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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7~181)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77>상하이 엑스포 중국관은 ‘애국노인’ 마상보(馬相伯) 칩거 장소 |제178호| 2010년 8월 8일
▲1929년 겨울 정·관계와 학계 인사들이 뤼야탕(綠野堂)에 칩거 중인 마상보(앞줄 왼쪽 둘째)를 방문했다. 마상보는 어느 정권이 들어서건 원로 대접을 받았지만 권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김명호 제공
마상보(馬相伯)는 1840년 강보에 싸인 채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 천주교와 천문학을 혼동했다. “하늘 천(天)자 때문에 해가 지면 하늘만 쳐다봤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일기에 적었다가 꾸중을 들었다. 상하이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던 학교가 있었다. 열두 살 되는 해에 입학해 프랑스어, 희랍어, 라틴어, 신학의 기초를 닦았다. 18년 만에 신학박사 학위와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돈 떼먹고 시치미 떼는 프랑스인 신부를 두들겨 패는 바람에 신학, 수리학, 천문학 관련 서적 100권만 펴내고 교단에서 쫓겨났다.
마상보는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22년간 일본·이탈리아·미국·프랑스 등에 주재하며 견문을 넓혔다. 1882년 임오(壬午)년 여름, 조선에 군란이 발생했다.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은 난을 평정하기 위해 수사제독(水師提督) 딩루창(丁汝昌)을 파견하며 마상보를 외교통상 고문으로 딸려 보냈다. 위안스카이라는 군관이 마를 잘 따랐다. 나이도 자식뻘이었다. “젊은 사람이 말귀를 잘 알아듣고 사람의 의중을 읽을 줄 안다. 동작도 민첩하다”며 볼 때마다 흡족해 했다.
하루는 위안스카이가 게 9마리를 사 들고 찾아와 조선에 계속 남게 해주기를 청했다. 마는 즉석에서 위안을 조선 주재 상무담당관(駐朝商務專員)으로 추천하는 편지를 리훙장에게 보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위안은 마의 제자로 자처했다.
시간이 갈수록 마상보는 위안스카이에게서 야심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위안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땅을 차고 튀어 올라 구름을 뚫고 싶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마는 짓궂은 데가 있었다. “간단하다. 궁중에 있는 환관들부터 구워삶아라. 그들을 통해 조정의 고관들과 인연을 맺으면 관직이 점점 올라갈 수 있다. 거짓말도 잘해야 한다. 진실을 말하겠다면 차라리 네 무덤을 파라. 약속을 많이 하되 지킬 필요는 없다. 애쓰는 척만 하면 된다. 진짜 능력과 실력은 고관 자리를 꿰찬 다음에 발휘해라.”
마상보는 장난삼아 한 말이었지만 평소 농담을 진담처럼 하고, 진담을 농담처럼 하던 위안스카이는 빈말로 듣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금을 마련해 환관들을 매수했다. 정 급하면 “내가 당장 죽더라도 네게 빌린 돈값은 할 거다” 라며 기녀들의 치마폭에 시(詩)를 써주곤 했다. 옷장 구석에 위안스카이의 붓글씨가 담긴 속옷 한두 벌은 있어야 제대로 된 기녀 축에 들었다. 결국은 서태후의 눈에 들었고 서태후가 가장 신임하던 룽뤼(榮祿)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가는 곳마다 “관운을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상보는 65세 때 교육계에 투신했다. 남양공학(교통대학 전신)에서 퇴학당한 학생들을 모아 푸단(復旦)대학을 설립하고 민주와 종교의 자유를 제창하는 글을 연일 발표했다.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에 취임하자 마상보를 검찰과 법원을 감독하는 평정원(平政院) 평정과 총통부 고문에 임명해 명사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차이위안페이 등 마의 제자들을 기용하고 툭하면 장남을 보내 잔치를 베풀었다. 마는 회의에도 나오지 않았고 자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위안스카이가 제위에 오르려 했을 때 마상보는 “장난삼아 했던 입방정이 국가에 화를 초래했다. 위안스카이야말로 천하 제일의 도둑놈”이라며 다른 사람이라면 모가지가 백 개가 있어도 모자랄 글을 수없이 발표했다. 위안스카이는 “청년 시절 조선에서 마상보를 만난 덕에 운명이 바뀌었다”며 모른 체했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마상보는 4개월간 12차례에 걸쳐 국난 극복을 호소하는 방송을 했다. 중국인들은 노(老)청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살던 투산만(土山灣)의 뤼예탕(綠野堂)은 항일의 정신적 성지였다.
1939년 가을, 에드거 스노의 책을 들고 온 중공 지하당원에게 “나는 한 마리의 개였다. 백 년간 짖어대기만 했지 사람을 깨우지는 못했다”는 말을 남기고 피난지 월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70년 후 상하이 엑스포를 준비하던 중국인들은 마상보가 칩거하던 곳에 ‘중국관(中國館)’을 세워 ‘애국노인(愛國老人)’을 위로했다. <178>충칭·난징선 서울보다 닷새 빠른 8월 10일 승전 폭죽김명호 |제179호| 2010년 8월 15일
▲1945년 8월 15일 오후, 전시수도 충칭에서 항일전쟁 승리를 선포하고 방송국을 나서는 장제스(가운데). 김명호 제공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사흘 후 나가사키에 두 번째 폭탄을 투하하기 10시간 전 소련도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150만 명의 소련 홍군이 만주에 진입하자 일본 관동군은 일주일 만에 8만3000여 명이 전사하고 59만4000명이 투항하는 등 괴멸했다. 관동군 사령관은 소련군 진영을 찾아가 지휘권의 상징인 군도를 제출하고 스스로 포로가 됐다. 일본은 더 이상 활로가 없었다.
8월 10일 오후 7시, 전시수도 충칭(重慶)의 중미합작소(中美合作所)에 근무하던 미군 공작원 한 사람이 황급히 군용 지프를 몰고 시내를 향했다. 영어로 “VICTORY”를 외치며 질주했다. 거리에는 혹서를 피하기 위해 나와 있던 시민들이 많았다. 불과 10여 분 만에 집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면식이 있건 없건 얼싸안고 깡충깡충 뛰다가 두 팔로 ‘V’자를 그리며 ‘의용군행진곡’을 불러댔다. 목청이 터져도 좋았다.
극장에선 한참 상영 중이던 영화가 중단되고 전쟁기록물이 스크린을 장식했다. 눈치 빠른 관객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댄스홀에서도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졌다. 상인들은 창고에 쌓아두었던 폭죽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신문사들은 그제야 호외를 찍어댔다. 이날 밤 충칭은 사이렌 소리만 없을 뿐 일본군의 공습을 받을 때보다 더 시끄러웠다.
일본의 괴뢰정부(僞國民政府) 소재지 난징(南京)에선 일본이 제작한 중국어방송을 내보내던 탄바오린(譚保林)과 수허센(蘇荷先)이라는 기술자가 충칭 방송을 청취하자마자 일본이 투항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잠적해 버렸다. 10초가 될까 말까 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들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순식간에 골목마다 폭죽이 터졌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일본군들은 갑자기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11일 초저녁, 일본군 치하의 상하이 시민들은 정규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중국 국가가 나오자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대동아행진곡(大東亞行進曲)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이어서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지 모른다’는 방송을 듣고서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열띤 토론을 벌인 후에야 거리에 유황냄새가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일부 지역에선 물가가 하락했다. 시안(西安)은 황금이 평소의 절반가격에 거래됐고, 전쟁기간 중 폭등했던 담뱃값도 하락했다. 안후이(安徽)성은 특히 심했다. 현찰 10만원이면 평소 46만원 하던 황금 한 냥을 구입할 수 있었다. 목재와 도자기, 찻값도 폭락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8월 15일 오후, 8년간 전쟁을 지휘한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는 연합군 중국전구(戰區) 최고사령관 명의로 전국의 군민(軍民)들에게 항일전쟁 승리를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날 밤 충칭은 또 한 차례 난리가 났다. 횃불 행렬이 10리를 이루었고 꽹과리와 나팔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빈 집들을 누비며 한몫 잡은 사람이 많을 정도로 시민들 거의가 거리에서 밤을 보냈다. 역사학자 푸스녠(傅斯年)은 달리는 차 위에서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엔 모자가 걸친 지팡이를 흔들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을 추다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몇 년간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붉은 도시 옌안(延安)은 일본의 무조건 투항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성 전체가 동시에 불쑥 떴다가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국기란 국기는 모두 내걸고 ‘홍군 만세’등 온갖 구호를 열창했다. 린뱌오(林彪)가 지휘한 핑싱관(平型關)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는 과일상인은 수박과 복숭아를 ‘승리의 과일’이라며 군중들에게 나눠 주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지만 그래도 싱글벙글했다.
옌안에 나와 있던 미군들도 합세해 광환(狂歡)의 시간을 함께했다. 늦은 밤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와 펑더화이(彭德懷)는 이들을 초청해 승리를 경축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5년 후 한반도에서 서로 총질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밤을 보냈다.
중국군은 일본군과 20여만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3500여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약 2억 명의 중국인이 유랑민으로 전락했고 전비를 포함한 재산 손실도 미화 5600억 달러에 달했다.
농담하기 좋아하는 중국인들 중에는 “일본 사람들만 전쟁하느라고 고생했다. 우리는 8년간 도망만 다녔다”고 말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179>50여 년간 정체 감춘 ‘홍색 특수공작원’ 옌바오항(閻寶航) |제180호| 2010년 8월 22일
▲1930년대 중반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옌바오항(가운데 안경 쓴 사람). 왼쪽에서 둘째 소년이 전 중공 중앙 서기처 서기 겸 통전부 부장 옌밍푸. 김명호 제공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독일의 소련 침공, 소련 홍군의 만주 진입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무명의 중국인이 있었다는 얘기는 하나의 전설이었다. 1991년 봄, 54년 만에 자유를 획득한 장쉐량(張學良)이 뉴욕에 도착하자 온 중화권이 들썩거렸다. 아무리 사소한 말이나 행동도 그가 하면 뉴스가 됐다. 하루는 심부름이라도 하겠다며 옆에 붙어 다니던 전 동북(東北)대학 총장과 조카에게 옌바오항을 거론하며 “자녀들이 뭘 하는지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연일 옌바오항의 이름이 지면을 장식했다.
장쉐량에게 문안인사 보낼 사람을 물색하던 중공 중앙은 항일 명장 뤼정차오(呂正操1905~2009)가 옛 상관을 만나겠다며 뉴욕행을 자청하자 옌바오항의 아들 옌밍푸(閻明復)를 합류시켰다. 전세기가 베이징을 출발하기 직전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이 공항으로 달려왔다. 옌밍푸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그것도 모자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너 내 말 똑바로 들어라. 장쉐량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절대 말하지 마라. 상심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큰일난다.”
양상쿤의 걱정은 기우였다. 장쉐량은 옌바오항이 문혁 시절 감옥에서 사망한 것을 알고 있었다. 옌밍푸에게 “네 아버지는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장제스는 우리 두 사람을 그렇게 죽이려 했지만 쑹메이링이 반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옌바오항기금회(閻寶航基金會)' 설립을 제의했다. 휘호(揮毫)는 물론이고 자금까지 출연했다. 옌밍푸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귀국하자마자 부친의 지난 세월을 추적했다.
1995년 11월 1일 베이징의 러시아대사관은 꼭두새벽부터 분주했다. 이날 중국 주재 러시아 대사는 옐친을 대신해 ‘반 파시스트 전쟁 승리 50주년 기념훈장’과 증서를 27년 전 세상을 떠난 옌바오항과 그가 이끌던 공작조에 수여했다. 옌바오항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숙한 사람들조차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다. “항일전쟁 시절 성경책을 옆에 끼고 장제스 부부가 가는 곳마다 모습을 보이던 국민당 고관 옌바오항이 마르크시스트였다니.” 말 같지 않은 소리였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소련이 훈장을 줄 리가 없었다.
저우언라이와 리커눙 외에는 50여 년간 그 누구도 몰랐던 ‘홍색 특수공작원’ 옌바오항의 행적이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옌바오항은 동북의 빈농 출신이었다. 12세 때부터 산에 올라가 남의 집 돼지를 키웠다(만주는 돼지를 방목한다). 틈만 나면 사숙에 달려가 창밖에서 수업을 들으며 글을 깨우쳤다. 추운 가을날 해질 무렵 사숙 선생이 나오더니 소년 옌바오항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공부는 너 같은 애가 하는 거”라며 학비를 받지 않았다.
사숙 선생은 1913년 옌바오항이 동북의 최고 학부였던 펑톈(奉天)사범학교에 수석 합격하자 “나는 수재를 제자로 뒀던 사람이다. 마적질을 할지언정 더 이상 미련한 것들과 씨름하기 싫다”며 사숙을 걷어치웠다.
1918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옌바오항은 극빈자 자녀를 위한 무료학교를 설립했다. 선양(瀋陽)의 YMCA에서 처음 만난 동북 왕(王) 장쭤린(張作霖)의 장남 장쉐량과 동북군 참모장 궈쑹링(郭松齡)의 후원을 받았다. 특히 펑톈여자사범학당을 졸업한 궈의 젊은 부인 한수슈(韓淑秀)는 매일 학교에 나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7년 만에 6개의 분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장쉐량의 모금과 한수슈의 덕이었다.
1925년 겨울, 동북에 쿠데타가 발생했다. 모반의 주역이 궈쑹링으로 밝혀지자 옌바오항은 외국인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낯선 사람이 찾아와 한수슈가 보냈다며 영문 성경(HOLY BIBLE)을 건네 줬다. 사진도 한 장 들어 있었다. 장쭤린은 궈쑹링과 한수슈를 총살시키고 3일간 광장에 폭시(曝尸)했다. 연루자들의 명단은 찢어버렸다.
목숨을 건진 옌바오항은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웠다. 통곡과 술 외에는 아무것도 내키지 않았다. 장쉐량이 찾아와 “남편은 나라를 위해 죽지만 나는 남편을 위해 죽는다. 아무 유감도 없다”는 한수슈의 유언을 전하며 영국 유학을 권했다.
에든버러 대학까지 가는 동안 옌바오항은 한수슈의 마지막 선물을 깡그리 외어버렸다. 한의 숨결을 대하듯 하루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영문 성경이 후일 ‘홍색 특공’ 옌바오항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암호 책으로 둔갑할 줄은 본인도 몰랐다. (계속) <180>옌바오항(閻寶航), 장제스에게 세 번 퇴짜 맞고 국민당에 등 돌려 |제181호| 2010년 8월 29일
▲1957년 겨울, 마오쩌둥의 마지막 모스크바 방문을 수행한 옌밍푸(오른쪽 셋째). 홍색공주 쑨웨이스(오른쪽 넷째)와 마오(오른쪽 다섯째)의 경호원이었던 태극권의 고수 리인차오(왼쪽 첫째)의 모습도 보인다. 김명호 제공
일본군의 만주 침략과 장쉐량의 연금은 국민당 고관 옌바오항을 중공 비밀당원으로 변신시켰다.
1929년 영국에서 귀국한 옌바오항은 추억의 ‘펑톈(奉天) YMCA’를 노크했다. 미국인 총무는 기독교도가 되어 돌아온 옌에게 총무직을 넘겼다. 부친이 일본군에게 폭사 당한 후 동북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쉐량은 최초의 중국인 총무를 위해 사옥을 지어줬다.
옌바오항은 YMCA를 중심으로 반일 선전과 마약퇴치운동을 벌였다. 당시 동북에 와있던 일본 건달들 중에는 아편장수들이 많았다. 관동군 관할 구역인 남만주철도 연변에 간판까지 내걸고 모르핀과 헤로인을 팔았다. 중국인들은 눈깔사탕보다 아편 구하기가 더 쉬웠다. 중독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옌은 발뺌만 하는 경찰들을 설득하고 학생조직을 동원했다. 487부대의 헤로인과 아편 400냥을 압수해 외국 영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소각했다. 이 사건은 옌을 전국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신생활운동촉진회 총간사 시절, 장제스·쑹메이링과 함께 행사에 참석한 옌바오항(오른쪽 셋째)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선양 점령 이튿날 옌바오항에게 현상금 5만원을 내걸었다. 초대 중공 당수에게 걸렸던 현상금이 2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동북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옌바오항은 목사 복장에 성경책을 끼고 동북을 탈출했다. 그해 겨울 베이징에서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유린당한 동북의 광복을 기원하며 밍푸(明復)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1934년 장시(江西)성 난창에 공비 섬멸 총지휘본부(南昌行營)를 설치한 장제스는 ‘신생활운동’을 선언했다. 본인이 ‘신생활운동 촉진회’ 회장을, 쑹메이링은 지도장(指導長)을 맡았다. 거짓말과 둘러대는 재주를 겸비한 인간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쑹은 장쉐량에게 괜찮은 인물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장쉐량은 옌바오항을 소개했다. 중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했고, 기독교도가 아니면 사람으로 치지도 않았던 쑹은 영문 성경을 줄줄 외워대는 옌을 촉진회 서기 겸 총간사로 천거했다. 장제스는 집무실에 책상을 한 개 더 들여놓고 옌바오항에게 육군 소장 계급장을 달아줬다.
최고 지도자 부부의 측근이며 2인자 장쉐량의 친구이다 보니 중통(中統: 국민당 정보기관)과 군통(軍統: 군사위원회 정보기관)의 책임자들도 옌바오항 앞에서는 눈치를 봤다. 고관 부인들은 옌에게 잘 보여야 쑹메이링과 차라도 한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36년 겨울, 장쉐량의 동북군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시안(西安)사변은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 양당의 합작에는 성공했지만 장쉐량은 연금 상태로 전락했다. 옌바오항은 장쉐량을 구하기 위해 장제스를 세 차례 찾아 갔다. 모두 거절당했다. 면회는 허락 받았지만 특무들이 둘러싸는 바람에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30분간 엉엉 울며 악수만 하다 장쉐량과 헤어진 옌바오항은 저우언라이를 찾아갔다. “우리 동북인들은 싸움에는 능하지만 정치에는 소질이 없다”며 공산당 입당을 자청했다.
중공은 코민테른의 지부였다. 옌바오항의 입당은 대형 사건이라 허락이 필요했다. 코민테른은 “국민당의 고위직에 있는 반동분자” 라며 반대했다. “중국인들은 다섯 살짜리 애들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며 저우언라이의 속을 확 긁어댔다.
당내에도 “인간관계가 복잡한 사람이라 믿을 수 없다”며 재고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네 말이 맞다. 너처럼 단순해야 한다. 옌바오항이 할 수 있는 일을 네가 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봐라”며 한숨을 내뱉었다. 저우는 옌바오항을 비밀당원으로 입당시켰다. (계속) <181>옌바오항, 국민당 파티서 ‘독일의 소련 침공’ 첩보 빼내 |제182호| 2010년 9월 5일
▲소련 홍군이 동북을 점령하자 장제스는 가장 믿을 만한 두 사람을 동북에 파견했다. 1946년 1월 창춘에 도착한 쑹메이링(앞줄 왼쪽 첫째)과 장징궈(오른쪽 셋째)를 맞이하는 소련군 원수 이마노프스키. 당시 옌바오항은 랴오베이(遼北)성 주석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 김명호 제공
항일전쟁이 중반에 들어서자 국민당은 반소(反蘇)·반공(反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소련 대사관의 중국 철수도 시간 문제였다.
코민테른 극동(極東) 정보국은 국민당의 군사·정치·외교·경제·문화에 관한 고급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중공 당원을 옌안에 요청했다. 전시 수도 충칭에 상주하고 있던 중공 남방국 서기 저우언라이는 리커농과 머리를 맞댔다. 옌바오항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저우는 옌안에 있던 옌바오항의 큰딸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폐결핵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충칭 교외 베이베이(北薔)의 움막 지하실에 무전기를 설치해 줬다.
◀1945년 8월 9일 소만국경을 넘어온 소련 홍군은 동북에 널려 있던 일본 관동군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다. 불과 열흘 만에 창춘(長春)·선양(瀋陽)·하얼빈(哈爾濱)을 점령했다. 하얼빈 역사를 점령한 소련 홍군.
옌바오항은 자녀들을 데리고 매주 두 번씩 베이베이로 나들이를 갔다. 국민당 고관의 가족 소풍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큰딸의 손에는 항상 영문 성경이 들려 있었다.
1941년 5월 초, 국민당 고위층만을 위한 작은 파티가 열렸다. 옌바오항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참석했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다들 희희낙락하며 술잔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옌바오항은 위유런(于右任)에게 다가갔다. 현대 초서의 창시자이며 34년간 감찰원장을 지낸 위유런은 성인(聖人) 대접을 받을 정도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지만 보안의식이 전혀 없었다. 본인도 그것을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 “광명 천지에 숨길 것이 없다”며 호언장담을 일삼았다. 분위기가 들떠 있는 이유를 묻자 “독일이 6월 20일을 전후해 소련을 침공한다”며 입법원장 쑨커(孫科)에게 들었다고 출처까지 얘기해 줬다.
옌바오항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확인을 위해 쑨커 곁으로 갔다. 별 관심이 없는 척하며 물었다. 국부 쑨원의 장남인 쑨커는 평생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다웠다. “위원장(장제스를 지칭)이 그렇게 말했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황급히 자리를 떠난 옌바오항은 딸과 함께 베이베이로 달구경을 갔다. 영문 성경에 등장하는 인명(人名)과 지명(地名)이 전파를 탔다.
‘사회조사부’의 보고를 받은 옌안의 중공 지휘부는 마오쩌둥의 명의로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다. 소련 군사 정보국은 일본·독일·스위스 등에도 정보망이 있었다. 비슷한 정보를 보내왔지만 모두 첩보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중공 최고지도자가 보낸 옌바오항의 정보는 스탈린의 결심을 굳히게 했다.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6월 30일 스탈린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준 덕에 미리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는 감사 전문을 중공 중앙에 보냈다. 이 전문은 1947년 봄 중공이 옌안을 철수할 때 소각해 버리는 바람에 중국 쪽에는 남아 있지 않다.
동북의 일본 관동군에 관한 기밀 자료를 깡그리 빼낸 것도 옌바오항이었다. 1944년 봄 군정부장 천청(陳誠)은 옌바오항에게 ‘관동군의 소련 공격 가능 여부’를 상세히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군사위원회 3청(三廳)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정보원이 수집해 온 일본군 관련 정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옌바오항은 천청의 지시를 빙자해 동북의 일본관동군에 관한 자료를 요청했다. 3청 청장은 동북사람이었다. 3일 후에 반납하라며 옌바오항이 요구하는 것들을 다 내줬다.
동북에 주둔한 관동군의 각 부서와 방어계획, 요새의 위치와 병력, 소유 무기, 각급 지휘관의 이름과 경력 등 온갖 기밀이 다 들어 있었다. 옌바오항의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의 중공 남방국은 사진기 아홉 대를 동원했다. 옌안은 전달받은 필름을 고스란히 소련에 넘겨줬다.
1995년 옌밍푸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러시아정부는 반세기 전 옌바오항이 제공한 관동군 관련 정보의 사본을 아들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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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옌바오항의 사례에서 봐도 국민당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장제스는 쪼다가 되어 버린 게 아닌가.
그런 셈인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