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모자
나는 타고난 성격이 그래서인지 외모나 치장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옷을 살 때 상표가 알려진 고가품보다 그저 그런 수수한 차림새를 선호한다. 산을 즐겨감에도 변변한 등산복이라곤 한 벌 없다. 배낭도 그렇다. 신발은 싸구려를 신으니 빨리 닳아 떨어져 비싸도 여물고 튼튼한 제품을 신는다. 여름이면 햇빛을 가리고 겨울엔 바람을 막아주는 모자를 써야함은 어쩔 수 없다.
여름 모자는 오래도록 써 온 낡은 모자가 하나 있는데 지난해 큰 녀석이 아비한테 새 모자를 하나 사 주어 잘 쓰고 있다. 겨울에는 산행뿐만 아니라 출퇴근 때도 방한용 모자가 필요했다. 삼십 분 가량 걸리는 학교까지 걸어서 출퇴근하기에 남들보다 추위를 많이 느낀다. 그간 겨울에 쓴 모자로 군밤장수가 눌러 쓴 모자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오래되어 낡고 빛이 바래 너덜너덜했다.
단풍이 물들었던 가로수도 나목이 되어 겨울로 접어들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에 따뜻한 모자를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어시장 부근을 지나다가 봐둔 모자 전문점이 한 곳 있었다. 어느 토요일 진북 서북산 부재고개 근처로 산행을 다녀오다 일부러 어시장에 내렸더니 모자 전문점은 문이 닫겨 발길을 돌렸다.
이후 시내 대형 할인매장에 들릴 일이 있어 모자가 전시된 코너로 가 보았다. 이런저런 모자가 있긴 해도 내 마음에 드는 모자가 없어 사지 않았다. 날씨기 더 추워지기 전에 모자를 하나 구하긴 해야겠는데 틈이 잘 나질 않았다. 어느 일요일 안민고개를 올랐다가 시내로 들어올 때였다. 마침 토월 성원아파트 상가를 지나게 되었다. 그곳에 모자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있다고 들었다.
상가건물 앞에 이르니 일요일이라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아 영업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어 건너편 백화점으로 가보았다. 매장에는 쇼핑객들이 더러 보였다. 나는 등산화에 배낭을 멘 등산복 차림으로 옷 가게를 기웃거렸다. 백화점에는 모자 전문 가게는 없고 스포츠용품이나 신사정장 코너에 남성용 모자를 끼워 팔았다. 나는 마음에 드는 모자를 고른다고 몇 곳을 둘러보았다.
등산갈 때도 쓰고 출퇴근 때도 쓰고 싶은 겸용 모자로는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등산갈 때는 여태까지 쓰고 있는 낡은 모자를 계속 쓰기로 작정하고 출퇴근 때 쓸 모자를 하나 고르기로 했다. 아침저녁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니려니 따뜻한 모자가 필요했다. 특히나 찬바람이라도 불면 이마가 시렸다. 나한테 모자는 대머리를 가리기 위한 보정용이 아니라 보온용으로도 필요했다.
나는 느긋하게 백화점 한 층 남성복 매장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다. 평소 같으면 어느 가게에서나 물건을 살 마음이 있으면 쉽고 빠른 결정을 내린다. 살 마음이 없으면 역시 과감하게 발길을 돌려버린다. 그런데 그날 모자를 고를 때는 사정이 달랐다. 한 번 들린 가게를 한 번 더 들려 모자를 한 번 더 살펴 골랐다. 모자의 디자인보다 얼마나 따뜻할 것인가가 선택의 기준이 되었다.
이렇게 요모조모 따져가며 모자를 하나 골랐다. 그런데 모자 가격이 만만하지 않았다. 할인행사를 하지 않았다면 십만 원 가까운 값이었다. 그런 고가의 모자를 사기엔 나한테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고심 끝에 고른 그 모자를 사기로 작정했다. 올 겨울만 쓸 모자가 아니고 앞으로 수년간 겨울이면 두고두고 쓸 모자이기에 아깝지 않았다.
외양으로는 헌팅캡에 가까운 디자인이었다. 재질은 면직으로 날씨가 추우면 가리개를 내려 귀를 살짝 덮도록 되어 있었다. 색상은 잿빛에다 자주색 무늬가 한 줄 끼였다. 살짝 눌러 써 보니 폭신하고 아주 따뜻했다. 대설을 하루 앞두고 중부내륙엔 많은 눈이 내리고 기습 한파가 닥쳤단다. 우리 지역도 바람이 불고 쌀쌀했다. 사냥꾼 모자 덕분으로 출근길 아침 이마가 시리지 않아 좋았다. 1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