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2025년 작 미키 17은 SF 블록버스터로 보기에는 애매하다. 이 영화는 생과 사, 원본과 복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자아’라고 믿어온 개념을 철저히 해체한다. 불교의 불이론(不二論)과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이 서사에 녹아 있지만, 정치적 알레고리가 철학적 사유를 삼켜버린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봉준호의 영화가 늘 그래왔듯, 인문학적 주제는 ‘다른 사건’을 통해 풀려나간다. ‘기생충’에서 한 가족의 사기 행각이 계급 문제를 드러냈듯, ‘미키 17’은 복제 인간과 정치적 권력의 충돌을 통해 현대 사회의 모순을 조명한다.
영화는 2054년을 배경으로, 인생 막장에 다다른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한때 스트롱맨 성향의 강성 정치인이었던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은 선거 패배로 입지가 모호해진 뒤 니플헤임 행성 이주 프로그램의 함장으로 참여한다. 미키에게 주어진 역할은 ‘익스팬더블’(expendable), 즉 소모품이다. 지구에서는 인간 복제를 가능케 하는 3D 프린터가 개발되었으나 윤리적 문제로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를 틈타 마샬은 “지구 밖 행성에서는 지구의 규제를 따를 필요 없다”는 논리로 복제 허가를 받아낸다. 이는 미국 내 고문 금지 정책을 피해 관타나모에서 포로를 고문해도 된다는 어느 법학 교수의 망언을 연상케 한다. 기술과 권력의 결합이 윤리를 압도하는 순간이다.
미키는 3D 프린터로 17번이나 복제된 인간이다. 바이러스 실험과 방사능 노출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기를 반복하며, 인류에 ‘공헌’한다는 이데올로기와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의지한다. 하지만 죽음의 기억을 간직한 그는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한다. 1970년 조해일의 소설 매일 죽는 사람에서 엑스트라 배우가 매일 죽음을 연기하듯, 미키 역시 ‘익스팬더블’이라는 이름의 엑스트라다. 단, 그의 죽음은 연기가 아닌 진짜라는 점에서 비극이 배가된다.
4년간 죽음과 부활을 반복한 미키는 마침내 니플하임에 도착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안개와 추위의 세계’를 뜻하는 “Niflheim”은 이 행성의 황량함을 상징한다. 그곳에서 미키 17은 새로운 실험 중 죽을 뻔하지만, 토착 동물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본부는 이미 미키 18을 제작해버렸고, 복제체가 둘 이상 존재하는 ‘멀티플’(multiple) 상황은 규정상 둘 다 제거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거짓과 선동으로 점철된 마샬과 그의 아내, 대머리 보좌관으로 대표되는 권력층, 그리고 이에 맞서는 미키들의 대결로 확장된다.
마샬은 무능함 뒤에 숨은 권력욕의 화신이다. 그의 아내는 실질적인 조종자이며, 대머리 보좌관은 충성스러운 부속품일 뿐이다. 이 설정은 2025년 대한민국 현실을 희화화한 듯 보인다. 봉준호는 마치 2024년 말의 ‘계엄 사태’를 예언이라도 한 듯, 마샬을 통해 윤석열과 트럼프 같은 인물을 떠오르게 한다. ‘효율’을 명분으로 모든 희생을 정당화하는 그들의 모습은 기술만능주의와 정치적 포퓰리즘의 결합을 상징한다.
불이론과 아우라의 붕괴
미키 17과 18은 남의 눈을 피해 하나인 척 살아간다. 불교의 불이론은 “둘이 아니지만 하나도 아니다”라는 역설을 제시한다. 미키 18은 17의 기억을 일부 공유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점차 다른 존재로 변모한다. 이는 윤회의 과정과 닮았다. 죽고 다시 태어나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존재처럼, 미키의 복제는 정체성의 경계를 흔든다. 하지만 영화 속 미키들은 이런 존재론적 고민에 머물 틈이 없다. 그들은 탐사 미션과 시스템의 규칙에 얽매인 기능적 객체일 뿐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은 이 상황을 더 깊이 설명한다. 기술복제 시대에 원본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예술작품은 대량생산된 이미지로 전락한다. 미키 17 역시 반복적 복제로 ‘유일한 존재’로서의 아우라를 잃는다. 그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대체 가능한 소모품, 노동력으로서만 기능한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점점 기계적 역할로 환원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마샬은 이 복제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기술만능주의의 상징이다. 그는 생명을 관리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이는 인간을 기능적 객체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봉준호는 마샬을 통해 기술이 인간성을 해방시키는 대신 체계화하고 통제하는 억압의 도구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미키의 복제 과정이 반복될수록 그의 개별적 의미는 지워지고, 기술은 그를 살리면서도 동시에 존재 가치를 박탈한다.
인간 존재의 경계를 묻다
미키 17은 단순한 복제 인간 이야기가 아니다. 불이론적 관점에서 미키 17과 18은 서로 연결되면서도 독립적인 존재로 분화하며, 벤야민적 시각에서는 아우라를 잃은 복제체임에도 새로운 정체성을 창출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마샬은 기술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러나 봉준호는 이 모든 철학적 질문 너머, 니플헤임의 안개 속에서 또 다른 답을 제시한다. 그 답은 바로 크리퍼스(Creepers), 이 행성의 토착 생물들이다.
크리퍼스는 미주 대륙의 원주민처럼 니플하임의 오래된 주인으로, 외부의 침략자—마샬과 그의 복제 시스템—에 맞서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온 존재들이다. 거대한 회색 알마딜로처럼 생긴 이 생물들은 혐오와 귀여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지능과 공동체 의식을 갖춘 토착민을 상징한다. 미키 17이 실험 중 죽을 뻔했을 때 그를 구한 것도 크리퍼스였다. 이는 마치 유럽 정복자들이 미주 대륙에 상륙했을 때, 원주민들이 처음에는 낯선 이방인을 도왔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마샬의 탐욕과 기술만능주의는 크리퍼스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정복하거나 제거하려 한다.
봉준호는 크리퍼스를 통해 묻는다. 기술로 무장한 침략자가 토착민을 지배하려 할 때, 진정한 생존은 어디에 있는가? 미키 17과 18은 시스템의 소모품으로 전락했지만, 크리퍼스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해 하나인 척 살아가며, 크리퍼스와의 공생을 모색한다. 불이론의 “둘이 아니지만 하나도 아니다”는 크리퍼스와 미키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니플하임이라는 세계에서 운명적으로 얽히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결국, 니플하임에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는 크리퍼스와 잘 지내는 데 달려 있다. 마샬의 시스템은 붕괴하고, 기술은 인간성을 지우는 대신 공존의 도구로 재정의될 수 있다. 크리퍼스는 미주 원주민처럼 침략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땅을 지켰고, 미키 17과 18은 그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꿈꾼다. 이는 봉준호가 기생충에서 계급 갈등을 넘어선 화해의 여지를 남겼듯, 미키 17에서도 정복이 아닌 공존의 메시지를 암시한다.
미키 17은 인간 존재의 경계를 탐구하며, 우리가 ‘자아’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 묻는다. 하지만 그 답은 더 이상 철학적 사유나 기술의 진보에만 있지 않다. 니플하임의 안개 속에서 크리퍼스와 손을 맞잡은 미키 17과 18은 말한다. 진정한 생존은 타자와의 공존에서 비롯되며, 아우라를 잃은 복제 인간조차 토착민과의 연대를 통해 새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영화는 이렇게 우리의 자아와 세계를 재정의하는 여정을 끝맺는다.
영화는 기술복제 시대의 인간 정체성과 노동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대체 가능한 기능적 존재로 전락할 때, 고유한 개체로서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마샬이 죽으면 행복한 세계가 당장 올까? 봉준호는 구체적 답을 주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마샬이 죽지 않으면 행복은 꿈조차 꿀 수 없다. ‘미키 17’은 결국 인간 존재의 경계를 탐구하는 철학적 여정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