북악산은 조선왕조 519년의 상징이자
오늘날, 청와대 대통령을 상징하는 곳.
그뒤, 북한산 보현봉은 조선시대 종각을 상징.
그러나, 오늘날, 보현봉은., 광화문 민중을 상징.
아울러, 인왕산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위상이며
오늘날에는., 대한민국 차세대 통치자의 위상이다.
2017.5.9 대통령 선거일.,누가 국민의 선택을 받을까?
조선시대 겸재 그림 - 인왕산도.
대한민국의 역대(歷代) 대통령들.
조선 역대왕의 권위의 상징인.,일월오봉도는
오늘날, 청와대 문양과 유사한 용도로 쓰인듯.
조선왕조에서 519년간 사용되었던.,일월오봉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