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목석연한 사람도 백번쯤 읽으면 시인을 만드는 박용래 시집 <강아지풀>, <백발의 꽃대궁>, 시전집 <먼 바다>를 거명하면서 [시집여행]의 닻을 내립니다. 20대무렵에 오매불망하던 시집 위주의 여행이어서, 제 마음 속에 아직 '연두빛'이 남아있던 시절의 이야기라서 감상적 주절거림이 넘친 것은 오해해 주십시오. 탁주 한 순배 돈 다음, 기형도, 고정희, 이성복, W.B.예이츠, 빈센트 밀레이 등 사랑하는 시인을 찾아뵙지요.
...............................................................................................................................................................
[시집여행] 박용래 시집 <강아지풀>
-------------------------------------------------------------------
부르면, 어느새 눈가를 적시게 만드는 이름이 있다.
언제나, 가슴 한 켠 은비늘로 반짝이며 새겨지는 이름이 있다.
환해진, 마음 자리 너머 눈부신 신록처럼 빛나다가도 11월 빈 수수밭가를
지날 때 무심히 듣는 서걱이는 갈바람 소리 같은 이름이 있다.
이 땅의 허다한 시인의 이름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올 때라든가 책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어느새 내 생각은 23년 전 가
을 11월 23일의 충남 산내면 삼괴리 양지녘 천주교 묘지가 떠올려지고,
내 순정한 새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이름과 그리운 모습이 사무치게
메아리친다.
한 작은 인연을 나불댐으로 하여, 행여 그 분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
까 저어하는 마음으로 내 스무 살 무렵 결코 잊을 수 없는 시인과 시인의
시집을 여행하면서 살큼 떠올리는 그리움을 달랜다. 이 그리움의 정
체는 단순히 시간의 거리를 애틋해 하는 감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되물릴 수 없는 시간의 환한 쪽과 빛나는 내 눈빛에 대한 회한(悔恨)이
다분히 섞인 그리움'이다.
박용래 (朴龍來) 시인!
'내게 시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내성(內省)의 질문을 처음으로 하게
만든 시인. 박용래 시인의 함자를 처음 본 것은 대학 1년생이던 1978년
6월 7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분을 처음 뵙게 된 것은 그 해 6월
22일 대전시 오류동(五柳洞) 한 선술집에서였다. 그 선술집 이름은 애
석하게도 적어놓지 않았다. (아마 단골집이니까 늘 기억하겠지 하고 기
록을 안했을 거다. 정확치는 않지만, 아마도 '버드나무집'이었지 싶다.
'기록은 총명함보다 낫다'는 말을 새삼 실감한다.)
그렇지만, 그때 풍경은 분명히 기억난다. 오류동에 살던 강석순이란
문과대 동기와 한참 말붙이기를 하고 같이 어울려 그의 집 앞에 있는 선
술집으로 갔다. 딱히 술을 마시기 위함보다, 학교에서 뭔가 토론을 하
며 그의 집 앞까지 왔기에 가까운 곳에 가서 남은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었는데, 이 '강석순'은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술고래였다. 강석순은,
충북 중원(지금은 충주)에서 온 촌놈에게 뭔가 확실하게 한 수
가르치려는 속셈으로 나를 술집으로 데리고 갔음이 분명하다.
(석순이는 이름은 그래도 머슴애이다.)
그때 시간이 해가 갸웃 기우는 저녁 무렵이었다. 술집이 서향으로 문
이 나있어 해질 무렵의 잔광이 미닫이문에 얼비쳐 오던 것도 지금 선명
히 기억난다. 그렇지만, 그 해질 무렵이 무에 그리 중요하리요.
그것은 아무래도 괜찮다. 그런데,
아아 거기서 박용래 선생님을 뵙고 말았다. 바로 그
해질 무렵이 박용래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는 내게 상징처럼, 은유처럼,
혹은 어떤 예감처럼 생각날 때가 많다. 석순이가 주모에게 막걸리를 주
문하려는 찰나, 웬 곰삭은 중늙은이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주모를 보고 벼락을 쳤다.
"강경댁, 저리 강~ . 노을을 가리잖어!"
그때 주모 강경댁(물론 그녀 밖에 없었으니까)은 "선상님 죄송혀유 어
쩌구" 하면서 덴겁하듯 자리를 비켰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중
늙은이의 술상에는 책 한 권과 흰 종이와 볼펜이 놓여 있었다. 그 중늙
은이의 얼굴에는 이제 막 발그스름하게 미닫이문을 통해 석양빛이 물들
고 있었으며, 꿈꾸는 듯한 소년의 눈빛으로 방금의 호통이 언제였냐
싶게 언짢은 표정을 순식간에 녹이고 지극히 평화롭게 자신의 세계에
빠져든 그 얼굴이라니!
석순과 나는 그저 무엇에 질린 듯 얼이 빠진 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막걸리를 주문했다. 그것은 처음 보는 사람이 만드는 전혀 예기치
못한 낯선 풍경이었다.
잠시 뒤 그 중늙은이는 울음반 떨림반 섞인 울먹이는 소리로 시인지
푸념인지를 읊조렸다. 숨 죽인 채 듣고 있노라니, 바로 얼마전 사서 읽
은 잡지 <한국문학 5월호>에 나오는 시를 읊조리는 것이었다.
시 '진눈깨비'.(그냥 쓱 훑어보듯 지나치며 본 시가 제목이랑 대강의 내용이
정말 어쩐 일인지 섬광처럼 떠올랐다.)
진눈깨비 (전문)
중학교 하급반 땐 온실 당번이었어라. 질펀히 진눈깨비라도 오는 늦
은 下午라치면 겨운 석탄桶 들고 비틀대던 몇 발자국 안의 설핏한 어
둠. 지우고 지워진 지 오래건만 강술 한잔에 떠오누나. 바자 두른 온실
二重窓에 볼 비비며 눈 속에 벙그던 히아신스랑 福壽草랑 오랑캐꽃 빛
깔의 指紋, 또 하나의 나. 오 비틀거리며 떠오누나. 바랜 트럼펫의 흐
느낌.
----언뜻 어제 등에 업혀 가던 사람.
끊어질 듯 이어지듯 가느다랗게 읊는 시, 내용은 별로 알 턱이 없는
내게 그 절절한 낭송이 가져다주는 숙연함으로 석순과 나는 멍하니 그
분을 쳐다보았다. 허공에서 눈길이 딱 마주쳤는데, 살포시 웃으시며,
그리곤 중늙은이는 막걸리 주전자를 쓱 내밀면서, "술 배우러 온 학생들
같은데, 한 잔 받게."하시며, 막걸리를 사발에 넘치게 따라주었다. 약
간 머쓱하고 황당해 하며, 석순이가 먼저 술을 받고, 나도 받았다.
"죄송스럽지만, 방금 암송하신 시가 진눈깨비 아닙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중늙은이는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어어어! 하는 표정을 지었
다. 감격해 하는 그 자체였다. 아, 바로 그 중늙은이가 박용래 시인이
었다. 내가 면전에서 시인을 첫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정현종 시인의 <고통의 축제>와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가 나온
민음사의 시리즈로 나온 하늘색 표지 시집<강아지풀>의
시인 박용래 선생님.
당시 쉰넷이셨는데도 환갑을 지난 모습에 아이 같은 눈빛을 간직
하신 선생님을 그렇게 처음 뵈었다. (어찌보면 너무나 하찮은 개인적인
뜻만 있을 뿐인 한 시인과의 만남을 좀 지루하게 묘사한 것은 짜장 미
안한 짓이지만, 나는 내 기억과 기록의 곳간을 위해 더욱더 길게 쓰고
싶은 심정이다. 천하에 널린 것이 사람이며, 날마다 석양빛은 우리 곁을
찾아오건만 그처럼 깊게 각인되는 '사람과 낯선 시간의 만남'은 그리
흔치 않다.
그 만남 이후로 꼬박 이태 반 동안 그 술집에서만 20여 차
례 시인을 뵈었으며, 앞서 박용래 시인이 산내 양지녘에 묻히실 때까
지, 흠모의 마음으로 그림자를 쫓던 기억에 내 '시집 여행'은 어쩌다
'시인 여행'이 돼버렸다.)
(나중에 이 선술집에서 쉰넷 먹은 소년을 스물 하나 먹은
아희가 선생님으로 모시기로 조인식을 했으며, 막걸리 두 되를
사야했으며, 그중 한 되를 마셔야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가슴에만 묻어두자!
그것의 의미와 향기는 아무리 사실적으로 혹은
시적(詩的)으로 표현을 한다고 해도, 그 깊은 아우라는 변죽만을 울릴 뿐
이다. 한 개인의 마음속에 아무리 우주 만하게 자리잡은 아우라라고 해
도, 들쑤셔 세상에 보여줄 것이 있고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건 그렇고, 이제 박용래 시인의 <강아지풀>로 여행을 떠난다.)
강아지풀 (全文)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驛 構
內 모퉁이 어메는 노
오란 아베도 노란 貨
物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
마른 枕木은 싫어 삐
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뿌
리는 동네로 다시 이
사 간다. 다 두고 이
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喪輿 소
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이런 정경. 그대들 아시는지요? 지금 당장 눈앞에 이런 정경이 잘 보이
지는 않더라도, 가만히 귀기울여 보면, 그 옛날 언젠가 핏줄 속을 잉잉
거리며 달리는 아련한 어떤 기억이 가물거릴 것이다. 어떤 영화 속에
우리네 한 세대나 혹은 그 윗세대쯤 되는 사람들이 무명옷을 입고 보퉁
이를 이거나 옆에 낀 채 '희망이라든가 생명의 환희와는 거리가 먼
묵묵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유민(流民).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떠도는 백성.
비교적 안정된 농경사회를 구축했던 조선시대조차
전쟁을 피해서 혹은 가뭄으로 유민이 많았다.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급격한 산업화로 대대적인 이농현상(離
農現狀)으로, 도시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런 사람들이
'일상에 지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곤곤한 표정으로 기차역을 빠져나오
는 정경'을 담담히 보여주는 시 '강아지풀'에서는 왠지 모를 서글픔과
아련함이 밀물져온다.
정겹게 부르면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맞이해 주는
복슬강아지 꼬리를 닮은 풀-강아지풀. 하찮게 지천으로 널린
강아지풀에서 시인은 중뿔나게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의 시름에 지친 표정을 읽었다.
반딧불 뿌리는 동네로 다시 가는 이사.
그런 곳으로 이제 다시는 누구도 이사 가지 못하리라.
이제 그런 동네는 사라지고 없다. 그렇지만, 아주 없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도시 변두리의 달동네 또한 이런 정경을 보여준다.
단지 식물인 '강아지풀'에서 이런 이미지를 끌어
들여오기가 어렵겠지만.
下棺 (全文)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이 시는 별다르게 풀어볼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 농촌 어디서든 가을
걷이가 다 끝나고, 잎 진 나무들 사이로 비껴드는 하오의 햇빛을 역광
으로 받으며, 무심하게 걸어보는 들녘에서 마주치는 정경들.그러나, 그
저 어슷비슷한 '가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관(下棺)은, 두루 아시다
시피 죽은 사람을 넣은 관을 광(무덤 안)에 내리는 마지막 행위(taking
down the coffin)이다. 묻어야 할 대상(사람 내지는 추억이든 무엇이든지
간에)은 그 모든 세상과의 연(緣)을 끊고, 광활한 우주 공간 내지는 무
(無)의 세계로 가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슬프냐는 러시아 동화 가운데서
일컬어지는 걸 굳이 따오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가장 슬퍼하는 것은 "모든 이별!"이다.
이별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돌이나 나무도막과 다를 바 없다.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 下棺' 은, 시속의 화자가 관찰한 세계와의 결
별이다. 그 엄연한 하관의 풍경을 '이제 막 북녘으로 날아가려고 날개를
간추리는 첫 기러기떼들이 전깃줄에 앉아, 같이 울어준다. 이 얼마나 놀
라운 '자연의 전송인가?' 아무리 헤어짐(죽음)이 슬프다해도 울어줄 기러
기(새)가 있다면, 그 헤어짐은 축복임에 틀림없다.
1978년부터 79년까지, 내 곁을 떠나간, 죽음들을 전송하면서, 이 시를
읽으며, 박용래 선생님과 울었던 밤도 떠올려진다. 사랑하는 누님과 자폐
증세를 보이던 친구의 까마득한 곳으로의 헤어짐은, 새파란 청년 상우에
게는 숨길 수 없는 슬픔 그 자체였다. 그러한 내 어설픈 마음자리가 용래
선생님에게도 전해졌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해 9월 어느 날 예의 석순이와
함께한 자리에서 용래 선생님이 한 말씀 하신 것이 이때껏 잊을 수 없다.
"눈물은, 남을 위해 보낼 수 있는 제일 소중한 보석이다. 허나, 결코
나약하게 자신을 위해서 울지는 마라.
자신은 죽고 나면 충분히 울 수 있는 것!"
이렇게 자꾸만 늘여 쓰다가 보니, 박용래 선생님이 일반적인 세평처럼
<눈물의 시인>이라는 것을 보태는 꼴이 되었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당시, 저 펄펄 살아 숨쉬는 평론가 조연현 선생(1950년대부터 70년대까
지, 잡지<현대문학>을 이끌고 한국펜클럽을 주도하던 분으로, 나는 몇 가
지 기억이 나지만, 본 줄기가 아닌고로 줄이고…….)께서, 어느 평문에서
한 글로 하여, 박용래 시인이 널리 알려졌다.
뭐, 이런 평가야 평론가들의 수사(修辭)라 해도, 한국 서정시를 연구하고
흐름을 살리려면, 간과해서는 안될 빼어난 시를 빚은 시인 가운데,
박용래 선생을 놓칠 수는 없으리라.
선생의 시 가운데 나는 특히 <월훈(月暈)>, <구절초(九節草)>, 낙차(落
差)>, <백발의 꽃대궁>, <먼 바다> 같은 시를 깊이 사랑한다.
그러나, 시집 <강아지풀>은, 절판 되어 거의 구할 수 없다. 그 대신, 창
작과비평사에서 펴낸 박용래 시전집(詩全集) <먼 바다>는 아직 거듭해서
출판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거기엔,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선생님이
"그리움에 다함이 없어 박용래의 행장기(行狀記)를 적는다"는 발문도 실려 있다.
(그걸 보면, 시인 박용래의 모습이 잘 정리되어 있다.)
사족이지만, 박용래 선생님의 하관(下棺) 때, 나는 소설가 이문구 선생님을 처
음 뵈었는데, 내가 이마가 좀더 넓으면, 40대엔 이문구 선생이랑 얼굴 골
상이 비슷해지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그 날 저녁, 나는 사람이 어찌 저렇게
술을 많이도 마시는지 이문구 선생님을 보고 알았다. 그 '불타는 고구마'같
은 얼굴. 이 또한 잊을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앞부분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말했듯이, 겨우 2년여 선생님을 뵙고
마치 그 분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말하는 이런 에세이에 약간의 회의를
숨길 수 없다.
모름지기, 시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잘대는 참새같이 나불거려
서는 아니 된다. 입방정 글방정은 자칫 진정성을 흐리게 하는
구실을 많이도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