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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대유목민족도 마찬가지지만, 흉노민족의 기원은 사실상 전세계 학회가 포기 내지 방기상태에 있다. 그렇지만, 여러가지 이유에서, 중국만큼 열심히 이 문제을 끈덕지게 물고 있는 곳 또한 찾기힘들 것이다. 물론 나같은 속물 입장에선 내용이 어쨋든 고맙기만 하지만. 아무튼 이 글 역시 민족기원문제의 온갖 문제는 다 보여주는 것 같다. -이상 역자 씀-
『歷史月刊』 2006年 224期 pp. 19~27 (臺北 : 歷史智庫)
북방초원의 첫번째 유목왕국 건국자:
흉노민족형성의 뿌리를 찾아서
北方草原第一個遊牧王國的創建者─匈奴民族形成探源
楊陽(YANG Yang)
(中國國家博物館 對外展覽部 副硏究員)
흉노 금관 (춘추~전국)
일찍이「흉노민족 오르도스지역 기원설 반박[匈奴民族起源於鄂爾多斯地區辯難]」란 글에서 우리는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한데묶어, 흉노(匈奴)와 자연지리환경, 흉노의 장례풍속,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 등 여러 문제를 고찰해서 흉노와 북적(北狄) 사이의 족원상 연계를 잘라내었고, 그래서 흉노- 북방유목민족(鬼方, 獯鬻, 獫狁, 北狄) 동일족원설을 부정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이 문제를 두고 단지 몇 가지 점에서만 의견을 덧붙이려는 바, 여러 학자의 가르침을 바란다.
내몽고 오르도스지역에서 출토한 흉노칼 (춘추~전국)
흉노족 청동사슴 악세서리
흉노민족은 언제 형성되었나
정작 이 문제는 여러 학자마다 눈여겨 보는 곳이 가지가지다. 그 가운데서 이르게 보는 이는 흉노를 하•상(夏•商)때부터 기원했다고 여기되, 늦춰보는 이는 전국시대부터 기원했다고 여긴다. 위아래로 무려 2천년! 어찌 이리도 시차가 클 수 있단말인가!
필자의 생각이지만, 흉노민족의 형성과정을 고찰하면서 흉노민족의 기원문제를 찾을 때는, 먼저 ‘민족(民族)’이란 개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민족의 정의에 대하여 통일적으로 규정하고 나서야 일정범위 내에서 의미있는 토론을 전개할 수 있거니와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빠른 해결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정의를 두고도 학계에는 견해차가 있다. 어떤 학자는 씨족, 부락, 그리고 민족을 비롯한 여러가지 인간공동체를 모두 넓은 뜻에서 민족이라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다 많은 학자가 민족이란 원시사회 후기에 부락 혹은 부락연맹이 융합되면서 생긴 ‘정치사회’라고 주장한다. 즉 민족이란 계급사회 혹은 문명사회의 산물이며 씨족이나 부락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후자의 관점에 찬성한다.
민족이란 역사 범주의 하나이다. 민족이란 역사 위에 형성된 일정한 특징을 갖춘 인간공동체로서, 민족은 결코 과거부터 쭉 있어왔던 것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따른 일정한 계급적 산물이다. 민족이 태어날때부터 민족이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는 생산방식의 변화와 서로 맞장구치며 뒤바뀌어 가거니와 시종일관 계급사회와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원시사회때 민족은 응당 아직 생기지 않았었다. 이런 관점이 역사발전의 법칙성과 부합한다.
통일한 민족개념의 전제하에, 재차 우리는 흉노민족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문제를 논해 볼 수 있겠다.
민족이란 계급사회의 산물이라했다. 그렇다면, 흉노가 언제 원시사회로부터 계급사회로 진입했는지가 바로 흉노민족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푸는 열쇠가 된다.
『사기•흉노열전』에 실려있는 흉노의 초기역사를 옮겨놓으면 이러하다.: “순유(淳維)부터 두만(頭曼)까지 1천여 해 동안,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따로 뿔뿔이 떨어져나가길 오래오래 했으니, 그 대대로 이어지는 (왕노릇의) 순서를 매겨 말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묵돌(冒頓)에 이르러 흉노는 가장 강대하서 북으론 이(夷)를 다 굴복시키고 남으론 중국과 맞먹는 나라가 될 때부터, 그 대대로 이어내려오는 (왕노릇의) 계보와 벼슬일컬음을 적어 말할 수 있었다 [自淳維以至頭曼千有餘歲, 時大時小, 別散分離,尙矣, 其世傳不可得而次云. 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 盡服從北夷, 而南與中國爲敵國, 其世傳國官號乃可得而記云.]”. 물과 풀을 좇아 옮겨다니되, …… 또한 저마다 나름대로 땅을 나눠가지고 있다 [逐水草遷徙, …… 然亦各有分地].” 병사가 활을 당길 힘이 있으며 다 갑기(甲騎)가 된다. 이들의 풍속은, (평상시) 널럴할 때면 가축을 뒤쫓으면서 짐승사냥을 일삼지만 (전쟁 따위가 터져) 서둘러야할 때면 사람들은 싸워 쳐대기에 익숙하여 쳐들어가 무찌르는데, 그 타고난 성질이다 [士力能彎弓, 盡爲甲騎. 士力能彎弓, 盡爲甲騎. 其俗, 寬則隨畜, 因射獵禽獸爲生業, 急則人習戰攻以侵伐, 其天性也.]”
이 토막기사는 두만선우(頭曼單于) 이전의 흉노에 대한 것인데, 여전히 목초지를 씨족이 공유하고 있는데다 생산조직과 군사조직이 일체화되어있고, 씨족조직 또한 未해체 상태거니와 씨족부락과 부락연맹이 아주 불안정해서 왕노릇은 세습되지 않고있으며, 국가(state) 또한 未건국 사회상황의 참모습을 비추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상황으로보아 당시 흉노는 원시사회 단계에 있었지 아직 계급사회의 문턱을 밟지 못했는데, 이는 또한 흉노가 어엿한 민족의 실체가 되는 막바지까지도 미처 이를 형성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흉노의 첫번째 선우(單于) 두만과 그 아들 묵돌선우(冒頓單于)때(기원전 3세기 말~기원전 2세기 초)가 되자, 흉노사회는 뿌리째 바뀌었다. 이 바뀜의 심벌과 같은 사건은 바로 묵돌이 그 아비인 두만선우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자리에 오르면서 흉노 선우의 세습제도가 확립된 일이다. 흉노의 선우세습제 학립은 또한 흉노사회가 이로부터 계급사회로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푯말이다.
이밖에도, 막북(漠北)에서 발굴한 기원전 3~2세기에 속하는 흉노무덤 중에는 껴묻거리가 몹시 알차게 가득한 큰 무덤이 있는가 하면, 껴묻거리가 굉장히 보잘것없이 적은 작은 무덤도 매우 많다. 이는 흉노사회에 일어난 질적인 변화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흉노라는 이름이 가장 일찍 보이는 옛 문헌의 연대는 기원전 4세기 말인데, 이는 아마도 흉노가 중원제후국과 접촉한 상한일 것이며 또한 마땅히 흉노가 역사무대에 나타난 때일 것이다. 기원전 3세기 말이 되자 흉노는 더욱 어엿하게 민족실체와 정치실체를 이루어 대막(大漠) 남북에서 우뚝 일어섰다.
흉노족 양머리모양 수레장식 (춘추~전국)
흉노인종의 귀속을 두고 떠오른 생각
인종이란 구성민족 특징의 여러 팩터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유전성과 안정성을 갖추므로 고대민족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데 일정한 참고가치를 가진다. 이 때문에, 흉노족의 인종귀속 또한 학술계에서 오래도록 논쟁이 그치지 않고있는 문제의 한가지다. 기본적으로 세가지 서로 다른 견해로 나눌 수 있다: 1) 흉노는 마땅히 몽골인종[몽골로이드]에 속한다. 2) 흉노는 혼합종족으로서 유럽인종[코카소이드]와 몽골인종 두 종의 성분을 겸하고 있다. 3) 흉노는 유럽인종에 속한다.
반기풍(潘其風) 선생은 국내외에서 발견된 흉노의 머리뼈 재료를 근거로 흉노의 인종성분을 분석하고「사람머리뼈 자료로 본 흉노의 인종[人顱骨資料看匈奴的人種]」을 비롯한 여러 글을 발표하여 몹시 값진 자료를 내주었다. 이 가운데서 어떤 논거와 추론은 우리에게 여러 깨우침을 주어 퍼뜩 몇몇 잇닿은 생각을 떠오르게 했지만, 그 결론 중에는 전혀 검토할 곳이 없는 바는 아니다.
1977년 청해성 대통현(大通縣) 상손가채(上孫家寨)에서 발견된 동한(東漢)시기(서기 2세기쯤) 무덤의 주인공이 남흉노(南匈奴) 귀족임은 이 무덤의 껴묻거리인「漢匈奴歸義親漢長」동인(銅印) 1점으로 증명할 수 있다. “종합형태와 측량분석 두 가지 측면을 비교했더니, 대통(大通) 흉노의 머리뼈 체질특징은 주로 북아몽골인종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기본적으로 바이칼호[貝加爾湖] 흉노 그룹과 가깝다”, 그렇지만 “또한 바이칼호 흉노 그룹과 서로 다 똑같지는 않다.”
1973년 내몽고 이케죠아이막[伊克昭盟, 現오르도스시] 항깅키[杭錦旗] 도홍파랍(桃紅巴拉)에서 발견된 옛 무덤은,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춘추말기의 백적(白狄) 혹은 프로토-흉노의 무덤이라고 한다. “도홍파랍 머리뼈의 얼굴부위 특징은 바이칼호 흉노와 다소 유사하다” 그러나 “큰 차이도 뚜렷하게 존재한다.”
1979년 내몽고 오란챠브아이막[烏蘭察市盟] 량성(涼城)
“상술한 흉노 머리뼈 재료가 출토한 지점의 지리적 분포는 아시아에서 발견된 지역으로서 남쪽 하투(河套)지역으로부터 북쪽 바이칼호까지이고, 시대는 기원전 6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로서 춘추전국, 서한, 그리고 동한 여러 역사시기를 아우른다. 이런 몇가지 그룹의 흉노 머리뼈를 가지고 인종유형의 차이와 분포를 분석해보면, 대체로 아랫글과 같은 몇가지 현상을 볼 수 있다.”
자바이칼[外貝加爾, 트란스바이칼]지역과 몽고 노인-울라[諾顔山, Noin Ula(Noyon Uul)]에서 출토한 머리뼈의 인종유형은 기본적으로 서로 동일하며, 다 몽골인종의 시베리아유형에 속할 수 있다. 자바이칼 지역의 흉노사람에는 또한 유럽인종 요소도 섞여들어가 있어서 복잡하다. 그러나 노인-울라에서 서쪽으로 300km 떨어져있는 쿠니-골[呼尼河, Khuni Gol] 강가에서 발견된 연대가 조금 늦은 흉노사람 집단에는 유럽인종과 몽골인종 양대 인종이 공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 경내에서 발견된 흉노 무덤떼의 경우, 지금껏 아직까지도 양대 인종의 공존 혹은 혼혈현상은 보이지않고 있거니와, 동시에 긴 머리뼈유형이 결합된 낮은 머리뼈유형을 주된 특징으로 띠는 古시베리아유형 머리뼈도 거의 없다.
도홍파랍과
“동유럽 헝가리[匈牙利]에서 발견된 흉노시기 무덤의 古인류학 재료 또한 古시베리아 유형의 머리뼈에 속함을 눈여겨 볼 가치가 있다. 이는 유럽에 침입했던 훈족[匈人, Huns]이 동방의 흉노에 뿌리를 둔다는 증거로 되어있다. 북흉노(北匈奴)의 후예는 古시베리아유형 특징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던 셈이란 말이고, 그렇다면, 북흉노의 주체주민은 古시베리아유형 인류집단에 속한다고 우리가 짐작하는 이유가 마련된다.”
이상과 같은 몇 그룹의 흉노인종재료 분석을 우리는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자바이칼과 몽고지역에서 발견된 흉노사람뼈는 몽골인종의 古시베리아유형에 귀속될 수 있다. 2) 내몽고지역에서 발견된 이른바 춘추전국시기 흉노사람뼈는 북아인종 요소도 띠고있지만 주로 동아인종에 가까운 형태특징이 우세를 차지한다. 3) 청해성 대통현에서 발견된 동한시기의 남흉노귀족 사람뼈는 북아몽고인종과 비교적 밀접한 관계를 나타냈다.
흉노족 청동 곤봉머리 셋트 (춘추~전국)
여기서 짚어 두겠는데 도홍파랍과
이로부터 우리는 아래와 같이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1) 흉노민족보다 몇 백년 앞서 ‘프로토-초원주민[原草原居民]’에서 발전해 일어나 북방지역에서 활동한 북적민족은, 화북지역의 화하(華夏)민족과의 접촉을 거치면서 그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 등 측면에서 바뀜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종상에도 바뀜이 일어나서 점차 동아유형에 더 가깝게 되었다.
(2) 기원전 3세기에 발돋움한 흉노민족의 경우 그 인종은 마땅히 몽골인종의 古시베리아유형에 귀속되지만 뒷날 그 민족이 대발전 및 대융합 단계에 있을 때 동아유형, 유럽인종 등의 성분도 섞여들어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상, 이런 동아유형성분은 또한 북적민족에서 동아유형성분이 차지한 비율에 견주어 많이 적었다. 이는 강대한 진•한(秦•漢)정권과 흉노정권 사이의 정치•군사상 적대성과 지리구역상의 격리성 때문에 그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흉노인종의 귀속은 또한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흉노민족이 발돋움하기 전에 중원의 화하민족과 교류가 있었던 귀방(鬼方), 험윤(獫狁), 그리고 북적(北狄)은 절대 흉노가 아니며 프로토-흉노[先匈奴]도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1천 년 넘도록 오고가며 섞여 살았다면, 아마도 본디 흉노가 날 때 가졌던 핏줄의 ‘순수성[純潔性]’을 그대로 지니고있긴 어려웠을 터이고, 따라서 뒷날에 나온 흉노민족의 인종성분은 마땅히 보다 많은 동아유형 체질특징을 나타내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 점을 두고, 우리는 청해성 대통현 동한시기의 남흉노귀족 사람뼈가 변함없이 古시베리아유형 성분이 주된 점을 한가지 사례로 들어 (그렇지않음을) 뒷받침한 바 있다.
흉노족 청동 말머리장식(춘추~전국)
흉노민족─夏, 羌 등 민족 동일족원설 반박
흉노의 족원을 두고 여러 설이 있지만, 흉노-하(夏)동족설은 역사가 아득히 오래되었다. 사마천은『사기•흉노열전』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흉노. 그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손인 순유(淳維)라 하더이다 [匈奴, 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 曰淳維].” 이후 역대로, 이 설에 기우는 사람이 모잘랐던 적이 없었다.
내몽고고고소(內蒙古考古所)의 육사현(陸思賢) 선생은「‘탱리고도선우(撐犁孤塗單于)’ 말뜻에 나타난 ‘연제씨(攣鞮氏)’족원[<撐犁孤塗單于>詞義反映的<攣鞮氏>族源]」이란 글을 통해 이런 관점을 논증하여 발전시켰다. 그 주된 논거는 이러하다.: 흉노통치집단의 주체민족이 섬겼던 토템은 용(龍)이다. 고힐강(顧詰剛) 선생에 따르면 황제(黃帝), 우(禹), 촉룡(燭龍), 고(鼓), 그리고 항아(姮娥) 등의 신화는 모두 곤륜(崑崙)계통에 속하며 강융(羌戎)에서 나온 것인데, 흉노의 통치자인 연제씨의 하늘과 용에 대한 신앙 또한 마치 그것처럼 비슷하고, 그렇다면, 역시 응당 강융에서 비롯되어야 할것이다. 하(夏)민족과 흉노민족의 나라가 서있는 별자리모양[星象]은 ‘묘성단(昴星團, 플레이아데스)’으로서 동일하다는데, 이는 아득히 오래전에 하(夏)민족은 흉노의 한갈래였든지 아니면 똑같이 강융족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하(夏)민족과 흉노족이 숭배한 토템은 모두 용이거니와 족원이 서로 똑같다함은 더 따져볼 것도 없다.
육사현 선생의 견해에 대하여 필자는 주제넘게시리 차마 동의하지 못하겠다. 아래와 같은 몇가지 문제를 넌지시 짚어두고, 앞으로 닥칠 토론을 기다리련다.
(1) 흉노와 하(夏)의 인종유형
앞글에서 나는 흉노민족의 인종유형에 대하여 소개를 했고, 현재 우리는 보는 하(夏)민족의 인종유형 귀속은 아래와 같다.
하대(夏代)에 들어맞는 하남성 용산(龍山)문화 말기와 이리두(二里頭)문화에서 수집된 사람뼈 재료는 넉넉치않기 때문에 하(夏)민족의 인종유형 또한 명확히 확정되진 못했다. 그러나 한신강(韓康信)과 반기풍, 두 분 선생은 비교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황하 중류 일대에는 머리뼈형이 높은 머리뼈(상하길이), 중간정도의 얼굴나비와 얼굴높이, 중간정도로 낮은 눈자위형, 좀 넓은 코형, 좀 납작한 얼굴 및 윗턱의 잇몸뼈 돌출정도[上齒槽突頷, 윗턱의 치조돌기], 그리고 중간정도의 사람키 따위의 특징이 우세한 신석기시대 주민이 활동했었다. 이들은 전설의 화하(華夏)집단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은 하(夏)민족의 인종유형은 적어도 몽골인종의 북아유형에 귀속될 수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역주: 소위 ‘북아유형’은 낮은 머리높이형에 속한다). 또한 이 설은 인종학적 각도에서 하(夏)민족과 흉노민족의 족원이 동일할 가능성을 잘라내는 것이다.
(2) 흉노와 하(夏), 강(羌)의 언어
언어는 민족의 한가지 중요한 특징이거니와 민족을 형성케하는 한가지 중요한 요소다. 여러가지 인류공동체의 특징 및 그 발전법칙을 연구할 때, 언어는 가장 눈에띠는 민족학적 심벌[標誌]이다.
흉노민족의 언어문제를 두고, 흉노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는 흉노어가 알타이어계통 어족에 속한다고 보는 데는 현재 일치하고 있지만, 이 어족계통 중에서 대관절 몽골어일지 아니면 투르크어[突厥語]일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흉노어 자료 또한 많지 않다.『사기•흉노열전』은 흉노사람을 두고 “문서는 없고 언어로써 약속을 했다 [無文書, 以言語爲約束]”고 말했고,『후한서•남흉노전』또한 호연씨(呼衍氏) 등 대성(大姓)을 두고 “재판이나 송사를 맡아 (처벌의) 경중이 결정되면 구두로 선우에게 보고하지만 (이를) 적어두게할 문서는 없다 [斷獄聽訟, 當決輕重, 口白單于, 無文書簿領]”고 말했다. 현존하는 흉노어 어휘는 서한(西漢)때 사람들이 한어(漢語)로 소릿값을 옮겨 둔 것이 남아 내려왔을 따름이다.
하(夏)민족의 언어문제를 두고, 비록 지금껏 실마리를 찾는 단계에 있지만, 가까운 몇 해 동안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한가지 문제는 벌써 풀렸는데 가히 믿고 따를만 한다.
이밖에도, 진작부터 정설로 자리잡았지만, 강족(羌族) 언어 역시 시노-티벳어 계통에 속하거니와 결코 흉노언어와 뭉뚱그려 이야기할 수 없다.
흉노족 호랑이-멧돼지싸움무늬 금장식패 (춘추~전국)
(3) 흉노와 하(夏), 강(羌)의 토템
토템은 씨족의 별칭 혹은 심벌이다. 토템숭배는 자연숭배를 바탕으로 발전해 온 것인데, 이것과 모계씨족은 동시에 발생하거니와 원시씨족사회의 사회적 산물이다.
흉노의 토템은 어떠했을까? 어떤 사람은 용(龍)이 토템이었다고 여기는데 한동안은 일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흉노의 다른 여러 씨족 또한 기타유형의 토템을 가졌을 법하다.
강(羌)의 토템은 어떠했을까?
하(夏)의 토템은 어떠했을까? 가지가지 전설에 근거한 가지가지 설이 있다. 율무[薏苡] 토템설, 돌 토템석, 곰 토템설, 물고기 토템설, 용 토템설 등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들 토템을 두고 하족(夏族)체계의 구성성분일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중국 고대 토템 연구는 전반적으로 아직 넉넉치 못하거니와 상세하고 믿을만한 재료도 드물기 때문에, 대다수가 (억측에 가까운) 추측이다. 그래서 기껏해야 약간의 민족에 대한 족원의 동일여부를 두고 토템이 서로 같은지 않은지 가릴 땐 그것들을 참고할 수도 있겠으나, 논거로 삼기엔 과학성이 모자르다. 용 토템 숭배만 두고 말해 보더라도 중국에서는 또한 古월인(越人) 및 묘(苗), 태(傣) 등과 같은 적지않은 민족의 토템과 연관된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이들 민족이 용을 토템으로 삼았다고 해서 반드시 하(夏), 흉노 등의 민족과 족원이 똑같아야 한다곤 결코 생각지 않는다.
(4) 흉노와 하(夏), 강(羌)의 고고학적 문화
국내외에서 발견된 흉노민족에 속하는 고고학적 문화유물과 국내에서 발견된 하(夏)민족에 속하는 고고학적 문화유물 및 古강인(羌人)에 속하는 고고학적 문화유물은 각자 다른 고고학적 문화의 구역•계통•유형에 속함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면의 제한상 수많은 고고학적 문화현상을 늘어놓아 비교분석을 할 순 없었고, 때문에 여기서 필자는 단지 제목만이라도 내걸어 두자고 생각했다. 관련된 주제는 따로 글을 써서 논술하겠다.
흉노족 수레장식용 악세서리 (춘추~전국)
성씨로 보는 흉노와 타민족 관계
성씨(姓氏)는 사회구조 가운데 일종의 혈연관계를 마킹하는 심볼이고, 때문에 성씨의 동일여부로도 민족의 동일여부를 구별할 수 있다.
부락연맹은 민족을 형성시키는 모체이고, 부락은 약간의 씨쪽으로 이루어져있다. 씨족-부락은 단일•불변의 공동조상을 지닌 순수혈통의 인류공동체이다. 성씨는 씨족조직의 한가지 심볼인데, 성(姓)은 종족의 호칭이고 씨(氏)는 성(姓)의 갈래다. 성씨의 근원[來源]은 주로 다음과 같다.: (1) 혈연적 팩터이다. 예컨대 사(姒), 희(姬), 강(姜) 등 모계를 따랐던 옛 성(姓)과 같은데, (『설문해자』에 따르면) “성(姓)자란 사람의 출신[所生]이다. 여(女)자와 생(生)자에서 (글자모양을 본떠) 뜻을 얻었으되, 소릿값은 생(生)자에서 따왔다 [姓, 人所生也. 從女, 從生, 生亦聲.]” (2) 지연적 팩터이다. 예컨대 황제(黃帝)의 본디 성(姓)은 공손(公孫)이지만 “희수(姬水)에서 성장했기 [長於姬水]”때문에 뒷날 희성(姬姓)으로 고쳐졌다. 신농씨(神農氏)도 “강수(羌水)에서 성장했다하여 강성(羌姓)이 되었다 [長於羌水, 故爲羌姓]”고 한다. (3) 토템의 명칭으로부터 발전해 나왔다. “운남성 신평현[新平] 양무(陽武)마을 로괴대채(魯魁大寨)의 이족(彝族) 사람은, 방성(方姓)은 새끼 노루가 탈바꿈되어 나온 것이고, 양성(楊姓)은 면양(綿羊)이 탈바꿈하여 나온 것이고, 범성(范姓)은 물소가 탈바꿈하여 나온 것이고, 장성(張姓)은 푸른얼룩비둘기[綠斑鳩]가 탈바꿈되어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 이밖에 또한 나라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든지 벼슬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던 것들도 있다. 성(姓)은 종종 씨족 구성원이 태어난 씨족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같은 성(姓)을 가진 씨족부락은 이들 씨족부락 사이의 혈연관계를 나타낸다. 사회의 발전은 씨족-부락제도를 허물어버리게끔 하는데, 사람들은 혈연연대의 속박을 깨트려고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유동적으로 교류하거나 섞여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본디 태어난 소속이 다른 부락의 사람들끼리 점차 동일한 언어의 사용 등 어엿한 공동지역의 특징을 지니게 되고, 이에 따라 민족의 모체(母體)가 태어나 발전한다. 이와 같은 까닭에서, 고대 성씨의 구성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고대민족의 족원을 찾거나 민족사이의 관계를 식별하는데 있어서 참고가치가 높은 한가지 실마리를 가져다준다.
『사기•흉노열전』,『한서•흉노전』, 그리고『후한서•남흉노전』에 의하면, 흉노가 나라를 세울 적엔 황족인 연제씨(攣鞮氏) 외에도 호연씨(呼衍氏)와 란씨(蘭氏)라는 두 귀족 씨족이 있었고, 뒷날에 수복씨(須卜氏)도 있었으며, 동한(東漢)시기에는 이름난 씨족으로서 구림씨(丘林氏)도 더해있었다. 남흉노(南匈奴)때가 되자, 우한씨(于韓氏), 당우씨(當于氏), 호연씨(呼衍氏), 랑씨(郞氏), 그리고 율적씨(栗籍氏) 등 각 씨족 출신의 골도후(骨都侯)도 있었다.『진서•북흉노전』에서 흉노를 두고 말하길, 호연씨(呼延氏), 복씨(卜氏), 란씨(蘭氏), 그리고 교씨(喬氏) 등의 씨족 출신 사람이 대대로 높은벼슬을 맡아본다고 했고, 또한 ‘사내들은 굳세되 걸핏하면 배반을 일삼는 [男健而好反叛]’ 기모씨(綦母氏), 근씨(勤氏) 따위의 씨족도 있다고 했다. 위•진(魏晉)시기에 이르러 흉노에는 또 도각씨(屠各氏)와 저거씨(沮渠氏)라는 두 새로운 귀족 씨족이 나타나있었다.
『춘추』, 『좌전』,『국어•周語』, 그리고 한(漢) 왕부(王符)의『잠부론•志氏姓』등의 역사문헌기록에 따르면, 적적(赤狄)에는 동산고락씨(東山皐落氏), 로씨(潞氏), 갑씨(甲氏), 유유(留籲), 탁진(鐸辰) 따위의 부락집단이 들어가있고, 적적(赤狄)의 통치집단은 본디 성(姓)이 외(隗)였는데 뒤에 운(妘)과 희(姬) 두 성(姓)으로 녹아들어 갔었다. 또한 백적(白狄)에는 선우(鮮虞), 비(肥), 그리고 고(鼓) 따위의 부락집단이 들어가있고, 그 족성(族姓)은 항(姮)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선우(鮮虞)의 통치집단은 또한 희성(姬姓)으로 되었다. 장적(長狄)의 족성(族姓)은 칠(漆)인듯하다.
하(夏)의 성씨를 두고『사기•夏본기』에서 말하길, ‘우(禹)는 사성(姒姓)이었지만 그 뒤에 분봉(分封)되면서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썼다. 때문에 하후씨(夏后氏), 유호씨(有扈氏), 유남씨(有男氏), 짐심씨(斟尋氏), 동성씨(彤城氏), 포씨(褒氏), 비씨(費氏), 기씨(杞氏), 증씨(繒氏), 신씨(辛氏), 명씨(冥氏), 짐과씨(斟戈氏)가 있었다 [禹爲姒姓, 其後分封, 用國爲姓, 故有夏后氏, 有扈氏, 有男氏, 斟尋氏, 彤城氏, 褒氏, 費氏, 杞氏, 繒氏, 辛氏, 冥氏, 斟戈氏]”고 했다.
위 세 고대민족의 성씨를 쭉내려 비교해보면 이 세 민족 사이 어디에도 서로 똑같은 곳을 볼 수 없다. 바꿔말하면, ‘성씨학(姓氏學)’의 각도에서 흉노와 북적(北狄), 하(夏)가 동일한 족원에 속할 가능성을 도려내었다.
흉노족이 장식하던 호랑이머리 악세서리 (전국시대)
흉노 형성과 발전 단계설의 안팎
흉노 족원에 대한 네가지 관점 중에서 실제로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귀방(鬼方), 혼이(混夷), 훈죽(獯鬻), 험윤(獫狁), 융(戎), 그리고 북적(北狄)은 흉노(胡)와 일맥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 그리고 흉노가 하후씨(夏后氏)의 묘예라는 설이었다. 이 두 관점에 대한 반박을 통해서, 필자는 이 두가지가 성립할 수 없거니와 응당 도려내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한가지 새로운 가능성 즉, ‘흉노민족의 형성과 발전 단계설’을 제안한다.
흉노의 형성과 발전에서, 앞단계는 흉노민족의 일원(一元)형성시기인데, 즉 흉노민족의 주체가 직접 원시사회 말기의 부락연맹으로부터 탈바꿈하여 나온것으로서 이 중에 기타 ‘노민족(老民族)’의 성분은 없다. 뒷단계는 흉노민족의 다원(多元)발전시기인데, 즉 녹아들어가 다종민족(多種民族) 성분이 되어있었다. 눈여겨 볼 가치가 있는 것은, 뒷단계에서 흉노민족은 두리뭉실하게 확대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흉노가 통치하는 강역내에는, 동화(同和)된 부락과 민족 말고도, 또한 오환(烏桓), 선비(鮮卑), 그리고 정령(丁零) 따위와 같은 수많은 피정복 부락과 민족도 있었는데, 이들은 비록 흉노의 통치 아래에 있을지언정 변함없이 자신의 민족특징을 간직한 채 동화되진 않았었다. 바로 이와 같았기 때문에, 흉노민족이 쇠락하여 서천(西遷)한 뒤에도, 원래 ‘흉노’라는 이름으로 뭉퉁그려 불리던 어떤 부락과 민족이 분화되어 나와서 재차 발전하여 우뚝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개념을 짚어두는 것이 좋겠다. 첫째, 세로방향이데, 즉, 흉노민족의 형성과 발전의 단계성이다. 둘째, 가로방향인데, 즉, 흉노민족 주체구성의 배타성이다.
이러한 점들이 흉노 형성과 발전 단계설 개념과 속뜻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설을 바탕으로 흉노민족 형성과정의 윤곽을 얼추 분간할 수 있을까? 필자는 아래와 같이 시도해 보았다.
앞글에서 다루었던 흉노인종의 분석결과로 미루어보아, 흉노민족의 선조는 본디 대막(大漠) 이북에서 길게는 대략 “1천년 남짓 [千有餘解]” 활동했을 법하다. 한(漢) 초에 누경(婁敬)은 흉노를 두고 “본디 북해(北海, 일반적으로 지금의 바이칼호를 가리킨다) 물가에 자리했었다 [本處北海之濱]”고 말했는데, 이 대목은 방증재료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뒤에 그 중심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대략 기원전 4세기 말에는 중원 제후국과 접촉하여 역사문헌에 보이기 시작했다.
흉노가 이때 남하한 원인을 두고 짐작하자면,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전반적인 기후변화 흐름과 잇닿아있을 듯하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중국의 기후역사상 근 5천년 동안에 4번의 한랭기가 있었는데, 가장 기온이 낮았을 때는 대체로 기원전 1000년, 서기 400년, 1200년 그리고 1700년 무렵이었다. 이들 해의 평균기온은 섭씨 1~2도 내려갔는데, 즉 등온선이 남쪽으로 200~300km 이동한 것으로서 장성(長城) 라인에 있던 것을 황하(黃河) 이북까지 떠밀어냈다. 이러한 경향은 동쪽으로부터 서쪽을 향해 전개되었다. 이밖에도, 4~6세기와 11~13세기에 아시아대륙은 딱 건조기에 놓여있었다. 이런 자연조건의 변화시기는 중국 서기 400년 무렵의 ‘5호16국’과 딱 알맞거니와, 서기 1200년 무렵의 거란(契丹), 여진(女眞), 그리고 몽고(夢古), 그리고 서기 1700년 무렵 청(淸)의 입관(入關)과 서로 잘 들어맞느다. 이런 현상을 결코 단순한 우연이라 치부할 순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북방초원지역의 자연지리 조건과 유목경제의 특징 또한 흉노 남하의 중요한 원인이다. 첫째, 북방초원지역의 자연지리환경은 흉노 유목경제의 단일성을 불가피하게 했다. 수공업과 농업도 있긴했지만 차지하는 비중은 몹시 낮았다. 둘째, 유목경제는 그 생활의 유동성을 불가피하게 했다. 유목민의 이동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고정된 노선을 따라서 전통적인 범위내에서 왕복을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적인 고정성은 천재지변이나 기타 지역 유목민의 간섭에 의해 파괴당하기 쉬웠고, 때문에 경우에 따라선 평상시보다 대규모로 먼곳까지 이주하도록 내몰리기도 했다. 셋째, 유목경제의 취약성이다. 즉, 자연재해에 대한 대처능력이 대단히 낮았다. 바람, 눈, 혹한, 가뭄, 그리고 돌림병을 하나라도 만나서 가축이 셀수없이 죽기라도 한다면, 유목민의 생활과 재생산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는다. 예컨대『사기•흉노열전』,『한서•흉노전』, 그리고『후한서•남흉노전』에 따르면, 기원전 104년 겨울, 기원전 89년, 기원전 71년 겨울, 기원전 68년 그리고 서기 46년 무렵에 흉노지역은 그러한 상황 아래에 놓여있었다. 이와 같은 경제상의 불안정성은 흉노의 정권과 나라힘을 느닷없이 더욱 세게했다 약하게했다 들쑥날쑥하게 만들었다. 경제상의 단일성은 대외교환의 수요를 불가피하게 했다. 생활상의 유동성은 자연스레 경제적 격리상태를 쉽게 돌파하게 만들거니와, 경제상의 특수한 취약성은 외부세계와의 교환을 더욱 절실하게 내몰았다. 당시 몽골초원의 동, 서, 그리고 북 삼면에는 모두 경제유형이 비슷한 민족이 분포해서 그와 같은 수요을 채울 방도가 없었고, 남면에 있는 중원의 농업지역이 유일한 교환시장이었다. 더군다나 농경지역과 목축지역 사이에는 거대한 자연장벽이 없었고, 또한 하투(河套)와 같이 농경에도 알맞거니와 목축에도 알맞은 과도지대는 농경민과 목축민이 교류를 벌릴 수 있는 다리노릇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자연상 그리고 경제상의 여러 팩터는 강대한 동력(動力)을 끌어모아 북방유목민족이 1천 몇 백년이나 흐르도록 끊임없이 ‘남향운동(南向運動)’을 되풀이하도록 부추겼다. ‘유목세계’와 ‘농경세계’의 관계는 때로는 군사충돌로 나타나기도 했었다.
기원전 3세기 말기에 이르러, 아직 설익었지만, 흉노민족은 형성되어 있었다. 흉노역사상 첫번재 선우(單于)인 두만(頭曼)은 막남(漠南) 음산(陰山) 북쪽기슭의 두만성(頭曼城)에 왕정(王庭)을 세웠는데, 그 세력은 장성(長城)을 돌파하고 하투(河套) 이남지역을 점령했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秦始皇)은 몽염(蒙恬)을 파견하여 ‘하남땅 [河南地]’을 수복했고, 두만선우는 진(秦)나라를 이기지못하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기원전 209년, 중원 각지에서 병사가 일어나 진나라에 등을 돌리자, “이로부터 흉노는 널널함을 얻어 차츰 도로 하남(河南)까지 넘어와 중국과 옛 새(塞)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於是匈奴得寬, 復稍度河南與, 中國界於故塞].” 서한(西漢) 원제(元帝) 때, ‘변방의 사정을 잘아는 [習邊事]’ 낭중(郎中)인 후응(侯應)이 말했다: “제가 듣기론, 요동(遼東)까지 이르는 북녁 가장자리의 새(塞) 바깥에 음산(陰山)이 있는데, 동서로 1천 여 리이며,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짐승이 많다고 하더이다. 본디 묵돌(冒頓)은 거기의 (지형이) 험함에 의지하고 있다가, 활과 화살을 만들거나 고쳐서, 약탈을 찾아 나왔다하니 이곳이야말로 (흉노의) 놀이동산[苑囿]입니다. [臣聞北邊塞至遼東, 外有陰山, 東西千餘里, 草木茂盛, 多禽獸, 本冒頓依阻其中, 治作弓矢, 求出爲寇, 是其苑囿也.]” 묵돌선우는 원래 음산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에, 흉노의 묵돌선우는 북방제후를 정복하고 국가를 형성하여 북방초원지역에서 독립했고, 아울러 그
간추려 다시 말하자면, 흉노의 선조는 본디 막북에서 나왔으되 민족형성의 발상지는 음산 일대이고, 민족이 크게 발전한 시기의 중심은 막북으로 되돌아갔다.
내몽고출토 서한시기 흉노족 부녀의 귀걸이, 머리장식, 마노(瑪瑙)머리띠
민족 형성과 발전의 과정은 응당 단계성과 다양성을 가진다. 다른 민족 또한 응당 다른 역사와 길을 가진다. 그래서 민족이란 그 본체가 기타민족의 수많은 특징과 다르기 때문에 민족을 이룬것이고, 따라서 식별성을 가질 수 있다. 그 개별적인 특징을 봐서, 다소의 민족끼리 공유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민족의 전모를 설정하더라도 이는 또한 이 민족의 독특함을 드러낼 따름이다. 민족의 역사는 굉장히 복잡한 과정인 것이다.
흉노의 족원은 역사상 풀기 어려운 문제의 하나다. 역사문헌과 고고학적 자료의 부족에 따른 어려움 또한 몹시 많아서 체계적인 분석연구를 벌릴 방도가 없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역사 수수께끼의 열쇠를 찾아 풀어서 흉노역사의 참모습을 복원하려고 간신히 역사문헌과 고고학적 자료에서 문장을 만들어바야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는 마땅히 역사학, 고고학, 체질인류학, 문화인류학, 민족학, 언어민족학, 성씨학, 종교부호학, 자연과학방법 및 수단, 그리고 상상력내의 논리적 추리를 아울러서 흉노역사에 대한 종합성 연구를 해야만 할것이다. 그래서 한걸음씩 역사 논리성에 부합하는 가장 믿을 만한 결론을 찾아야할것이다.
첫댓글 오오...이번에도 역시 좋은 논문, 무지무지 감사합니다. ^^ 가져가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