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 이입사행론 二入四行論
궁극에 이르는 길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두 가지란 원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이다. 첫째 원리적인 방법이란 경전에 의해서 불교의 본질을 알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똑같은 진리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감각과 망상에 의해 가려져 있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망상을 등지고 실체를 향한 사람은 벽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거기에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경전을 대하고서도 흔들림이 없으며, 침묵으로 동의하며 이론과 하나를 이루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로 도(道)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실천적인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행(四行)이라고 부르는데, 그 네 가지는 첫째 억울함을 참고,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며, 셋째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넷째 다르마(Dharma)를 따라 사는 것이다. 첫째,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나는 세속적인 삶 속에서 본질을 놓치고 생명의 여러 가지 겉모습을 바꾸어가며 방황해 왔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화를 내었고 까닭 없이 남을 미워하고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과거의 잘못에 대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어떤 신이나 인간도, 잘못된 행위가 어떻게 그 열매를 맺는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열린 가슴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역경을 만나도 걱정하지 말라. 그대의 의식은 그것을 통해서 깨어나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그대는 원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억울함을 참음으로써 그대는 도(道)에 들어서게 된다.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의 자아란 것이 없으며 단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 고통을 당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모두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복된 일, 즉 부와 명성을 얻는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일 뿐이다. 인연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그러니 기뻐할 것이 없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연을 따라오는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요가 없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도(道)를 따르게 된다
. 셋째,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욕망에 빠져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마음을 무위(無爲)에 고정시키고 몸마저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은 불타는 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불타는 집 속에 들어 잇는 한 그 사람은 고통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 속에서 평화롭게 있을 수 있겠는가? 넷째는 다르마(Dharma)를 따라 사는 것이다. 다르마란 만물의 순수한 본성을 일컫는 것이다. 다르마의 눈으로 보면 모든 현상은 공허하게 보인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경에 이르기를 "다르마란 어떤 것도 그것이 존재하는 실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존재한다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곧 다르마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진리를 충분히 체득하여서 다르마를 따라 살게 된다. 그리고 다르마 그 자체에는 그 어떤 것도 보존할 것이 없다. 따라서 다르마를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몸과 소유물을 아낌없이 바친다. 그들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집착도 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남을 수 있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다른 여섯 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 여섯 가지 덕을 행하고도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다르마를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손을 놓는다. 그는 망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것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축복 받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 안에 있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축복이다
보리달마(Bodhidharma)! 나는 내 가슴속 가장 부드러운 곳에 달마를 간직하고 있다. 이제 그 가슴이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해서 입을 열게 한다. 아마도 그는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거의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 어떤 것도 글로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할 때 완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깨달은 사람은 글을 남기지 않으며 달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니 옛사람에 의해 전해진 이 책을 통해서 달마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거의 일천 년 전에 이 책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달마의 가르침이라고 믿었다. 그것을 부정할 만한 증거도 없고 굳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도 없다. 나는 학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달마라면 틀림없이 말했을 내용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그의 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의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 후에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스승이 베푼 가르침을 모아서 제자가 책으로 펴내었더라도, 저자명을 스승의 이름으로 내는 것이 과거의 전통이었다. 그 책의 내용이 제자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스승에게서 나온 것이다. 달마! 그는 나와 너무나 친숙하다. 우리가 그의 어록(語錄)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에 대해 몇 가지 알아두면 좋을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그대에게 달마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어서, 이 어록의 어떤 부분이 그에게 속한 것이고 어떤 부분이 그의 것이 아닌지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달마는 4세기, 남부 인도에 있었던 팔라바스(Pallavas) 제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팔라바스 제국은 매우 큰 나라였다. 그는 그 나라 황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모든 상황을 지켜볼 만큼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뛰어난 지성 때문에 부왕은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는 결국 왕자의 자리를 포기했다. 그는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결심한 것은 단지 세속적이고 사소한 일에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모든 관심은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한, 그는 육체의 죽음을 자신의 종말로서 맞이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진리를 구하는 모든 구도자가 죽음의 문제를 놓고 분투하고 있다. 러셀(Bertrand Russell)은 죽음이 없다면 종교도 없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종교는 드넓은 바다와 같다. 그것은 죽음의 비밀뿐만 아니라 축복과 진리도 찾고 있다. 또한 삶의 의미도 찾고 있다. 그것은 매우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하지만 러셀의 말은 확실히 옳은 구석이 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매우 극소수의 사람만이 종교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데에 하나의 커다란 동기가 된다. 달마는 왕자의 자리를 포기하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부왕께서 나를 죽음에서 구할 수 없다면, 그때는 나의 길을 막지 마십시오. 죽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아가도록 나를 내버려두십시오."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막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의 죽음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탐구를 계속하라. 나로서는 슬픈 일이지만 그것은 나의 집착이며 나의 문제이다. 나는 네가 나의 후계자가 되어 위대한 팔라바스 제국의 황제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너는 그것보다 더 고상한 것을 선택했다. 나는 너의 아버지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너를 막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너는 도무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물어 왔다.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을 말해 준다면 궁전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이다." 달마가 얼마나 뛰어난 지성을 갖고 있었는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점은 달마가 석가모니 부처의 사상을 따랐으면서도 어떤 점에서 그보다 더 높이 날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 부처는 여자가 자신의 제자로서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달마는 깨달음을 얻은 여자를 스승으로 선택했다. 그녀의 이름은 프라기야타라(Pragyatara)였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 이름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단지 달마로 인해서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달마를 중국에 가게 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는 사실 외에, 우리는 그녀에 대해서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달마가 중국에 가기 거의 6백여 년 전에 중국에 불교가 전해졌다. 그런데 거기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부처의 가르침이 중국 사람들에게 전해진 즉시 그들은 쉽게 불교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때 중국은 유교의 영향 아래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교는 청교도와 같이 도덕주의였기 때문이다. 유교는 삶의 내면적 신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외부적인 것에만 집중되어서, 말과 행동을 갈고 닦고 세련되게 만들어서 최대한 아름답게 보이려고 할 뿐이었다. 공자의 사상이 널리 펴질 때쯤, 노자나 장자 또는 열자 같은 사람들도 중국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비주의적 은둔자였을 뿐, 중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유교를 상대할 만한 어떤 운동도 일으키지 못했다. 거기에 공백이 있었다. 아무도 영혼이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대가 한번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대의 삶은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다. 영혼은 그대가 존재하는 모든 의미가 한데 뭉친 것이다. 영혼이 없다면 그대는 존재계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마치 나무가 가지에서 잘려지면 양분을 공급해 줄 근원이 없어져서 곧 말라죽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 속에 영혼이 없다는 바로 그 생각이 그대를 존재계에서 잘라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매우 위대한 합리주의자였다. 노자나 장자, 열자 같은 신비주의자들은 공자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산 속에서 몇 명의 제자들만을 가르치며 조용히 살았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을 때 그것은 즉시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고, 마치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불교는 사람들에게 시원함을 주며 삽시간에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그런 일은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근세에 들어 기독교는 동양의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개종은 종교적인 개종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없다. 그것은 가난한 자, 배고픈 자, 거지와 고아를 개종시켰을 뿐이다. 음식과 의복과 집을 미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런 것은 영적인 것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 이슬람교 역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들은 칼을 들고서 개종을 강요했다. 이슬람교도가 되느냐 아니면 죽느냐, 그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개종이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개종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대규모로 행해진 개종치고는 유일하게 이루어진 영적 개종이었다. 불교 전파자는 그저 불교의 교리만 설명했을 뿐인데도 중국 사람들은 그것의 아름다움을 이해했다. 그들은 그것을 목말라했다. 그들은 그와 같은 것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결국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중국 전체가 불교로 개종했다. 6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달마가 중국에 왔을 때, 이미 거기에는 3만개의 절이 있었고 2백만 명의 불교 승려들이 있었다. 2백만 명이라는 숫자는 작은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승려의 수가 말이다. 그것은 당시 중국 전 인구의 5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였다. 달마의 스승인 프라기야타라는 그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불교를 전하러 갔지만, 그때까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위대한 학자였다. 사랑과 자비와 동정심은 많았지만 깨달은 자는 아니었다. 이제 중국은 또 다른 석가모니 부처를 필요로 했고, 그럴 만한 토양이 준비되어 있었다. 달마는 중국에 간 첫 번째 깨달은 사람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점은 석가모니 부처는 여자가 입문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달마는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여자들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용기가 있었다. 물론 그전에도 깨달음을 얻은 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전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란 여자들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과 부처의 여 제자들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달마의 이름은 석가모니 부처 이후 두 번째로 깨달은 사람으로서 모든 불교도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것 모두가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첫째가 바로 중국의 황제 양무제(梁武帝)를 만난 것이다. 달마가 중국에 들어온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인도를 출발해서 양무제를 만날 때까지 3년이라는 세월을 여행했던 것이다. 한편 양무제 역시 불교 철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불교 경전들을 한문으로 번역시키고 있었고, 수천 개의 절과 수도원을 지었다. 자연히 그는 위대한 덕을 지닌 왕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그들이 만났을 때 양무제의 첫 번째 질문은 당연히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수많은 절을 짓고 수천 명의 학승들을 먹여 살리고 있소. 나는 불교의 진리를 연구하기 위해 많은 대학을 세웠다오. 나는 이 나라를 불교의 보물들로 가득 채워 왔소. 그러니 나는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겠소?" 그는 달마를 보며 약간 당황했다. 그가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달마는 매우 큰 눈을 가졌고 인상은 매우 무섭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사람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무시무시했다. 그가 색안경만 썼다면, 그는 완전히 마피아 두목 같았을 것이다. 양무제 역시 달마를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일반적인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공포이다. 그때 달마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무런 보상도 없소이다. 오히려 일곱 번째 지옥에나 안 가면 다행한 일이오." 황제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소. 왜 내가 지옥에 가야 합니까? 나는 승려들이 하라는 것은 모두 다 했소." 달마가 말했다. "당신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 불교도든 불교도가 아니든 아무도 당신을 도와줄 수 없소. 지금까지 당신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소. 만약 그 소리를 들었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오. 석가모니 부처의 길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소이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탐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오. 불교의 핵심은 욕망을 버리는 것이오. 만약 당신이 절을 짓고 수천 명의 승려들을 먹여 살리는 행위가 훌륭한 공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당신의 마음에는 욕망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지옥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오. 만약 이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행하고 그 즐거움을 이 나라 전체와 함께 나누며 어떤 욕망도 갖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이미 보상을 받은 것이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오."
양무제가 말했다. "내 마음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새벽 네 시경에 일어나 혼자서 이곳으로 오시오. 그렇게 한다면 내가 당신의 마음에 영원한 평화를 주겠소."
황제는 이 사람이 정말로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많은 승려들을 만나 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정중했고 황제의 기분을 거슬리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두운 새벽에 혼자서 이런 자를 찾아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항상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황제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가느냐? 가지 않느냐?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뭔가를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뭔가 진지한 것이 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황제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겠다고 말하니, 오히려 내가 거지이고 그가 황제처럼 보인다. 나는 지금까지 인도에서 온 많은 현자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수행 방법과 명상 기술들을 가르쳐 주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어딘가 조금은 미친 사람 같았고 술 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큰 눈 때문에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것은 충분히 모험을 해볼 만하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결국 그는 호기심을 뿌리치지 못하고 달마를 만나러 갔다. 양무제가 그 절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네시였다. 어둡고 이른 새벽에 그는 홀로 달마를 찾아간 것이다. 달마는 큰 지팡이 하나를 짚고 계단 위에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올 줄 알았소. 당신은 가느냐 마느냐 망설이다가 한잠도 자지 못했을 것이오. 당신은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오. 이 가난한 승려를 겁내다니, 그저 지팡이 하나밖에 가진 것 없는 거지 승려를 말이오. 하지만 나는 이 지팡이로 당신의 마음을 침묵시킬 것이오." 황제는 생각했다. "맙소사! 나는 지팡이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 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지팡이로 머리를 때리면 조용해지겠지. 하지만 그것은 마음이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다. 머리가 깨져서 죽기 때문에 조용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달마가 말했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사원 마당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감으시오. 나는 지팡이를 들고 당신 앞에 앉아 있을 것이오. 당신이 할 일은 마음을 잡아내는 것이오. 그러니 눈을 감고 앉아서 그것을 찾아보시오. 당신이 그것을 잡아내는 순간 나에게 '여기 있다.'라고 말하시오. 그 다음은 내 지팡이가 알아서 할 것이오." 그것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이상한 경험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다른 길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양무제는 눈을 감고 앉았다. 달마가 하는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을 찾아서 모든 곳을 다 둘러보았다. 하지만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지팡이가 효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으로 그는 그런 상태를 경험했다. 만약 그가 마음을 발견하면 이 사람이 지팡이고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한적한 곳에서 그저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성격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달마와 단 둘이 있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많다. 하지만 달마는 그들 중에서도 에베레스트 산처럼 높이 솟아 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자신 속에서 나온 것이지 누구를 흉내낸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마음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는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마음이란 그대가 찾지 않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가 깨어서 그것을 찾는 순간, 그 깨어 있음이 마음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린다. 몇 시간이 흘러갔다. 태양이 떠올랐고 시원한 미풍이 불어왔다. 달마는 황제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와 침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상처럼 고요한 침묵의 표정이었다. 달마는 황제를 흔들어 깨워서 물어 보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소. 그래 마음을 찾았소?" 황제는 말했다. "당신은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고도 내 마음을 완전히 평화롭게 했습니다. 나는 어떤 마음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말한 내면의 목소리를 이제야 듣게 되었고, 당신이 한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나는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보상을 받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누가 나에게 보상을 해주겠습니까? 보상을 받겠다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생각입니다. 또 누가 나에게 벌을 내리겠습니까? 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 보상도 되고 벌도 됩니다. 나는 나의 운명의 주인입니다." 달마가 말했다. "당신은 보기 드문 구도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오. 그것은 황제로서가 아니고 깨어 있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렇소. 당신의 마음에는 빛이 있고 이제 모든 어둠이 사라졌소." 황제는 달마를 자신의 궁전으로 가자고 간청했다. 그러자 달마는 말했다. "그곳은 내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매우 거친 사람이오.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온 사람이고 내일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오. 나는 매 순간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오.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란 말이오. 나는 당신과 당신의 궁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어려움을 끼치게 될지도 모르오. 그곳은 나에게 맞지 않소. 그러니 나를 그저 내버려두시오."
그 후 달마는 태(Tai) 산에 살았다. 그의 두 번째 전설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달마는 최초로 차(Tea)를 발명한 사람이다. 그 '차(Tea)'란 이름이 바로 '태(Tai)'에서 나왔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차(Cha)'라고 불렀고, 힌두어로도 'Chai'라고 쓰는데, 그 발음 역시 '차(Cha)'로 불린다.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마라티어도 바로 '차(Cha)'라고 부른다. 이 모든 말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달마가 차를 발명한 것이 역사적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전설은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거의 하루 종일 명상에 잠겨 살았다. 때때로 잠이 올 때면 그는 잠을 자지 않기 위해 눈썹을 뽑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마당에 던졌다. 마당에 떨어진 눈썹이 차나무로 자라났다. 이것이 최초의 차나무인 것이다. 그대가 차를 마실 때면 졸음이 가신다. 불교에서는 이것도 하나의 명상 과정이 되어 버렸다. 차는 명상을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그대에게 각성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2백만 명의 불교 승려가 있었다. 하지만 달마는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제자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일생 동안 단지 네 명의 제자들만을 입문시켰다. 그리고 그 중에 처음 제자가 된 사람이 혜가(慧可)이다. 그 첫 제자를 찾는 데에도 9년이 걸렸다. 9년이란 세월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달마의 동시대에 기록된 역사서들은 모두 이 기간을 9년이라고 적어 놓았다. 한편 양무제가 떠나간 후 달마는 벽을 마주보고 그저 앉아 있었다. 9년이란 세월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벽만 보고 살았다. 그대가 오랫동안 벽을 바라보면 그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대 역시 점점 벽이 되어갈 것이며 그대 마음의 화면은 텅 비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에게 제자가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 한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겠다."
사람들은 그를 찾아와서 그의 등뒤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무도 벽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달마는 벽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의 등뒤에 앉아 있어도 그는 결코 얼굴을 돌리는 법이 없었고, 겨우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지가 벽과 다름이 없다. 오히려 나를 더 귀찮게 할 뿐이다. 벽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벽은 그저 벽일 뿐이다. 나는 행동으로써 내 제자가 될 만한 자질을 증명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무슨 행동을 해야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다가 9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 날 '혜가'라는 이름의 한 젊은이가 달마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서 달마 앞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당신이 돌아보지 않으신다면 제 머리를 잘라서 당신 앞에 던질 작정입니다." 달마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대야말로 내가 진정 찾고 있던 사람이다. 이제 머리를 자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리하여 혜가는 달마의 첫 제자가 되었다. 후에 달마는 중국을 떠나면서 네 명의 제자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내일 아침 히말라야로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의 뒤를 이을 사람을 결정하고자 하니, 그동안 내가 말한 가르침의 본질을 간단하게 말해 보라." 첫 번째 제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가르침은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며, 절대적으로 침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저절로 흘러갈 것입니다." 달마가 말했다. "그대의 말은 흡족하지 않다. 그대는 단지 나의 가죽을 얻었을 뿐이다." 두 번째 제자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존재 그 자체만 있을 뿐입니다." 달마가 말했다. "조금 낫지만 아직 미흡하다. 그대는 나의 살을 얻었다." 세 번째 제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필요치 않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좋다! 하지만 그대는 이미 그것을 말했다. 그대의 말과 그대의 생각은 서로 모순이다. 그대는 나의 뼈를 얻었다." 네 번째 제자가 말할 차례였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달마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가 바로 혜가였다. 이윽고 달마는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그것을 말했다. 그대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이제 그대는 나의 후계자이다." 그러나 달마는 그 날 밤 다른 세 명의 제자들에 의해서 독을 마시게 되었다. 자신들을 후계자로 뽑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들은 달마를 땅에 파묻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후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그것은 달마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달마가 맨발에 지팡이를 들고 히말라야로 가고 있는 것을 한 관리가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에는 짚신 한 짝이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 관리는 달마를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달마를 보았으며 어느새 그에게 빠져 있었다. 그 역시 약간은 괴짜였던 것이다. 그는 달마에게 물었다. "지팡이에 짚신을 매단 뜻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달마가 대답했다. "그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나의 제자들을 만나면, 내가 히말라야로 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 하더라고 전해라." 그 관리는 즉시 달마가 살던 절로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달마가 독을 마시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달마의 무덤도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달마가 국경을 넘어서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황해하면서 말했다. "맙소사! 나를 이곳에 보낸 사람은 바로 달마입니다. 그 부리부리한 눈은 틀림없이 그분의 눈이었습니다. 그분의 지팡이에는 짚신 한 짝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호기심이 일어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무덤을 파 보았다. 그 속에는 짚신 한 짝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관리는 "그대는 곧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한 달마의 말을 이해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마가 부활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아마 그는 혼수상태 속에서 매장을 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깨어나자 짚신 한 짝만 남겨 놓고 무덤을 빠져나간 것이리라. 그는 히말라야의 만년설 속에서 죽기를 원했다. 무덤도 없고 사원도 없으며 그의 불상도 세우지 않는 그런 곳에서 그는 죽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을 숭배할 만한 어떤 흔적도 남겨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는 허공 속으로 사라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무도 달마에 관해서 듣지 못했다. 그는 히말라야 눈 속 어딘가에 묻혀서 죽은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들은 후세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다. 그 책을 기록한 사람들은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르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도에 대한 말로 가득 차 있었고 거기에서 결국 오해와 왜곡이 비롯된 것이다. 달마는 말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책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숭배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달마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만 가려서 말할 것이다. 그의 말은 이 책 여기저기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과 함께 섞여 있다. 그의 말만을 가려낸다는 것이 학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의 경험에 의해서 그의 말만을 가려낼 수 있다. 마치 쭉정이에서 알곡만 가려내듯이 말이다. 자 이제 그의 어록으로 들어가자.
궁극에 이르는 길은 많다
이 말은 달마가 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진리에 이르는 길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며 아무 곳에도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대는 어디를 향해 가는 행위를 당장 그만두라. 그저 그대가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라.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은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길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 바로 그대 안에 머물러 있으라. 일단 그대가 어떤 길에 들어서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수의 시작이다. 이것이 바로 달마의 말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두 가지란 원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이다. 달마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를 궁극의 실체로 인도하는 이론 같은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이론이란 마음의 장난이다. 그리고 실천의 길이란 더욱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신념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고 그대는 그것을 따라 자신을 훈련시킨다. 그때 그대는 흉내 잘 내는 원숭이 한 마리에 불과하다. 그대의 본래 면목을 결코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실천도 필요 없다. 그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완벽하다. 더 이상 다른 그 무엇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그대는 자신의 존재 속에 정주(定住)하지 않고 주변을 방황해 왔다. 그대가 자신 속에 정주할 때 그때는 두 가지 길이 아니라 어떤 길도 사라지고 만다.
첫째 원리적인 방법이란 경전에 의해서 불교의 본질을 알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똑같은 진리의 본성을 지니고 잇지만 감각과 망상에 의해 가리워져 있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달마는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믿는다'는 말은 장님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믿음이 그대의 시력을 찾아줄 수 없다. 어떤 선입견도, 어떤 견해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대에게 빛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것들은 체험이 아니다. 달마는 오직 체험에만 관심이 있다.
감각과 망상에 의해 가리워져 있어……
이런 말은 평범한 수준이다. 달마의 번득이는 지혜에는 미치지 않는 진부한 말이다.
그래서 망상을 등지고 실체를 향한 사람은 벽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거기에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경전을 대하고서도 흔들림이 없으며, 침묵으로 동의하며 이론과 하나를 이루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로 도(道)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이 문장에서 이론과 하나를 이룬다는 말은 체험과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바꾸어져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이 부분이 달마의 생각임을 나는 전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생각을 버린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떨쳐 버리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의 마음에 있는 화면은 벽과 같이 텅 비어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그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속에 에고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할 만한 존재가 없는 것이다. 존재만이 있을 뿐, 나는 없다! '무아(無我)'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의 근본 사상이다. 달마 역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가 일으킨 모든 혁명의 머릿돌이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조차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달마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과 성자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들은 생각이 다르고 인격이 달랐지만 그들의 주체를 이루는 내면 자체는 같은 것이다. 죄인과 성자는 똑같다. 죄인은 불필요한 죄의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성자는 '나는 너희들보다 거룩하다.'는 불필요한 에고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아라는 점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같다.
경전을 대하고서도 흔들림이 없으며……
이런 사람들은 경전에 의해서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무아'를 경험한 것이다. 그들은 에고로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 의식에 도달해 보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경전이 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침묵으로 동의하며 이론과 하나를 이루어……
이 부분에서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첨가되었다. 달마의 말로 바꾸자면 그것은 '이론과 하나를 이루어'가 아니라 '체험과 하나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이 말은 달마에게서 나온 말이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란 말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말이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대는 움직이지 않는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대는 마치 그대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지도 말고 노력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때 그대는 존재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실천적인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행(四行)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이 말이 불교 경전에서 나왔지 달마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이 말은 불교 경전에 나온다. 이런 말은 석가모니 부처는 말할 수 있어도 달마는 할 수 없다. 불교 경전에는 '억울함을 참고 인연을 받아들여라.'고 나와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혁명에서 도피하도록 만든다.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석가모니 부처가 가르친 방법으로서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 전생에 지은 나쁜 행위가 그대에게 억울한 상황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하나의 벌이다. 그것에 대해 불평하거나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잠시 겉으로만 즐거울 뿐 그대의 모든 아름다운 개성을 파괴시킨다. 그것은 그대 속에 있는 진정한 혁명의 싹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의 이런 사상 때문에 인도는 2,500년 동안 가난함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대가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참으라고 가르친다면, 모든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면, 그대는 노예 제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노예 제도를 찬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제도를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의 형편이 전생에 지은 업의 결과라는 사상은 사회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어떤 나라도 2,500년 동안 노예 제도를 그대로 간직해 온 나라는 없다. 하지만 소위 자유의 시대라고 부르는 오늘날에도 인도에는 노예 제도가 그대로 있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기탄잘리(Gitanjali)>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 책은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타고르는 그 즉시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캘커타에서 살았고 캘커타 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카고르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는 거절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당신들은 지금 명예박사 학위를 나에게 수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노벨상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당신들의 정신은 노예 근성에 사로잡혀 있다. 내 책은 이미 인도에서 20년 전에 출간되었고, 지금 나온 번역본은 원본보다 아름답지 않다." 시는 다른 나라말로 번역될 수 없다. 만약 시를 번역한다면 그 의미만 전달될 뿐 그것이 지닌 향기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만다. 석가모니 부처는 인도인의 노예 근성과 가난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가르침으로 해서 그것을 잘못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혁명에 대한 그 자신의 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의 식물인간처럼 살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혁명적 기질은 그대 삶의 흐름 그 자체이다! 나는 달마 같은 사람이 '억울함을 참고 인연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차라리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다르마를 따라 산다'는 말은 달마의 말이다. 그대는 '다르마(dharma)'란 말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번역될 수 없는 말이기도 하지만 쉽게 다른 말로 설명할 수도 있다. 다르마는 사물의 본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불의 성질은 뜨거운 것이다. 얼음의 다르마는 찬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다르마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아이며 침묵이며 자비심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모든 구하는 행위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대를 본질에서 벗어나게 한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달마가 가르친 진리의 핵심이다. 아무 데도 가지 말라. 그대의 에너지를 내면으로 쏟아 부으라. 외부로 향한 마음의 창을 닫고 그 안에 있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다르마가 무엇인지, 그대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라. 마치 그대가 아무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라. 그때 그대는 드넓은 자비심을 갖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삶 전체가 하나의 현존이며, 그대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첫째,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나는 세속적인 삶 속에서 본질을 놓치고 생명의 여러 가지 겉모습을 바꾸어가며 방황해 왔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화를 내었고 까닭 없이 남을 미워하고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과거의 잘못에 대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 말들은 이 책을 기록한 사람에게서 나온 말들이다.
"어떤 신이나 인간도 잘못된 행위가 어떻게 그 열매를 맺는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열린 가슴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이런 말은 절대로 달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역경을 만나도 걱정하지 말라. 그대의 의식은 그것을 통해서 깨어나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그대는 원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억울함을 참음으로써 그대는 도(道)에 들어서게 된다.
이 말들 역시 달마의 말이 아니다.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의 자기란 것이 없으며 단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 역시 달마의 말이 아니다. 그는 어떤 인연도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우선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순수한 없음'일 뿐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순수한 없음'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대를 지배할 수 있어도 그대의 존재, 즉 무아를 지배할 수는 없다. '그대 자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연', 이런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 사회에 또 하나의 기생충을, 착취자를 만드는 것이다. 달마는 그런 인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고통을 당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모두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복된 일, 즉 부와 명성을 얻는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뿌린 시앗을 거두는 것일 뿐이다.
이 말 역시 달마의 말이 아니다. 달마는 과거나 미래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현재만을 신뢰한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의 결과는 그림자처럼 즉시 따라온다. 그것의 보상이 미덕이라면 그것의 벌은 죄로 나타난다. 달마는 단순한 사람이다. 그는 철학자들처럼 복잡하지 않다. 그리고 그는 여느 성직자처럼 사회의 기생충이 아니었다.
인연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무로 돌아간다. 그러니 기뻐할 것이 없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연을 따라오는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요가 없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도(道)를 따르게 된다.
이 말은 달마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일의 성공이나 실패로 인해서 그대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하나의 꿈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그 속에서 그대는 자신을 지켜보는 이로 남아 있어야 한다.
셋째,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욕망에 빠져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마음을 무위(無爲)에 고정시키고 몸마저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이 말 속에는 달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말들이 약간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달마의 뜻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어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달마의 말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는 말 역시 달마가 한 말이다. 그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꿈처럼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모양은 다를지 몰라도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인생 전부가 꿈의 연속이라고 본다. 그대는 어떤 때는 기분 좋은 꿈도 구고 어떤 때는 악몽도 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꿈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으며 혹시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더라도 그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꿈이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은 불타는 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불타는 집 속에 들어 있는 한 그 사람은 고통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 속에서 평화롭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삼계란 육체와 마음과 영혼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것을 특히 불교에서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누어 말한다. 여기에 네 번째 세계가 있다. 그것은 '투리야(turiya)'라고 부르는 세계이다. 사실 그것은 세계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세계가 아니다. 세계 바깥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평화 속에 존재하는 세계 바깥이다.
넷째는 다르마(Dharma)를 따라 사는 것이다. 다르마란 만물의 순수한 본성을 일컫는 것이다. 다르마의 눈으로 보면 모든 현상은 공허하게 보인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이 말은 순수하게 달마로부터 나온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다르마란 어떤 것도 그것이 존재하는 실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존재한다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곧 다르마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진리를 충분히 체득하여서 다르마를 따라 살게 된다.
이 말은 책에 기록한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다르마 그 자체에는 그 어떤 것도 보존할 것이 없다. 따라서 다르마를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몸과 소유물을 아낌없이 바친다. 그들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집착도 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남을 도울 수 있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다른 여섯 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 여섯 가지 덕을 행하고도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다르마를 따라 사는 것이다.
이 문장 전체도 달마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단지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만 달마가 한 말이다. 이 세상의 경전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고 산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은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도둑이건 위대한 인격자이건 아무런 차이도 없다. 꿈속에는 그대는 도둑도 되고 훌륭한 인격자도 될 수 있지만 꿈을 깨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가 꿈속에서 도둑이 되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하겠는가? 그 모두가 물거품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달마를 알면 어떤 것이 그의 말인지 정확히 가려낼 수 있다. 그대가 지금 따르고 있는 철학이나 가치관, 혹은 그대가 행하고 있는 모든 수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대는 비로소 다르마를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손을 놓는다. 그는 망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것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축복 받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 안에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어떤 것이 달마의 말이고,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려낼 것이다. 그리고 내 말은 진실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달마의 말이라면 모든 것에 찬성한다. 물론 학자들도 자신들 나름대로 학문적인 구분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학자가 아니다. 나는 달마이다. 그러니 나는 어떤 것이 내 말이고 어떤 것이 내 말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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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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