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영주에서 주인노릇을 했어요.” 자긍심은 남달라 새로 마련한 종택으로의 還鄕(환향)과 삼판서 고택 복원에 가슴 벅차
“우리가 영주에서 주인 노릇을 했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영주군수 할래 문절공(文節公) 종손 할래 하면 군수 안한다 그랬어요. 요즈음에는 종가에 시집도 안 오려고 하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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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손 김광호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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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긍심이다. 사랑방에서 어릴 적에 듣던 이야기를 수십 년 만에 다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선성(宣城)이란 안동 예안(禮安)의 별칭이다. 지금도 선성현 아문 건물이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 남아 있다.
그곳에는 한국국학진흥원에 들어서 명실상부한 한국학 연구의 요람이 되었다.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까지 예안이라는 면이 있었다. 예안은 퇴계 선생의 고향으로 인해 유림 사회에서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지만 특별시와 같은 대접을 받아왔다.
예안(禮安)은 글자로만 보아도 참 정이 가는 지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예안은 안동댐 건설로 그 지역 대부분이 수몰되어 지금은 행정 명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예안을 관향으로 쓰는 대표적인 성씨가 김씨와 이씨인데, 지금까지 명성이 자자하다. 안동을 달리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부른다. 이는 퇴계 선생을 위시해 훌륭한 분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인데, 영주지역 역시 추로지향으로 함께 불린 예가 있다.
영주는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회헌 안향 선생의 고향이다. 퇴계 선생 역시 이곳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최초의 사액서원을 만들었고 또 자신이 직접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구상해 완성했다. 많은 후진을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양성한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영주는 명실상부한 양반고을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양반가문에도 그 격이 있다. 최고의 격을 유지한 문중은 어디일까? 안동에서는 단언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영주의 경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선성 김씨 문중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만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 사람은 영주의 전통문화에 정통하지 않은 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안향 선생을 배출한 순흥 안씨는?’ 하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순흥 안씨는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로 인물이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영주군지를 펴서 보면 선성 김씨의 현달함에 놀라게 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무송헌 김담 과 그 현손(玄孫)인 백암 김륵 이다. 무송헌은 시호를 문절공이라고 받아 일반에서는 호 보다는 시호에 더욱 익숙하다.
그리고 백암 김륵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는 영남안집사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이다. 이들 두 사람은 영남을 넘어서 나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를 ‘국사(國士)’ 또는 ‘두겁조상’이라 한다. 선성 김씨는 한 분도 나기 어려운 두겁조상을 두 분이나 모시고 있다.
영주의 선성 김씨를 대표하는 문절공 김담은 어떤 어른인가? 그는 조선의 표준역법 제정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또한 세종대왕 당시에 집현전에서 17년간 재직한 대표적인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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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리 종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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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지생활을 한 종손이 선대 이력을 어쩌면 이렇게도 잘 꿰고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종손은 남모르는 노력을 다했다. 이를 방 한쪽에 있는 두툼한 대학노트 한 권에 깨알크기로 적은 선대 역사 사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삼판서 고택’ 이야기를 종손에게 듣고 싶었다. 영주에서 터 좋기로 제일이며 판서 세 분이 났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옛집이 있었다.
“이 옛집은 일찍이 삼판서를 내었고/ 김씨는 팔세(八世)를 이어 살고 있네/ 뜰 앞 연꽃 길은 큰 괴화나무 고목 남았는데/ 알고 보니 그 때 덕 끼친 것 남은 것인 걸.”
조선 후기 진사 정중원이란 이가 삼판서 고택을 지나며 읊은 시다. 일찍이 영주 구성산(龜城山) 아래 있던 영주를 대표하던 고적인 이 집은 서애 류성룡의 수제자인 학사 김응조가 ‘영주의 유일한 고적’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 명성이 있었다.
이 집은 고려시대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鄭云敬, 삼봉 정도전의 부친)에서 그의 사위로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에게 전해졌고 다시 황 전서의 외손자인 이조판서를 지낸 문절공 김담(金淡)으로 이어졌다.
건물이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8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고적임에 분명하다. 정운경의 맏아들인 삼봉 정도전이 1392년 유배지에서 돌아와 이 집에 거처하며 지은 시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한그루 배꽃 눈부시게 아름다운데/산새는 지지배배 이 봄을 노래하네/은든자 홀로 앉아 무념에 빠지니/뜰에 돋은 풀만 한가롭게 바라보네.”
그 시를 느껴보고 싶어 같은 봄날 영주시 영주동 구성공원 남쪽 서천(西川, 乃城川)이 발 아래로 보이는 둔덕을 찾았다. 고목으로 자란 아카시아 나무들마다 꽃이 만발해 향기가 주위에 가득했다.
그 위에 800년 역사를 간직한 삼판서 고택을 총 공사비 16억을 투입해 복원하고 있었다. 이미 이건한 향토유적 제민루(濟民樓, 1433년 군수 潘渚 창건)는 그 형태를 갖추었다.
고택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선성 김씨들의 손을 떠난 그 집은 퇴락해 자취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영주의 대표적인 고적이었던 유서 깊은 이 고택이 세인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간 현실을 애석하게 여긴 시민들의 노력으로 지금 본래의 위치에다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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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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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에 삼판서를 배출한 고택 복원은 의미 있는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일의 책임을 맡고 있는 영주시의 김주영 시장 역시 선성 김씨라는 것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는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750여 평 대지에 정면 6칸 측면 7칸의 팔작지붕 와가에 집경루(集慶樓)라는 옛 명칭을 게판한 고택을 구경할 날도 멀지 않았다.
족보를 펴서 이 집 계도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19대를 이어온 면면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문절공은 삼형제를 두었으나 위로 두 분은 후사를 잇지 못했다. 조선 초는 후사를 잇지 못하면 양자를 하지 않고 무후로 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문절공의 종통은 당대에 셋째 아들로 계승되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문집 자료가 풍부하지 못한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현손 대에 이르러 맏이 문절공의 백씨 집으로 출계해 다시 둘째 집으로 이어졌고, 7대, 15대에 이르러 각각 양자가 있었다.
18대 종손인 김조영(金祖榮, 1925-1974) 씨는 영남학파의 거유인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 1867-1952) 선생에게 수학한 분이나 정작 본인은 신학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렇지만 부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친은 풍재와 언변이 모두 뛰어났고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있었지만 어느 한 분야에도 뜻을 펴지 못하고 고향에서 삶을 마쳤다. 19대 현 종손이 선친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 무섬마을 전경
이야기 말미에 ‘역시 선성 김씨’라고 무릎을 친 사연을 들었다. “저도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판서 고택이 없어진 뒤 종가 건물이 없었어요. 그런데 족조인 김학진(金鶴鎭, 1921년 생) 씨가 수도리에 마련해둔 와가 한 채를 종택으로 쓰라고 희사를 했습니다. 그 어른은 국회의 박종근(朴鐘根) 의원의 장인이십니다. 연세가 많으신데, 지금 일본에 계시는 실업가입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경제력이 있다 해도 이렇게 확실하게 종가를 후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를 선성 김씨 종가에서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영주의 선성 김씨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영주를 방문해 곧장 문수면 수도리(水島里)를 찾았다. 잘 가꾸어진 영주의 대표적인 반촌인 수도리에는 반남 박씨와 그 외손으로 후대에 입향한 선성 김씨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곳 반남 박씨 만죽재 고택 뒷집에 잘 정돈된 반듯한 와가 한 채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곳이 문절공 선성 김씨 종가라고 지시해 주었다. 아직 주인이 이사 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쌍수를 들어 환영 하고 있었다.
환향을 앞둔 종손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으로 보였다. 생각해보니 종손의 태도는 바로 이 가문의 휘장과도 같은 공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종손과 대화를 끝내고 돌아서면서 영주의 선성 김씨가 명문가로 이름을 떨친 원동력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보았다. 필자는 이를 종택 문루에 게판했던 집경루(集慶樓)에서 찾았다. 바로 공경할 경(敬)자였다.
이 이름을 지은 조선 후기의 학자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은 집경루 기문에서 “십년을 공경하다가 하루만 공경하지 않아도 욕을 당하게 되고, 십세(十世)를 공경하다가도 한 세대에 공경을 하지 않으면 그 집안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라고 했다. 19대를 이어오면서도 그 명성을 실추하지 않은 저력은 공경 경자의 실천에 있었다고 본다.
김담 1416년(태종16)-1464년(세조10) 본관은 선성(宣城).
자:거원(巨源) 호:무송헌(撫松軒), 시호: 문절(文節).
이순지와 함께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세조가 즉위하지 외직을 전전, 節義 지켜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은 태종16년 영주의 대표적 고적인 삼판서 고택에서 현령 소량(小良)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종17년(1435)에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형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는 매우 드문 예였다.
세종19년 집현전을 설치한 세종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서 강론을 담당할 문학에 밝은 선비 10인씩을 뽑게 하였는데, 형제가 거기에 선발된 것이다. 최고의 영예였다.
이때의 실록을 보면, 그는 연소한 문신 가운데 장래를 총망 받았던 대표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 18년(1436)에 임금이 어명으로 승정원에 이르기를, “봉상시 판관 이순지가 상시로 간의대에 근무하며 천문을 관측했는데 지금 어머니 상을 당했으니 여러 사람들이 이순지를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라.”라 했다.
이에 승정원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집현전 정자(正字) 김담이 나이가 젊고 총명하고 민첩하여 영오하므로 그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고 천거했다. ‘총민영오(聰敏穎悟)’하다는 최고의 평을 받은 것이다.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충주목사가 되었을 때 정사를 확실히 하고 송사를 잘 다스렸다는 평을 받았다. 충주는 산악 지대로 자연 도둑 출몰이 잦았다. 문절공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도적을 원수 보듯 하여 철저히 적발해 응징했다. 너무 가혹하다는 득담까지 들었다. 이 때문에 그 지역에는 도적들이 얼씬도 못했다 한다. 안동, 상주, 경주 고을 수령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했다.
문절공의 관직 이력을 보면 그 대부분이 외직에 치우쳐 있다. 특히 말년에 경주부윤 직에 오래 있었던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부모 봉양에 있었지만 실제 이유는 부당하게 왕위에 오른 세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시호 역시 글월 문(文) 자에 절개 절(節) 자로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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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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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러니 하게도 문절공에 대한 세조의 예우는 남달랐다. 그는 하직하는 상주목사 김담에게 영친연(榮親宴)을 내렸다. 세조는 그에게 의복과 말안장을 내려줌과 아울러 경상도관찰사에게 명해 영친연을 베풀어주라고 했다. 영친연이란 출세한 자식이 어버이를 위로하는 잔치를 말한다.
단종을 지지한 단초는 왕조실록에 일부 드러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34년 뒤인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의 심문으로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이개 박팽년, 하위지의 일에 대해 말했다.
“김담이 하위지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있지 않는다는 일을 진사 최익한에게 들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김담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에게 ‘위방불거(危邦不居)’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 때 ‘위태로운 나라’라는 의미의 ‘위방’이란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장악한 세조의 조정을 지칭한 것이다.
결국 김담은 사육신처럼 정면으로 세조를 부정하지는 않았어도 외직을 전전하며 적극적으로 중앙무대에서 국왕을 위해 헌신하지는 않았다. 그가 선택한 외직은 자손을 보호하기 위한 고심에서 나온 최소한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의 속내를 짐작할 또 다른 단서가 있다. 그는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는데, 맏사위에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이란 이가 있다. 그는 도촌(桃村)이란 호를 가졌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영주와 이웃한 소백산 아래 봉화 사제(沙堤)마을로 내려와 평생을 북쪽으로 작은 창문 하나만 낸 집을 짓고 그 속에 거처하며 출입을 하지 않고 세상을 버린이다.
그 집이 공북헌(拱北軒)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의 행적은 후일 그것이 북쪽 영월 땅에 유배와 있던 단종을 기리는 것이었음이 알려져 최고의 찬사를 받았고 단종 절신(端宗節臣)으로 기려졌다. 장인과 사위를 아우르는 옹서(翁壻)란 말이 있는데, 옹서간에 공교롭게도 세조 치세에서 단종을 지지하는 마음을 남몰래 가졌던 것이다.
김담의 인물 비중을 단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무엇일가? 안견이 그린 불후의 명작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현재 일본 천리대학에 소장)가 있다. 그 그림 말미에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 문신들이 시를 써둔 것이 있다.
몽유도원도의 주인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이다. 21명의 세종조의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신숙주, 이개,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항, 백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 만우, 최수가 그들이다. 당당히 이들 기라성 같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과에서 성삼문이 1등, 김담이 2등, 이개가 3등이었던 것도 이들이 당시를 대표하는 일류였음을 알려주는 예다.
종손이 손수 정성껏 쓴 병풍서를 보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문절공이 몽유도원도에 제시한 작품이었다. 필자는 이를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운 교감(交感)으로 보았다.
문절공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학자 한 사람이 있다. 이순지(李純之)라는 이다. 그는 본관이 양성(陽城)으로 문절공보다 10년 연장자로 7년 앞선 세종 9년(1427)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특히 천문 분야에서 호흡을 맞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진행한 대표적인 작업이 칠정산(七政算) 내외편(內外篇)이라는 책자 편찬이다. ‘칠정산’이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는 의미로 해와 달, 5개의 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알리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조선 천문학 연구 수준이, 최고라고 평가되는 아랍의 천문학보다 앞섰다고 한다. 칠정산 내외편은 세종24년(1442)에 완성되었는데, 동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이 이러한 수준의 연구를 한 것이 1682년이라고 하니 우리보다는 240년이나 뒤의 일이었다.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요즈음에도 그 계념조차 모호한 것을 조선 전기에 이처럼 정밀하게 연구했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만 하다. 이 점에 문절공의 위대함이 있다고 본다. 이순지와 김담은 평생을 천문 역법연구에 바친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였다.
종가에 소장하고 있던 목판은 안동한국학진흥원에 위탁했고, 교지 등 고문서 자료는 영주의 소수박물관에 보관 중에 있다. 2006년 10월 2일부터 2007년 3월말까지 소수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선성김씨문중유물 특별전이 개최된바 있다.
이 때 주목된 작품이 정통 12년(1447) 김담(金淡) 친시(親試) 을과(乙科) 1등 제2인 급제자 교지였다. 지금부터 560여 년 전의 작품이다. 그리고 문절공이 손수 제작한 것으로 전해오는 천문도(天文圖) 한 장도 전시되었다.
글쓴이-서수용 선비촌관리사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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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촌관리사무소 서수용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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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수용 소장은 단산면 사천1리(새내)이 고향이다. 단산 구구초 1학년을 다니다 교사인 부친을 따라 서울, 경기도 양평, 상주와 안동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안동고와 안동대 한문학과를 나와 성균관대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는 고전 번역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특히 영남권의 문집과 집안에 대해서 상당한 안목을 가지고 있으며 국내 원로를 제외한 40대 연령층 가운데 영남지방의 보학(譜學, 족보학)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15년간 박약회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진일재 류숭조 선생 문집’ 외 다수를 번역했고 저서로도 ‘안동하회마을을 찾아서’, ‘종가기행’, ‘안동의 문화재’ 등을 집필했다.
또, 7년간의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 국회의원 보좌관 경력과 박약회 사무국장 외에도 최근까지 서울 송파구 자원봉사센터 소장, 전국 자원봉사센터 사무총장 등을 맡아 활동했으며 현재 박약회 감사로도 재직하고 있다. | |