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태화강의 북서쪽 심산유곡에는 대곡천이란 조그마한 지천이 있다. 울산시 울주군의 깊은 계곡을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면서, 15만분의 1 지도에서나 강줄기를 또렷이 확인할 수 있는 개천이다. 이 대곡천변에는 그 유명한 국보 285호 ‘대곡리 암각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다시 물줄기를 따라 불과 1㎞ 가량만 거슬러 오르면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이 있다.
취재팀이 지난달 30~31일 대곡리 암각화(바위에 새겨진 그림)가 있는 대곡천 하류의 인공호수인 사연호를 찾았을 때는 그림판 역할을 하는 상층부의 바위 절벽만 눈에 들어왔을 뿐 아랫부분의 그림은 볼 수 없었다. 그림 부분이 댐의 물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마을 사람들은 “암각화는 1965년 하류에 사연댐이 축조되면서 개천의 물이 깊고 넓어져 그림을 온전히 또는 부분적으로나마 볼 수 있는 기간은 연중 8~9개월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또다른 바위 그림인 상류의 천전리 각석(刻石)은 댐의 영향권 밖에 있어 각석과 그림의 윤곽이 온전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2개의 국보는 한반도의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문화유산으로, 후대에 이르러 제대로 보존돼야 마땅하지만 댐에 갇힌 채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2개의 댐에 갇힌 국보 문화재=취재팀이 “대곡리 암각화가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는 언제인가”라고 물었을 때 주민들은 “초겨울과 봄 사이의 갈수기”라고 대답했다. 그나마 암각화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은 드물고 윗부분만 살짝 드러나기 때문에 자신들도 그림 전체를 볼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원래 대곡리 암각화는 전체가 드러나 있었지만 65년 대곡천 하류에 사연댐이 들어선 이후 수장(水葬)된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로부터 다시 상류로 2㎞쯤 거슬러 오르자 동심원과 소용돌이 등 갖가지 문양이 바위절벽에 새겨진 또다른 암각화, 천전리 각석이 나타났다. 대곡리 암각화와는 달리 이 암각화는 사연댐의 수위조절에 따른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아 침수 피해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따금씩 관광객들이 찾아와 선사시대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고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천전리 각석으로부터 대곡천을 따라 다시 1㎞쯤 오르자, 이르면 내년에 물을 담기 시작할 계획이라는 대곡댐 구조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만약 홍수로 대곡댐의 수위가 높아져 대곡천으로 물을 한꺼번에 방류하게 된다면…’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방류로 인해 이미 수장된 상태인 대곡리 암각화는 더 깊은 물속에 잠기게 될 수 있고, 특히 댐과 가까운 천전리 각석마저 새롭게 침수 또는 침식 피해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댐 수위를 낮춰라”=아니나 다를까, 암각화 전문가를 비롯한 학계에서는 이 두 문화유산이 댐으로 인해 심하게 훼손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 두 국보에 대한 보호의 당위성은 발견 및 국보지정 과정을 거치면서 30여년간 줄곧 제기돼 왔지만, 99년말 울산시가 암각화를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훼손 논란과 함께 보존 방안을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재 울산시의 계획에 따라 암각화로 접근할 수 있는 진입로를 넓히고, 주차장을 마련하는 등의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다.
이 공사로 인해 ‘개발보다는 보존이 우선’이라는 지적이 학계와 울산환경운동연합 등으로부터 수년동안 잇달아 제기되자 울산시는 올해 들어 몇가지 보존 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오히려 “훼손을 부추긴다”는 반발을 낳으면서 울산시·문화재당국과 학계·시민단체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두 암각화는 같은 하천의 상하류 7㎞ 구간을 사이에 두고 축조된 2개의 댐에 갇혀 있는 형국이어서 보존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댐을 따로 떼어놓고는 논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암각화 전문가인 장석호 박사(계명대 강사·한국선사미술연구소장)는 “만약 대곡댐이 물을 한꺼번에 내려보내면, 대곡천은 협소해 많은 물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천과 맞닿아 있는 천전리 각석이 물에 잠기거나 침식 등의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두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존하려면 댐을 철거하거나, 단기적으로는 댐의 수위를 낮춰 담수량을 줄이는 등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기사 참조〉
하지만 사연댐뿐 아니라 대곡댐도 울산시의 상수원이어서 철거든, 수위 하향조정이든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사연댐은 건설 당시 상류에 이들 소중한 문화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축조됐다지만, 상류의 대곡댐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세워졌다는 점에서 “문화재 및 수자원관리 당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 것”이란 비난이 일고 있다.
울산환경운동연합 서토덕 사무처장은 “두 댐이 울산시민의 상수원인 점을 고려하면 철거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댐의 철거 또는 수위 조절을 통한 대책을 통해서만 두 국보의 훼손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변경관 훼손도 문화재 파괴”=올해 들어 울산시가 3가지 암각화 보존방안을 제시하면서, 물에 잠긴 대곡리 암각화의 보존을 위해 암각화 둘레에 차수벽(遮水壁·암각화를 물과 분리하기 위한 인공 구조물)을 설치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자 보존 논란은 더욱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는 양상이다. 대곡리 암각화가 사연댐에 의해 물에 잠기는 바람에 훼손되고 있으므로 사연호 수중에 다시 옹벽을 높이 쌓아 암각화를 사연호의 물에서 떼어놓겠다는 발상이다.
울산시 지역홍보연구소 서창원 소장은 “암각화는 주변 환경과 분리돼서는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라며 “주변에 인위적인 구조물을 설치해 경관을 파괴하는 행위는 암각화를 생명이 없는 박제(剝製)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지적했다. 장석호 박사도 “차수벽 설치는 암각화의 가치를 이중으로 말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댐의 수위를 낮추거나, 댐을 완전 철거하는 것만이 진정한 보존대책”이라고 잘라 말했다.
결국 암각화의 보존은 그림이 새겨진 바위 벽면뿐 아니라, 선사시대 사람들이 이같은 예술작품을 남기기 위해 최적의 공간으로 활용한 자연환경까지 함께 고려돼야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으로 학계는 인식하고 있었다.
암각화의 권위자인 한국선사미술연구소장 장석호 박사(44)는 울산시 및 문화재 당국이 대곡리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을 보존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철학이 결여된 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장박사는 “세계적으로 볼 때 선사시대의 암각화는 대개 강이나 호수와 같이 물이 있는 환경에서 발견되고 있다”며 “이는 암각화가 주위의 물과 떨어져서는 참된 가치를 잃고 만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선사시대 암각화가 존재하는 곳의 물은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재생’ ‘부활’ ‘병의 치료’ ‘생명의 원천’ 등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선사시대 사람들도 물이 있는 빼어난 자연환경에 암각화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각화의 보존은 물을 포함한 자연경관에 대한 보존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박사는 “최근 보존 논의과정에서 암각화와 주변의 물을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억지로 분리시키려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치졸한 발상이며, 세계적으로도 보존 방법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보존방안 가운데 암각화를 수장시킨 사연호의 물을 유로변경을 통해 제거하겠다는 것은 주변 경관을 해치는 행위여서 그는 반대한다. 물론 암각화 주위에 차수벽을 설치하자는 방안에 대해서도 공사 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다량 발생하고, 인공 구조물이 암각화를 가로막는 등 주변 경관을 해치는 행위여서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원론적으로는 대곡댐과 사연댐를 철거해야 하며, 현실적으로 철거가 어렵다면 단기적으로는 댐의 수위를 낮춰 담수 규모를 줄이는 방법으로 훼손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장박사는 “만약 두 문화유산의 보존을 막기 위한 당국의 논의 방안이 오히려 문화재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지금 살고 있는 대구에서 암각화와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겨 결사적으로 막아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